------------------------------------------------------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소설제목 : 워너비콤플렉스 wannabe complex 작가명 : 청몽채화&홍양 E-mail : lovelymin@hanmail.net 연재게시판 : 릴레이작가방 총편수 : 총 64편 완결 +에필로그 4편 펌허용여부(yes/no): no 댓글허용여부(yes/no): yes 출처 : fam. 에스팸/ fan. 블루드림 ------------------------------------------------------ Writer. 홍양 [프롤로그] Part 1. 이재준, 민지율 크리스마스 이브. 커플들이 삼삼오오 사주카페로 모여든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있는 점술가는, 교복을 채 벗지도 못하고 앉아있는 남학생과 여학생이었다. 크리스마스 대목을 맞아 숨 돌릴틈도 없이 일하고 있는 고등학생 점술가들. "아저씨, 여자친구가 둘이죠?" ".......뭐?" "한쪽은 정리하죠? 웬만하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며 말하는 남학생. 그의 발언에, 앞에 앉아있던 남자손님은 사색이 되어 여자친구를 향해 손을 내젓는다. "아니야!! 나 못 믿어?? 이 자식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거야!! 내가 무슨..." "정씨랑 한씨 중에 누가 더 좋은데요?" "......." 직접적으로 말하는 건 하지 않기로 약속했건만, 순간 장난끼가 발동해 콕 집어 물으면 손님은 얼굴이 시뻘개지며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사주카페 밖으로 나가 버린다. 그러면 태평한 얼굴로 타로카드를 섞으며 "다음분요~" 하고 소리친다. 그리고 그런 남학생의 옆에는, 작은체구에 하나로 올려묶은 긴머리... 점술가라기엔 포스가 부족하지만 이 곳에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여학생이 앉아있다. "그러니까 합격 한다는거죠?" "네, 합격 하실거에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한테 감사할게 뭐가 있어요." 합격 할거란 소식에 기뻐하며 연신 고맙단 인사를 하는 손님. 그런 손님을 바라보는 여학생의 눈빛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럼 저 이만 가볼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합격하면 또 들를게요." 기분좋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손님의 팔을 붙잡는 여학생. 한숨을 푹 내쉬며 한참을 고민하더니, 마음을 굳힌듯 손님의 귀에 대고 말한다. "저보고 재수 없다고 그러셔도 좋은데요." "네?" "내일 큰 사고가 있을 거거든요." "......." "부모님이 많이 다치실거에요. 조심하시라고.. 꼭.. 꼭 좀 전해주세요." 여학생의 속삭임에 싱글벙글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확 굳어버린다. 갑자기 어깨를 확 밀쳐내는 바람에, 여학생은 힘없이 구석에 넘어진다. 하지만 자주 겪는 일인 듯 담담히 치마를 털고 일어나는 여학생. "이 년이 지금 뭐라고 그러는거야??" "......."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학생을 보며, 남학생은 혀를 끌끌차더니 그 앞을 막아선다. "아이쿠, 죄송합니다. 얘가 어제 잠을 못잤더니 또 헛소릴 했나봐요? 뭐라던가요?" "뭐 이런게 다있어?" "형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얘가 부적 값 벌려고 또 거짓말을 했나보네요!" 남학생이 생글생글 웃으며 사과를 하자, 남잔 만원짜리 다섯장을 그의 가슴쪽으로 던지며 나간다. 그러면 남학생은 만원짜리를 주섬주섬 주워 주머니 속에 넣는다. 그리고 마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며 말한다. "묻는거에만 대답해." "......" "좋은 소리 듣는것도 아닌데 뭐하러 얘길 해줘." "보이는 걸 어떡하냐? 그것도 당장 내일 일인데..."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잖아." "이재준..." "우린 돈 벌러 온거야. 정말 점 봐줄거야?" 다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는 남학생. 여학생은 힘없이 자리에 앉아 "다음분요.." 기계적으로 다음 손님을 받는다. 그들은 평볌한 점술가가 아니었다. 타로카드를 어떻게 보는 건지도 모르고, 섞는 것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보는 사람의 신상명세를 알아내는 능력을 가진 이재준.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을 지닌 민지율. 그들은 부모도, 친척도 없고... 기댈 곳이라곤 어렸을 때부터 함께 해온 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생계를 자신들 스스로 해결해야 했고 아직 학생 신분인 그들이 택한 길은, 초능력을 이용해 점술가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Part2. 정우현, 가승휘 비밀스러운 곳에 위치한 기숙사. 정부의 지원 아래,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6살꼬마부터 40살 넘은 아저씨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녀로 나뉘어, 그곳에서 1m도 벗어나지 못한채 먹고 자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늘도 같은 방에 있는 34살의 아저씨와 인생상담을 하던 우현은 자신도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이 곳에서 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몸서리 치다 감독관을 불러 말한다. "감독관님." "왜.." "저 시험 좀 보게 해주세요." "안돼." 안그래도 험상궂은 인상을 더욱 딱딱하게 굳히며 안된다고 말하는 감독관. 우현은 미치겠다는 듯 벽을 쾅 내리찍으며 소리쳤다. "왜요!! 가승휘는 되고 왜 저는 안되는데요!!" "승휘는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넌 아직 멀었어." "그깟 시험! 보게라도 해달라고요!" 매일, 거절만 반복되는 말싸움을 하고 있는 감독관과 우현의 사이로 승휘가 지나간다. 우현은 그런 승휘의 팔을 휘어잡으며 소리친다. "내가 이 새끼보다 못한게 뭔데!!!!" 졸지에 이 새끼가 된 승휘는 우현을 노려보다,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가승휘는 얼마전 시험을 통과해 곧 있으면 이곳을 떠날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시험이란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컨트롤 할 수 있는가를 테스트 하는것이다. 국가로써는 초능력자의 존재를 숨기는 게 급선무였고, 그 다음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힘을 조절하게 해서 능력자들을 이용하는 게 두번째였기 때문에 이런 시험을 통과한 사람만 내보내는 것이었다. 쉬운 시험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회조차 안준다는 것은 억울하다는 생각에 우현은 화가났다. 그런 우현에게 감독관이 되묻는다. "왜 가승휘는 되고 넌 안되냐고 물었냐?" "네. 전 모르겠습니다. 저 자식이 뭐가 대단한건지." 우현의 당돌한 대답에 피식 웃더니, 승휘의 닫힌 방문을 한참동안 쳐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 감독관. 뿌옇게 피어오른 담배연기 사이로 뭔가를 회상하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가승휘를 처음 봤던 게, 열네살 때니까 벌써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어제일 인 양.. 아직도 생생한 것은 분노에 찬 승휘의 눈빛이었다. 어린 나이었음에도, 그는 그 눈빛을 보자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다른 초능력자들도.. 강제로 끌려온 이후 자신에게 그런 눈빛을 하긴 했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얼마 후.. 얼마나 지독한 마음을 먹은 것인지, 그는 가승휘의 눈빛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분노도.. 기쁨도.. 슬픔도.. 아무것도 담아내질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 두려움을 느꼈다. "후.. 승휘 저 자식은, 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랑 5년을 꼬박 얼굴보면서 살았거든." "........" "잘 참더라.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잘 참아." "........" "그래야 나갈 수 있다는 걸 아니까, 저 새낀 죽이고 싶은 내 얼굴 보고도 매일 인사하더라." "감독관님, 그게 무슨 소리......" "넌 그만큼 간절한게 있냐?" Writer. 청몽채화 1. - 미안, 나 오늘 선도부 활동 있어. 휴대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재준이의 목소리. "가증스럽게 사과하지 마.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놈은 짜증이 가득 담긴 내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 높여 비웃는다. - 푸하하하, 민지율 예지능력은 날이 갈수록 대단해지는데? "닥쳐." - 야, 편해서 좋다. 나 앞으로 미리 말 안 해도 되는 거지? 더 이상 상대해줄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핸드폰 플립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어린 시절부터 항상 친구로서 내 곁에 있어준 재준이지만... 왜 내 예지능력을 이럴 때만 써먹는단 말인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다. [지율아, 내일 수학선생님이 숙제 검사 하냐?] [민지율!! 나 지금 옥상에서 담배 필 건데 들킬까?] [나 쟤한테 고백하면 쟤가 나 받아 주냐?] 그런 하찮은 일에 내 능력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재준이. 조그마한 일들은 순리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내 예지력이 어김없이 들어맞지만 중학교 때 이재준의 교통사고 건이나, 패싸움 건은 아니었다. 위험을 미리 예고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재준이는 언제나 그런 큰 일에 휘말려 들어갔고, 나는 그런 놈을 전혀 막아주지 못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재준이도 나에게 자질구레한 일들만 물어보는 거겠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예지 능력. 이걸로는 세상을 바꾸지도 못하고, 내 주변의 사람을 돕지도 못해. 하찮다, 정말.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때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었어. 학주가 내 미친 인맥 사랑하잖냐. 좀 있다 보자.] 재준이의 문자다. 항상 내 속을 뒤집어놓고는 이런 식으로 애교 섞인 문자를 보낸다. 앞으로 누가 이 놈 여자 친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그녀에게 애도의 눈물을 보내며 동정을 표하는 바이다. 재준이는 학생주임의 눈에 걸려 억지로 선도부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놈은 사람을 한 번만 봐도 그의 신상명세를 좌르륵 읊을 수 있으니까 선도부 활동엔 적격이었다. 누군가 도망가는 뒷모습만 봐도 그가 몇 학년 몇 반의 누구인지 단번에 맞추곤 했다. 물론 학주는 재준이가 특별한 초능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단지, 재준이 놈에게 미친 인맥이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학주는 '전교생을 다 아는 놈'에게 선도부 활동을 맡겨야 한다는 일념을 지니고 있었다. 재준이의 카운트와, 나의 예지능력. 그건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서로의 비밀이었다. 가족도 없는 외로운 우리들이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하는 그런 비밀. 생각에 잠겨있던 내 앞에 갑자기 웬 검은 형체가 날아와 흉측하게 엎어졌다. "꺄악!!!!!!" 평소 놀라는 일이 잘 없는지라 오히려 더 놀라버렸다. 높은 담벼락을 막 뛰어넘은 40대 가량의 아저씨. 날카롭게 이어진 눈매와... 험악한 인상과... 손에 들고 있는.... 칼.... 칼.... 칼???? 아저씨와 내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내 몸이 미세하게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일주일 후의 미래까지 다 내다볼 수 있지만, 단 하나, 내 미래에 대해서는 점치지 못한다. 강도인지 성폭행범인지 살인자인지 모를 이런 아저씨에게 붙잡혀 내 인생은 이런 식으로 종말을 맞이해야만 하는 건가. "쌰... 썅, 그 개새끼 어딨어...." 주변을 극도로 경계하며 눈치를 살피는 강도 아저씨. 히스테릭한 모습이었다. 무언가에 지나치게 신경쓰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언뜻 머릿속에 아저씨가 수갑을 차고 끌려가는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저씨, 그러지 말고 자수를 하시는...." 내 예지 능력을 너무 믿고 설친 것이 문제였을까. 그를 향해 내가 한 발 내딛자마자 아저씨는 내 손목을 휘어 채며 소리쳤다. "씨발, 이렇게 된 마당에 너라도 인질로 잡아야!!!!" 그래, 바로 그 순간. 거짓말처럼 아저씨를 덮쳐 오는 다른 한 남자의 형체. 담벼락에서 뛰어내린 것도, 거리를 뛰어온 것도 아니었다. 내 눈이 제대로 보았다면... 그는 갑자기,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났다. 안개 속에서 드러나는 산신령처럼. 급작스럽게 내리는 소나기처럼. 그가 섬광처럼 나타나 아저씨를 덮치는 바람에 강도 아저씨는 내 손목을 놓친 채 바닥에 깔려있었다. 살짝 빨갛게 부어오른 손목을 제외하면, 다행히 나는 매우 멀쩡한 모습이었다. "이 새끼!!! 너 정체가 뭐야!!! 어디서 나타나는 거야!!" "그러니까 도망쳐봐야 소용없대두요." 그 때. 아저씨를 깔고 앉은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소년. 소년이었다. 그것도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어....디서 나타난......" 당황한 내가 더듬거리며 묻자 그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근데 꼬맹아. 거기 떨어져있는 수갑 좀. 갑자기 나타나느라 떨어졌나봐." "나 꼬맹이 아닌데요." 범죄자를 잡고도 너무 태평한 소년의 모습에 나까지 긴장이 풀어지고 있었다. "그래? 그럼 예쁜 아가씨. 수갑 좀 주세요." 능글맞은 소년의 말투. 나는 내 앞에 떨어진 수갑을 천천히 주워들고 그 소년에게 건넸다. 소년의 교복 마이 주머니 위에 수놓아진 이름은... 정우현이었다. "아저씨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법정에서 유리한 진술을 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 이미 한 번 들어봤죠? 아저씨 탈옥한 거니까." 생글생글 웃으며 강도아저씨에게 수갑을 채우며 재잘거리는 그 소년. 그리고는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집어 들어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더니... "임무 완수했습니다. 경찰들 보내서 빨리 수송해주세요. 저 이러다 학교 늦어요." 눈 앞에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이런 상황. 내 예지능력도 미리 알아채지 못했던 이런 상황. "아가씨. 이렇게 노닥거려도 괜찮아요? 10분 안에 도착안하면 지각이예요." 정우현이란 소년은... 멍하니 서 있는 나를 향해 큰 비밀을 알려주듯 속삭인다. 급하게 시계를 보니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나는 무작정 뛰었다. * "어이쿠, 이를 어쩌나. 그래도 아까워하지는 말아라, 민지율. 아슬아슬한 지각이 아니라 완전한 지각이다. 너 5분 늦었어." 이미 굳게 닫힌 교문의 철창 너머로 나를 보며 고개를 젓는 이재준. "학주 모르게 그냥 나 좀 들여보내줘, 임마." "억울하면 니가 선도부 하든가." "유치하게 이럴래?" "너도 어제 치사하게 나한테 거짓말 했잖아." 이런, 벌써 들킨 건가. "내, 내가 뭘?" 오리발을 내밀어 보지만.... "사주카페 아르바이트 살짝 땡땡이 쳐도 사장형이 모른다며." "그, 그건 내 예지 능력이 살짝 빗나간 거고!!!" "꺼져, 그런 주제에 오늘 내가 학교 일찍 온 건 무슨 수로 알아내셨대? 니 예지력이 빗나가는 날엔 내가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야, 미안해. 근데 그건 니가 잘못한 거잖아, 니 손님 땜빵 내가 다 했는데!!" "사장형이 오늘 아르바이트 오면 맞을 준비 하랬단 말이야. 그것도 책임 져 줄 거야?" "그건 아니지." "그러니까 너도 돌아. 운동장 열 바퀴." 내기 농구를 하기로 했다며 (나에게 꼬치꼬치 물어본 다음에 이긴다는 정보를 접수하고는) 어제 아르바이트를 채 끝마치지 않고 가버린 재준이 놈이 얄미워서 잠깐 외출 나간 사장 오빠가 알바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긴 했었다. 물론 그건 내 예지력을 미리 사용한 거짓말이었지만. 아, 쓸모없는 예지능력. 오늘 내가 이렇게 지각할 거라는 사실은 어찌 예측할 수 없었단 말인가. 내 꾀에 내가 당하는구나. 왜 내 일은 예측이 안 되는 거야, 짜증나게. 사악하게 웃는 재준이를 노려보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 "이 놈 이거, 머리봐라, 머리!! 임마, 앞머리 누가 이렇게 길게 하래!!! 그리고 임마!! 넥타이는 어디다 팔아 먹었어? 엿 바꿔 먹었냐, 엉???" "전학와서 그랬어요. 앞머리 규정도 몰랐고, 넥타이는 교복파는 누나가 안줬다니까요!!" 악명높은 학주와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 저렇게 개길 수 있는 놈이 존재했던가,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 말도 안돼............ 아깐 본 그 놈이야. 정우현. 그래, 아까 그 놈이 확실해. 그런데 어떻게.... 나보다 늦게 출발한 게 분명한 사람이... "내가 학주생활 15년만에 너처럼 10분간 말대답하는 놈은 처음이다!!!" ..........나보다 늦게 출발한 게 분명한 저 사람이... 그러니까..... 나보다.... 10분이나 일찍 왔다는 말이야.....? ..........말도 안돼.... 저 사람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그럴 리가 없어. 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도 막힌단 말이야. 그 범죄자를 수송한 뒤에 경찰차를 타고 왔다고 해도 나보다 10분이나 일찍 온다는 건 불가능해. 아, 설마... 쌍둥이? 쌍둥인가? "잔말 말고 운동장 10바퀴 돌아, 임마!!!!" 정우현의 머리를 작대기로 콕콕 찍으며 놈을 운동장으로 내모는 학주선생님. 오만상을 찌푸리고 뒤돌아선 놈은... 놈은.... "어?? 아까 꼬맹이 아가씨!!! 역시 지각했구나!!! 안녕!!" 밝게 인사하고는 기지개를 한 번 펴더니, 이내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나를 알아. 그럼 쌍둥이도 아니란 소린데? 아까 그 놈 맞는 건데? "야야, 이재준, 이리와 봐. 빨리 쟤 좀 봐봐." 나는 철창 사이로 손을 뻗어 재준이의 옷깃을 잡아끌었고, "뭐야, 너한테 인사한 거야? 너 아는 사람이야?" "빨리 쟤 좀 봐봐. 쟤 좀 이상해. 보이는 거 다 말해봐, 빨리." 재준이를 재빨리 정우현의 쪽으로 돌리며 묻는 나. "오늘 전학왔어. 우리랑 동갑이야. 이름은 정우현."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 대한 신상명세를 읊기 시작하는 재준이. "생일 5월 27일. 혈액형 O형. 라이벌은 가승휘? 그게 누구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잠시 말을 멈추는 재준이. "국가 기관.... 소속이야. 능력을 국가에게 빌려주는 대신 자유를 얻었어." "뭐? 그게 무슨 뜻이야?" 머리가 아픈 듯 잠시 머리를 감싸 쥐는 재준이. "왜? 잘 안 보여?" "저 새끼..... 뭐야......" "재준아?" "초능력자야." ...........예사놈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순간이동 능력자." Writer. 청몽채화 2. “이상해, 느낌이 안 좋아.” 아침 조례시간. 자리에 앉아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긴 재준이. 우리 이외의 초능력자는 처음 봤기 때문에 우리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엮이지 마. 절대로.” 재준이가 내 다짐을 얻어내려는 듯 확고한 말투로 못을 박았다. 아침에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난 건 그가 순간이동 능력자이기 때문인가. 재준이는 계속 못미더워했지만 나는 그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나쁜 사람 같아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먼저 그의 앞에 가서 얼쩡대는 일은 없겠지만. “왜 국가기관 소속인 거지? 그게 계속 걸려.” “너무 신경 쓰지 마.” “읽히지 않았어. 국가기관인 건 보였지만 정확히 어디 소속인 건지는 알 수가 없었어. 자물쇠로 잠긴 것처럼 전혀 정보가 새어나오지 않았다고.“ “이재준.” “아무 것도 안 보여?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 재준이가 굳이 이런 식으로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나 또한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머릿속에 정우현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그에 대한 미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아수라장인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담임선생님. “자자, 조용!! 니들이 고3이면 양심이 있어야지, 떠들지 말고 공부를 해라, 공부를!!” 교실 벽을 막대기로 탕탕 치며 아이들을 제자리에 앉히고, “오늘은 전학생이 한 명 있다.” 순간, 사색이 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는 재준이와 나. 설마 오늘 우리 반에 전학오는 게... 정우현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엮이고 싶지 않아도 어떻게든 엮이게 될 운명이었다. “들어와.” 담임선생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복도에 서 있던 한 남자가 교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다행이다, 정우현이 아니었다. 정우현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남자였다. 까불대거나 능글맞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남자. 지독한 외로움과 쓸쓸함에 길들여진 것 같은 그의 분위기에 괜시리 내 마음이 시렸다. 세상 모든 것에 무관심해 보이는 그의 태도를 내가 꼼꼼히 관찰하고 있을 찰나, 내 옆에 앉아있던 재준이가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놈의 행동이 어찌나 빨랐던지, 재준이의 의자는 뒤로 나뒹굴고 있는 상태였다. “뭐야!! 이재준, 너 왜 그래???” 담임선생님은 인상을 찌푸리며 재준이를 향해 소리치고, 나는 재준이의 옷깃을 잡으며 그의 의자를 바로 세워주었다. 전학생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으나 무표정한 얼굴만은 그대로였다. “재준아, 왜그래. 앉아.” 재준이는 넋이 나간 듯 전학생의 얼굴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힘을 주어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 재준이는 순순히 내 힘에 이끌려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 오늘 이상해, 정말 왜 그러...”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초능력자야.” 시선을 전학생에게 돌렸다. 그는 재준이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승휘.” “......... 가승휘라면....” “그래, 정우현이 라이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놈이야. 같은 국가기관 소속이야.” 소름이 돋았다. 정우현을 볼 때와는 다른 생소한 감정이 내 안에서 맴돌았다. 그 감정의 정체는 두려움과 공포였다. “쟤도.... 순간이동 능력자야?” 재준이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의 손도 떨려오고 있었다. “보이지가 않아.” “..........” “정우현과는 차원이 달라.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아.” 재준이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재준이의 카운트 능력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 재준이는 정우현이 순간이동 능력자라는 것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가승휘에 대한 정보만은 전혀 캐내지 못하고 있었다. “에, 이름은 가승휘고, 이제 니들도 다 컸으니까 괜히 왕따다 뭐다 유치하게 굴지 말고 적응 잘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라. 그럼 어디 보자, 니 놈 자리는....“ 불안감이 온 몸을 엄습해왔다. “옳지. 지율이 뒷자리 비었네. 민지율, 손 들어봐.” 담임선생님의 말에 나는 마지못해 오른 손을 살짝 들어보였고... “가승휘, 저 여자애 뒤에 앉아.” 가승휘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내 옆을 스쳐지나갈 때, 옅은 바람이 느껴졌다. 그는 슬쩍 내게 시선을 던졌는데, 그 눈빛이 어떤 감정을 담아내고 있는지는 전혀 읽히지 않았다. “이번 주 주번은 누구지? 아, 지율이랑 재준이 니네 둘인가?” 담임선생님의 말에 내가 급히 대답하려 할 때. “아아, 복장검사 시즌이라 재준이놈 바쁘지? 학생주임이 재준이 일 시키지 말랬다. 그럼 이번 주 주번은 지율이랑, 전학 온 놈. 니네 둘이 해. 주번 같이 하는 김에 지율이 니가 저 놈한테 여러 가지 가르쳐주고. 요즘 교복 도난 사건 많다고 하니까 이번 주 주번들은 체육시간에 운동장 나가지 말고 교실에 딱 붙어있어. 도난당한 거 있으면 그거 다 주번들 책임이다.“ 차라리 정우현과 엮이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승휘는 이미 검은 기운을 한가득 내뿜고 있었다. 아프다는 핑계라도 대서 어떻게든 주번 일을 미루고자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그럼 오늘 조례 끝낸다. 다들 수업 열심히 듣고.” 담임선생님은 들고 있는 막대기로 숱이 없는 머리를 긁적이며 나가버렸다. 제기랄. 꼼짝없이 엮이게 생겼다. 순식간에 다시 반 분위기가 느슨해졌다. 아이들은 술렁대며 하나 둘 씩 가승휘 쪽으로 몰려들었다. “어머, 어떡해. 쟤 잘생겼지?” “잘생기긴 했는데 이상해. 눈매 봐. 되게 무서워. 난 재준이 같은 스타일이 더 좋아.” “친구한테 문자왔어. 야, 옆반에도 완전 귀여운 애 전학왔대. 가볼래?” “어이, 전학생!! 안녕!! 너 키 좀 큰 거 같은데 농구 좋아하냐?” “재준이 놈이랑 얘 있으면 6반 놈들 이기겠다. 6반만 이기면 우리 반이 우승이야.” 나는 그 어수선한 순간을 틈 타 엎드려있는 재준이에게 말을 건넸다. “머리 많이 아파?” “이런 적이 없었는데.” “재준아...” “무서워.” 재준이 입에서 무섭다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양호실 좀 다녀올게.” 재준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뒷문으로 걸어갔다. 그런 재준이가 걱정되어 계속 눈으로 그를 쫒고있을 때였다. 어떤 장면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교무실에서 재준이와 정우현이 맞고 있는 장면이었다. “야, 이재준!! 안돼, 가지마!!!” 재빨리 재준이를 따라가려 했지만 가승휘 주변으로 모여든 아이들 때문에 그 곳을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재준이는 큰 키와 긴 다리를 이용해 이미 교실을 유유히 빠져나간 뒤였지만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작은 체구를 가진 나는 북적북적한 교실 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부대껴가며 아등바등 빠져나가려 애쓰고 있었다. 치열한 사투 끝에 복도로 나갔을 때, 이미 재준이는 사라진 뒤였다. 나는 기를 쓰고 1층에 있는 양호실로 내달렸다. 하지만 양호실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렇다. 우리 학교 양호선생님은 지각으로 유명한 분이었다. 뭐야, 이재준.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양호실 간다며. 너 지금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 너 오늘 일진 사납단 말이야. 교무실에서 먼지 나게 두드려 맞는 장면이 보여. “웅? 꼬맹이 아가씨. 자주 만나네.” 재준이 대신 내 눈 앞에 보인 건... 빨대로 우유를 쪽쪽 빨아먹고 있는 정우현. 옳지. 이거다. 분명히 재준이 옆에서 맞고있는 건 정우현이었다. “너 지금 어디가는 길이야?” “응?” “요즘 복장검사 기간이야. 교칙에 어긋나는 거 있으면 안돼. 그러니까...” “넥타이 없는데. 니 리본이라도 빌려줄래?” 이 미친 애새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농담이나 지껄이다니. “지금 니가 어디가는 지는 모르겠지만 니가 가는 곳에 재준이란 애가 있을 거야. 너랑 재준이랑 같이 맞을 일이 생겨. 그러니까 이상한 데 가지말고 교실로 가. 재준이 만나면, 그 애한테도 꼭 교실로 오라고 전해줘.“ 내 말이 끝나자마자 정우현은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괜히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섣불리 내 예지능력을 드러낸 것 같았다. 하지만 정우현은 너무 편한 친구같은 느낌이라, 조심해야 한다는 걸 순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엑스맨 놀이 하는 거야? 여자애들은 이런 놀이 싫어하던데.” 하지만 놈은 내 예지를 농담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차마 내가 예지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못하고 한숨만 내쉬고 있을 때, 정우현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내 어깨를 휘어잡았다. “너 오늘 봤지?” “...........” “초능력자 처음 봐서 신기한 건 알겠는데.” “..........” “그래서 이런 식으로 나 놀리려는 모양인데.” “............” “잊어버리는 게 좋을 거야.” 놀란 표정으로 정우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가더니 다시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니 얼굴만 떠올려도 니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어.” “..............”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것도 쉬워. 운동장 한 30바퀴 돈 것처럼 숨은 존나 차지만.” 그는 나에게 장난을 치듯 여전히 능글맞게 중얼거렸다. “프랑스까지 가는 건 개 힘들더라. 한 3일 앓아누웠거든.” “....... 너.......” 그는 해맑은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윽쓰윽 쓰다듬었다. “이거 쉬운 일 아니니까 아가씨, 어설프게 흉내내지마. 영웅놀이 아니거든.” “..... 잠시만, 너 지금 내 말을....” “니가 정말 능력자라면 이런 곳에 있을 수도 없을 거야.” “...........” “이딴 걸로 사람 놀리면서 장난 치지 마. 나는 여기에 내 인생을 걸었어.” “정우현, 나 지금 놀리는 거 아니야. 진짜야.” 내가 확고하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말을 듣지도 않는 것 같았다. 대신 놈은 아주 조용하고도 씁쓸하게 말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들을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다음부터는 조심해. 이런 걸로 장난치면 나 진짜 화낼 거야.” “저기,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 그런데 정우현. 한 두 대 맞는 거면 나도 상관안해. 근데 너희들 정말 큰 일 난다니까? 어디서 뭘 하다 걸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교감선생님한테 들켜, 내 말 알겠어?” “민지율.” 그는 내 명찰을 바라보고 내 이름을 부드럽게 발음했다. “다음에 또 보자.” 그는 텅 빈 우유곽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 우유곽이 차가운 복도 바닥에 떨어지는 그 순간, 그도 내 눈 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남들이 내 예지 능력을 목격할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Writer. 청몽채화 3. 1교시가 지나고 2교시가 지나도 재준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 있는지 모르니 무작정 놈을 찾아 나설 수도 없었다. 점심시간이면 학교 전체를 다 뒤져서라도 찾아낼 텐데 쉬는 시간 10분 안에 그를 찾아내는 건 무리였다. 쉬는 시간마다 양호실에 가도 놈은 없었고, 핸드폰도 꺼져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3교시. 체육시간이었다. 담임선생님의 말대로 아이들이 나간 뒤에도 주번인 나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아이들까지 저마다 재잘거리며 신발주머니를 들고 나가자 교실 안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건 가승휘와 나 둘 뿐이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함이 밀려왔다. 내 뒤에 앉은 가승휘는 내게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저기, 미안한데....” 결국 결심을 굳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말했다. 그는 말없이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나 찾을 사람이 있어서, 좀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1층 학교 화단부터 옥상까지 다 뒤져봐야겠다. 재준이 놈을 찾아야 했다. 그 때, 누군가가 우리 교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교복을 훔치려는 도둑이라면 조금 더 조심스럽게 들어올 텐데, 뭐지? 경계 태세를 갖추며 뒷문 쪽을 바라보았다. “씨발!!! 가승휘, 니 넥타이 빌려줘.” .......... 정우현이다. 순간이동이 아니라 뒷문을 열고 멀쩡하게 나타나는 놈의 모습을 보자 괜히 새로웠다. “내가 왜.” 그리고, 가승휘의 목소리. 문득 가승휘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놈의 목소리는 매우 낮고 남성스러웠다. 약간의 미성을 자랑하고 있는 정우현의 목소리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다음 시간 수학이래. 학주가 수학 담당인데 넥타이 없는 거 또 걸리면 죽인대.” 정우현은 아직 가승휘 앞에 있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착실했냐.” “뭐?” “수업이나 들어가. 남의 반에서 노닥거리지 말고.” “수업 안 들어간 거 아니야, 못 들어간 거지!!” 가승휘는 짜증난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정우현을 상대하지도 않겠다는 굳은 의지 표현인 것 같았다. 재준이가 말한 것처럼, 정우현은 가승휘를 라이벌로 생각하며 온갖 짜증을 다 내는 데 반해 가승휘는 정우현을 상대도 하지 않는 듯 했다. “개새끼야, 나 건들지 마. 안 그래도 지금 맞고와서 나 기분 존나 더러우...” 그리고 그 순간, 정우현과 내 눈이 마주쳤다. “야, 너!!!!!!!!!!” 그는 무서운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불러제꼈다. 천둥처럼 큰 목소리였다. “너 뭐야.” 그는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위협적으로 내게 물었다. “뭐.... 뭐, 뭐가?” “니 말대로 걸렸어. 옥상에서 담배 피다가.” 정우현의 말에 가승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귀에서 이어폰을 빼냈다. 왠지 쉽게 볼 상황이 아닌 것 같아 등 뒤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재준이가 옆에 있어줘야 해. 나 혼자 이런 상황에 처하면 머릿속이 백짓장처럼 변해버려. 나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내뱉어야 하는 거지? “지금까지 맞다가 왔어. 니가 어떻게 안 거야? 너 정체가 뭐야? 놀린다고 생각했는데 진짜였어. 너도 니가 예지 능력 있는 거 알지?? 그거 알고서 그렇게 당당하게 나한테 경고했던 거지? 솔직히 말해.”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연기를 시작했다. “저, 저기... 재, 재준이는 어딨니? 아이쿠, 재준이 찾으러 가 볼까나?”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여 뒷문으로 발을 내딛었을 때, 정우현은 거칠게 내 팔을 휘어 잡았다. “그 새끼 아직 맞고 있어.” “............” “나랑 같이 담배피다가 걸려서 니 말대로 맞고 있다고.” 재준아. 나 좀 도와줘. 니 말대로 이 애들이 국가기관 소속이라면, 나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한 거야? “정우현. 그 애 놔 줘.” 그 때, 가승휘가 차가운 목소리로 정우현을 향해 한 마디 내뱉었다. 방금까지 정우현을 상대할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목소리였다. 당장이라도 행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지체없이 한 대 칠 기세였다. “넌 상관없는 일이야. 닥치고 있어.” “정우현.” “이 년 수상한 년이야!!!!” “죽여버리기 전에 그 손 놔.” “가승휘!!!!!!!!!” 그 때, 가승휘는 한 쪽 발로 책상을 강하게 걷어찼다. 책상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앞에 있던 책상 세 개가 힘없이 쓰러졌다. 정우현은 그런 가승휘의 반응에 놀란 듯 싶었다. 그 정도는 나를 노려보면서도 내 손목을 천천히 놓아준 정우현의 행동만 봐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상부에 보고해야 돼.” “...........” “예지 능력이 있었어.” 정우현은 내게 고정한 시선을 절대로 떼지 않으며 잇새로 나지막히 말을 내뱉었다. “세상에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일이 많다는 거, 누구보다 니가 잘 알 텐데.” “그거와 달라. 정확하게 예언을 했어.” “이 세상 점쟁이들 다 잡아갈 생각이야? 때려 맞추는 거와 예지 능력은 달라.” “그런 거 아니었어!!!!!” 그들은 내가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주고받고 있었다. 가승휘는 지금까지 정우현이 떠벌리던 일을 쓸데없는 말로 치부하며 단칼에 잘라내 버렸다. 정우현에게 예지능력을 들킨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쓸데없이 일 벌리지 마. 정확히 따지자면 내 직급이 너보다 높아. 내 말 들어.” 가승휘의 차가운 한 마디에 정우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승휘는 그런 정우현을 달래듯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지켜보지. 같은 반이니까.” “........... 나도 지켜볼 거야. 숨겨줄 생각하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숨겨줄 생각 없어.” “개처럼 사육당하는 우리 같은 새끼들도 있는데, 능력 있으면서도 그거 숨기고 밖에서 즐길 거 다 즐기면서 자유 만끽하는 놈들이 있어. 불공평해. 나 그 꼴 두고 못 봐.“ 설마.... 초능력자들만 모아두는 공간이 있다는 소리일까. 이 놈들... 국가기관 소속이 아니라... 국가에 끌려간 놈들인 거야? 재준이와 함께 어딘가로든,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계속 여기서 이 놈들과 같이 있다가는 당연한 것처럼 피해를 입을 것 같았다. 절대로 내 능력과 재준이 능력을 들켜서는 안 된다. 떨리는 발을 조심스레 옮겨 놓으려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너무 놀란 모양이었다. 그 때, 뒷문이 다시 활짝 열렸다. 드디어 재준이가 온 모양이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그를 향해 소리쳤다. “재준아!!!!!” 그러나, 뒷문을 열고 나타난 건 재준이가 아니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불독 같은 인상의 한 아저씨. 학교의 선생님이라거나 누군가의 학부모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정우현. 너 왜 호출기 안 켜놔.” 그는 잠시 내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새 정우현의 목덜미를 휘어잡았다. “아, 왜 이래요!! 오늘 내 할 일 다 끝났다구요!! 탈옥범 잡았잖아요!!” “끝나긴 뭐가 끝나. 긴급 호출이다. 조퇴해. 빨리 와, 임마.” “망할 감독관. 이거 놔요, 오늘은 힘 다 썼어요!!” “개새끼야, 말 안 들어?? 너 조건부로 나온 거 잊었어??” “왜 나만 써먹어요!! 국가 소속 에스퍼(초능력자)중에 순간이동 쓰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요???” 정우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불독을 닮은 아저씨는 인상을 구기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 이 새끼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말해, 일반인 있는 거 안 보여? 불만을 지껄여도 나가서 말해, 따라와!!!” “가승휘 이 새끼는 일도 잘 안 시키면서 왜 나만 있는 대로 부려먹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불독 같은 인상의 아저씨는 정우현의 뺨을 후려쳤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정우현의 고개가 돌아갔다. 놀란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지만, 가승휘는 그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그저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겪어온 일이라는 듯, 그의 태도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함부로 비밀 누설하지 말라고 몇 번 말했냐.” “......... 도망 칠 거야.... 나 개새끼 아니야.” 정우현의 볼이 금세 빨갛게 부어올랐다. 놈의 눈동자도, 저렇게 슬픈 빛을 낼 수 있구나... 생각했을 때. “도망칠 수 있으면 쳐 봐, 순간이동 능력자들 몸에 위치추적 칩 박은 거, 그 누구보다 니가 더 잘 알 테니까. 지금도 위치추적 해서 너 찾아 온 거야.“ 세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내가 알아들을 만한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순간, 불독 같은 인상의 남자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그 남자를 봤던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낯이 익은데.” 그의 말에 가승휘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불독같은 인상의 남자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오는 그 순간, “여자애들 사이에서 흔한 얼굴이죠.” 가승휘는 무심한 말투로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그나저나 감독관님, 더 이상 시간 끌면 안 될 것 같은데요.” “........ 그래, 이왕 걸린 거, 빨리 처리하고 와. 나는 정우현 새끼 정신교육 좀 똑바로 시키고 있을 테니까.” 재준아. 나 좀 도와줘. 불독 같은 남자의 명령에 가승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목을 붙들었다. 그리고는 복도 밖으로 무지막지하게 나를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야, 너 뭐야!!! 놔!!! 이거 놔!!! 너희들 뭐야!!!!??” 쉽게 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놈이 잡은 손목이 벌써 욱신거렸다. 끊임없이 반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층에 있는 화단까지 나를 손쉽게 끌고 갔다. 악을 쓰듯 소리 쳤는데도 다른 교실 모두 수업 중이라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한 곳에서 계속 떠들면 내다볼 법도 하지만, 끌려가는 와중에 소리쳐 댄 게 문제였다. 나는 눈 깜짝할 새에 학교 뒤편 화단으로 끌려와있었다. 가승휘는 거칠게 나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고, 나는 공포에 질려 그를 바라보았다. “굳이 힘들여서 모든 걸 애써 기억하려 들지도 말고, 우리에 대해 파헤치려고도 하지 마. 다 헛수고야. 그냥 다른 세계 사람이라 생각하고 무시하는 게 좋을 거야.” “.......... 뭐?” “나는 기억을 조종한다.” 말.... 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지금 바로 이 순간의 기억을 지워줄게. 니가 지금 알게 된 모든 사실을 없앨 거야. 감독관한테 들키지 않으려면 뭐든 니 기억을 지운 척이라도 해야 하니까.” “가승휘..........” 두려움이 엄습했다. 정우현이나 가승휘는.... 재준이나 내 능력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기억을 다 지우지는 않을 거야. 모든 걸 다 잊으면 넌 우리에게 또 다가올 테니까. 지금 이 순간을 잊는 대신 니가 교실에서 느꼈던 두려움과 무서움만 확실해 기억해. 니가 우리에게 다시는 다가오지 않도록.” 그는 차갑게 말을 이었지만... 그의 눈빛이 순간 다정하게 보인 건 내 착각이었을까. “초능력자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다가오지 마.” “너.... 날 알아?”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그를 향해 물었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나온 물음이었다. “니 기억을 지울 거니까 지금만큼은 편하게 말해도 되겠지.”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한순간 나를 향해 쓸쓸한 미소를 보여준 것도 같았다. “너는 날 모르겠지만.” “...........” “난 니가 보고 싶었어.” Writer. 홍양 4.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혼란스러움에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가승휘를 떼어냈다. 그러자 가승휘는 갑자기 내 눈을 빤히 바라본다. 순간 나는 찌릿, 알 수 없는 두통을 느꼈다. "........" 몇분후.. 천천히 뒤돌아 서는 가승휘. 어, 그런데 내가 왜 쟤랑 이곳에 있는 거지?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양 어리둥절한 상황에 나는 한참을 얼어 붙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며 가승휘를 향해 물었다. "너랑 나.. 여긴 언제 온거야?" "아까 그 사람, 피하는 게 좋아." "......" "정우현도..." 그렇다. 아까 교실에서의 일은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어찌된 것인지, 얕은 잠을 잔 것마냥 멍하고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는다. 설마.. 쟤.... 사람을 재우는 능력이 있나, 아님 시공을 뛰어넘는건가? 별의별 생각에 잠겨들고 있을 때 가승휘가 뒤를 돈 채로 차갑게 말했다. "알량한 예지능력으로 함부로 우리 세계에 발 들여놓지마." "......" 알량한... 예지능력. 쓸모없는 건 알았지만 가승휘에게서 그런 얘길 들으니 심장이 욱씬 거렸다. '우리 세계엔 더 훌륭하고 좋은 능력이 많으니 쓸모없는 능력가지고 어울리려는 생각마라.' 마치 날 깔보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예지능력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떤 이유로건, 숨겨줬단 생각에 다행이기도 했다. "너 옆에 앉아있던 그놈도 함부로 남의 신상명세 읽어내리지 말라고 그래." "...재준이 말하는...." "들키고 싶지 않으면." 재준이의 능력에 대해서도 파악했나보다. 역시 무서운 놈인게 틀림없었다. 내가 대꾸를 하기도 전에, 가승휘는 왠지 모르게 시린 뒷모습으로 교실로 향하고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팔목이 빨갛게 부어있었다. 분명히 무슨일이 있었다... 무슨일이지? 어째서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는거야! - 멍한 상태로 교실로 향하자, 교실문 앞에는 재준이가 서 있었다. 아무래도 날 기다린 듯.. 내 모습이 보이자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 진짜 치사해!" "어.. 재준아..." "나 학주한테 두들겨 맞을 거 왜 얘기 안해줬어? 존나 아팠다고!!" 난 막으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재준이에게 어디서 부터 말해야할지, 머릿속이 정리가 하나도 되질 않았다. 일단은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교실안을 확인했고, 다행히 가승휘는 아직 교실로 오지 않은 듯했다. 나는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재준아.. 나.. 이상한 아저씨를 봤어." "바바리코트 입은?" "아니, 장난 치는 거 아니야." 내 대꾸에 엉덩이를 만지작 거리며 피식 웃는다. 언젠간 재준이의 버릇을 고쳐놓고 말겠다. 내가 진지해지면 코웃음 쳐버리는 거. "정우현, 가승휘랑 관련있는 것 처럼 보였어. 아.. 감독관님이라고 불렀어." "감독관? 씨발, 그건 또 뭐야.. 내가 그 새끼들이랑 어울리지 말라 그랬지!" "목소리 좀 낮춰!" 안 그래도 가승휘나 정우현이 들을까봐 조마조마 해 죽겠구만. 재준이는 내 머리를 쥐어박더니, 절뚝거리며 교실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가승휘가 우리 능력을 알아." 내 말에 재준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반응은 없었다. 깜짝 놀랄 줄 알았더니.. 그렇게 종례시간이 가까워 올때까지 가승휘는 교실에 나타나지 않았고, 정우현도 아까 그 아저씨에게 끌려간 이후로 보이질 않았다. 괜시리 불안한 마음에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재준이를 쳐다봤다. 그런 내 눈빛을 느낀건지 재준이가 안 어울리는 조용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민지율.." "응?" "당분간 점 같은거 안보는 게 낫겠다. 오늘 바로 집으로 가자." "그럼 우린 뭐 먹고 살아?" "모아둔 거 있으니까 당분간 그걸로 생활하지, 뭐." 버는 족족 쓰는 줄 알았더니 모아둔 돈이 있긴 있는 모양.. 기특한 마음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조심스레 내 손을 떼어놓으며 말한다. "마지막 경고야. 걔들이랑 어울리지마." "........" "특히 가승휘 그 자식." 평소와는 다른 말투에 움찔해버렸다. 그래서 나는 찍소리도 못한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 재준이와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후미진 곳에 위치한 3층짜리 건물이었다. 그곳의 반지하에는 내가, 옥탑방에는 재준이가 세를 들어 살고 있다. "사장형한테는 아프다고 둘러댔으니까 요령껏 해. 알았지?" 재준이는 30번째 같은 잔소리를 하고 난 후에야 옥탑방으로 올라갔고 나는 반지하로 향했다. 어느새 날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정우현은 괜찮으려나, 그 아저씨 주먹 장난 아니겠던데... 그리고 아까전에 가승휘 그 자식은 나한테 심한소리 한 주제에 뭐가 그리 쓸쓸해보였던거야. 신경쓰이게... 아 몰라, 나랑 상관 없으니까! 할일도 없는데 공부나 해볼까 하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수북히 쌓인 쓰레기봉투가 나 좀 버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기에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이 근방은, 밤에 여자 혼자 나가면 위험했기에 재준이를 부르려다 관뒀다. 녀석은.. 그것을 빌미로 내일 아침밥을 차리라고 할게 분명했으므로. "으..춥다.." 밤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쓰레기 봉투를 투포환 던지듯 던져놓고 서둘러 집으로 가려는데.... 집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 "......." 응..? 정우현...? 세상에 이제 내가 헛것까지 보나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쳐다보았을 때, 정우현의 눈과 정통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피할 타이밍을 놓친 나는 집안으로 들어가려 발걸음을 빨리했다. "야." 그런 나를 부르는 정우현. 나는 얼떨결에 돌아봐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맞은 건지 얼굴엔 밴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입술도 터져있고... 어쨌든 절대로 어울리지 말란 재준이의 말을 상기하며 다시 한번 발을 옮겨 놓는데.. "으윽..." 이번엔 내 후드티에 달린 모자를 잡아챈다. 덕분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정우현의 앞에 서고야 말았다. 그렇게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나는 여자인데 너무 함부로 대한다는 생각에 눈에 힘을주고 째려보자 "나 지금 도망칠건데.. 어떻게 될 거 같냐.." 돌연, 진지한 눈을 한채로 묻는 정우현. 그 말을 듣자마자 얘가 남자셋에게 무자비하게 끌려가는 모습이 떠올라버렸다. "......" 하지만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이 말을 해준다면, 내 예지력을 인정하는 거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 "거짓말." "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멋대로 불쑥.. 남의 집 앞에 찾아오지마. 순간이동이고 뭐고 나한텐 쓰지 말라고!" "......." 아까 정우현이 한말이 떠올랐다. 내 얼굴만 떠올려도 내가 있는 곳으로 올 수 있다는... 지금도 능력을 이용해서 온 것이겠지 해서 소리를 지르면, 정우현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간다. "순간이동? 설마했는데.." "......" "가승휘가 기억을 안 지웠나보네?" 기억을... 지워? 정우현은 성큼 내 앞으로 와서 내 턱을 잡은 채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 자식이 지시를 안따라? 넌 뭐야, 뭐길래 가승휘 그 자식이...." 절묘하게 잘려진 듯한 기억. 그럼 아까 가승휘가 내 기억도 지운건가.. 설마.. 기억을 조종한단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다른 기억은 지우지 않은거지? 그럼 지워진 기억은 어떤거였지? 혼란스러움에 어쩔 줄 모르던 나는 정우현을 밀쳐내고 집안으로 들어가려했다. 그런 나에게, 정우현은 아까와 똑같은 질문을 한다. "뭐, 그건 나중에라도 지우면 되는거니까." "뭘.. 지운다는....." "예지력이 아니더라도 좋으니까 아무 얘기나 해줘." "......" "도망칠거야... 멀리... 어떻게 될까, 난?" 정우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감독관이라는 험상궂은 아저씨에게 뺨을 맞던 정우현의 모습이 떠오르며 , 순간 이 애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정우현의 눈을 마주한 채 단호하게 말했다. "잡혀." "......" "그러니까 지금은 도망치지 않는 게 좋아." 가승휘 마저도 그랬다. 정우현을 조심하라고.. 하지만 나는 절대로 예지력을 들켜선 안되는 사람에게, 예지력을 이용해 충고를 해주고야 말았다. 지금 내가 한 말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겁이 들었다. 그래서 얼른 재준이를 찾아가려는데.. 내 등 뒤에서 둔탁한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뒤돌아보니 정우현의 옆에 작은 칼이 떨어져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정우현의 팔에선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관둬야겠다, 그럼." "......너... 미쳤어??" "여기에, 칩이 있거든." 정우현은 피가 나고 있는 자신의 팔목을 가리키며, 씁쓸히 웃는다. Writer. 홍양 5. "너 정말 미친거...." 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뒤돌아가려는 정우현을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붙잡았다. 그러자 정우현은 눈을 찡긋거린다. (아무래도 놓으라는 뜻인가보다) "이러고 어딜간다는 거야!" "놔." 나는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우현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향했다. 그 자식은 짜증나 죽겠다는 표정으로, 한편으로는 이런 음침한 곳도 다있구나.. 신기해 하는 표정으로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아까 잠시 스쳤던 장면에서 정우현의 팔목쪽이 심상치 않았었다. 왜 눈치채지 못한거지. 정말 이 쓸모도 없는 예지력... "여기가 니 집이야?" 나는 대답대신 흰 티셔츠를 가지고 와서 지혈을 시작했다. 정우현은 피가 나고 있는 자신의 손목보다, 내 지하방이 더 신경쓰이는 듯 이리저리를 살폈다. "너 여기 혼자 사는거야?" "......" "존나 위험하겠네.. 문 꽉 잠그고 자. 하긴 볼 것도 없어 보이지만.." "야!!"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을 하고도 담담한 것인지,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왜 하필 내 앞에서 이런 짓을 해!! 신경 쓰이게!!" "........." 내가 소리를 지르자 뭐 이런애가 다있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정우현. 나는 애써 무시한채 칼에 베인 상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어?" 순간, 나는 아까 잠시 스쳤던 장면이 떠오르며 뭔가가 달라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상처도 확실히 작고... 뭣보다 이 아이를 끌고 가려했던 남자 셋도 안왔다. 설마 내가 이 아이의 미래를 바꾼걸까? "그만해." "응? 뭘...." "이 정도는 나 혼자 치료 할 수 있으니까, 그만하라고." 지혈을 하고 있던 흰 티셔츠를 바닥으로 던지며 일어나는 정우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서랍에 고이 보관하고 있던 손수건으로 그 애의 손목을 감쌌다. 께름칙한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대로 보내면 내 맘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뭐야, 이건.. 당장 풀어." "앞으론 이런 짓하지마." "......." "대답해, 이런 짓 하지마." "니가 무슨 상관인데." 퉁명스럽게 말하며, 자신의 손목을 감싼 손수건을 바라보는 정우현. 그리고 몇초후 거짓말 처럼 정우현은 사라졌다. 녀석의 순간이동을 오늘로 세번째 본다. 같은 초능력자 주제에, 너무 신기해 기가 막혔다. - 다음날. 20여분간 집앞에 쪼그려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재준이가 집밖으로 나왔다. 잠이 덜깬 듯 눈도 뜨지 않은채로 말이다. 선도부일이 적성에 맞는 건지, 재준인 그렇게 좋아하던 아침잠도 포기 한채 일찍 학교에 나가곤 했다. 이렇게 졸려 할거면 일찍 가지 않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이재준! 눈 좀 똑바로 뜨고 걸어!"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서는, 아예 서서 잠들어 버렸다. 나는 그런 재준이에게 어제 밤 내내 끌어안고 있었던 고민을 말했다. "재준아, 가승휘있잖아. 전학온 애.." "응?" '가승휘' 라는 자극적인 이름에 눈을 똑바로 뜨고 날 쳐다보는 재준이. 괜한 걸 말해서 신경쓰이게 하고 싶진 않았지만 나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일이었다. 이재준.. 이 자식의 도움이 간절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남들이 쓰는 말과는 다른 의미로.. 나는 재준이 녀석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다. "걔가 기억을 지울 수 있데..." 내 말에 재준이의 표정이 딱딱히 굳어버렸다. 그렇게 한참 후.. 재준인 걸음을 떼며 되물었다. "니가 그건 어떻게 알았는데?" "응? 뭐.. 그냥.. 어쩌다보니..."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닌데...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재준이의 등을 툭 치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걔가 우리 기억이라도 지우면...." "지우면이 아니라, 이미 지웠을지도 모르지." "...우리 기억 다 지워버리면...." 재준이는 그다지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예상하고 있었던걸까?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길가에 있는 문방구로 들어간다. 그렇게 몇분 지나지 않아, 검은 봉지를 달랑달랑 거리며 뛰어 나오는 재준이. 봉지 안을 뒤적거리더니 곰돌이가 그려진 파란색 수첩과 볼펜을 내 손에 쥐어준다. "이..이건 뭐야?" "앞으로 걔네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 하나도 빼지말고 여기다 적어놔." "......." "기억 까짓것, 지우면 다시 찾으면 되는거야." 나도 재준이처럼 인생을 단순명쾌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정우현- 순간이동. 가승휘-기억을 지운댔음. 파악 덜됨. 아쉬운대로 수첩에 이것저것을 적는다. 하면서도 이게 무슨 짓인가 싶지만.. 이재준 그 자식이 오늘내로 안 채워 놓으면 혼낸댔다. 나에겐 이런걸 시켜놓고.. 옆에서 쿨쿨 자고 있는 재준놈이 얄미워서 때려줄까 하다가 "........." 교실에 들어오고 있던 가승휘랑 눈이 마주쳐 버렸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시선처리를 하려했으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훽 틀고야 말았다. 이건 뭐.. '나 너 불편해죽겠어요.' 광고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재준이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나 미동도 않고 잠만 잔다. 어제 저녁.. 그놈의 총게임을 하다 2시간만 잔게 분명했다. "가승휘!!!!! 이 나쁜 새끼야!!!!"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교실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다. 얼마나 소리가 컸는지, 학주가 두들겨패도 일어나지 않을것 같던 재준이마저도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너 진짜 치사하게 이 따위식으로 할래???" 정우현이었다. 성큼성큼 가승휘쪽으로 걸어오더니 책상을 쾅 내리쳤다. 저러면 팔목이... 팔목쪽을 살펴보자 어제 내가 매준 손수건이 그대로 있었다. 버릴 줄 알았더니.. 어쨌든, 뭔가 잔뜩 화가 난 게 있는 듯 씩씩 거리며 가승휘를 노려본다. "너 어제 나 집에 안 들어온거 보고했지?" "나가서 얘기해." 나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걸 느낀건지, 가승휘가 차분하게 맞받아쳤다. 그럼에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정우현. "치사한 새끼!! 너도 나랑 같은 상황이면서 그쪽에 서서 앞잡이 노릇을 해?" "입 다물어." "씨발, 난 그 쪽 사람들보다 너 같은 새끼가 더 싫어, 알아? 너 같은 놈 때문에 그런 지옥같은 곳이 안 없어지는거라고!" "입 다무라고 했어." "너 덕분에 오늘도 존나 까이게 생겼다, 고맙다.. 이 악마보다 더 나쁜 새끼야!" 살벌한 두 남자의 말싸움에 나는 재준이의 눈치를 살피며 옷깃을 꽈악 붙잡았다. 재준아.. 어떻게 좀 해봐... 내가 싸움에 말린양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사이에 가승휘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집에 멋대로 안 들어온건 니 잘못이야." "......." "잘못했음 벌받아. 시끄럽게 굴지 말고." 설마.. 저 원수같은 둘이 같이 살고 있는 건가? 두 사람의 대화에서 뭔가를 캐내려는건 재준이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다른 아이들이 교실 안에서 큰소리를 내고 싸운다면 선도부를 무시하냐며, 둘 중 하나를 패서라도 말릴 재준이가 웬일로 조용히 경청중이었으니까. "정우현, 너도 이제 그만 포기하고 최소한의 룰은 지켜." "......" "교실로 돌아가. 니 객기 받아주는 건 여기까지야." 마치 떼쓰는 초등학생을 다루는 선생님처럼... 가승휘는 무섭도록 차분했다. 정우현이 저렇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면, 같이 흥분해서 싸울법도 하건만 흔들림조차 없었다. 마지막으로 가승휘는, 정우현을 향해 경고하듯 말한다. "아님 있던 곳으로 다시 돌려보내줄까?" "......" 시시하게도, 정우현은 가승휘에게 상대도 되지 않는다. 제 3자인 내가 봐도 그랬다. 정우현의 도발로 인해 시작된 말싸움은, 가승휘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정우현이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나를 쳐다본다. 야,,.. 왜 날봐.... 불길한 느낌에 나는 재준이의 옷깃을 더 꽉 붙들었다. "룰을 지키라고? 웃기시네... 먼저 룰을 어긴건 너야. 가승휘." "......" "기억 지우라는 지시 어긴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래도 난 누구처럼 치사하게 보고 하거나 그런 짓은 안했어. 그 사람들 좋은 짓 시키기 싫었으니까." "너 함부로 비밀 누설하면....." "니가 말하는 그 거지 같은 룰대로.. 어제 어디있었는지 보고해야되지?" 오..안돼.. 설마... 천천히 손수건을 풀어내더니 내 책상위에 던지는 정우현. 그러자 재준이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안돼.. 안돼.. 이러면 재준이가 날 죽이려 들거야. 아니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 앞으로 내 얼굴을 안 볼지도 몰라. 이 손수건 그냥 너 가지라고!!! 당장 도로 가져가!!!! 괴로움에 몸서리 치고 있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현은 어울리지도 않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어젠 고마웠다. 민지율." Writer. 홍양 6. 정우현의 말에 교실에 있던 학생들이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가 가장 미치겠는건, 재준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도로 책상에 누워 잠을 자려 한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무슨 일이냐고 따져물으면 좋으련만... 나는 재준이에게 들리게끔 큰 목소리로 정우현을 향해 따졌다. "그런 거 아니잖아!! 너 지금 무슨 소릴......." 하지만 무책임하게도 정우현은, 아무런 핑계도 대주지 않은채 교실밖으로 나가버린다. 잡아야해.. 잡아서 아니라고 말하게 해야해.. 나는 몸을 일으켜 정우현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얼마 못가 누군가가 내 팔을 붙잡는다. 재준인가 해서 돌아보면..... ".........어..." 재준이는 얼굴 한번 들어보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있고, 날 잡은 건 가승휘.. 묘한 느낌에 나는 팔을 비틀어 빼내려 했다. 하지만 가승휘는 나를 끌고 복도로 나간다. "악!! 이거 놔아!!!" 가승휘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나를 교실밖으로 끌어냈다. 이재준.. 아무리 화났더라도 이건 아니잖아. 나 좀 구해줘! 그러나 바라던 재준이 대신, 더 막강한 지원군이 등장했으니.. 학교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던 학주와 마주친 것이다. 가승휘에게 잡힌 내 팔을 보며 살벌한 표정을 짓더니 회초리를 든채로 우리쪽으로 달려온다. "선생님!!!!!! 도와주세요!!!!!" 기회는 이때였다. 나는 최대한 억울한 표정으로 학주에게 SOS를 요청했다. "선생님!! 여기에요!!! 여기!! 여기.....ㄴ데..." 그런데 학주는 마치 우리를 못본 사람마냥 지나친다. 말도 안되는 상황에, 당황해있는 나를 더욱 세게 끄는 가승휘. "선생님 여기......" "소용없어." 흔들림없는 눈으로 말했다. 학주는 한번씩 우리를 돌아보며 살벌한 표정을 짓다가 돌아서고.. 돌아서고를 반복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가승휘가 기억을 지워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섭다..난 이 아이의 힘이.. 정말이지 두려웠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고 그 아이가 이끄는대로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그 때 한번 이상한 기운을 느꼈던 학교 뒤 화단이었다. 두번씩이나.. 제대로 말 한번 해본 적 없는 가승휘와 이곳에 있으려니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내가 경고했을텐데." "......." "정우현 그 자식 조심하는게 좋을거라고." 내가 어째서 가승휘에게 이런 소릴 듣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에도 단 한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화가난 듯한 그 아이를 향해 당당히 대답했다. "너한테 변명할 생각없어. 오해해도 상관없으니까." "........" "잠깐이지만 어제 정우현이랑 같이 있었어. 그런데 그게 뭐? 그게 너한테 혼날 일이야?" 나에게 있어 정우현보다 더 두려운 존재는 가승휘였다. 겉으로 보기에 정우현 그 자식이 더 틱틱대고, 날 싫어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순간이동이라는 능력은 나나 재준이에게 그다지 위협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가승휘는 다르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없는 것처럼 만들 수 있다는 것. 그건 정말 두렵고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너희 세계에 들어오지 말라고 그랬지?" "....." "나랑 재준이, 정말 그럴 생각 눈곱만큼도 없거든. 너희가 오히려 우리한텐 방해물이야. 이거 왜이래!! 너희야말로 우리 세계에 들어오지마. 너희 만나기 전엔 우리 아주 잘 살고 있었거든?" "....." "그리고 난 정우현 괜찮은데 니가 뭔데 정우현이랑 어울리지 말래! 니가 정우현 부모라도 돼? 내 맘대로 할거야! 놀거야!! 놀거라고!!" 이게 아닌데... 입이 터진김에 아무말이나 내뱉고 있는 나. 하지만 지금 이순간에도 가승휘의 행동하나, 눈빛하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표정을 읽기 어려운 가승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화가난 듯 보였다. 나 역시 분을 삭히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가승휘의 팔을 어깨로 툭 친 채 다시 교실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얼마못가 그런 나를 붙잡는 가승휘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정우현 그 자식이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난 기억을 지울 수 있어." "......." 가승휘의 고백에, 난 그제서야 '내가 미쳤었구나' 를 깨달았다. 이 어마어마한 애를 상대로 내가 정면돌파를 하려했구나. 후회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지금이라도 무릎꿇고 싹싹 빌까? 잘못했다고....? "내가 다시는 니 기억에 손대는 일 없게 해줘." 다시는? 언제.. 내 기억을 지웠었단 말이야? 의지와는 다르게 두 어깨가 조금씩 떨려오는 걸 느꼈다. 그런 나에게 가승휘는 말했다. "그리고 혹시나 정우현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잊어." "무슨 소리야... 나 정우현 안 좋......" "좋아했던 기억들, 다 내 손으로 지워야 되니까." 다른 종류의 협박이었다. 협박이라 할만큼 말투가 단호하진 않았다. 오히려 간절했다는 말이 맞을 정도였으니까. 어째서 가승휘 저 애가 나에게 이러는 것인지.. 단순히 정우현을 생각해서 하는 말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개만 해, 병신아." "......" 그때였다. 언제온건지 넥타이는 삐뚤어져 있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재준이가 가승휘를 향해 거침없이 '병신' 이란 말을 내뱉었다. 저게 겁도 없이.. 어쨌든 재준이를 보고 긴장이 풀린 나는, 얼른 재준이의 등 뒤로 달려가 숨어버렸다. 이제 됐어.. 재준이가 알아서 해줄거야. 그래도 10년 우정을 버리진 않았구나! 하나로 합체를 해버린 나와 재준이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가승휘. 이럴땐 아니지만.. 저 자식 참.. 잘생겼네. 뜨끈한 나의 눈빛을 읽은건지 가승휘가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얼른 시선을 피해버렸다. "고백이든 협박이든 한개만 해, 얘 멍청해서 잘 못 알아 먹으니까." "........" 멍청..? 내가 무슨. 은근히 나를 씹고 있는 재준이의 허리 쪽에 사정없이 주먹 한방을 먹여버렸다. 그런 나를 무시한 채 또박또박.. 글자에 힘을 주어가며 묻는 재준이. "너...우리가 에스퍼(초능력자)인걸 알면서 도대체 왜 숨겨주는 거냐?" "......." 가승휘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재준인 특유의 비웃음을 날렸다. 저거 되게 기분 나쁜데... "어이.. 가씨. 혹시 지율이 좋아하냐?" 재준이가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묻는다. 이 자식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순식간에 얼굴이 확 달아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대로 가승휘는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거냔 식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내 이럴줄 알았다. 괜히 쪽팔리네.. "아니면 왜 우릴 숨겨...." "너희같은 애들까지 끌어들였다간 귀찮은 일만 생기니까." "너희같은 애들? 무슨 뜻이냐, 그게?" 재준이가 제 성질을 못이기고 공격적으로 가승휘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가승휘는 전혀 흔들림 없는 눈빛을 한채 대답했다. "같은 초능력자라고 해서 급까지 같은건 아니야." "우리가 급이 떨어진다는거냐? 와씨.. 너 죽을래?" "니맘대로 통제도 안되는 초능력. 최악이지." "이 새끼가... 내맘대로 통제 잘되거든?" 아마 지금 재준이는, 그때 내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 스스로 예지력이 쓸모없다고 느끼고 있었고, 불길한 미래를 볼때마다 차라리 이런 능력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만.. 남이 나에게 그걸 깨닫게 했을 때는 심장이 덜컥 내려 앉은 것만 같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승휘는 표정 변화 한번 없이 말을 이어간다. "그럼 니가 보고 싶은 정보만 볼 수 있어?" "뭐?" "궁금하지도 않은 사람들 정보가 둥둥 떠다녀서.. 미치겠지?" "........" 재준이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1년에 한번 볼까 말까한 재준이의 당황한 모습에 나 역시 움츠러 들고 말았다. "너희가 가진 능력. 스스로는 꽤 대단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한텐 짐만 될 뿐이거든." "말.. 다했냐?" "괜히 티내고 다녔다가 뒤치다꺼리 해야되는 건 나야." "......" "그러니까 조용히, 없는듯이 살아." - 10분 뒤.. 멋대로 수업시간을 빼먹었다는 이유로 우리 셋은, 교실 복도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럴 때 선생님의 기억을 지워주면 좋으련만 가승휘는 성실하게 벌을 받을 생각인가보다. 정말 알 수 없는 놈이다. "야, 민지율한테 붙지마. 떨어져." "왜..왜그래.. 재준아.. 하나도 안 가까운데.." "씨발, 떨어지라니까? 내말이 우습냐?" "재준아.. 선생님 들으셔.. 조용히 좀!" 이미 멀리 떨어져 앉아있는 가승휘에게 시비를 거는 재준이. 재준이, 나, 가승휘.. 하필이면 자리도 이렇게 잡은 바람에 양쪽 남자 사이에 껴서 내 등만 터지게 생겼다. 하지만 가승휘는.. 정우현도 그렇고 무시하는 거에는 도가 튼 모양인지 재준이가 무슨 말을 하던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그에 비해 재준이는 아직도 분한건지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하긴.. 나는 몰라도 재준인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자부심이 강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재준인 가승휘를 쏘아보던 눈빛을 나에게로 돌리더니 무섭게 다그친다. "민지율 너는, 정우현이랑 어제 무슨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보고 하고 반성문 100장써. 알았어?" "아무 일 없었다니까....." "이 여자가.. 증거가 있는대도 오리발이네." 언제 챙긴건지, 손수건을 내 눈앞에 대며 살벌하게 웃는 재준이. "혐오스럽게 피는 뭐냐. 그 새끼 다쳐서 간호해줬냐?" "그럴일이 있었어.." "그러니까 그럴일이 뭐였는지 보고 하라고." 이재준은 내 인생을 통털어 가장 쿨한 남자라고 자부하지만, 집요하게 파고들면 가장 무서운 놈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이번엔 가볍게 넘길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이 자식들이 뭘 잘했다고! 조용히 못해!" 종례 종이 울린지 3분 후에 나온 국어선생님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재준이의 머리를 쥐어박으신다. "선도부란 놈이 잘하는 짓이다, 다음수업 시작할 때까지 꼼짝말고 무릎꿇고 반성하고 있어." "에...쉬는 시간까지 벌서라구요??" "그래, 이 자식아." "말도 안돼요! 애들 다 보잖아요! 쪽팔린다구요!" 재준이가 큰 목소리로 따졌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지 '잔말말고 꿇어앉아 있어.' 라는 말을 남긴채 교무실로 내려가 버리셨다. 그리고 단 몇초 후.. 각반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어! 이재준 무릎 꿇고 있어!" 그 중, 농구게임을 할때마다 보곤 했던 재준이의 여자팬들이 우리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꿇어앉아 있는 재준이를 보며 킥킥킥.. 웃음을 날리더니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야.. 너희들... 그만 좀 찍어라.." 다른 사람 같았음 가만 두지 않았을테지만, 팬관리를 하는 모양인지 재준이는 최대한 화를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왼쪽에도 여자애들이 하나 둘씩 몰려들었다. 그래... 가승휘, 이재준.. 잘났다, 너희들.. 제길... "재준이랑 가승휘랑 싸웠나? 그런데 가운데 저 여자앤 뭐야?" "민지율이잖아. 재준이 여자친구. 으- 나도 저 가운데 한번 앉아보고 싶다.." 군중들 사이에서 말도 안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확 수그린채 명찰을 떼버렸다. 그리고 자꾸만 스물스물 올라오는 치맛단을 손으로 끌어내렸다. 그런 나를 본건지, 가승휘가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마이 벗어줘?" ".....응?" "불편해 보이길래." "아니아니.. 괜찮아. 정말 괜찮아." 저 여자들 보는 앞에서 그런 짓을 한다는 건, 날 죽이겠다는 거냐? 가승휘라면.. 그럴 의도가 다분해보였다. 강경하게 아니라고 못을 박은 후, 언제쯤 쉬는시간이 끝날지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그런 내 다리 위로 남자마이 하나가 툭 떨어진다. "괜찮다니..." 가승휘겠지 해서 사양하려했는데 마이 앞주머니에 '정우현'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설마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정우현이 흰 와이셔츠만 입은채 내 앞에 서 있었다. 재준이와 가승휘의 시선이 동시에 우리 둘에게 향한것이 느껴졌다. "일어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나와는 달리, 정우현은 주변눈치를 보지 않은 채 내 쪽으로 손을 내민다. 설마.. 저걸 잡고 일어나라고?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거절했다. "나.. 다음 수업 시작 전까지 벌 받아야돼. 안 그럼 혼나." "눈치껏 들어가는거지. 멍청하기는." "........" "걸리면 내가 책임질테니까 일어나." 그 때, 재준이가 내 팔을 잡지 않았더라면 난 정우현의 손을 잡아 버렸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난.. 정우현이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아이에 대해 경계심이 풀어지는 것일까. 내 미래에 대해선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지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Writer. 청몽채화 7. “이재준. 너 진짜 밥 안 먹어?” 학교에서 가승휘와 한 판 붙은 뒤로 갑자기 말이 확 줄어든 재준이. 지가 대여섯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왜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단식투쟁에 들어간 걸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놈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어르고 달래고 있단 말인가. 방과 후 모든 일정도 끝났고, 아르바이트도 요즘 나가지 않는데 머리 아픈 일들은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미래를 볼 수는 있지만 바꿀 수는 없다고 넌 항상 괴로워했지.“ 재준이의 눈 앞에 밥숟가락을 들이밀었을 때, 놈은 내 손목을 천천히 잡으면서 중얼거렸다. 재준이가 사는 옥탑방의 공기가 차갑게 느껴져서 순간 몸이 가볍게 떨려왔다. “난 그럴 때마다 널 위로해줬지만.” “...........” “더 괴로운 건 나였어.” 재준이는 가승휘의 말을 계속 머릿속에서 되새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학교에서는 잠자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승휘의 말을 되받아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초능력에 대해 많이 생각한 것 같았다. “내 능력은 니 능력보다 훨씬 더 하찮아. 쓸모없고 보잘 것 없고, 도움도 안 돼.” 재준이가 자신의 능력을 그렇게 비하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재준이는 나에게, 초능력자임을 숨기라고 언제나 조언하고 다녔으니까. 초능력자가 된 것을 원망하면 원망했지, 능력이 모자람을 탓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거리를 돌아다니면, 그 곳을 걸어 다니는 수백 사람들의 프로필이 다 보여.” “재준아....” “가승휘 말 그대로야. 통제할 수도 없고 제어할 수도 없어. 보고싶은 것만 볼 수도 없고, 궁금한 것만 뽑아내지도 못하고. 알고싶지 않은 것도 머릿속에 들어와.“ “..........” “학교에서 운동장 조회만 해도 그래. 보고싶지 않은 정보가 다 떠다녀. 교장선생님 폐는 시꺼멓게 썩었네. 암인데 병원에는 왜 안 가실까. 알려드리고 싶은데 이런 말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미친놈 취급받겠지. 왕따 당하는 3반 여자애. 우울증이 극에 달했는데 그대로 놔두다간 자살하지 않을까. 아, 학주선생님 아들은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구나. 그래서 오토바이 단속이 심한가. 친구랑 사귀는 여자애가 날 좋아하기도 하고, 국어선생님이 촌지를 받기도 하고. 도덕선생님은 부인이랑 대판 싸우고 이혼절차 밟고 있고. 학교에서 패싸움 일으킨 문제아 새끼는 알고 보니 그 도덕선생님 아들놈이고.“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 투성이었다. 재준이는 하나만 알아도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 이런 개인적인 문제들을 언제나 떠올리고 살아왔던 걸까. “내가 왜 그런 걸 알아야 하지? 그리고 이걸 안다고 해서 뭘 할 수 있지?” 차라리 모르는 게 더 좋았을 비밀들을 언제나 느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민지율. 현재의 내 능력으로는....” “............. 그만해.” “날 지킬 수도 없고, 널 지킬 수도 없어.” 정우현과 가승휘의 등장으로 인해 재준이와 나의 생활이 이상하게 꼬여가리라는 것쯤은 이미 피부로 느낄 정도로 확실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태어난 의미조차 불분명한 우리에게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걸까. 나도 모르게, 재준이의 옷깃을 붙잡아버렸다. 재준이가 나에게 뒷모습을 보이고 걸어가는 장면이 선명하게 눈 앞에 그려졌다. “어디 가지 마.” “...........” “나만 두고 어디 가지 마, 이재준.” “왜 그래, 뭐가 보였어?” 또다. 내가 진지해지자 장난스럽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묻는 재준이놈. “뭐가 보였는데? 응? 응? 응?” “아무 것도 안 보였어, 오두방정 떨지 마!!!” “이로써 나의 소중함을 알았겠지?” “밥 안 처먹을 거면 말아라. 난 우리집에 갈란다!!!” 애써 차려놓은 밥상에 놓여진 소시지 반찬을 들고 일어섰다. 내가 먹을 일용할 양식을 확보하고자 하는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민지율.” 뒤에서 나를 부르는 재준이의 목소리. 예리한 새끼. 소시지는 못 주겠다 이건가. 계란말이는 가져가도 뭐라고 안하겠지? “너 두고 가지 않을 거야.” “...........” “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돌아올게.” “............” “반드시.” * “배고파. 뱃가죽이랑 등가죽이 달라붙을 거 같아.” “그러게 어제 저녁 줄 때 처먹지.” “아침은 안 줬잖아. 어제 밤에 내 소시지 훔쳐간 주제에 지금 그게 니가 할 말이냐?” 다행히 재준이는 하루 사이에 평정심을 되찾은 것 같았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자연스럽고 평범하게 하루를 보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나저나 저 새끼. 안 보는 척 하면서 내가 소시지 훔쳐간 거 다 보고 있었구나. 한참을 티격태격 싸우며 교문 안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가 내 가방끈을 거세게 잡아당겼고, 나는 덕분에 교문 옆에 마련된 샛길 (주로 남학생들이 담배피울 때 애용한다)로 휙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악!! 지금 뭐.....” 내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오늘도 다시 한 번 마주치게 된 가승휘. “민지율!! 뭐야!! 왜 그래!!!” 그리고, 옆에서 잘 가던 내가 갑자기 사라지자 덩달아 놀라서 샛길로 바로 따라 들어온 나의 듬직한 친구 이재준. 외나무 다리에서 다시 마주치게 된 이 원수들과, 다시 이 가운데에 끼게 된 불운한 여인 민지율. “니가... 나 끌어당긴거니, 지금?” 내 물음에.... “오늘 학교 가지마.” 너무나도 태연하게 대답하는 가승휘. “아, 이 새끼 진짜 왜 이래. 야, 지금 니가 지율이 남편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나 본데. 지율이가 학교 가든 말든 니가 웬 상관이야.“ 그리고, 평소보다 더 껄렁껄렁한 태도로 가승휘를 상대하는 재준이. 바닥에 침만 찍 뱉어준다면 영락없이 뒷골목 양아치의 모습이 될 것 같았다. “너도 가지마. 오늘 학교 주변에 없는 게 좋을 거야.” “야, 너 자꾸 까부는데....” 사무적으로 할 말만 또박또박 내뱉는 승휘와, 그런 승휘 곁으로 다가서는 재준이. 재준이는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릴듯이 승휘 곁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 순간. “본부에서 카운트 에스퍼(초능력자)가 파견될 거야.” “............” “감독관이 지율이를 수상하게 생각해. 눈치도 빠르고, 눈썰미도 좋은 인간이야. 한 번 봤던 사람은 쉽게 잊지 않아.“ “놀고있네, 감독관인지 관리인인지 지율이는 전에 그런 사람 본 적도 없거든?” 재준이는 내 동의를 구하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나는 고개를 재빨리 끄덕이며 재준이의 의견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다. 불독처럼 생긴 감독관이 나를 보고 낯이 익다고 말한 건 기억이 났으나, 전에 그를 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가승휘는 우리의 말은 전혀 듣지도 않은 채 계속 지껄였다. “너도 카운트를 쓸 수 있으니까 알겠지만, 오늘 감독관이 데려올 에스퍼는 장난이 아니야. 너희들을 한 번 보자마자 에스퍼인지, 아닌지 단숨에 알아챌 거야. 어떤 능력을 쓰는 지도 바로 읽히게 될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 눈에 띄면 안돼. 감독관이 그 에스퍼와 함께 다니면서 이 학교 안에 있을 에스퍼들을 찾아내려고 해. 물론, 주목적은 지율이야. 감독관은 아무래도 지율이가 에스퍼라고 확신하는 눈치야.“ “아, 뭐래. 진짜 개소리하네. 야야, 됐다, 지율아, 가자.” 내 어깨에 손을 두르며 그 장소에서 빠져나오려하는 재준이. 나는 가승휘의 말을 더 듣고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재준이 힘에 의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가승휘는 재준이를 다시 한 번 불러세웠다. 억지로 화를 참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재준. 내 말 들어.” “참, 나. 너 기억 지울 수 있다면서요. 그러면 그 감독관이나 카운트 에스퍼 기억 지우면 될 거 아냐. 우리한테 일부러 알려줄 것 없이 니가 그냥 걔들 기억 지우면 되겠네. 왜? 도와줬다는 생색내고 싶어서 그래?“ 재준이는 매우 능글맙고 밉살스럽게 굴고 있었다. “감독관들은 매주 정기적으로 점검을 받아. 초능력으로 인한 변화를 검사하는 시스템이야. 그에게 능력을 썼다가는 100% 적발되기 때문에 함부로 다룰 수 없어.“ “...................” “본부에 끌려가면 안 돼.” “..........” “일반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할 수 있는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다.” “.............” “교육도, 식사도, 생활계획도 모든 게 국가기관의 지시에 따라 흘러갈 거야. 3살 무렵의 꼬마 아이부터 90세의 노인까지 모두 똑같은 일정대로 움직인다. 계속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 트레이닝 시스템이 24시간 돌아가고 있어. 이 나라에 살고있는 에스퍼들은 무조건 그 곳에 끌려가게 되어있지.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잡아가는데 아직 끌려가지 않은 너희들은 운이 좋은 거야. 능력이 없으면 실험체로 쓰이고, 능력이 뛰어나면 의무적으로 정부의 일을 도와야 해. 죽을 때까지 헤어나올 수 없는 굴레야. 불복종은 곧 죽음이니까.“ 가승휘와 정우현이 속했다는 국가기관이 바로 지금 말한 저 곳인 걸까. 무섭고도 잔인한 곳이었다. 말만 들어도 에스퍼를 사람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유를 얻는다고 해도 하루종일 쫒아다니는 감독관이 파견되고, 하루 생활의 모든 계획을 짜주는 매니저가 따라붙어.“ 나 뿐만 아니라 재준이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게 국가기관 에스퍼들의 인생이야. Korea Government - ESP, 줄여서 KG. 정우현과 내가 속한 곳이 바로 거기야.“ 재준이는 내 어깨에서 손을 떼어내더니 난감한 듯이 눈썹을 긁었다. 나나 재준이나, 우리에게 닥친 위험이 무엇인지 이제 정확하게 파악하게 된 것이다. 가승휘의 말을 듣고 혼란스러움에 미칠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오늘 피하게 된다 해도, 앞으로도 피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국가에 그런 조직이 운영되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때, 가승휘의 휴대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그는 한숨을 내쉬며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았다. “아직 에스퍼인지, 아닌지 확실치도 않은 여자를 본부 안으로 들여보낼 수는 없습니다. 명령을 시행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이의를 제기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검토해주세요. 섣불리 건드리다가 실패하면, 될 것도 안 되는 법입니다. 그리고 아직 학교 내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지각하는 모양이예요.“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는... 재준이와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가승휘. “들었지? 감독관 전화야.” “............” “지율이를 본부로 데려오래.” Writer. 청몽채화 8. 시간이 멈춘 것처럼 우리 세 명의 사이에는 침묵만이 가득 차 있었다. 두려워서 그 어떤 말도 섣불리 꺼낼 수가 없었다. 재준이와 승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재준이는 내 손을 꼭 쥐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나만 믿어, 내가 지켜줄게. 언제나처럼... 내가 지켜줄게.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살짝 입술을 깨물었을 때... 우리 세 명의 눈 앞에 정우현이 나타났다. 여느 때처럼 순간이동 능력을 써서, 마치 마법처럼 갑작스럽게. 그 능력을 여러 번 지켜봐온 승휘는 아무렇지도 않은 눈치였고, 나도 조금은 익숙해져서 가만히 있었으나, 재준이는 상당히 놀란 것 같았다. 확실히 순간이동은 눈에 드러나는 효과가 큰 초능력이었다. 그건 쓸모없는 예지능력이나 카운트보다 놀라운 파급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어라? 뭐야, 이건. 계모임이냐?” 정우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제기랄. 민지율 친구까지 있을 줄은 몰랐네. 가승휘. 얘 기억 지워줘.” 정우현은 턱짓으로 재준이를 가리켰다. 자신의 순간이동 능력을 보게 된 재준이의 기억을 지워달라는 말 같았다. 라이벌이니 뭐니 해도 그 두 명은 서로를 보완해주며 살아가고 있는 듯 했다. “넌 여기 왜 나타났어.” 가승휘는 정우현의 부탁에는 대답도 없이 그를 향해 물었다. “민지율 보러.” 매우 뜬금없는 정우현의 답. 그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승휘와 재준이의 눈썹이 동시에 사납게 올라갔다. “민지율, 너 오늘 나랑 같이 갈 데가 있는데.” 정우현은 내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어제 재준이놈 때문에 정우현의 손을 잡지 못했었는데. 처음 느껴보는 정우현 손의 온기에 심장이 떨렸다. “정우현. 그 손 놔.” 하지만 가승휘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런 가승휘의 반응에 우현이는 웃음기를 싹 거둔 얼굴로 승휘를 바라보았다. “너 요즘 순간이동 트레이닝 새로 들어간 거 알아. 그러니까 그 손 놔.” 무슨 말인지 모를 소리에 나와 재준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말 그대로 트레이닝이야. 아직 능력 완전히 익힌 거 아니야.” 한 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다시 나를 쳐다보는 정우현. “나 요즘 새로운 기술 트레이닝 중이야.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순간이동 시키기. 두 사람 동반 순간이동 시키는 거야.“ “...........” “아직은 제대로 안 돼. 서울에서 수원까지 연습해봤거든. 나는 제대로 갔는데, 다른 사람은 중간에 이상한 곳에 떨궈져 있더라고.“ 가승휘와 정우현이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일상사를 말해주는 것은 내가 그들과 같은 초능력자이기 때문일까. “중간에 니가 다른 데로 떨어지면 내가 다시 데리러 갈게. 그러니까 나 믿고 해 볼래?” “....... 나를 어디로 데려갈 생각인데?” “본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그의 손을 강렬하게 뿌리쳤다. 가승휘나 재준이가 나서기도 전에 재빨리 터져나온 행동이었다. 그런 내 반응에 정우현은 놀란 듯 허공에 남겨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우현. 본부 연락 받았어?” 가승휘는 내 앞을 가로막으며 정우현에게 말했다. 우현이는 허공에 있던 손을 거두며 애써 웃음지어 보였다. “어, 방금.” “지율이 데리고 오래?” 정우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결국... 지율이 끌고 갈 셈이었냐?” “불복종은 죽음이야.” “어떻게든 막아볼 생각은 했어야지.” “내가 넌 줄 알아? 순간이동이 내 능력이야. 변명할 거리가 있으면 만들어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우현 입장에서는 내가 눈 앞에 안 보인다거나, 지각을 한다거나 하는 핑계를 댈 수 없었다. 내 얼굴만 떠올리면 내 앞에 바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정우현은 가승휘보다 계급이 낮은 것 같았으니... 내가 위험하다느니, 에스퍼가 아닐 것 같다느니 하면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 “빨리 가야돼. 이번에 제대로 안하면 감독관이 나 주말에 독방에 가둔댔어. 민지율, 이리와. 내 손 잡아.“ 나는 승휘 뒤에 몸을 숨긴 채, 재준이의 손을 꼭 붙잡았다. 국가기관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된 이상, 절대로 끌려갈 수는 없었다. “부탁이야.” “..........” “지율이... 모르는 척 해줘.” 가승휘 입에서, 절대 나오리라 생각지 못했던 말이 내뱉어졌다. 매우 슬프고도 애절한 어조로 그는 정우현을 똑바로 바라본 채 중얼거렸다. 간절한 그의 말투에 괜히 심장이 떨려왔다. 정우현은 인상을 쓴 채 가승휘를 바라보았다. 가승휘가 내뱉은 말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인상을 쓴다기보다, 너무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써버린 것 같았다. “너도... 부탁이란 거... 하냐?” 정우현은 더듬대면서 가승휘에게 물었다. 승휘는 곁눈질로 나를 뒤돌아보며 한숨을 쉬곤 말을 이었다. “우리같은 인간... 더 만들어서 좋을 건 없어.” “...........” “거기다 여자애야. 워낙 성별에 관해 엄격하게 구분 지어놓는 곳이라 너나 내가 곁에서 항상 지켜줄 수도 없어.” 정우현은 나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매우 쓸쓸하고 외로운 눈이었다. 그런 우현이를 자극시키듯이, 가승휘는 조근조근하게 중얼거렸다. “일곱 살짜리 꼬마 봤지. 투시능력으로 언제나 공항 앞에 서서 관광객들 가방 지켜보던 애. 마약범을 잡고, 테러범을 잡고, 도굴꾼들도 잡고, 밀수업자들도 잡았어. 언젠가 그 꼬마가 아팠어. 고열에 시달리고 몸살로 앓아누웠지. 그런데도 그 애 담당 감독관은 그 애를 끌고 나가려고 했어. 애는 아파서 그런지, 엄마 찾으면서 드러누웠고 안 가겠다고 울부짖었어. 그 때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꼬마는 왜인지 병이 다 나은 후에도 일을 하지 않았지. 그 애... 결국 어떻게 됐지?“ 조용하게 말을 잇던 가승휘는 정우현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현이는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그의 주먹이 세게 꽉 쥐어진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정우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였어. 감독관이.” 맙소사. 말도 안돼. 상상조차 힘든 사실에 나는 입을 틀어막았고, 재준이는 승휘와 우현이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런 기관에, 지율이 꼭 집어넣어야겠냐.” “.........” “그 꼬마 죽고나서, 미친듯이 항의한 사람이 너 하나뿐이었는데. 너 그렇게 동정심 많고, 남들 이해 잘해주는 새끼였는데. 지율이 꼭 넣어야겠냐.“ 정우현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시멘트 벽을 향해 사정없이 주먹을 날렸다. 감히 말릴 생각도 못하고 멈춰있는 동안, 정우현의 주먹을 맞은 시멘트 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날리고 있었다. 그의 주먹이 다 까져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직 손목도 다 낫지 않았을 텐데, 자기 몸 관리 좀 하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욕지거리를 지껄인 정우현은 가승휘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소용없어. 카운트가 우리 학교에서 이상기운을 감지했대.” “............” “5분 내에 내가 가지 않으면 감독관이 들이닥칠 거야.” 이번만큼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인듯, 승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때, 재준이가 나섰다. “내가 갈게.” “이재준!!!!” 놀란 내가 서둘러 나서보지만.... “어떻게든 누군가 끌려가야 하는 거라면, 내가 갈게. 지율이 대신.” “이재준, 이러지 마. 너 진짜 왜 이래.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학교에서 느껴진 이상기운은 나 때문이라고 보고해줘.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재준이의 말에 승휘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고, 우현이는 이건 웬 놈이냐는 듯 이상하게 재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뭔데?” 그리고 우현이의 물음에... “이름 정우현. 생일 5월 27일. 혈액형 O형. 라이벌은 가승휘. 국가기관 소속. 순간이동 초능력자.“ 우현이의 프로필을 세세하게 읊는 재준이. 놀란 정우현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긴, 신기하겠지. 학교에서 알게 된 사람 중에 2명이 초능력자라니. “나는 카운트 에스퍼야. 이상기운이 감지되어서 어차피 들킬 수밖에 없는 거라면, 지율이 대신 나를 데려가.“ “이재준!!! 너 미쳤어?? 왜 그래, 정말!!!!” 나는 재준이 옷깃을 잡고 미친듯이 외쳤다. “차라리 도망가, 우리 둘이 도망가자!!! 응? 너 이럴 필요 없어, 진짜야!! 얘들이 거짓말 하는 거야, 지금 우리 놀리려고 이러는 거야!!!“ 미친듯이 외치는 내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는 건지.. 재준이는 피식 웃어보일 뿐이었다. “민지율 예지능력은 대단해.” 재준이가 나를 떠나가는 장면. 어제 머릿속에 스쳐간 그 장면은.... 바로 이 상황을 예견한 거였을까. “5분 지났어. 감독관이 움직였을 거야.” 우현이가 말하자마자 재준이는 승휘를 보며 물었다. “감독관이 데려온다는 카운트 능력자, 반경 몇 킬로미터부터 이상기운 감지하는 거야?” “5킬로미터.” “그럼 정우현이 지율이를 데리고 빨리 순간이동을....” “아직 완벽하게 마스터하지 못했어. 그것만 믿었다간 감지될 거야.” 능력을 아직 완벽하게 마스터하지 못했다는 말에 화날 법도 한데 정우현은 가승휘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세 명의 남자들은 나를 지켜주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데도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아 눈 앞이 흐려졌다. “방법이 하나 있어. 오늘밖에 유효하지 못하겠지만. 이재준 니가 대신 잡혀가면 이상기운도 약해지고 감시가 줄어들테니 지금으로선 이게 유일한 방법이야.“ “............” “카운트 에스퍼는... 초능력자 본인이 느끼지 못하는 능력까지 알아챌 순 없어.” 가승휘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와, 민지율.” “...........”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 “오늘 하루 잠시만... 니가 예지능력 있다는 사실을 잊어.” 입술을 깨물었다. 이재준, 가승휘, 정우현. 모두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오히려 원망스러웠다. Writer. 청몽채화 9. 가승휘의 눈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순간 정신이 몽롱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약간 휘청거리면서도 다시 정신을 다잡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될 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어디로든 떠나보자. 내 손 잡아.” 정우현이 급하게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재준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야, 지금 위험한 건 재준이야. 빨리 재준이를....” 정우현은 거칠게 나를 잡아끌었다. 교문 앞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멈춰섰다. 가승휘가 정우현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우현이는 나에게 속삭였다. “다른 생각하지 마. 온전히 나한테 의지해야 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재준이가 잔인한 국가기관에 끌려갈 지도 모른다는데. “재준아........” 우현이가 순간이동 하기위해 힘을 발산하던 그 순간, 나는 재준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 덕분인지, 내 손을 잡고 있던 정우현은 혼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손 끝에 뭔가 야릇한 기분은 들었지만 나는 멀쩡히 원래 있던 장소에 발을 붙이고 있었다. “역시 아직 완벽하지 못하다니까.” “..............” “미리 손 써두길 잘했다.” 가승휘는 머리를 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재준아, 빨리 숨어.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아니야. 재준이가 잡혀갈 지도 모르는데...” 그 순간, 보기만 해도 압도적인 외제차에서 내리는 불독같은 감독관. 그리고 그의 옆에는 마치 예술가같은 포스를 풍기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카운트 능력을 가졌다는 에스퍼. 재준이를 데려가버릴 지도 모르는 에스퍼. 나는 재빨리 재준이 앞을 막아섰다. 이런다고 해서 카운트 에스퍼에게 재준이의 프로필이 읽히지 않을 리는 없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감독관과 카운트 에스퍼가 샛길에 숨어있는 우리를 발견했을 때, 재준이는 급하게 나를 벽으로 몰아붙이는 시늉을 했다. “너, 함부로 까불지 말라고.” 재준이는 이 모든 게 연기라는 사실을 알려주듯 눈을 찡긋해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미 감독관과 에스퍼는 우리 앞으로 다가와있는 상태였다. “너, 사주카페에서 일하는 건 알겠는데... 타로카드 본다고 해서 초능력 있는 건 아니거든. 아무 것도 아닌 주제에 아는 척 나불대지마. 내가 보기엔 너 되게 웃겨. 자꾸 내 옆에서 얽히려고 하는데 진짜 맞고싶냐. 왜 어디든 다 끼어드냐.“ 재준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재준이의 말에 의아해하며 도대체 놈이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순간에도 재준이는 뒤에 있는 감독관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가승휘. 니 놈은 여기 왜 있는 거야?” 그 순간, 감독관은 승휘에게로 날카로운 눈빛을 던지며 물었다. “감시하려고 찾아봤을 뿐입니다.” “씨발, 정우현 새끼는 어디로 간 거야? 도대체가 말을 들어먹는 새끼들이 없어. 이봐요, 어떱니까? 내가 말한 여자애는 저 앤데.“ 불평을 몇 마디 하더니 턱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긴 머리의 남자 에스퍼에게 묻는 감독관. 하지만 아까 재준이의 행동 때문인지 나보다는 재준이를 더 신경쓰는 것 같기도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재준이의 앞을 막아서고 싶은데, 재준이는 벽으로 밀어붙인 나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 때, 정우현이 나타났다. 혼자 멀리로 갔다가 되돌아온 것 같았다. 그는 숨을 엄청나게 몰아쉬고 있었다. “야, 이 개새끼야!!! 너 어디 다녀와!!!!” 감독관의 고함소리에도 아랑곳않고 우현이는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내가 놈에게 온전히 기대지 않고 딴 짓을 했기 때문에 동반 순간이동에 실패한 모양이다. “저 년 얼굴이 너무 흔해요.” 정우현은 과장된 말투로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감독관님이 준 쟤 증명사진 보고 순간이동 했는데도 엉뚱한 데로 다녀왔다구요.” 워낙 자그마하고 아담한 체구라서 흔한 얼굴이라는 평을 들은 적은 없었는데 이상하다. 오히려 한 번 보면 잘 잊혀지지 않는다는 말은 자주 들었을 망정 이런 말은 처음이다. 가승휘와 정우현이 지나치게 나를 감싸준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지금 도움이 필요한 건 재준인데, 왜 다들 나를 위해주는 걸까. 감독관은 정우현의 말을 새겨듣는 눈치였다. 그리고 가승휘의 팔을 툭 치며 말을 이었다. “일단 저 여자애 앞에 있는 남자애 기억지워. 정우현의 순간이동을 봤다.” 그 순간, 감독관의 옆에 있던 긴 머리의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럴 필요 없겠는데요.” 뱀처럼 가느다란 눈. 그의 눈이 순식간에 나와 재준이를 훑고 지나갔다. “저 놈이 에스퍼예요.” 그는 소름끼칠 만큼 긴 손가락으로 재준이를 가리켰다. 감독관의 눈이 재준이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여자애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데요. 이상기운이 느껴진 건 다 저 놈 탓이었네요. 저 놈을 잡아요. 키우면 뭐든 되겠어요. 능력은 탁월한데 통제는 못해요.“ “........ 무슨 능력입니까?” 감독관은 인상을 쓰며 물었고, 긴 머리의 남자는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카운트 에스퍼.” 재준이가 자신과 똑같은 능력을 가져서일까. 긴 머리의 남자는 라이벌을 보는 듯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재준이를 바라보았다. “너,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야겠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재준이의 팔을 꺾어 잡으며 수갑을 채우는 감독관. “뭐야, 이거!!! 왜 이래요!!!” “잠시 조사만 받으면 된다. 국가에서 나왔어.” 주머니에 들어있는 신분증을 재준이에게 보여주는 감독관. “다행이긴 한데... 이상하게 거슬려, 저 여자....” 그리고, 나를 힐끗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 여자애 멀리해. 이런 일에 관심많은 모양인데 괜히 엮이다가 일이 복잡해진다. 가승휘, 저 여자애 기억 한 번 더 지워.“ 심기가 불편한 듯한 얼굴로 나를 유심히 살펴보는 감독관. “안돼요. 재준이 데려가지 말아요. 얘 아무 능력 없어요, 정말이예요!! 수갑 풀어줘요!!” 내가 소리치자 가승휘는 내 팔을 거세게 휘어잡았다. 아무 말 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인듯 싶었지만 나는 전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아, 진짜 씨발년. 야, 니가 나한테 반한 건 알겠는데.” 그리고... 나를 향해 큰 소리로 윽박지르는 재준이. 놀란 덕분에 순간 나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봐요, 당신이 뭐든 상관없으니까 일단 자리 좀 피해줘요. 나 이 년한테 마지막으로 한 마디 좀 해야겠어. 가만히 내버려두니까 존나게 기어올라.“ 감독관은 처음 보는 재준이를 마구잡이로 끌고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재준이는 이미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교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바로 와. 도망칠 생각은 마. 국가는 니가 어디에 있든 단숨에 찾아낼 수 있으니까. 조사만 받으면 바로 집에 보내주겠다.“ 한 눈에 봐도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피하는 감독관. 감독관은 긴 머리의 카운트 에스퍼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떠났다고 해봤자 몇 미터 앞의 차 앞에 대기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나누는 대화 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재준, 너 어떡하려고 그래? 왜 니 발로 그런 데로 걸어들어가?” 걱정되어 앞 뒤 생각 없이 여러 질문을 내뱉는 나를 향해... “민지율. 들키면 안되니까 제발 나대지 마.” 피식 웃으며 말을 잇는 재준이. 수갑을 채웠기 때문에 그의 손은 얌전하게 뒷짐을 지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 선도서야지, 학주가 너 엄청나게 찾을 거야. 빨리 그 수갑 풀어달라고 해. 우리 경찰에 신고하자, 이거 다 잘못된 거야.“ 내가 알고있는 사람중에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바로 넌데, 니가 그런 국가 기관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을 거야. “가승휘, 나 국가기관 안에서 얼만큼 썩어야 되냐?” 내 말을 가볍게 씹어넘기며, 가승휘에게 묻는 재준이. “뭐?” “말 그대로야. 얼만큼 그 안에 있어야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거야?” “사람마다 달라. 초능력의 범위가 크고, 강도가 높을수록 자유를 얻을 기회가 커져. 국가가 니 능력을 탐내도록 만드는 게 관건이야. 국가가 너를 필요로 해야 돼. 카운트 능력만으로 자유를 얻기는 힘들어. 그건 국가 사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별 도움이 안 되는 능력이니까. 트레이닝 프로그램으로 너를 업그레이드 시켜야 해. 그 다음에 국가에게 평생 복종하겠다는 맹세를 하면, 나올 수 있을 거야. 정우현처럼.“ “흐음.... 그럼 정우현, 제일 빨리 자유를 얻은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어?” 재준이는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흘리며 정우현에게 물었다. 우현이는 말없이 재준이를 바라보았다. “제일 빨리 자유를 얻은 사람, 몇 개월만에 국가기관에서 빠져나왔어?” “....... 아마 6개월일걸, 그보다 빨리 나온 사람은 못 봤어. 가승휘랑 나만 해도 그 안에서 몇 년을 썩었으니까. 가승휘는 5년, 나는 3년.“ 재준이는 그 말을 듣더니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정우현은 잠시 망설이더니 재준이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튀지 말고, 빨리 나오려는 생각도 하지 마. 그러다가 나처럼 감시만 심하게 받게 돼. 다른 능력을 습득하거나, 자기 능력을 통제하거나, 힘을 더 강화시켰을 때, 국가는 너를 이용하려고 들 거야. 지금 나만 해도 그래. 순간이동 에스퍼 중에서 3년만에 원거리 이동을 터득했어. 그 능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를 얻었지만... 감시체제를 오히려 더 심해졌어. 위치추적 칩도 박았고. 일부러 동반 순간이동 능력도 가르치려고 들어. 그럴 수밖에 없지. 감독관이 말했어. 나중에 날 킬러로 이용해먹으려는 생각이라고.“ 진지한 우현이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를 바라보았고, 재준이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승휘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도, 국가에 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인물이면 난 그를 죽여야 할 거야. 그게 국가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 총 하나 들고 순간이동 해서, 위험인물 죽이고 다시 KG로 복귀하겠지. 덕분에 난 이제 와서 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어. 독방에도 몇 번이나 끌려갔어. 손에 피 묻히기 싫어서 트레이닝을 소홀히 했으니까.“ 무서운 현실에 치가 떨려왔다. 재준이는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재준이라면 버릇처럼 머리를 긁적일텐데, 손이 수갑에 묶여 뒤로 꺾여있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도 마음껏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3년간 멀쩡히 살아있는 내 가족도 만나지 못했어. 앞으로도 만날 수 없겠지.“ 정우현이 마지막 말을 중얼거린 후, 약간의 침묵이 감돌았다. 재준이는 이제야 결심을 세운 듯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민지율. 밥 잘 챙겨먹고, 나 없으니까 대신 가승휘랑 정우현 말 잘 들어. 너 도와주려는 거 보니까 영 나쁜 놈들은 아닌 것 같다. 대신 너한테 스킨십 하려고 달려들면 가차 없이 뺨때기 갈기고. 내 통장 비밀번호 알지? 돈 없으면 그거라도 써. 돈 아끼는 짓거리 하지 말고. 아르바이트도 당분간 나가지 마. 위험하니까. 밤에 운동한다고 돌아다니지도 마. 정 운동하고싶으면 밝을 때 해, 해 떠있을 때.“ “이재준.......” "나 없다고 점심 굶지말고. 어찌된 기집애가 나 말고 친구도 없냐. 누가 친구하자고 다가오면 까칠하게 굴지 말고 다정하게 대해주고. 숙제 열심히 다 해라, 괜히 안 했다가 몸도 작은게 선생한테 처맞을라. 수업시간에 딴 짓 하지 말고, 몸 안 좋으면 참지말고 양호실 가." "야, 너 정말......" “요즘 날씨 오락가락 하니까 우산 잘 챙기고 다녀. 괜히 비 맞고 감기 걸리면 안 돼. 아침에 늦게 나오지 말고 일찍 일어나. 학주한테 걸리면 운동장 열 바퀴다. 울지 말고, 힘들어 하지 말고, 외로워하지 말고.“ “재준아.........” "가승휘, 정우현." 재준이는 여러 가지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승휘와 우현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애틋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미안한데, 나 없는동안만 민지율 좀 잘 챙겨줘." 끝까지 나만 챙기는 놈.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바보인건지. 할 말을 다 마친 듯, 재준이는 늘 하던대로 씨익 웃었다. 그리고, 모두를 놀라게 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나 돌아올게, 민지율.” “..........” “한 달 안에.” Writer. 홍양 10. 일어나보니,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떠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어젯밤 많이 울었는지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설마.. 혹시나 재준이가 오진 않을까.. 옥탑방에 들어온 게 화근이었다. 집안 구석구석 녀석이 없는 곳이 없어서, 나는 울다 지쳐 잠이 들어버렸다. "설마... 아니겠지?" 어젯밤, 재준이가 감독관에게 대들다가 독방에 갇혀버리는 꿈을 꿨다. 오랜만의 예지몽이었다. "어...?" 나.. 예지능력이 있었네. 어째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거지..? 그러고보니 어제 초능력자를 끌고 간다는 사람들이 왔을때 나 스스로도 이렇게 생각했었다. '재준이..걸리면 안될텐데...' 재준이 걱정만 했을 뿐.. 내가 에스퍼라는 사실은 자각하지 못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든다. 요즘들어 많이 느끼는 기분나쁜 감정이었다. "후우....." 복잡한 생각을 애써 지우고 이불에서 재준이의 향기가 나,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학교를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기진 않았지만 일단 세수와 양치를 했다. 재준이가 곁에 없음을 느낄때마다 울컥하고 눈물이 나려는걸 겨우 참아냈다. 그리고 멍하니 재준이의 침대에 걸터 앉아있는데.. "씨발, 너..." "....." 오늘 역시, 땅에서 솟은 듯 나타난 정우현이 나를 보며 미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능력자라고 해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는건데 어쩌자고 남의 집안까지 쳐들어오는 것인지.. 잠시 재준이도 잊고 화가 먼저 치밀어올랐다. "하루만에 폐인이 되셨구만." "당장 나가!" "뭐?" "우리 재준이집에서 당장나가라고!" 다짜고짜 고함을 지르는 나의 모습에 놀란건지 정우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주위를 한번 살피더니 나에게 묻는다. "여기가 이재준 집이야? 아.. 그러고보니 그때랑 좀 다르네.. 아니 똑같은데? 다른가?" "너랑 말할 기분 아니야, 그냥 나가줘." 화를 누그러뜨리며, 부탁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지만 정우현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천천히 내쪽으로 걸어왔다. "가승휘 그 새끼가 너 데리고 오랬어. 하루쯤 가만히 두자니까 말이 안통해. 무조건 데리고 오래." 정우현이 조심스럽게 내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따뜻한 목소리로... 너무 따뜻해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있을테니까 교복으로 갈아입어. 알았지? 학교가자." "정우현 나 학교 안....." "조금만 늦었다간 점심시간도 끝이야. 그럼 나 학주한테 맞아죽어. 5교시가 수학이거든." 내 대답은 듣지도 않겠다는 듯, 정우현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학교에 갔다가 재준이의 빈자리를 더 크게 느끼면 어쩌나.. 하는 겁이 들었지만 나는 뭐에 홀린 사람마냥 바닥에 널려있는 교복을 주워 입었다. 교복을 다 입고 밖으로 나가자, 정우현은 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가만히 내 앞에 섰다. "....뭐..뭐..하는거야." 퉁퉁 부은 내 눈을 한손으로 지그시 누르는 정우현. 손이 많이 차가웠다. "얼음찜질." "뭐?" "보내는 사람도 가는 사람만큼 힘들구나." "...." "난 나만 힘든 줄 알았네."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더니 정우현은 내 손을 붙잡았다. 어쩌다가.. 우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손까지 잡을 수 있는 사이가 된걸까. 의아할 새도 없이 정우현이 나를 향해 말한다. "3초면 되니까 눈 꼭 감고 있어." "....." 1,2,3.. 나는 나도모르게 마음속으로 3초를 세고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때... "오, 가까워서 그런가? 이번엔 성공했네." "......." "축하한다. 내 첫 파트너." 믿을 수 없게도 내가 서 있는 곳은 학교 담벼락 아래였다. 어리둥절한 상황에 나는 슬쩍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아프다.. 그럼, 정말 내가 순간이동을 한거란 말이야? "여기서부턴 혼자 갈 수 있지? 다른데로 빠지지 말고 교실로 가!" 머리위로 손을 흔들며 운동장쪽으로 뛰어가는 정우현. 나는 아직도 꿈에서 덜 깬듯, 멍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뚜벅뚜벅 교실로 향했다. - 이럴까봐 안 오려고 한건데.. 텅 비어 있는 재준이의 책상을 보자 또 눈물이 나려했다. 그런 내 등을 툭툭 두드리며 교무실로 내려가 보라는 반장. 나는 가방도 채 벗지 못한 채, 터덜터덜.. 힘없이 교무실로 내려갔다. 심성이 고운 담임선생님은 좋지 않은 내 얼굴상태를 보더니 어디 아픈거냐며 늦은 이유도 추궁하지 않고 특별히 양호실행을 허락해 주셨다. "하루만에 전학이 말이되냐? 어제까지 멀쩡히 다니던 애가.." "맞다니까. 방금 내가 교무실에서 보고왔다니까!" "에이.. 설마...." "방금 전에 재준이 삼촌이라는 사람이 왔었어. 재준이 전학시키겠다고." "진짜? 그럼 무슨 낙으로 학교를 오냐. 아- 이재준!!" 재준이 삼촌...?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는 여자둘의 대화에 귀가 쫑긋 섰다. 나는 머릿속을 정리할 새도 없이 여자애를 붙잡고 물었다. "재준이 삼촌이라는 사람.. 언제 봤어?" "응?"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보는 여자애. 나는 숨도 쉬지 않은 채, 큰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언제 봤냐고!" "방...방금." 방금? 아까 나도 교무실에 있었는데.. 왜 난 못 봤던 거지? 이상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그 사람 어느 쪽으로 가는지 봤어?" "저.. 저 쪽으로 나가던데.." 학교 뒤에 있는 쪽문을 가리키자마자 나는 순간이동을 하는 것 마냥 빠르게 그쪽을 향해 내달렸다. 그 몹쓸 국가기관의 사람이 분명했다. 내가 모르는 재준이 삼촌이 어디 있단 말이야!! 혹시나 재준이의 얼굴을 한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달리자, 저쪽에서 못보던 고급 승용차가 출발하려는 게 보였다. "이재준!!" 힘껏 외쳤으나 내 목소리를 못 들은 모양인지 천천히 학교를 빠져 나가려는 차. 안돼.. 저게 나랑 재준이를 이어주는 마지막 끈이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이것저것 따져보지도 않고 차 앞으로 뛰어드려 했다. "읍..." 그때였다. 내 등뒤에서 누군가가 강한힘으로 나를 잡아채더니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학교 건물 사이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덕분에 나는 눈앞에서 차를 놓치고야 말았다. "으읍...." 누구지..? 순간이지만 무서운 느낌에 눈물이 나올 뻔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차가 완전히 시야 밖에서 사라지자, 내 입을 막고 있던 손이 천천히 떼졌다. 나는 누군지를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뒤를 돌아봤다. "민지율... 너 미쳤어?" 내 등뒤에 있는 건 가승휘.. 지금 화를 내야할 사람이 누군데,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그 차가 누구찬 줄 알고....." "알아! KG인가 뭔가. 거기 사람 차잖아!" 가승휘가 아직까지 무서운 존재이긴 했지만, 너무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어째서 마지막 희망의 끈까지 잘라버린 건지 원망스러웠다. 저 차안에 재준이가 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자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내 눈물을 보며 더욱더 인상을 찌푸리던 가승휘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알면서 그 차에 뛰어들려고 했다는 거냐? 이재준 이름까지 부르면서?" "그래! 저 사람이 재준이 삼촌이라면서 거짓말치고 오늘 전학까지 시킨대.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가만 안 있으면... 니가 뭘 어쩌겠다고? 뭘 할 수 있는데." 가승휘의 날카로운 질문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해빠진 내 자신이 싫었다. 재준이가 언제 돌아올지, 재준이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제 재준이의 미래에 관한건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예지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자, 정말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가승휘. 어제 날 어떻게 한거야? 왜 그 사람이 내가 초능력자인 걸 못 알아봤어?" "....." 자세한 내막까진 알 수 없었지만, 가승휘가 내 기억을 잘라냈다는 것은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스스로가 예지력이 있음을 잊는 일은 일어날 수 없으니까. "됐어! 니 도움 필요 없으니까 지금가서 나도 초능력자라고 말해! 당장!" 정말 화나고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나는 말도 안되는 고집을 피우는 버릇이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가승휘 앞에서 이래선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며 떼를 쓰고 말았다. 재준이 말로는 하느님도 못말린다는 내 땡깡. 가승휘는 의외로 날 밀어부치거나 하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면 나 역시 소리를 지를 준비가 되어있었건만, 가승휘는 바닥에 주저 앉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너희맘대로 결정했어? 왜 재준이 보낸거냐고!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건 나였잖아!" "그만울어, 첫날부터 그러면 한달안에 탈진해." 한달. 재준이가 말했던 한달... 한다면 하는 녀석이지만 이번만은 아닐 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 오한마저 드는 것 같았다. 그런 나에게 가승휘는..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냉철한 표정을 했다. "애처럼 군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야." "....." "이성적으로 생각해. 이재준 그 자식은 말할 것도 없고, 나..정우현까지 목숨을 걸고 벌인 일이야. 니가 초능력자인게 들통나면 널 감췄단 이유로 우린 죽을 수도 있어." 내가 뭐라고.. 내가 뭐길래.. 나 하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미워졌다. 내가 소매로 눈물을 닦자 가승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니가 자꾸 힘든 내색하고, 함부로 KG와 엮이려 든다면.. 이재준에 관한 기억들 다 지울 수밖에 없어." 가승휘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두려움의 일종이었다. 물론 재준이의 기억을 지운다면 내가 이토록 마음 아플 일은 없겠지만, 내 인생에서 재준이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가승휘는 영악하게도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건드렸다. 나는 울음을 그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가승휘의 앞에 바짝 섰다. "함부로 내 기억 조종하지마. 특히 재준이에 대한 기억.. 건들지마." "....." "안 힘든척, 안 아픈척... 너희들한테 피해 안가게 할게." 내 말에 가승휘는 고개를 왼쪽으로 틀었다. "한번만 더 울면.. 이재준이고 뭐고 다 필요없어." "......." "그러니까 울지마." 딱딱하게 말했지만 그 속에 날 걱정해 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말로는 우리가 귀찮아서, 쓸모없어서 감춰줬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각오하고서까지 이럴 수는 없었다. 무슨 이유로 우릴 감싸주려는지 모르겠지만.. 가승휘는 나에게.. 재준이에게 해가 될만한 일을 하지 않을거란 믿음이 생겨버렸다. "... 고마워.."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는 모양인지 가승휘는 대꾸도 않고.. 언제나처럼 쓸쓸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괜히 내 마음까지 시렸다. Writer. 홍양 11. 우여곡절끝에 교실에 돌아왔다. 선생님은 재준이가 개인적 사정으로 전학을 하게 됐다는 말만 남긴채 수업을 계속하셨다. 아이들이 끈질기게 무슨 이유냐고 물어도 '모른다' 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까 지율이랑 승휘랑 혼자 앉고 있네." ".....네?" "승휘가 지율이 옆으로 와. 주번은 빈 책상 창고에 갖다 놓고." 저 선생이 지금 뭐라는 거야. 누구 피를 말려 죽이려고! 거부할 거란 예상과 달리 별다른 말없이 내 옆에 앉는 승휘. 여기서 내가 싫다고 그러면 상당히 웃긴 그림이 나올 것이었으므로, 꾹 참았다. 세상에.. 내가 가승휘랑 짝꿍이 되다니. 어이없는 상황에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숨쉬기도 눈치보이고 행여나 가승휘의 팔과 닿을까봐 어찌나 신경을 썼던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질식으로 죽기 직전에 쉬는 시간 종이 울렸다. "아프면 양호실 가." 끙끙대는 내 모습이 아파보였는지 양호실을 가라는 가승휘. '니가 불편해서 이러는거야!' 소리쳐 주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민지율~"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교실 뒷문을 보자 정우현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 자식은 또 뭐야. 잔뜩 경계하며 정우현을 쏘아보자 피식 웃고는 내 팔을 끌어 당긴다. "너 밥 안먹었지? 나도 니 덕분에 점심시간 놓쳐서 점심 못먹었어." "응?" "빵 사줄게. 뭐든 좀 먹자." "피자빵?" 평소 빵순이라 불릴만큼 빵을 사랑하는 나는, 매점에서 가장 비싸다는 피자빵을 외치며 정우현을 따르려 했다. "정우현." 그런 나와 우현이를 쏘아보며 나지막히 이름을 부르는 승휘. 설마.. 치사하게 내 빵은 내가 사먹으란 말은 하지 않겠지? 돈 안가지고 왔는데... "아직은 민지율 경계대상이야. 함부로 어울리지마. 빵은 내가 사줄테니까 넌 니 교실로 돌아가." "자기는 짝꿍까지 하는 주제에 되게 그러네.." "뭐?" "그냥 나랑 민지율이랑 있는거 싫다그래. 너답지 않게 둘러대지 말고... 민지율, 가자." 정우현은 어리둥절 해 있는 내 팔을 끌어당겼다. 가승휘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매점에 도착했을 때.. 내사랑 피자빵은 품절된 상태였고 남은 건 팥빵과 소보루빵뿐이었다. 실망스러웠지만 아쉬운대로 소보루빵을 하나 집어들고 바나나우유와 함께 배를 채우고 있을 때였다. 남자인 주제에 나보다 더 깔끔한 모습으로 빵을 먹던 우현이가 물었다. "이제 괜찮은 모양이네? 하루종일 울 줄 알았더니." "울면.. 가승휘가 기억 지워버린대.." 가승휘보다 이쪽이 훨씬 편했기 때문일까. 그 앞에서 푸념을 늘어놓자 우현인 피식 웃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우현이는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 "그 새끼.. 무서운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 고쳐야 되는데.." "......" "아, 내가 말 안했었나? 가승휘 초능력 안통하게 하는 방법.." "응? 안해줬는데?" 안 통하게 하는 방법이 있단 말이야? 사랑에 빠진 여자마냥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그래서 나는.. 정우현쪽으로 몸을 바짝 당기며 눈을 반짝였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내 물음에 허리양쪽에 주먹을 붙이더니, 잔뜩 인상을 쓴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냈다. "뭐야..." "이렇게 한다음에 로보캅! 하고 크게 외쳐." "......." "니 몸이 강철이다, 강철이다 하고 계속 자각하게 만들어야돼." "그게 다야?" "응.. 가승휘가 내 기억은 못 지우잖아. 매일 이렇게 하니까. 그 자식이 말하지 말래서 아무한테도 안 가르쳐 준건데, 너만 특별히 가르쳐준거다." "....고마워.." 가승휘도 그렇고.. 정우현도 그렇고.. 재준이의 부탁 때문일까. 지나치게 날 생각해준다는 느낌에 몸둘바를 몰랐다. "그런데 너 돈있어? 용돈 받을데도 없을텐데..." 빵과 우유를 뱃속으로 다 털어넣고나서야 걱정이 되서 물어보면 우현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한다. "따지고보면 나도 나랏일 하는 공무원인데, 월급 받아." "아......" "마땅히 쓸데도 없는데 돈은 많이 줘." 돈을 많이 받는다는 말을 하면서도 하나도 기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싱글벙글 장난끼 가득했던 얼굴이 점점 굳어져갔다. "돈 때문에 주변사람은 물론이고 가족들이 신고를 해서 오는 경우도 있어." "......" "그게 KG가 존재 할 수 있는 이유야. 돈으로 사람마음을 매수하는거지..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기관에 대해 긍정적인 에스퍼들이 많아." 혼자 이런 생각을 했었다. 초능력자들이 힘을 합쳐 그 기관에서 빠져나오면 안되나... 하지만 씁쓸하게도, 세상밖에서 누리는 자유와 돈을 맞바꾼 사람들이 많은 듯 했다. 나는 정우현에게 어떤 위로도 해주지 못한 채 벌컥벌컥 우유를 들이켰다. 속이 탔다. 재준이 혼자 그런 말도안되는 기관에 들어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져왔다. 그런 내 마음을 대체 어떻게 읽은건지 우현이가 말했다. "이재준 만나서 해주고 싶은 말있으면 나한테 해. 전해줄게." "정말? 넌 재준이 만날 수 있는거야?" "자주는 못가도 가끔 끌려가니까." "........ 그런데 지금은 아무 생각이 안나네." 문득 떠오르는 재준이의 모습에 울상을 지으면, 정우현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런데 이재준.. 너 대신 들어갈 정도면 혹시 애인이야?" 정우현의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늘 받던 오해지만, 오늘따라 더욱 강하게 도리질을 하면 정우현은 알겠다는 듯이 끄덕거렸다. "세상엔 말로 설명안되는 관계들도 많으니까. 남녀라고 해서 애인만 있는건 아니지." 정말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걸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읊조리는 우현이를 보며 난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정우현의 말대로, 나와 재준인 친구 그 이상이었지만 남녀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가족같다는 말이 맞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음에 감사했다. "이제 들어가.. 가승휘 그새끼가 나 존나 갈구겠네." - 배를 채우고 교실에 들어가보니 반 아이들이 죄다 체육복으로 갈아 입은채 운동장으로 나가고 있었다. "이재준 그 자식은 오늘 6반이랑 내기 농구 하기로 하는 거 알면서 전학을 가냐! 의리없는 새끼!" 체육시간인가.. 남자애들이 또 6반과 내기농구를 할 모양이었다. 가승휘는 자리에 앉아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채 엠피를 듣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사복을 입은 모습은 처음이다. 키가 큰대다 잘생겨서일까. 촌스럽기 짝이없는 우리 학교 체육복이 수트처럼 보였다. 내 인기척을 느낀건지 감았던 눈을 뜨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하하.. 안녕." 민지율. 병신.. 거기서 안녕이 웬말이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인사에 당황한 나는.. 사물함안에서 체육복을 꺼내 화장실로 내달렸다. 그리고 빛의 속도로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어이~ 민지율~" 그런 내 등뒤에서 익숙한 잡음이 들려왔다. 뭔가해서 뒤돌아보면 체육복을 입은 정우현이 언제 샀는지 모를 쭈쭈바를 입에 물고 걸어나오고 있었다. 세상에 치사하기도 해라... 자기만 먹다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놈을 노려보면 정우현은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팔을 걸친다. "오늘 우리반이랑 너희반.. 농구내기 붙는거 알아?" 우현이가 6반이었구나... 새삼 깨달은 사실에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데, 정우현이 갑자기 지가 먹던 쭈쭈바를 내 입에 물려버린다. "악.. 퉤퉤!! 지금 뭐하는거야!!" 신종플루가 극성인데 이 새끼가... 지금!! 성질난 오랑우탄마냥 날뛰는 내가 웃긴지 계속 킥킥대는 우현이. "나 뽀뽀하고 싶어 죽겠어요.. 하는 표정이길래." "뭐???" "하마터면 당할뻔했네." 저 새끼가 지금 뭐라는거야.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진짜인 양 하는거야! 머리를 긁적이며 앞서 걸어가는 정우현. 나는 눈 딱감고 뒤통수를 때려줄까 하다 씩씩거리며 녀석에게서 세발짝 이상 떨어져 걸었다. 그런데 녀석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는 바람에, 녀석의 가슴쪽에 머리를 쿵 찧고 말았다. "아야.. 또 왜!" "농구할때.. 정우현 파이팅! 한번만 해주라." "뭐?" 재준이보다 더 초딩같은 마인드를 가지고있는 녀석임이 분명했다. 농구경기에 참가하진 않지만, 따지고 보면 적인 나한테 '정우현 파이팅' 따위를 외쳐달라고 부탁하다니.. 나는 격하게 안된다고 도리질을 했다. 행여나 그런짓을 했다간 난 우리반에서 매장이야. 죽음이라고! "안 그럼 이재준 소식 안들려준다?" 배실거리며 협박을 하는 정우현. 이 가승휘보다 지독한 새끼.. "너 정말 치사...." "치사한거 아니까 '정우현 파이팅.포에버' 해달라고!" 1분도 안되서 포에버가 더 붙어버렸다. 미룰수록 이상한 말이 더 붙을거라는 기분 나쁜 느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꼭 가승휘한테 들리게 말해야 된다, 작게하면 무효야 알았지?" 자기한테 들리게도 아니고 가승휘한테 들리게라니.. 이상한 녀석이었다. 내가 따져묻기도 전에 정우현은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학생들 중 가장 늦게 운동장에 도착했을 땐.. 가승휘와 정우현이 양쪽편으로 갈라져 농구를 시작하고 있었다. Writer. 홍양 12. 각반에 남자 다섯명씩. 우리반은 재준이가 빠진 대신 승휘가 낀 모양이었다. 나는 가장 후미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재준이가 있었다면 '오빠의 멋진 플레이'를 보라며 가장 가운데로 날 끌고 와줬을테지만 오늘은 햇볕도 안드는 스탠드 끝자리도 감지덕지였다. 재준바라기라는 팬클럽은, 벌써 승휘쪽으로 마음을 돌린 것인지 꺅꺅대며 승휘의 이름을 외쳐댔다. 저런 지조도 없는 여자들... 재준이 떠난지 하루라고.. 하루. 괜히 씁쓸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농구골대로 눈을 돌렸을 때 "나이스!! 정우현!!" 정우현이 개똥폼을 다 잡으며 첫골을 넣었다. 그러자 정우현은 나를 향해 눈을 찡끗하며 신호를 보낸다. 설마.. 지금 나한테 정우현 파이팅을 하라는 거야? 겨우 한골 넣어놓고? 나는 신호를 못본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좋은 자리를 다 놔두고 하필이면 내 옆에 풀썩 앉는다. "안녕?" 그냥 돌아가줬으면 좋겠건만, 인사까지 건내길래 나는 어쩔수 없이 안녕이라고 해버렸다. 익숙한 얼굴이 아닌걸로 봐서 6반 아이임이 분명했다. 쫙 째진 눈매며 희어멀건한 피부까지.. 내가 싫어하는 조건을 고루 갖춘 남자. 승휘도 눈이 째지긴 했지만 이런식으로 막 되먹게 찢어지진 않았다. 적당히 섹시하게.. 아..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왜 여기 앉아있어? 너무 습하지 않아?" "응.. 그냥.. 농구 안 좋아해." 재준이가 없는 농구게임이 지루해, 생각나는대로 대답하면 그 아인 내쪽으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난 박동욱이라고 해." "......" "악수 안 받아줄거야?" "아니....... 나는 민지율.." 동욱이라는 아이는 마치 날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했다. 어색한 악수를 끝마치고 땀을 삐질 흘렸다. 그런 내가 웃긴 듯 실실 웃는 동욱이라는 아이. "말 안해줘도 돼.. 니 이름 알고 있어." "......." "오래전부터 지켜봐왔거든." 오마이갓. 나 이럴때 어떻게 해야돼, 재준아? 니말대로 친구를 사귀려면 다정하게 대해야 되는거니? 얜 남잔데? 내가 불편해 한다는 사실을 느낀건지 동욱이는 화제를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돌렸다. 선수인게 분명했다. "오늘 농구내기에서 진팀, 각반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는거래.. 재밌겠지?" "아...." 가승휘가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떠올리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을 뻔했다. 정우현의 재롱은 구미가 당겼지만... "저기.. 나 말이야.. 너.. 맨날 이재준이 옆에 있으니까 말 못했었는데..."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사내자식이 심하게 부끄러움을 타며 말할 듯 말듯 뜸을 들인다. "응?" "지율아.. 오래전부터 나... 너...." "타임!! 민지율 이리와봐!!" 동욱이가 뭔가를 말하려는 사이에 심판역할을 하고 있던 반장녀석이 나를 향해 손짓했다. 나는 설마하고, 손가락으로 나를 쿡 찌르며 '나?' 하고 되물었지만 역시나 날 부른 것이었다. 이씨! 난 또 왜!! 귀찮고 불안했지만 별수 없이 농구코트쪽으로 가자 반장녀석이 가승휘한테 가보랜다. "야! 가승휘! 몇분 했다고 타임이야!" 아무래도 가승휘가 타임을 요청한 듯 했다. 다들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날 왜....." "내 책상위에.. 손목시계 좀 가져와." "응? 내가?" "니가 내 옆에 앉잖아. 가져와." "싫어! 왜 그런걸 나한테 시켜!" "승휘야, 시계 저거 보면 되는데?" 반장놈이 학교 정문에 걸린 커다란 시계를 가리키자 찌릿.. 그쪽을 향해 살벌한 눈빛을 한다. "그냥 잔말말고 가져오라면 가져와." "씨....." 분했지만.. 녀석에 대한 공포증이 아직 덜 극복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발을 쾅쾅 구르며 다시 교실로 올라갔다. 저 자식은 날 만만히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내가 지 몸종이야? 투덜대며 교실안으로 들어가자, 가승휘의 책상 위에는 '나 좀 훔쳐가쇼' 하고 시계가 올려져 있었다. 꽤 비싸보이는데... 괘씸한 마음에, 없다고 뻥을 칠까 생각했지만 워낙 심성이 착한지라 손목시계를 들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가승휘는 나에게 심부름을 시킨 걸 잊은건지 다시 농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울려 노는 건 안하는 줄 알았더니, 그 어느때보다 신이 난 듯 했다. 반면에 정우현은 꽤나 진지한 모습이었다. 별 수 없이 시계를 반장놈에게 맡기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니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박동욱은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쟤는 무슨 복이야.. 재준이 가니까 가승휘까지..." "듣겠다. 조용히 말해." "그런데.. 설마 사귀는거야?" 나를 보며 좋지 않은 시선을 던지는 여자애들. 뭐뭐.. 내가 뭐 어쨌다고. 난 짝꿍으로써 시계만 가져다 줬을 뿐이라고! 따져물을 깡도 없어서, 못들은 척 하고 고개를 수그려버렸다. 그런 내 어깨를 툭툭..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내 이름을 부르는 여자애 두명. 사람들과 말하는 데 공포증이 있는 나는 조심스럽게 '왜' 냐고 물었다. "저기. 너.. 승휘랑 사겨?" 가시가 가득한 물음이었다. 나는 얼른 아니라고 손사레를 쳤다. "그런데 왜 승휘가 동욱이더러, 지율이 너 내 여자니까 건들지 말라 그랬어?" "응?" 내..여자...? 생전 처음 듣는 이상한 말에 어리둥절 해 있을 찰나, 이쪽으로 농구공이 통통통 튀어왔다. 가승휘는 땀에 젖은 채로 공을 주으러 와서는 "응원 안해줘?" 여자애 둘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놀란 토끼눈을 해서는 응원석으로 돌아갔다. 가승휘가 그런말을 했을거라는 건 상상조차 안되는 나였기에, 그냥 넘기려 했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물론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닐거다. 재준이의 부탁 때문에 아무말이나 했을 확률이 높다. 나는 다시 한번.. 열심히 농구를 하고 있는 가승휘쪽을 쳐다보았다. 물만난 고기마냥 활기차 보이는 모습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저렇게.. 농구공 하나로도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는 녀석인데, 도대체 무엇이 가승휘를 심장도 뛰지 않을 것 같은 냉혈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일까. 나도 모르게 눈이 가승휘만 쫓고 있는 게 느껴졌다. 호기심이라기 보단.. 뛰는 모습이 너무 멋져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야!! 민지율!!"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또 나를 부른다. 귀찮은 마음에 얼른 왼쪽으로 고개를 꺾어보면, 정우현이 자꾸 눈을 찡긋하며 싸인을 준다. 저 자식은 하다 하다.. 응원 구걸까지 하냐.. 6반 여자애들이 다 해주드만.. 뭐... 나는 큰 결심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쳤다. "가승휘 화이팅! 포에버!!!" 내 응원소리가 커서 놀란 모양인지, 가승휘는 상대편에게 공을 뺏긴 채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정우현은 작게 욕을 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뻥쟁이." 나에게 입모양으로 뻥쟁이라고 하더니, 화난 표정으로 농구골대를 향해 뛰어가는 우현이. 그리고 나의 갑작스러운 응원을 받은 가승휘는.. '저건 뭐야.. 시끄럽게' 라고 할거란 내 예상과는 달리 눈이 부시게 웃어줬다. - 결과는 34 대 36. 우리반이 승리했다. 마지막에 승휘녀석이 3점골을 넣는 바람에 역전승 하자, 남자애들은 승휘를 영웅대접 해주고 있었다. 수많은 학생들 사이로.. 물에 젖은 머리를 털고 있는 승휘의 모습이 보이자 괜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털썩.. 옆자리에 앉는 승휘. 땀이 나 씻고온 모양인지 부드러운 비누향기가 진동했다. 앞머리로 가리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마가 참 이쁘네. 힐끗힐끗 녀석을 훔쳐보자, 헛기침을 하며 습관처럼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급 뻘쭘해진 나는.. 녀석에게 안 들릴때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에 양 허리 위에 주먹을 올려놓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마음속으로 되뇌였다. 나는 강철이다.. 강철이다.... 강철이다.. 강철... 무쇠다리..무쇠팔.. "로보캅!!" 그렇게 강철인간이 된 채 눈을 떴을때.. "뭐하냐?" 가승휘가 귀에서 이어폰을 뺀 채로 날 깔보고 있었다. 나는 너무 당황하는 바람에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기도.." "기도 하는 데 손을 그렇게 하고 하냐? 정우현 그 새끼가 또 이상한 소리했지? 이렇게 하면 내 능력이 안 통할거래?" "아닌데.. 정말 기도한건데.." "그런거에 속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속아? 설마 정우현 그 새끼가... 날..? 불길한 느낌에 뚫어져라 가승휘를 쳐다보자, 그 앤 내 머리를 쓰윽쓰윽 만지며 피식 웃었다. "겨우 참고 있는데.. 자꾸 나 꼬시지마라." Writer. 청몽채화 13. 입에 장미 한 송이를 물고 정열적인 탱고 춤을 추는 정우현의 모습은 매우 새로웠다. 그래도, 차라리, 정우현이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엄습했다. 진짜 내 눈 앞에서 가승휘가 저런 짓을 했다면 난 학교 담벼락에 대고 구토를 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 반 여자애들은 정우현의 모습을 보고 꺅꺅대며 핸드폰 동영상을 찍기에 바빴다. 진짜 얼굴만 반반하면 다 좋아하는 건가. 재준이 좋다고 난리칠 땐 언제고, 가승휘 3점 슛을 보며 열광할 때는 언제고. 저 박쥐같은 여자애들의 핸드폰에는 세 남자의 일상생활이 모두 담겨있을 지도 모른다. 하긴, 앞으로 재준이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달을 기다려야겠지만. 힐끔 내 옆에 앉은 가승휘를 쳐다보았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교과서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으나 놈도 정우현의 탱고 춤을 꽤 즐기는 눈치였다. 아니, 탱고 춤을 즐긴다기보다는 정우현의 굴욕을 즐기는 듯 했다. 하지만 우현이는 오히려 그 굴욕을 더 즐기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그는 여자들의 비명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 탄력받는 스타일이었다. 동생의 재롱잔치 보는 기분으로 정우현의 섹시한 (본인이 섹시한 춤이라고 소개하고 시작했다) 춤에 시선을 고정했을 때, 그는 긴 팔을 양 옆으로 쫙 펼치며 마무리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귀여워, 정우현!! 완전 귀여워!! 한 번만 더 보여줘!!” “선배님, 그 장미 저 주시면 안돼요?” “2반에서 공연 한 번만 더 해줘, 응?” 각 반은 물론 후배들까지 다 몰려든 앵콜 공연이었다. 정우현은 매일 하루에 한 반씩 돌며 내기농구에 진 벌칙을 열심히 수행했다. 오늘은 그 마지막, 10일 째 되는 날이었고 정우현은 자기에게 벌칙을 수행하게 한 우리 반에서 처절한 마지막 공연을 선보인 것이었다. “민지율!!!!” 정우현은 다른 여자들의 비명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자리로 다가왔다. 이 미친놈. 저리 가. 니가 내 옆에 있으면 여자애들이 나 욕한단 말이야. 안 그래도 가승휘 때문에 욕 더럽게 처먹고 있으니까 제발 저리가. 내 마음 속의 외침이 무색하게도 정우현은 내 책상 위에 자신이 물고 있던 장미를 내려놓았다. “이거 줄게. 내가 아침에 학교 오다가 직접 산 건데 그거 노리는 애들 되게 많아.” “니 입에 물었던 거 필요 없는데.” “그냥 가져. 경매붙이면 되게 비싼 값 받을 텐데 진짜 팔면 죽는다.” 우현이는 승휘를 약 올리듯이 내 옆에서 계속 알짱대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렇게 잘해주는 거, 고마운 줄 알아. 솔직히 너 완전 배신자잖아. 나 응원하라고 빵도 사주고, 쭈쭈바까지 줬는데 그렇게 홀랑 가승휘 응원하냐?” “쭈쭈바는 니가 먹던 거 물려준 거잖아!!!” 내가 소리치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다. 우현이에게 홀린 여자들은 물론, 가승휘까지 날카로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정우현은 피식 웃었지만 나는 벌게진 얼굴을 푹 숙여버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재준이 옆에 맨날 딸려있는 년이라고 전교에서 왕따 당하다시피 살았는데... 이제는 가승휘랑 정우현까지 홀리는 재수없는 년이 되어버렸다. 초능력 때문인지 빌어먹을 대인공포증은 이미 내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감히 동성 여자친구를 사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재준, 가승휘, 정우현... 모두 초능력자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를 사귀는데 나는 왜 언제나 이 모양인 걸까. “민지율, 로보캅! 그거 해봤어?” 정우현은 능글맞게 웃으며 내게 물었고, 나는 도로 고개를 처들며 그에게 소리쳤다. 물론 다른 애들한테는 들리지 않게 조용히 소리쳤다. 나는 눈치란 게 있는 여자였다. “너 진짜 죽을래? 내가 그거 때문에 얼마나 망신당했는지 알아?” “진짜 했어? 미친 거 아냐?” 좀 모자란 애 보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는 정우현. 그의 모습은 흡사 악마와도 같았다. 정우현은 순간 소리를 죽이며 내 귀에 대고 재빨리 속삭였다. “오늘 우리 집 와라.” “내가 너희 집에 왜 가!!!” “밥 줄게.” “나 밥 굶고 사는 애 아니거든?” “진짜 맛있을 건데.” “니가 해주는 밥 먹고 싶지도 않아.” “김칫국 마시지 마. 언제 내가 해준다고 했어?” 정우현은 나를 민망하게 만드는 능력을 타고난 것이 틀림없다. “우리 집에 밥 존나 잘하는 식모있어. 놀러와라.” 순간, 그 식모가 가승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승휘한테는 비밀. 오늘 학교 끝나고 우리집 와.” “싫어, 안 가.” “이재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은가봐?” “재준이 만났어????” 적당히 치고 빠질 줄 아는 사기꾼처럼 내 자리에서 떠나려는 우현이의 옷깃을 바로 붙잡았다. 재준이가 떠난 후, 처음 듣는 재준이의 소식이다. “니가 전에 내 응원만 해줬어도 그냥 알려 줄랬는데, 빈정 상해서 안되겠어. 오늘 우리 집 놀러오면, 그 때 말해줄게. 이재준 소식.“ “재준이... 잘 지내?”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나 대신 끌려간 재준이는... 지금 평소처럼 행복한 모습으로 잘 웃고 있는 걸까. “KG에서 제일 예쁜 중학생 여자애 어깨에 손 두르고 사진 찍고 있던데.” ........... 이재준 이 망할 새끼. 그 바람기는 사그라들지도 않는 거냐. “더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집에 오면 해 줄게.” 내 귀에 대고 조용하게 속삭이는 정우현. 순간, 거짓말처럼 그의 음색이 감미롭다고 느꼈다. 굳이 그가 재준이 핑계를 대지 않았더라도, 나는 그를 따라나섰을 것이다. * 가승휘는 KG에서 제공해주는 차를 타고 오는 반면에, 나는 정우현의 손을 잡고 순간이동을 사용해서 눈 깜짝할 새에 그들의 집에 도착했다. 나와 함께하는 정우현의 동반 순간이동은 이제 신기할 정도로 잘 통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많이 의지해서인지, 그의 기술이 늘어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정우현은 이런 식으로 나를 집에 데려옴으로써 승휘를 놀라게 해주려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가지고 서로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승휘나 정우현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닭살돋는 생각은 도저히 못하겠다. 그들이 사는 집이라는 곳은 호화로운 오피스텔 건물이었다. 물론 순간이동을 이용해 건물의 꼭대기 층 복도까지 단숨에 왔기 때문에 나는 그 건물이 오피스텔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확인할 수 있었다. 정우현은 초인종 밑에 달린 깔끔한 검은색 판에 자신의 지갑을 가져다댔다. “국가에서 마련해준 집이야. 웬만한 초능력자가 아니면 이렇게 신경써주지 않아. 다른 에스퍼들은 대부분 국가에서 지은 원룸에서 살고 있는데 가승휘랑 난 달라. 직접적으로 국가에서 받은 명령만 이행하기 때문에 특별대우 받고 있지. 물론 학교 다녀야 되는 고등학생이니까 이렇게 신경써준 걸 수도 있고. 이 집은 KG소속 신분증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어.” 정우현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현관문의 손잡이가 깔끔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재준이는.... 어떻게 되는 거야? 재준이도 나중에 돌아오면 여기서 살 수 있어?” 급한 내 물음에 정우현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어떤 능력을 습득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 “국가에서 나와 가승휘를 붙여놓은 이유는,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기 때문이야.” “..........” “순간이동은 다른 사람에게 들키기 쉬운 능력이야. 가승휘는 그런 나를 도와줘. 내 능력을 본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흔적도 없이 지워주지.“ 승휘와 우현이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왜 같이 다니나 궁금했는데, 역시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이재준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능력을 습득한다면, 우리와 같이 살 수 있겠지.” 19년 인생을 통제되지 않는 카운트 능력으로만 살아왔던 재준이. 그런 재준이가, 차원이 다른 힘을 소유하고 있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고작 민지율이란 여자 하나 때문에, 지금 이 대단한 아이들이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 건지. “감독관은 우리랑 같이 안 사니까, 겁내지 말고 마음 놓고 들어와도 괜찮아.” 불독같은 감독관 때문에 내가 겁 먹은 줄 알았는지, 웃으며 내게 손을 내미는 정우현. “초대할게, 우리 집에.” 아직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결국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의 인테리어는 블랙&화이트 톤으로 예상외로 매우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정우현이 내가 사는 곳을 보고 낯설어했던 것이 이해가 된다. 가승휘와 정우현이 살고 있는 곳은 미친듯이 호화스럽고 고급스러웠다. 이들은 오피스텔의 꼭대기 층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내 질문에 정우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KG도 이렇게 호화스러워?” “KG는 현대과학의 결정판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야.” 하긴, 에스퍼들을 다루려면 웬만한 시설로는 어림도 없겠지. 이해가 간다. 왜 대부분의 에스퍼들이 국가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건지. 정우현을 따라 거실 한복판으로 걸어갔을 때, 담배 냄새가 풍겨왔다. 집에까지 냄새가 배어있으니 담배 좀 그만 피라고 정우현에게 소리치려 했으나, 눈앞에 아지랑이처럼 펼쳐지는 담배 연기가 보이는 것 같았다. 잘못본 건가 싶어 소매로 눈을 마구 문지른 뒤 다시 앞을 쳐다보았으나... 짙은 담배 연기가 소파 한가운데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허공에 떠 있는 담배가 붉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악!!!!!!!!!!!!!”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난 이번에 정우현의 순간이동을 봤을 때보다 더 놀랐다. 내 고함소리에 정우현은 다시 나를 돌아보았고, 허공에 떠 있는 담배를 거칠게 집어들어 재떨이에 박아버렸다. “우리더러는 집 안에서 담배피지 말라며, 이 골초야!!!!!” 정우현이 그 한 마디를 내던지자마자.... 아무 것도 없었던 소파 위에 어떤 형체가 스물스물 자리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우 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있는 한 여자가 나타났다. 이건.... 도대체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정우현 말 안 듣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집에 외부인 들이는 건 이해가 안 가는데.” 긴 생머리에 매우 큰 키와, 매우 볼륨있는 몸매를 자랑하고 있는 여자. 소파에 앉아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자의 키와 몸매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그윽한 눈매가 범상치 않은 포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다시 담배 하나를 빼 물었다. “벙쪄있지 말고, 당신 정체부터 불어, 아가씨.” 여자의 차가운 말투에, “내 손님이야!!! 너 진짜 왜 그래!!!” 정우현이 대들지만.... “아가씨, 투명인간 처음봤어?” 맙소사. 이제 살다살다 투명인간까지 내 앞에 나타나다니. “당신 소개가 힘들면 내 소개부터 하지.” “............” “가승휘와 정우현 담당 매니저야.” 가승휘가 말한 적이 있었다. 에스퍼들에게는 감독관과 매니저가 따라붙는다고. “말 더럽게 안 듣는 이 애물단지들하고 같이 살면서 스케줄 관리하는 게 내 임무야.” 여자는 까맣게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을 내게 내밀었다. “스물 다섯 살, 투명인간 도하진이라고 해.” Writer. 청몽채화 14.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170은 너끈히 넘을 것 같은 키. 성인용 만화 속에나 나올 법한 완벽한 콜라병 몸매. 눈꼬리 끝까지 길게 이어져있는 스모키 화장. 도하진이라는 여자는 어떤 여자든 주눅들게 만들만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다 큰 고등학생 남자아이들과 사는데도 자기 몸매의 장점을 최대한 드러낼 생각인지 검은 색의 탱크탑과 핫팬츠만 입은 채였다. 이 여자 앞에 서 있는 나, 민지율은 채 160도 안 되는 키와 유아용 몸매로 그 앞에 대적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너무 쪽팔려서 차마 고개도 못 들어올릴 정도였다. 나는 그녀가 내 앞으로 내민 손을 천천히 잡아 악수를 했고, 어떤 식으로든 나 자신을 소개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제 이름은 민지율이구요, 아, 저 가승휘랑 같은 반이예요." 말하고 보니 뭔가 실수한 것 같았다. 가승휘랑 같은 반이면서 왜 정우현의 손을 잡고 이 집에 놀러온 건지 물어본다면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그 여자가 질문을 내던지기 전에 재빨리 선수쳐서 말을 이었다. "우현이랑은.... 저, 매점에서 빵 사먹다가 알게 되어서... 그러니까 얘 탱고를 보다가.. 농구를 했거든요... 거기서 제가 응원을 했는데 그게...." 초등학교 2학년생이 말을 지어내도 나보다는 변명을 잘했으리라. 여자는 내 말을 듣기도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며 중얼거렸다. "그딴 걸 묻는 게 아니고." "예?" "넌 무슨 능력이 있어서 여기 온 거야?" 예상 외로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눈치가 매우 빠른 여자였다. 정우현이 나에게 집으로 놀러가자는 구라를 치고 몰래 본부로 데려온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믿을 것은 정우현 뿐이었기에, 나는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철렁 내려앉은 내 심정과 대조적으로, 그는 나를 향해 웃고있었다. "이 여자는 괜찮아.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돼." "넌 닥쳐.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낯선 여자애한테 KG 이야기를 뻔뻔스럽게 하는 거 보면 평범한 애는 아닐 것 같아서 물어본 것뿐이야." 정우현의 머리를 빡 소리나게 때리며 말을 잇는 그녀. "평범한 여자애라면 이 곳에 있을 수 없어. 기억을 지워서 밖으로 내보내야 해." 더 이상 내 기억을 조종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지력이 있어요." 이제 잃을 것도 없다는 생각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여자는 내 말을 듣자마자 씨익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야. 용케 KG에 잡히지 않았나봐?" "피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 기관을 알게 된 것도 최근이예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 의견도 묻지 않고 나를 먼저 숨기려 한 건 재준이, 승휘, 우현이였으니까. 이 여자가 우악스럽게 내 목덜미를 휘어잡아 국가기관에 보낼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달리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미친 개 같은 기관이니까." "............" "KG에 잡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 여자의 말투에서도 기관을 향한 증오의 감정이 느껴졌다. 승휘와 우현이가 KG를 대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녀 자신도 투명인간이라는 능력을 지닌 에스퍼이기 때문일까. "날 눈 앞에서 봤으면서도... 잡아가지 않는 거예요?" 의문을 지니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여자는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말투로 내뱉었다. "널 잡아들인다고 해서 내가 얻는 이득이 뭐지?" "............" "그리고 니 능력을 내가 어떻게 확신하지?" "............" "니 능력이 투명인간이나 천리 밖을 보는 천리안이었다면 난 너를 무조건 잡아들였을 거야. 에스퍼들의 매니저는 투명인간이나 천리안의 능력을 가진 에스퍼만을 사용하니까. 널 잘 키워서 내 후임으로 뒀겠지. 난 이 새끼들 돌보는 게 지긋지긋하거든." 그녀는 몸을 굽혀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집어넣었다. "설마 너 가승휘 좋아하니?" "네?" 뜬금없는 질문에 어이가 없어서 한껏 인상을 구기며 되물었다. "널 데려온 게 승휘였으면 난 널 바로 KG로 처넣었을 거야." "....... 왜요?" "나 승휘 좋아하거든. 어린 게 제법 섹시해." 그녀의 대답에 경악해버리고 말았다. 25살이 19살의 고등학생을 탐하고 있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된다. 그것도 같이 사는 주제에. 이건 범죄다. "그래서 말인데." "..........." "나 앞으로 승휘랑 잘 될 수 있을 것 같니?" 머릿속에서 승휘와 그 여자를 붙여놓으려 해 봐도, 승휘가 황급히 자리를 뜨는 영상만이 가득 떠올랐다. 이걸 입 밖으로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기도 전에 나는 대답하고 있었다. 이건 예지력을 가진 자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안돼요. 승휘는 당신을 존경하고 고마워하고 있지만 사랑은 아니예요." 하진언니의 표정에는 그 어떤 미묘한 변화도 떠오르지 않았다. 순간, 그녀의 섹시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엉터리군." ".........." "앞으로 함부로 점은 봐주지 않는 게 좋겠어, 아가씨." ".........." "KG는 지랄맞긴 하지만 에스퍼들 교육은 똑바로 시키고 있지. 소속 에스퍼들에게 실수를 용납하지 않아. 실수는 곧 자유의 박탈이야. KG 표현을 빌자면, 아가씨 초능력은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적인 상태지. 그 예지력이 어디까지 들어맞는지 내가 한 번 두고보겠어." 부끄러운 감정이 내 머리부터 발 끝까지를 휘감고 있었다. 어쩌면 재준이는 이런 감정 때문에 제 발로 KG에 걸어들어 갔는지도 모른다. 에스퍼라면 느끼게 되는 숙명적인 감정은,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는 완벽한 능력의 획득이었다. "어쨌든 흥미로우니까 앞으로도 이 집 출입은 허락해주겠어." "저기, 설마 이재준....에 대해서 알고 계세요?" 한 눈에 봐도 KG에서 부여한 하진언니의 직급은 매우 높아보였다. 어쩌면 우현이가 알고있는 것보다 이 언니가 알고있는 것이 더 많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이재준?" 그녀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아, 그 괴물." "괴물이요?" "니가 걔구나. 괴물이 지켜줘야 한다는 꼬마." 도대체 재준이가 왜 괴물이라고 불리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괴물처럼 생긴 건 절대 아니다. 재준이는 우리 학교의 유일한 얼짱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놈이다. 물론 승휘와 재준이가 전학오면서 그 유일이라는 타이틀은 잃고 말았지만. "괴물은 잘 지내. 귀엽던데, 내 계급을 알면서도 나한테도 밥 먹자고 덤비더라. 내 허리라인이 섹시하대. 어린 게 제법 작업 잘 걸더라, 승휘도 그래야 할 텐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재준 이 구제불능의 개새끼. 여자한테 집적댈 거면 제발 한 명만 건드리라고, 한 명만. 왜 너는 그토록 잔인하다는 기관에 끌려가서도 그 지랄을 하고 있는 거니. "여기저기 다 얽혀있는 거 보니, 너 상당히 재밌는 애다?" 그녀가 내 앞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을 때, 현관문이 열리며 승휘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한 쪽 어깨에 가방을 걸치고 거실로 발을 내딛던 승휘의 피곤한 눈동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내 옆에 있는 정우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우현 이 개새끼..."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잇새로 말을 내뱉던 승휘는 빠르게 우현이에게로 발을 내딛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애를 여기까지 데려와!!!!" 흥분하는 일이 없던 승휘이기에, 나는 놀라서 흠칫 뒤로 물러섰다. 내가 자기 집에 왔다는 사실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걸까. "감독관한테 들키면 어쩔 뻔 했어, 위험하게 만들지 말랬잖아!!!!" 승휘가 우현이의 멱살을 잡아챌 듯이 가깝게 다가왔을 때, 하진언니는 그 사이를 가로막으며 태연한 표정으로 승휘 앞에 섰다. "워워, 그만." "누나....." "애새끼 건드려봤자 좋을 거 없다. 한 번만 더 크게 싸우면 이번 주말 둘 다 독방이야." 항상 겪어오는 일이라는 듯, 하진언니는 자연스럽게 대처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승휘, 왜 이렇게 흥분하지?" 언니는 승휘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겨주고 있었다. 두 명의 행동이 꽤 선정적이라는 생각에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 질투나. 시선 돌리지 마." 그리고, 하진언니는... 승휘의 뺨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뭐하는 짓이냐는 고함소리가 입 밖까지 튀어나올 뻔 했다. 그 여자를 뿌리치지 못하는 승휘의 행동에 화가 날 것 같았다. 아니... 아니... 아니, 내가 왜 화나지? 뭐지? 설마 내가 지금 가승휘를 좋아하는 거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저 놈은 냉혈한에다가 사무적이며 인정머리 없고 무서울 정도로 이성적인 놈이야. 그럼 내가 우현이를 좋아하나? 그것도 아니야, 내가 저렇게 철없고 욱하는 성질이 있는 놈을 좋아할 리 없어. 그래, 나는 갑작스럽게 마주치게 된 이런 상황이 낯선 것뿐이야. 승휘도, 우현이도... 다들 잠시 스쳐지나갈 인연일 뿐이야. 재준이가 다시 돌아오면, 나는 일상적인 생활에 다시 젖어들 수 있을 거야. 심호흡을 하며 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였다. "나 배고파. 식모, 밥 줘." 우현이는 승휘를 어루만지고 있는 하진언니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고, 하진언니는 손으로 승휘를 계속 어루만지면서 긴 다리를 들어 우현이의 배를 차버렸다. 실로 무서운 파워였다. 퍽 하는 소리가 나자마자 우현이는 곧바로 배를 부여잡고 땅바닥을 굴렀다. "악마년!!!!!!!!!!!" 그의 외침에도, 하진언니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우현이 옆에 쭈그려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악마년. 나 진짜 쟤한테 복수할 거야." 평생 복수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나는 우현이에게 한없는 동정심을 품으며 그 사실을 비밀에 붙이기로 작정했다. "누나, 나 만지지 마." 그리고 그 순간, 승휘의 조용한 한 마디. "누나든, 정우현이든." 침묵으로 가득한 공간. 그의 목소리만이 이 곳을 가득 채웠다. "저 애한테 가는 길을 막으면... 나, 더 이상 가만있지 않을 거야." Writer. 청몽채화 15. 검은 색의 가구가 주를 이룬 승휘의 방과 대조적으로, 우현이의 방은 흰 색의 가구로 뒤덮여있었다. 재준이는 파란색을 좋아할 텐데. 지금쯤 어떤 방에서 어떤 표정으로 어떤 짓을 하며 지내고 있는 걸까. 가끔 내 초능력이 텔레파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랬다면... 난 재준이를 잃었다는 느낌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고, 이토록 외로워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현이의 방 안에서 우현이와 나는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아있었고, 승휘는 책상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키가 커서 위압적인 느낌이 한껏 풍겨져 나왔다. 하진언니는 긴 머리를 비녀 하나로 틀어 올리더니 저녁 준비에 들어갔다. 말만 매니저지, 이놈들과 함께 하는 식모와 다를 바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들의 직속상관이었고, 이들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친해지기 힘든 여자인 건 확실하지만 정말 섹시하기는 더럽게 섹시했다.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아직은 비밀에 붙여졌기 때문에 잘 몰라." 우현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말만 앞서고 약속은 안 지킬 줄 알았더니, 재준이에 대한 말을 해주기는 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급성장을 하고있는 것만은 분명해. 벌써 감시가 두 배로 늘어났대. 트레이닝을 혹독하게 받았나봐. 카운트가 아닌 다른 능력을 가졌을 거야." 재준이가 앞에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나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힘겹게 무언가를 이뤄낼 필요는 없다고. 벌써 재준이가 떠난 지 열흘이 지났다. 울지 않고 잘 지내고 있으니 내 걱정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노파심이 들었다. 하긴, 거기서 여자들을 후리고 있는 거 보면 지 즐길 건 다 즐기고 있는 놈이었다. "감시가 늘어나는 게 좋은 의미는 아니야." "..........." "위험한 능력을 습득하고 있다는 거야. 눈에 띄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재준이 고집은 알아줘야 한다. 나처럼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그는 한 번 마음먹은 일은 천지가 뒤바뀐다 해도 이뤄내고야 마는 놈이었다. 그 때, 가만히 우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승휘가 끼어들어 말을 이었다.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했어." 나는 가승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우현이도 그의 말에 놀란 것 같았다. 우현이의 표정에 뭔가 모를 경쟁심이 생겨난 것도 같았다. 그는 무엇을 하든 가승휘보다 한 발 늦는 편이었다. 가승휘를 라이벌로 생각하면서 홀로 경쟁심을 느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번에도 그랬다. 우현이는 예쁜 여중생과 사진찍는 재준이의 모습을 스쳐지나가면서 본 것뿐이었지만, 승휘는 직접 재준이와 대화를 나누고 온 것이다. "어때? 재준이 잘 지내?" 하지만 아직은 나에게 우현이의 심정을 헤아려줄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어쨌든 재준이가 중요했다.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가승휘에게 물었다. "KG 트레이닝 건물 복도에서 만났는데, 뒤에 감독관 네 명을 달고서도 나한테 인사하더라. 웬만한 에스퍼였다면 그것조차 금지였겠지만, 나는 일반 에스퍼들보다 직급이 높아. 감독관들한테 이야기할 시간을 달라고 했어. 그렇게 5분을 얻었고." 사소한 행동 하나를 하더라도 뭐든 보고하고,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이놈들. 이들보다 자유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스럽게 잘 지내냐고 물어봤는데, 다행히 웃으면서 말했어. 웃으면서 말한다고 해서 정말 괜찮은 건 아닐테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좋아보였어. 예쁜 애들도 많고 시설도 좋다고, 곧 사회로 파견나가면 돈도 많이 주는 거 아니냐고." 그래, 재준이는 어디서든 장점을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애가 항상 내 옆에 있어줬기 때문에, 나도 웃을 수 있었을 거야. "눈에 띄지 말라는 경고를 잊은 건 아니지만 민지율 너도 눈에 밟히고, 계속 거기 있다가는 미칠 것 같대. 그래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대. 감독관, 트레이닝 코치. 사회에 나오면 붙게 될 매니저까지. 미칠 만도 하지. 자신이 저지른 모든 행동이 기록되는 곳이고, 잠을 잘 때조차 CCTV가 돌아가는 곳이니까." ".........." "잠을 두 시간밖에 못 잔대. 기본적인 트레이닝 시간을 넘기는 바람에 과도하게 초능력을 사용해서 여러 번 실신해서 쓰러지기도 했고." ".........." "말하지 않으려고 했어. 이재준도 그걸 원하는 것 같았고. 들으면 니가 괜히 괴로워할까봐." 가승휘는 침대 쪽으로 다가와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근데 아무 것도 모르고 혼자 괴로워하는 게 다 보여서 말해주는 거야." "............" "그동안 울지 않았으니까, 상으로 가르쳐준 거야." 내가 애냐, 라고 소리치려고 했으나 목이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에 커다란 돌덩이가 막힌 것처럼 가슴 속이 답답했다. 하지만 울었다가는 더 이상 이런 기회를 얻지 못할 것 같아 속으로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우현이가 내 머리위에 놓인 승휘 손을 거두며 나를 향해 말했다. 승휘는 화가 난 듯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손을 거두어주었다. "이 새끼 말 듣지 말고." ".........." "울고 싶으면 울어." 언제나 다른 말을 해주는 두 사람. 정반대의 방법으로 나에게 위안을 주는 두 사람. "울어, 눈물나는 걸 왜 참아, 참으면 병 돼. 울어."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충고를 던지는 우현이. 그의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마구 흘러나왔다. 어린 아이처럼 목 놓아 울 것 같아서, 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서럽게 바로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인지, 두 사람은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태어나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나에게 있어서, 재준이와의 우정은 이 세상의 전부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 남매처럼, 재준이와 나는 서로를 의지하며 지금껏 살아왔다. "이재준한테 물어봤다. 민지율한테 해줄 말이 있냐고. 전해주겠다고." 울고있는 나를 향해 승휘가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한 번 더 울면 내 기억을 지우겠다고 해서 솔직히 지금 울면서도 많이 무서웠었는데, 다행히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다정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웃더니 이 쪽지를 줬어. 아직 나도 안 펴봤어." 승휘는 지갑 안에 들어있던 하얀 종이 쪽지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승휘를 올려다보면서, 종이 쪽지를 받아들었다. 손바닥에 흥건한 내 땀이 작은 종이쪽지를 녹여버릴것만 같았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종이쪽지를 펼쳤을 때. 나와, 승휘, 우현이. 모두 종이쪽지를 향해 눈길을 고정했을 때. 하얀 종이 위에 써진 깔끔한 재준이의 글씨체가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나, 하늘을 가졌어.] 수수께끼같은 말. 그리고.... [민지율, 오빠 믿지?] 장난스러운 재준이의 말투 그대로였다. [하늘을 데리고 돌아갈게.] 종이쪽지에는... 단지, 그 세 마디 뿐이었다. 파란 하늘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한데, 재준이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있는 걸까? * "밥 먹어." 재준이가 남긴 수수께끼같은 말을 우리 세 사람이 열심히 해석하고 있을 무렵, 하진언니가 방으로 들어와 소리쳤다. 그녀는 밥주걱에 붙은 밥알을 떼어먹는 추접스러운 행동을 하고있었는데, 재수없게 그 행동마저도 섹시했다. "뭐야, 이건?" 언니는 내 무릎위에 놓인 재준이의 쪽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특유의 표정으로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골 때리네, 괴물새끼." "식모, 너는 알지? 이재준이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 정우현은 언니를 향해 공격하듯 물어보았다. 저런 식으로 물어본다면 나라도 안 가르쳐주겠다. 그러나 하진언니는 우현이의 버릇없는 태도가 이미 익숙한 것 같았다. "난 알지. 내가 모르는 게 어딨어. 난 너희들을 개잡듯이 패는 불독보다도 직급이 높은데." 불독, 그건 필시 승휘와 우현이의 감독관을 뜻하는 단어이리라. 나만 그 사람을 불독 닮았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구나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직급 높은데 왜 내가 감독관한테 맞았을 때 안 도와주냐!!" "니가 맞을 짓 하잖아." 다시 한 번 말한다. 정우현은 하진언니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승휘는 도와줄 거면서." "쟤는 맞을 짓 안하잖아." "쟤가 맞으면?" "당연히 도와줘야지." 우현이가 당하고 있는 불공평함에 같이 눈물이라도 흘려주고 싶었다. "누나, 이재준이 가진 능력이 뭐야?" 그 때, 승휘는 하진언니를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뭐, 본인이 그대로 적어놨구만." 수수께끼같은 말을 보며 그녀는 만족스런 웃음을 흘렸다. "승휘도, 우현이도 긴장타는 게 좋을 거야. 기억조종이나 순간이동 에스퍼는 너희들 말고도 많으니까 언제든 대체 가능한 거 알지?" "뭐야, 그럼 이재준은 아니라는 거야?" "KG의 보물이지. 듣기만 했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인 능력을 터득했으니까." 그래서 하진언니가 재준이를 괴물이라고 부르는 걸까. 하진언니의 투명인간도 전혀 평범하지 않은 능력이다. 그런데.... 투명인간이 인정한 괴물이라. 재준아,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마 괴물이 나오면 너희들과 같이 살게 될 거야, 특별대우 받을 사람이니까." 언니는 내 무릎에 다시 종이쪽지를 내려놓았다. "어쨌든 너희들은 지금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돼. 밥 먹고 승휘는 기관에 잠깐 들러. 범죄자 자백을 얻어낼 일이 있어서 기억을 끄집어내야 된대. 우현이는 한동안 일은 없지만 모레부터 동반 순간이동 트레이닝 다시 들어간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상과도 같을 일. 다른 세계 사람같은데... 나도 이들이 속한 기관이 탐낼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하진언니는 말을 이으며 머리에 꽂았던 비녀를 풀었다. 결 좋은 긴 생머리가 한꺼번에 풀어져내려왔다. "누나...." 승휘는 방을 나가기 위해 뒤돌아있는 하진언니를 불렀다. "왜, 우리 애기?" 먹은 게 없음을 감사했다. 먹은 게 있었으면 모조리 다 게워냈을 지도 모른다. 세상에, 가승휘가 애기라니, 말이나 될 법한 소리냔 말이다. "우리 목숨을 걸고 일을 벌였어. 누나도 눈치챘을 거야." ".........." "숨겨줘도... 괜찮겠어?" 하진언니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 사실 저 아가씨 마음에 안 들긴 하는데..." 나는 오히려 그녀의 당당함과 솔직함이 더 멋있게 느껴졌다. "너희들도 그렇고... 재준이도 앞으로 내 새끼 될 것 같으니까, 숨겨줄게." 역시나 쿨한 그녀. "그러니까 아가씨." 하지만... 역시 대하기 어려운 타입에는 틀림없기에.. 나는 긴장을 한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우현이랑 잘해봐. 승휘는 건들지 말고."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색한 미소를 띈 채로 나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Writer. 홍양 16. 어제 저녁.. 범죄자의 자백을 받아내야 하는 일을 도우라는 명령으로 나간 승휘는 아무래도 밤새 시달린 모양인지 학교 책상 위에 엎어져 하루종일 잠만 잤다. 쉬는시간은 물론, 점심까지도 거르고 잠만자는 승휘가 걱정이 된 나는 톡톡.. 손가락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 미동도 않는다. 민감한 녀석인데 터치를 해도 못 일어나는 것 보니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어, 가승휘 아직도 자냐?" 승휘에게 할말이 있는 모양인지 벌써 세번째 교실을 들리는 정우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나 내 신호를 못본 모양인지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우리쪽으로 다가온다. 그러더니 승휘의 귀에 입을 바짝 갖다댄다. "야 임마! 불났어!" 나는 기겁을 하고 정우현을 떼어냈다. 그러나 우현이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가승휘는 열심히 잠만 잤다. "정말 많이 피곤한가봐. 괴롭히지말고 가." "야, 가승휘! 이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겠냐? 나한테 엄살 떤다고 한번만 더 해봐라. 죽어!" 들을 턱이 없는 승휘의 뒤통수에 대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늘 느끼는 거지만 정우현 이 자식의 머리는 순전히 자기 위주로 돌아간다. 자기 볼일이 우선이고, 자기 감정이 우선이고.. 본성이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게 흠이었다. 그렇게 정우현이라는 인간에 대해 파악하고 있을 찰나, 우현인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묻는다. "내가 가승휘 1초만에 깨워볼까?" "응?" 말릴새도 없이 내 얼굴을 감싸쥔 우현이가 천천히 입술을 내쪽으로 가져온다. 뭐.. 뭐지? 지금 얘가 설마 나한테... 이게 말로만 듣던, 영화에서나 보던.. 키스의 시작단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마땅한 반항을 하지 못했다. 사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몰랐다. 나 처음이란 말이다! 그렇게 정우현의 숨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다가오는 것을 멈춘 정우현이 진지한 목소리로 묻는다. "눈 안감을거야?" "......" "키스할건데." 아.. 정말 키스? 안되는데!! 번뜩 정신을 차린 나는 얼른 정우현을 밀쳐내려 몸에 힘을 주었다. "악." 나와 입술이 닿을락말락할 즈음, 정우현은 '악' 하는 단발마 비명소리와 함께 반대편으로 튕겨져 나가버렸다. 내가 그런것이 아니었다. 난 밀쳐내려 준비동작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우씨, 가승휘 너 죽을래?" 잠에서 깬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가승휘가 정우현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화가 난 듯한 모습에, 거부도 못한 멍청한 나까지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거봐, 1초만에 깬다 그랬지?" "......." "진짜 할 맘은 없었어, 너 깨우려고 그런거야. 아.. 아파라." 이마를 문지르며 일어나는 우현이.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능청스러운 모습이었다. "아 그래도 그렇지..내가 얼굴쪽은 때리지 말랬잖아. 난 얼굴이 생명인데... 지율아, 많이 부었냐?" 아까 그 '팍' 소리가 진정 사람의 이마에서 나는 소리 였단 말인가. 우현이의 반질반질한 이마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마쪽으로 손을 올리려다 가승휘의 눈치가 심상치 않아 올라갔던 손을 주머니에 넣고 '부었어.' 하고 대답했다. 이 어색하고 창피한 상황이 얼른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가승휘는 도로 누워 잠을 잤으면 좋겠고 정우현은 교실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내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정우현은 빤히 내 눈을 쳐다보며 묻는다. "그런데 민지율.. 너 왜 거부 안했냐?" "......." "너도 내가 싫지는 않은 모양이네." 이 순간에도 입만 산 정우현은 쑥쓰러움도 없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 뭐라 반박을 해야했는데 거부 못한것도 맞고, 정우현이 싫지 않은 것도 맞기 때문에 아무말도 하질 못했다. "까불지마." 그런 정우현에게 가승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너 아니라도 머리가 터질것 같으니 날 좀 가만히 둬.. 라는 투였다. "그러게 일어나랬을 때 일어 났어야지." 정우현은 대단한 아이였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가승휘의 저 눈빛만 봐도 고개가 절로 수그려 질텐데 가승휘의 말하는 족족 장난으로 받아 치고 있었으니까. "민지율 너 로션 뭐 쓰냐? 향기 좋다." "........" 그 때 마침 예비 종이 울리고 점심을 먹고 온 아이들이 하나 둘씩 교실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우현은 이마가 아픈지 한쪽 손으로 문질러 가며 교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 쟤 승휘한테 용건 있어서 온 거 아니었나? 왜 그냥 가지? 정우현 저 자식에게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절로 몸이 떨려왔다. 더군다나 가승휘를 나 혼자 어떻게 감당하라고 무책임 하게 돌아가버리는 것일까. 얄미운 자식.. 정말 내 저 자식을... 내가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 사이, 가승휘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어떤 말이라도 해야했다. 나는 얼른 승휘쪽으로 몸을 틀고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하려고 한거 아니다? 거부 하려고 했는데......." "관심없어." 무안하게 내 말을 잘라먹은 가승휘가 차가운 눈으로 날 쳐다봤다. 사람을 얼릴 듯한 눈빛.. 그 눈빛에 압도된 나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따지고 보면 이 상황에서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설사 내가 정우현과 키스를 했다고 해서, 가승휘에게 변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난 어째서... "어제 이재준이 목걸이 어쩌고 하던데.." 가승휘는 아까일은 정말 상관없다는 듯 사무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목걸이 좀 가져다 달래. 어떤건지 알지, 너는?" "응.. 그럼 내가 내일 학교로 가지고......" "같이 가." "응?" "어차피 이재준 자식집이 어딘지도 알아야 되니까." "응..." 그 말을 뒤로 가승휘는 다시 책상에 엎드려 잠만 잤다. 왠지 모를 씁쓸함이 감돌았다. 난 지금까지 무슨 착각을 했던걸까? 나.. 공주병인가? - 가승휘는 귀신처럼, 종례종이 치자마자 눈을 떴다. 그리고.. 정말 같이 재준이의 집을 갈 생각인지 내 속도에 맞춰 가방을 챙긴다. "다 챙겼음 나가자." "어.. 응." 가승휘와 함께하는 하교길은 처음이라 생소하고 낯설었다. 이럴 때 정우현이라도 있어주었으면 좋겠건만 순간이동으로 오피스텔로 곧장 간 모양인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어.. 택시 안타도 되는데.. 금방이야." "바빠서." 택시를 잡아탄 가승휘. 나는 뻘쭘하게 그의 옆에 탔다. 가까운 거리라 5분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가승휘는 나를 뒤돌아보지도 않고 택시에서 내린다. 항상 차가운 모습이긴 했지만 평소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도 차갑게 툭툭 내뱉긴 했지만, 적어도 그 속엔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느껴지곤 했었는데 오늘은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KG의 가승휘같은 느낌이었다. "이 건물이야?" "응.. 저기 옥탑방 보이지?" 가장 윗층을 가리키자 가승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놀란거겠지.. 어떻게 저런데 사람이 살아, 하고.. KG의 호화로움을 맛보고 산 가승휘니까 이런 반응이 당연했다. 내가 앞장을 서며 계단을 오르자 "내려와." "응?" "내가 먼저 올라갈게." 나를 옆으로 밀쳐내고 앞장서는 가승휘. 하... 이제 내가 앞에서 얼쩡거리는 것도 싫다는 건가? 왠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들어 나는 발걸음을 떼지 못한채 그 자리에 서있었다. 사실 아까부터 쌓였던 설움이 하필 이 때 폭발해 버린 것이다. 그러자 한참 계단을 오르던 가승휘가 의아한 표정으로, 멀뚱히 서있는 날 쳐다봤다. "왜 안올라와?" "니가 날 꼴보기 싫어하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말고 얼른 올라와. 바쁘다니까..." "바쁘면 혼자 올라가. 들어가면 바로보이는 책상 두번째 서랍에 있을거야." 나는 가승휘쪽으로 열쇠를 던지고 지하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내가 왜 이러는 건지, 나조차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가승휘는 나에게 성질을 낸 적도 없고.. 평소처럼 무섭게 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대체 뭐가 섭섭한건지.. 복잡한 생각을 애써 지우려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마시려던 순간. 가승휘가 우리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잔뜩 짜증이 난 듯한 얼굴이었다. "너 갑자기 왜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근데 여긴 또 어디냐? 설마 니 집이야?" "응. 알았으면 좀 나가줄래? 재준이집은 옥탑방이거든. 위로 올라가봐." 가승휘는 내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왔다. 집이라고 해봐야 방 하나가 전부라 빙 둘러만 봐도 집 전체를 구경한거나 다름없었다. 승휘는 방범창을 한 손으로 툭툭 건드리더니 물었다. "기지배가 혼자 이런데 살면 안 위험하냐?" "안 위험해." "이제 이재준도 없는데.." 가승휘의 얼굴엔 걱정의 빛이 가득했다. 저러니 내가 착각을 안하냐고.. 괜히 짜증이 솟구쳤다. 저 자식은 왜 한번씩 사탕발린 소리를 해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어 놓는걸까? "아.. 그런데 왜 화난건데?" "화난 거 아니야. 너가 날 보기 싫어하길래 그냥...." "내가 널 언제 보기 싫어해." 가승휘가 물었다. 나는 이걸 얘기할까 말까 망설이다, 핵심을 쏙 빼놓은 채 서운했던 얘기를 늘어놓았다. "방금도 막.. 내가 앞에 가니까 니가 못가게 했잖아." "그건 니 치마 때문이고. 여자 치맛속 보는데는 흥미없거든." "그...그래? 그건 그렇다치자. 그리고 되게 단답형으로 대답했잖아. 계속.." "피곤해서 그랬어. 그건 미안. 됐지?" 가승휘의 타당한 답변에 괜히 나만 속좁은 여자가 되버렸다. 민망함에 나는 승휘의 등을 떠밀며 같이 옥탑방으로 향했다. 그런 나에게 가승휘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아까 그 상황에서 화를 안낸 건.. 정말 화나 나서.." "......" "그 상태로 얘기하면 너한테 상처만 줄 거 아니까 참은거야." 가승휘의 등을 떠밀던 내 두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정우현이나 가승휘.. 둘은 가끔 내 속을 들여다볼 때가 있어서 민망하다.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저런 말을 해주는걸까.. "두번은 못 참으니까 앞으론 정우현 그 자식 눈도 쳐다보지말고.. 말상대도 해주지마." "......." "손 잡으면 발로 까고, 키스할려고 들면 뺨을 쳐." 그말을 끝으로, 성큼성큼 재준이의 옥탑방을 향해 걸어가는 승휘. 다리가 길어선지 나보다 훨씬 먼저 도착했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Writer. 홍양 17. 분명히 여기 있어야 할 목걸이가 보이질 않았다. 안다고 큰소리는 뻥뻥 쳐놨건만 내가 방 이곳저곳을 헤매고만 있자 가승휘의 표정이 조금씩 무섭게 변해갔다. "있기는 한거야?" "응.. 잠깐만.." 늘 있던 자리에 보이질 않자 불안했다. 그 목걸이는 재준이의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일한 물건이었다. 잊어버릴까봐 하고 다니지도 않고 제자리에 뒀었는데.. 어디 갔지? 내가 뒤지고 있는 사이에 가승휘는 성큼성큼 내 쪽으로 들어오더니 "이거 아니야?" 단번에 목걸이를 찾아냈다. 정말 나는 바보인가보다... 눈앞에 두고도 못찾았다는 생각에 민망해 머리를 긁적이자 가승휘는 목걸이를 주머니에 넣은 채 책상위에 놓여져 있는 액자쪽으로 눈을 돌렸다. 재준이와 나의 어릴적 사진이었다. 양갈래 머리를 한손으로 잡은 채 개구지게 웃고 있는 남자아이가 재준이고, 그 앞에서 작은 강아지를 안고 있는 여자아이는 나였다. "으악! 보지마!" "......" '크면서 용됐다'라는 말을 밥 먹듯이 들을 정도로 어렸을 때 난 못난이였다. 키도 또래에 비해 한참을 작은탓에(지금도 그렇지만) 꼬맹이 혹은 꼬마로 불리곤 했었다. 나의 추레한 과거사를 들키기 싫은 마음에 얼른 액자앞을 가로막으며 보지말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승휘는 그런 날 가볍게 밀쳐내고선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렇게 한참동안 사진만 쳐다보고 있던 승휘가 묻는다. "몇살 때지?" "몰라.. 기억 안나. 그만봐." 내 대답에 가승휘는 비스듬히 날 내려다본다. 쫄지 않기로 속으로 다짐했건만.. 기에 눌려버린 나는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했다. "열네살 이후일거야.. 그 전 사진은 없거든." "......." 또 재준이 생각에 젖어드려는 내 머리를 스윽 쓰다듬어주는 승휘. 나의 과거에 대해 알리가 없건만.. 다 안다는 듯이 안쓰럽게 나를 쳐다봤다. 괜히 또 눈치없는 눈물이 나와버릴 것 같아 승휘를 떠밀었다. "이제 가봐.. 바쁘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피하자 가승휘는 가만히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제 그만 뒤돌아서려는데. "어, 니가 여긴 왜있냐? 도하진이 너 열나게 찾던데?" 또다시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나타난 정우현 덕분에 나나 승휘는 당황한채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둘이 되게 친해졌나봐? 같이 집에도 오고..." 당연히 승휘를 찾으러 온건지 알았건만 승휘가 있을 줄은 예상도 못했는듯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아니 지금 황당해야 될 게 누군데... 그건 그렇고 가승휘가 바쁘다고 했던게 도하진, 어제 본 더럽게 섹시한 여자와 할 일이 있나보다. 가승휘는 특유의 무표정과 함께 액자를 엎어 놓으며 말했다. "니가 여긴 왜 와." "볼일이 있어서.. 그럼 넌 여기 왜 있는데?" "......" "내가 민지율 찾아올 거 알고 감시하러 왔냐? 귀신인데?" 정우현이 내 남동생이었다면 난 주저 하지 않고 그의 등을 내리쳤을 것이다. 하는 말마다 사람 약을 올리는 재주가 탁월했다. 어떻게 저런식으로 속을 뒤집을 수가 있는 건지 비법을 알고 싶었다. "악마년이 너랑 민지율 이러고 있는 거 보면 당장 KG 보낸다고 난릴걸?" "......." "얼른 집으로 가보라고." 나는 또 가승휘와 정우현이 말싸움을 시작하겠다라는 생각에, 둘을 떼어놓으며 말했다. "그래, 너 바쁘다면서.. 목걸이도 찾았으니까 이제 그만 가봐." 하지만 나의 깊은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싸-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가승휘. "너 왜 나 보내려고 그러는데." "그야.. 너 바쁘....." "안 바빠." 가승휘는 벌러덩 재준이의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아예 잘 모양인지 이불을 덮어썼다. 그러자 정우현은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나 오늘 쉬기로 했는데 어디 가고 싶은데 없어?" "응?" "가고 싶은데 없냐고.. 어디든 데려가 줄게." 정우현이 거만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러자 가승휘는 이불을 걷어내며 침대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KG.." 나도 모르게 나온 대답이었다. 가승휘와 정우현은 물끄러미 날 쳐다본다. 콩.. 하고 내 머리를 쥐어박는 우현이. 그리고 그런 우현이를 살벌하게 쳐다보던 승휘가 정우현의 팔을 떼어내며 날 부엌쪽으로 밀었다. "쓸데없이 어디 가잔 말을 왜해." 나에게 괜한걸 물어서 이런 사단을 만들어버린 정우현에게 경고하듯 말하더니 다시 날 쳐다본다. 나 역시 예상치 못했던 말이 나와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냥 재준이가 보고싶다.. 보고싶다..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인데 입에 담기에도 무서운 KG에 가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갈까, 그럼? 정말 데려다 줄까?" "......." 정우현이 진지하게 되물었다. 무서운 느낌에 아니라는 대답은 못하고 승휘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나 주먹을 세게 쥔 채 화를 누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정우현은 말을 멈추지 않고, 내 가슴에 비수를 꽂고야 만다. "이재준 보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KG 가고 싶단 말은 하지마." "......." "재수없으려고 그러거든. 너..." "....." "그곳이 어떤지 말로만 들은 니가 하기엔 살짝 건방지네." 처음이었다. 우현이가 승휘보다 무서워지는 건... 내가 큰 말실수를 해버린걸까? "이재준이랑 가승휘는 그렇다 쳐도 난.." "......." "하루에도 수십번 널 KG에 신고하고 싶은 사람이야." "우현아..." "그렇게 할래? 지금까지 우리가 널 위해 해줬던거 다 무시하고 가볼래, 한번?" 친구처럼 내 옆에 있는 줄 알았던 정우현이 그런 생각을 했다니 무섭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 앞에서 지어주던 미소는 다 연기 였던 걸까?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가승휘가 두손으로 내 귀를 막았다. "니가 누리고 있는 자유.. 불공평해." "그만해.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 때였다. 누군가가 쾅쾅 하고 재준이의 집 문을 과격하게 두드린다. 우리 셋은 놀란 눈으로 동시에 문을 쳐다봤다. "누구 올 사람 있어?" 가승휘의 질문에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누구세.....읍.." 내가 누군지 알아보려 문쪽으로 향하자 가승휘는 다짜고짜 내 입을 막고 날 뒤로 숨긴다. 문을 두드리는 것 보면 도둑은 아닐텐데 승휘나 우현이는 지나치게 견제 중이었다. "너야? 정우현.... 너 설마... 정말 신고라도 한거야?" 승휘가 묻자 우현이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팔목을 가리켰다. 그러자 승휘는 낮은 목소리로 밖으로 들리지 않게끔 중얼거렸다. "씨발. 칩박은 새끼가 여길 오면 어쩌자는거야." 설마 감독관이 여기로 찾아온걸까? 목소리를 낸 적도 없건만 두 남자는 용케도 알아차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어리둥절했다. "가승휘! 문 열어!" 그때 마침 감독관의 소름끼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정우현대신에 승휘의 이름을 부르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져 버렸다. "니가 말 안했으면... 나까지 있는 건 어떻게 아는데." "몰라. 씨발 나 신고 안했다니까? 타이밍 한번 좆같네." 하필 자신이 신고 어쩌고를 얘기 했을 때, 감독관이 찾아온 상황.... 정우현은 타이밍이 좆같다는 말과 함께 문을 열려 현관으로 나간다. "잠깐." 그런 정우현을 막은 승휘가 집 이리저리를 둘러보더니 반쯤 열려있는 옷장을 가리킨다. "민지율.. 거기 들어가 있어. 숨소리도 내지마, 알았어?" 너무 겁을 먹는 바람에 이 중 가장 믿음직한 가승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빛의 속도로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한 승휘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더니 문을 열었다. 나는 바늘구멍만한 틈새 사이로 세사람을 지켜봤다. "무슨일 이십니까." 감독관은 승휘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구두를 신은채 방안으로 들어왔다. "뭘 숨기느라 문을 안 열어. 정우현 너 이새끼.. 집에 잠자코 있으라니까 왜 또 나와있어." 잠깐.. 그러면 정우현이 어디있는지 모르고 찾아왔다는 뜻인데... "위치추적해서 오신거 아니에요?" "정우현 너한테 볼일 있어서 온거 아니다." 어쨌든 감독관이 찾아온게 정우현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이렇게 까지 할 놈은 아니라는 걸 믿고 있었기에, 내 믿음을 깨지 않아준 게 새삼 고마웠다. "여기 그 괴물자식 집 아니냐?" KG에서는 모두 다 재준이를 괴물이라고 부르는 가보다. 대체 무슨일을 하고 있길래 그러는거야.... 덜컥 겁이 드는 걸 참고 한손으로 입을 막은채, 승휘의 말대로 숨소리도 나지 않게 했다. "이재준이 필요한게 있대서...." "외부물품은 반입 금지인거 모르나?" "그냥 일반 목걸이입니다." "아무 의미 없는 목걸이를 찾을리가 없지. 분명 사연이 있을텐데 괜히 그놈 감성 건드렸다간 트레이닝 안하겠다고 버틸지도 모르니 없다그래." 예상했었지만.. 저 불독같이 생긴 감독관은 에스퍼들에게 일말의 동정도 없는 듯 했다. 성질 같아선 당신이 뭐길래 이러냐고 따져들고 싶었지만 그저 숨죽이며 저 사람이 나갈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기나 하는건지.. 감독관은 여기서 나갈 생각이 없는 듯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더니 입을 연다. "요새 웬 여자애한테 신경을 써준다는 얘기가 있던데.." "......" "혹시 그 때 그애냐?" "아닙니다." 가승휘는 딱딱한 목소리로 아니라고 말한 후, 정우현을 한번 노려봤다. 그러자 정우현은 미치고 팔짝 뛰겠는 듯 손으로 가슴을 퉁퉁 치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마도 자신이 말한게 아니라는 뜻을 피력하는 듯 했다. "같은 반이라 우연히 몇마디 나눈 게 다 입니다." "민지율.. 민지율... 이름도 그렇고 익숙 하단 말이야." 감독관이 내 이름을 읊으며 가승휘를 쳐다봤다. 역시나 승휘는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리곤.. 당황할만 한 상황이었으나 지나치게 담담하게 되받아쳤다. "그 애 얘기라면, 에스퍼가 아닌게 밝혀졌을 텐데요." "그래. 그게 참 이상하단 말이야. 왜 아니었지?" "........" "너 같은 애가, 지나치게 그 애일엔 간섭한다는 생각이 들어." 감독관은 소름끼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가승휘의 어깨를 쓸어 내리는 손에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있었다. 순간 셋을 훔쳐보고 있는 내 눈과 감독관의 눈이 마주치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얼른 몸을 웅크렸다. 설마.. 못봤겠지? 아주 잠깐이었어... 괜찮아.. 괜찮아. 진정해.. "가승휘." 감독관은 다행히도 날 못 본 모양인지 승휘를 향해 다시한번 말을 이어나간다. "넌.. 우리가 원하는 가장 완벽한 에스퍼야." "......" "한번도 지시를 어긴적도 없고, 동정심도 없지. 그냥 일만해주는 기계.. 우린 사람이 아니라 사람같은 기계 하나를 원하는 거거든. 정우현은 능력은 뛰어나지만 너무 말을 안 들어먹고." 기계...... 냉정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던 감독관이 점점 내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니가 변하기 시작했어." "........" "왜일까?" 악 소리를 내지르기도 전에 감독관이 옷장문을 열더니 내 팔을 낚아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승휘나 우현이가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마치 사냥감을 쫓는 표범처럼.. 이쪽엔 관심없는 듯 하다 확 덮쳐버렸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감독관이 쥔 내 팔이 미칠듯이 아파왔다. "아악!!" 참아냈으나, 이번엔 참을 수 없이 팔목이 아파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런 내 팔을 돌려 감더니 수갑을 채우는 감독관. "얘가 에스퍼가 맞든 아니든.. 데려가야 겠다." Writer. 홍양 18. "아이고, 너 왜 거기 기어들어가 있냐? 우리 스토커 짓 하지 말랬잖아." 우현이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감독관은 수갑을 채운 내 팔을 한번 강하게 당긴다. "악!!" 너무 아파 소리를 지르자, 천천히 다가오던 정우현이 한발 물러나며 작게 욕을 뱉었다. 단두대에 오르는 죄수의 마음이 꼭 나같았을까. 심장이 떨려 내 등뒤에 있는 감독관을 쳐다보기조차 겁났다. 그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채 얼른 이 상황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데려가는 건 좋은데 수갑은 좀 풀어주시죠." 그때 가승휘가 담담한 어투로 감독관을 향해 말한다. 평소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애잖아요. 도망 안칠겁니다. 치더라도 금방 잡힐거구요." 정우현은 승휘의 태도를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가방을 멘 승휘가 먼저 집 밖으로 나서려 했다. 그를 불러세운건 감독관이었다. "연기하지마, 새끼야. 날 속이려 들어?" "연기라... 능력도 없는 애를 데려다 뭘 하실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 "작아서 힘쓰는 일도 못하고.. 밥만 축낼텐데. 식당에라도 쓰려면 데려가고." 밖으로 나가려던 승휘가 우현이와 어깨를 부딪히며 인상을 찌푸린다. "......." 승휘가 우현이의 손에 작은 쪽지를 쥐어줬다. 다행히 감독관은 날 신경쓰느라 보지 못한 듯 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가승휘는 밖으로 쌩- 나가버리고, 정우현만이 남아서 감독관을 향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승휘말대로 수갑은 풀어줍시다. 스토커라도 계속보니까 정들었는데 이런꼴 보니까 안쓰럽네.." "이 새끼들이.." "얘가 도망친다고 그래도 손바닥 안인데 남들 보는 눈도 안좋고.. 그냥 끌고 가죠?" 감독관은 잔뜩 인상을 쓰더니 열쇠로 수갑을 풀고 대신 억센 손길로 내 팔목을 휘어잡았다. 차라리 수갑이 낫다 싶을만큼 아팠다. "허튼생각말고 일단 밖으로 나가." 정우현은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가승휘는 정말 집으로 가버린건지 보이질 않았다. 배신감이 들었다. 지켜줄 것 처럼 말하더니.. 정작 중요한 순간엔 도망치듯 사라진 그 애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게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각오가 되있었다. 더이상 정우현과 가승휘를 곤란한 일에 빠뜨리고 싶진 않았다. 그래.. 미워할 것도 없이 지금까지 지켜주려 애쓴것 만으로도, 그들에게 충분히 빚을 졌다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감독관님.." 그 때 먼저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정우현이 불독감독관을 불렀다. 그러자 불독놈은 반사적으로 내 팔목을 더 세게 휘어잡는다. 걱정시키지 않으려.. 당장이라도 터져나올것 같은 눈물을 겨우 참아냈다. 정우현은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돌아봤다. "얘가 에스퍼가 아니면 어쩌실 생각이세요?" "니가 상관할 거 없어. 수작부리지 말고 얼른 내려가." "묻는말에나 대답해. 아니면 어쩔거냐고." 순간 표정을 굳히며 반말을 하는 우현이. 너무 당황스러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우현이를 쳐다봤다. "이 새끼가 미쳤나. 너 죽고싶어?" "대답안할거 같으니까 다음 질문. 에스퍼이면?" "......" "우리처럼 니들 개로 만들거야? 작으니까 강아지?" "정우현." 감독관이 몸을 부르르 떨며 정우현의 이름을 불렀을 때 정우현은 눈을 낮게 내리깔며 말했다. "너 사실 우리 에스퍼들 두렵지?" "......" "당신. 이론적으로는 세상에 따라올 사람이 없는데, 초능력은 개뿔도 없잖아. 니가 그렇게 동경하는 초능력.. 단한번도 가진적 없는 초능력가진 우리가 부럽지?" "이 새끼가!!!" "다 티나." "정우현!!!" 정우현이 거기까지 말을 내뱉었을 때 흥분한 감독관이 내 팔목을 놓고 정우현에게 달려드려 하는 바람에 나는 중심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으악!!" 이대로 죽는구나.. 나는 눈을 감은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생을 스스로 애도했다. 그러나.. 단 몇초 후 바닥치고는 지나치게 폭신한 느낌에 눈을 떠보니 용케도 정우현이 아래에 깔린 채 나를 받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우현이가 순간이동능력자 라는 걸 새삼 깨달으며 놀라고 말았다. "다쳤어?" "정우현..." 다급한 표정으로 나를 일으키는 우현이. 다짜고짜 손을 잡더니 대문쪽으로 달려나가려 한다. 나는 서둘러 뒤를 돌아 감독관의 위치를 확인했다. 어차피 잡힐거라면 정우현을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다. 모든 걸 나 혼자 감당하자는 생각으로 뒤를 돌아봤을 때.. 내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가승휘!!" 아무래도 감독관을 뒤에서 덮친 모양인지 감독관의 목을 한팔로 휘어잡은 가승휘가 나와 정우현을 번갈아 쳐다봤다. "씨발 뭐하고 있어! 정우현!" "가승휘!! 그러지마!!! 나 KG갈거야!!! 너희 그만해!!" 미칠것만 같았다. 그냥 나 혼자 끌려가면 그만인데, 얘들은 어쩌자고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야! 민지율!" "정우현 그만해!! 더이상 하지마!! 승휘 좀 말려봐!!" "날 봐!" 정우현은 거칠게 내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맞추며 이야기한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어. 오케이?" "너희들....." 정우현은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내 머리를 자신의 가슴쪽에 댄다. 그리고 날 감싸안았다. "딴데다 눈돌리면 안되는거 알지?" 지금 순간이동을 할 작정인가보다. 혼자 남을 가승휘가 걱정도 안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정우현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갖은 애를 썼다. "씨발 얼른 안가냐고!" 등뒤에서 큰소리로 외치는 가승휘... 지금 그 애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미칠것 같다는 느낌에 정우현을 있는 힘껏 떼어내려 하는 순간.. "......." 몸이 붕뜨는 느낌과 함께 순식간에 주변공기가 바뀐 걸 느낄 수 있었다. 설마.. 내가 그 와중에도 순간이동을 한걸까. 혼자 고군분투하는 가승휘를 두고... 난... 두려운 마음에 눈물이 솟구치려는 걸 다시한번 참아낸다. 이러다 울화병이라도 걸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그런 날.. 정우현은 천천히 품에서 떼냈다. "너.. 날 많이 믿는가보네." 혼잣말인듯 중얼거리는 정우현. 나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며 녀석에게 물었다. "지금 너희들 어쩌려고 날 돕는거야?" "지우겠지.." "뭘..." "가승휘가 감독관 기억을 지우겠지." 정우현은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음에도,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예전에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라버렸으니까. '감독관들은 매주 정기적으로 점검을 받아. 초능력으로 인한 변화를 검사하는 시스템이야. 그에게 능력을 썼다가는 100% 적발되기 때문에 함부로 다룰 수 없어.' 언젠가 가승휘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감독관들한테 능력을 썼다 적발되면 어떻게 되는건데?" 내 물음에 정우현은 '어쭈, 그런것도 알아?' 하고 장난스럽게 받아치더니 머리를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위험인물로 분류되겠지." "위험인물로 분류되면..." "두가지 경우야. 몇년간 교육을 다시 받거나 아님... 죽이거나." 정우현의 대답을 듣는 순간 숨이 멎을것만 같았다. 어째서 그렇게 위험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억을 지우면 난 적발되지 않겠지.. 그 사람한테 직접적인 초능력을 사용하진 않았으니까."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가승휘는? 나는 정우현의 뒷말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가승휘는 장담못해." - 그렇게 지옥같은 시간이 조금씩 흘러갔다. 우현이는 승휘에게 호출을 한다며 밖으로 나갔고..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온 기차역에서 나는 애꿎은 신문만 찢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후.. 덥다며 벗어놓은 우현이의 마이를 쳐다보다 주머니 끝에 살짝 튀어나와 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그러고보니 승휘가 나갈때 우현이에게 쥐어준 걸 봤었다. 내용이 궁금했던 나는 살짝 쪽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승휘가 적은 깨알같은 글씨들.. 이 글씨를 알아먹은 게 놀라울 만큼 휘갈겨져 있었다. (나가있을테니까 저 새끼 계단쪽으로 몰고 넌 민지율 데리고 어디든 가. 수갑 꼭 풀어주고.) 가방을 챙기는 척 하면서 이걸 썼다고 생각하니 코끝이 찡했다. 얼마후.. 내쪽으로 달려온 우현이가 기차역 밖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처리했나봐. 집으로 와도 된대." 부끄럽고 미안해서 차마 고개를 들기도 민망했다. 앞으로 펼쳐질 끔찍한 미래를 생각하자 몸서리가 쳐졌다. 나로인해 너무도 많은 걸 걸어버린 두 사람이 고맙다기보단 원망스러웠다. "미안해 하지마." "......" "넌 우리한테 강요하지 않았어. 우리 멋대로 일 벌인거니까 고개 안숙여도 돼." "정우현 나.." "그런데 조금 궁금하네. 가승휘한테 넌 뭔지..." 그래.. 난 뭘까. 지쳐버린 나는 너무도 익숙하게 정우현의 가슴쪽에 얼굴을 묻었다. "손만 잡아도 동반이동은 돼." "아...." 정확한 지적질에 당황한 내가 얼른 머리를 들어올리려 하자 정우현은 숨이 막힐만큼 세게 날 끌어안았다. 그리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켜주고 싶은 여자인건 확실한 거 같다." - 집으로 돌아왔을 땐 가승휘가 식탁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필이면 가승휘의 코앞에 도착하는 바람에.. 꼭 끌어안고 있는 우리둘의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다. 하지만 화낼 기력도 없는지 정우현의 다리를 세게 찬 후, 재준이의 밥그릇에 담배를 비벼껐다. 이제부터 밥먹을 때 담배맛 나겠네... 평소 같으면 한소리 했을텐데... 오늘은 너무 미안해 싫은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아우씨! 동반 이동 하다 떨어질까봐 그랬다!" "거짓말하지마, 개새끼야. 안는다고 안 떨어지냐?" 큰 폭풍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티격태격 다투는 우현이와 승휘. 그리고 어느새 그 가운데에 서있는 나. 이 익숙한 풍경속에서도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건..불길한 미래를 예감했기 때문일까? 맘처럼 예지는 되지 않았지만 미래가 좋지않으리라는 걸 예감할 수는 있었다. "민지율.. 아무것도 안보여?" 그때 정우현이 냉장고를 뒤지다 말고 내쪽을 향해 물었다. 그래.. 아무것도 안보여.. 차마 대답은 하지 못하고 가승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까 그 불독같은 놈이랑 싸우다 다친 모양인지 입가에 빨간 딱지가 져 있었다. "악마년이 계속 호출이네. 씨발.." 정우현은 욕을 하며 휴대전화 비스무리한거에 얼굴을 가져다 댄다. "왜." "너희 지금 어디야?" "어딘지 알면?" "이 새끼가! 넌 어디가서 뒈져도 안 궁금하니까 너말고 우리승휘바꿔!" 카랑카랑한 도하진의 목소리가 내쪽까지 들려왔다. 가승휘는 없다고 하라고 싸인을 보냈지만 정우현은 기어코 가승휘를 향해 호출기를 던진 뒤 서랍장에 있던 초콜렛을 까먹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은 승휘는 여전히 내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호출을 받았다. "우리 승휘, 어디야?" "누나.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오.. 무섭게 왜 이러실까. 왜 뭔데?" "누나가 민지율 보고했어요?" 예상치 못한 발언에 나와 정우현이 동시에 가승휘를 쳐다봤다. "아니." 다행히도 대답은 '아니' 였다. 그러자 가승휘는 '진짜이길 바래요.' 하고 호출기를 껐다. 잠자코 초콜렛을 까먹고 있던 정우현이 말했다. "그런 사람 아닌거 알잖아." "세상에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고 아닌건 없어." 도하진이라는 여자를 더 믿고 따르는 건 가승휘처럼 보였는데.. 그마저도 연기였나보다. 오히려 앙숙처럼 보였던 정우현이 그 여자를 감싸돌고 있었다. "그래도 도하진은 아니야." "그럼 너고." "뭐라고? 내가 그랬음, 어? 민지율 데리고 도망쳐 줬겠냐?" 흥분하는 정우현과 달리 가승휘는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들의 싸움은 대부분 이런식이었다. "너에대한 기억은 모조리 다 지웠으니까, 앞으론 귀찮게 굴일 없을거야." "......" "감독관들 검사하려면 일주일 정도 남았으니까 그동안은 걸릴일 없어. 그러니까 걱정하지마." 바보야. 그럼 일주일동안 나는 숨도 제대로 못쉰 채 니 걱정만 해야 되잖아. 그리고 일주일후엔...? 왜 일주일 후는 말해주지 않는건데... "나 가볼게." 가승휘는 오늘 스케쥴 없다며 가기 싫다는 정우현을 억지로 잡아끌고 집밖으로 나갔다. 순간이동으로 집에 가겠다는 정우현을 멀쩡한 다리 놔두고 뭐하는 거냐며 우격다짐으로 걸어가게 하는 가승휘. 승휘는 아직 정우현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반이동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옥상에서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동안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조용한 동네에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그들의 목소리. 언제쯤 사이좋은 둘의 모습을 보게될까... 볼 수나 있을까... 그렇게 10분.. 그들이 사라진지 한참이 지난 후에도 난 바로 집으로 가지 못하고 옥탑방안으로 향했다. "........" 정우현이 어지럽힌 부엌이라도 정리하려 재준이의 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검은 형체가 순식간에 덮치더니 내 두팔을 휘어잡았다. 찰칵.. 하고 무엇인가가 잠김과 동시에 아까와 비슷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수갑.... 수갑이었다. "민지율...." "......." "잠깐 조사 좀 받아야겠다. 얌전히 따라와." Writer. 청몽채화 19. 형사드라마에서 가끔 보던 취조실과도 같은 곳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일반 경찰서의 취조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넓다는 점이랄까. 천장에는 갓을 씌운 노란 알의 전구가 은은한 빛을 내며 매달려 있었다. 잿빛의 벽이 전구가 반사하는 빛을 받아 주홍색으로 변해있었다. 이제는 낯익게 느껴지는 불독을 닮은 감독관이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은은한 전구빛이 그의 얼굴을 징그럽게 비추고 있었다. 오한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살짝 몸을 움츠렸다. 한 쪽 벽은 반투명 유리로 도배되어 있었는데 저 너머에서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다짜고짜 내 손에 수갑을 채우고 이곳으로 날 끌고 온 감독관은 막무가내로 나를 차 안에 태우더니 바로 안대를 씌웠다. 그리고 이 취조실 안에 나를 집어넣고 나서야 안대와 수갑을 풀어주었다. 내가 끌려온 곳이 어딘지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한 전략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게도 감이란 것이 있다. 승휘와 우현이에게 익히 들었던 것처럼 이곳은 KG의 본부일 것이다. "궁금한 눈이군." 승휘는 분명 감독관의 기억을 지웠다. 기관 내에서도 직급이 높은 승휘의 능력이 통하지 않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감독관이 그새 초능력으로 인한 변화를 검사했을 리는 없을 테고. 그 검사로 인해 기억이 지워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해도, 지워진 기억이 민지율에 대한 것이었다는 점을 바로 깨닫게 될 리는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금방 감독관이 나를 이곳으로 끌고 올 수 있었던 걸까. "특별히 너에게만 들려주지. 혼자 듣긴 아까워서 말야." 감독관은 내 눈 앞에 얇은 펜처럼 생긴 길쭉한 무언가를 내밀었다. 두툼한 그의 입술이 야비하게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감독관의 손이 길쭉한 물체에 붙어있는 빨간 버튼을 눌렀다. [- 씨발 뭐하고 있어! 정우현!] 녹음기였다. 빨간 버튼을 누르자마자 아까 승휘가 내뱉었던 외침이 그대로 재생되었다. "가승휘 새끼가 제법 똑똑한 척은 하는 데 말이야." "............." "가끔 허술하게 굴 때가 있지. 가승휘 감독관에게 녹음기는 필순데 말이야." 보지는 않았어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내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아마 지금 내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있으리라. 기억을 지워진 상태에서 감독관은 녹음기를 통해 내용을 듣고 나를 다시 잡으러 온 것이다. [- 내 눈을 똑바로 봐요. 오늘의 당신 기억을 없앨 거야.] 녹음기는 그대로 재생되고 있었다. 아마 승휘가 저런 말을 한 순간, 나는 우현이와 동반 순간이동으로 사라졌겠지. [- 제발 지율이는 건들지 말아요.] 내가 없어진 후에 승휘가 감독관을 향해 건넨 말들. [- 그 애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니까.] 승휘의 목소리가 예상 외로 너무 애절해서 깜짝 놀랐다. 그가 나를 살아가는 이유라고까지 표현할 줄은 몰랐다. 승휘는 왜 이렇게까지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걸까. 나조차도 궁금했다. 승휘의 목소리를 듣고 멍해져 있는 내 표정을 보더니, 감독관은 녹음기를 껐다. "가승휘가 너라는 여자한테 목을 맨다. 이것만으로도 너는 조사할 가치가 있는 년이지." 감독관은 내 턱을 들어올렸다. "솔직히 불어, 너 가승휘 새끼랑 사귀냐?" ".......... 비열해......." 엄연히 한 나라의 국가기관이라는 곳이 마구잡이로 행하는 인권침해에 역겨움이 몰려왔다. "그럼, 정우현이야? 그 새끼랑 붙어먹는 거야?" "비열하고... 야비해...." 감독관에 대한 경멸과 불신을 눈에 한가득 담고 비난을 퍼부은 순간, 그의 딱딱한 손이 내 뺨을 거칠게 내려쳤다. "까불지마, 개년아!! 상황파악은 하고 덤벼야 될 거 아냐, 진짜 이게 미쳤나!!! 지금 너를 도와줄 사람이 있는 줄 알아?"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픈 것보다 서러움이 밀려와서 눈물이 고였다. 돌아간 고개를 제대로 돌릴 힘조차 사라져서 옅은 숨만을 몰아쉬고 있었다. 감독관은 내 머리채를 붙잡아 자기 얼굴 쪽으로 들이밀었다. 우현이가 KG이야기에 치를 떨었던 이유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인간을 개처럼 취급하는 이곳의 분위기는 잔인할 정도로 냉정했다. "잘 생각하고 말해. 지금 너 때문에 가승휘는 지하실로 끌려갔어." 감독관들에게 능력을 썼다가 적발되는 경우에는 죽을 수도 있다고 들었다. 나 하나 때문에, 승휘는 이미 죽음의 위기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증거가 불충분해서 정우현은 아직 못 처넣었다. 자기보다 계급 높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다고 우기면 방법이 없지. 불복종도 곧 죽음이니까." "............." "........ 가승휘 새끼, 고문받다 죽을 지도 몰라. 빨리 불어, 너희들 무슨 사이야?" "..... 아무 사이도 아니예요......" "이게 진짜!!!!!" 감독관이 다시 내 뺨을 향해 솥뚜껑같은 손을 치켜들었다. 어떻게든 견뎌내기 위해 눈을 힘껏 감았을 때, 천장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됐어, 끌려온 첫날이예요. 사람 잡지 맙시다. 진정하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목소리. "가승휘 말고 다른 메모리컨트롤 에스퍼를 데려와야 합니다!! 기억을 끄집어내야 해요!!" 감독관은 반투명한 유리에 대고 소리쳤다. 내 예상대로 거기에서 다른 사람들이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 바로 파견될 수 있는 메모리 컨트롤 에스퍼가 없어요. 잠깐.... 저 목소리는.... 저 목소리는.... - 민지율 호송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 애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주세요. 저와 교대하죠. "하진언니!!!!!!!!!!" 내가 급히 소리치자, 스피커의 말소리가 잠시 끊겼다. 딱딱 끊어 말하는 멋있는 말투. 분명히 들은 적이 있다. 저건 하진언니의 목소리다. 스피커 너머의 사람은 깊은 한숨을 내쉬는 듯 했다. 그리고 한 마디 내뱉었다. - 이런 데서 만나니 새롭네. 반가워, 민지율. * 취조실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안대가 씌워졌다. 감독관의 거친 손길이 나를 누군가에게 떠넘기자, 차가운 손을 가진 누군가가 내 손에 수갑을 채웠다. 그나마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한 손에만 수갑을 채우는 것을 보니, 다른 한 쪽은 자신의 손에 채워두는 것 같았다. "하진언니 맞죠?" 지금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있는지 보지 못하는 게 원통스러웠다. "그래." "숨겨주겠다고 했잖아요." "숨겨줄 생각이었어. 적어도 승휘와 우현이의 죄는." "당신이 나를 고발했어요?" 그녀는 말없이 나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수갑이 팽팽하게 땡겨졌기 때문에 손목이 금세 부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가는 쪽으로 발을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여자 에스퍼들 기숙사에서 취침하도록 해주지. 내일 아침 일찍부터 다시 너를 조사할거야. 그러니까 마음 놓지마. 카운트 에스퍼와 메모리 컨트롤 에스퍼가 다 붙을 테니까 각오해둬야 할 거야." "말 돌리지 말아요. 당신이 나를 신고했냐고 물었어요."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내가 신고했어." 믿을 사람 없다는 승휘의 말이 다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왜요!!? 그럴거면 숨겨주겠다는 약속을 말아야지!!! 나 때문에 승휘까지 잡혀갔잖아요!! 그 애 죽을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승휘 좋아한다면서요!!!" 악을 쓰며 소리지르는 내 말을 듣더니, 잠시 발걸음을 멈추는 하진언니. "처음에는 숨겨줄 생각이었어. 니가 승휘와 연결이 되어있다는 걸 알기 전엔. 하지만 승휘가 자꾸 너한테 신경을 쓰니까 짜증이 나더라. 질투가 나서 고발했어. 솔직히 초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는 너를 가만둘 수도 없었고. KG로 잡아와서 간단한 조사만 거치게 할 생각이었어, 그렇게 겁이나 주려고 했지. 이런 식으로 승휘가 너를 도와서 끌려가게 만들 줄은 상상도 못했어. 그렇게 무모한 짓 저지르는 새끼가 아니었는데." ".......... 당신은 KG를 욕했지만... 결국은 KG와 똑같아요." 맞을 각오를 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하진언니는 다시 걸음을 움직였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니가 지금 내 얼굴을 본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거야." "............." "승휘가 끌려가고 그 놈을 빼내려고 지랄했어. 피곤한데도 하도 울어서 얼굴이 말이 아냐."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 슬프게 들렸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에스퍼들이 식사 배급받는 식당을 가로질러 갈 거야. 거기가 지름길이거든. 내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와. 안 그러다가는 다른 애들한테 치일 테니까." 하진언니는 그 말만을 내뱉은 채 다른 말없이 무작정 걷기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학교의 급식시간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밥을 먹으면서 떠드는 건 어디서나 똑같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에스퍼들이라고 해도, 평범한 사람처럼 취급받을 권리가 있었다. 개같이 사육되는 대상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식당으로 추정되는 따뜻한 건물 안을 지나 그로부터 200미터 가량 떨어진 다른 건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어떤 방으로 들어가서야 하진언니는 내 안대를 벗기고 수갑을 풀어주었다. 그녀가 미리 말했던 것처럼 하진언니의 눈은 퉁퉁 부어올라있었다. 승휘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게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여자 에스퍼들이 쓰는 기숙사 방은 1인실이야. 화장실, 냉장고, 텔레비전, 테라스까지. 모두 구비되어 있으니까 불편한 점은 없을 거야." 하진언니가 몇 가지 사항을 말해주던 그 순간, 요란한 휴대폰 소리가 울렸다. 내 핸드폰은 이미 감독관에게 압수된 상태였다. 하진언니는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도하진 매니저 전화 받았습니다." 점점 일그러지는 언니의 얼굴. 어떤 전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보고가 길어지고 있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언니가 휴대폰의 플립을 닫자마자, 나는 재빨리 물었다. "뭐예요, 승휘한테 무슨 일 있는 거예요??" ".......... 씨발, 이재준이 식당에서 널 봤나봐." 재준이.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 곳은 KG가 확실했다. 식당에 있는 재준이, 여자 기숙사에 있는 나, 지하실에 갇혀있을 승휘. 우현이는... 지금 어디있는 걸까. "감독관 총을 빼앗아 들고 자살하겠다고 지랄하고 있대." "......... 재준이가요????" 놀란 눈으로 하진언니를 붙들고 물었다. "널 지긋지긋한 스토커라고 표현했대. 니가 눈 앞에서 사라지기 전까지는 트레이닝을 거부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는 모양이야. 도대체 넌 뭔 복을 타고났길래 그 지독한 새끼들이 널 지키겠다고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거지?" ".............." "......... 편히 쉬어, 재준이 새끼 처리하러 난 빨리 가봐야해." 하진언니는 재빨리 말을 내뱉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밖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고리를 몇 번 돌려봤지만 안에서는 문이 열리지 않는 것 같았다. 뭐야, 이거. 밖에서 열어주기 전까지는 나갈 수도 없는 거야? 감옥이 따로없잖아. 머리가 복잡했다. 승휘는 나 때문에 지하실에 처박혀있고, 재준이는 나 때문에 자살소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도 진심이 아니라 연기라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망연자실해서 방 한 구석에 놓인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그 순간이었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방안에 정우현이 나타났다. "아, 빌어먹을!! 착지 못해서 넘어졌어. 이래서 급하게 능력 쓰면 안된다니까." 욕지거리와 함께 바람처럼 나타난 우현이. ".......... 너........." "니 덕분에 여자기숙사도 와본다. 남자는 거의 2인실인데 존나 차별이네." ".......... 정우현....." "아침엔 가승휘랑 짰는데, 이번엔 이재준이랑 짰어. 이재준이 안 도와주면 죽인대서. 자기가 자살소동 부리면서 도하진 잡고 있을 테니까 그 전에 해결해달래." "..........안 돼... 너까지 위험하게 만들 순 없어."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런 내 반응과 대조적으로 정우현은 피식 웃었다. "위험하겠지. 가승휘 새끼랑 짠 건 명령 들었다고 구라까면 되는데 이번 건 아니거든. 이재준 그 새끼 계급은 나랑 똑같으니까 이번엔 이재준 무죄 만들고 내가 다 덮어써야돼." 무서운 말을 너무도 쉽게 하는 그. "가승휘 그 새끼 고문실에 혼자 있는 거보다 나랑 같이 있는 게 재밌을걸?" "정우현!!!!" "내 손 잡아." 장난끼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손을 내미는 우현이.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때려죽여도 저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우현이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 순간, 내 방에 있던 빨간 경보장치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 "여자 기숙사에 남자 들어왔다고 저 경보장치 지랄하잖아. 들키기 전에 빨리 이리와." ".........우현아........." 내가 망설이고만 있자 그는 내 가까이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아챘다. 덜덜 떨면서 눈을 감고있었을 때, 경보장치의 삐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나는 재준이의 옥탑방에 있었다. "정우현!!! 너 위험한 거 몰라?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방바닥에 대자로 뻗은 우현이를 보며 소리쳤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소리내어 웃었다. "숨겨줄 데가 없어서 이런 데로 피신올 수밖에 없다. 그래도 걱정마. 나까지 잡혀가고 나면 악마년도 정신 좀 차릴거야. 섣불리 다시 너 건드리지는 않을걸. 감독관도 나랑 가승휘 같이 고문하려면 너 잡으러 갈 시간도 없이 바쁠 거다. 거기다 너 다시오면 이재준이 트레이닝 안 받고 죽겠다고 또 지랄할 거고." "너 미쳤어? 너 정말 왜 그래, 나 따위가 뭐라고!!!!" "위치추적 칩 다시 작동하기 전에, 나 자수하러 가볼게." "정우현!!!!!!!!" 나는 그의 팔을 급히 붙들었다. 우현이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내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병신 지랄한다고 해도 좋은데." "............." "점점 니가 예뻐보인다." 그리고, 사라졌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는 나를 옥탑방에 남기고 사라졌다. Writer. 청몽채화 20. ※ 작가시점 "이렇게 쌍으로 미친짓 해댈거야? 개또라이들, 내가 정말 너희 가만 놔두나 봐라!!!" 감독관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려오자 승휘는 고개를 하늘로 쳐들며 힘겨운 숨을 토해냈다. 하긴, 하늘을 보고 싶어서 눈을 돌려봤자 보이는 건 숨 막히는 지하실 내에서 뿌옇게 올라오는 먼지뿐이었다. 힘겹고 아프던 시절, 자유를 박탈당해도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만족했던 때가 있었다. 하늘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간절하게 원했던 지율의 얼굴이 언제나 떠올랐으니까. 하지만 KG의 지하실은 무겁고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차 있는 고문실이었다. 하늘은커녕 천장에 붙어있는 거미줄과 찌든 때가 역겨울 만큼 사람을 진저리나게 만들었다. 승휘는 이번엔 또 얼만큼 맞아야 감독관의 기분을 흡족하게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흐려진 눈의 초점을 선명하게 맞추기 위해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하루 만에 급속히 망가져버린 몸의 상태는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엔 민지율의 걱정만이 가득했다. 초능력으로 인한 감독관 몸 상태의 변화는 일주일에 한 번씩 체크한다. 걸릴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들통나게 된 것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하루만에 끌려온 이 상황에서, 지율이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허름한 나무의자에 묶여있는 승휘 앞으로 감독관의 짧고 굵은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화가 단단히 난 듯 씩씩대던 그는 승휘 밑으로 어떤 물체를 내던졌다. 그 물체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더러운 바닥과 부딪히는 동시에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물체가 아니라 사람인 모양이었다. 승휘는 눈을 찌푸리며 그가 누군지 파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둠에 익숙해진 승휘의 눈은 생각보다 쉽게 그가 누군지 식별해낼 수 있었다. ".........정.....우현.....?" 승휘의 말에 그 사람은 땅바닥에 대고 입가에 고여있던 침을 내뱉었다. "씨발... 하도 쳐맞았더니 입에서 자꾸 피 맛이 나. 비릿해서 기분 존나 더러워." "니가 여기 왜....." 멀쩡히 밖에서 활개치고 다닐 거라 생각했던 우현의 모습을 확인하자 또 다시 불안감이 엄습했다. 비상시의 상황에서는 우현이 어떻게든 지율을 지켜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현까지 고문실로 끌려왔다는 것은, 지율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와 똑같았다. 승휘는 가까스로 분노를 누르고 감독관을 향해 의문이 가득 담긴 시선을 던지며 소리쳤다. "이 새낀 잘못 없습니다!! 그 때 일은 모두 제가 시킨 일입니다. 명령 불복종은..." "두 번째로 민지율 빼내라는 지시도 니가 내렸나?" 소름끼치는 감독관의 목소리에 승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민지율 잡아놨더니 이 새끼가 또 빼돌렸어. 니들이 아무리 대단한 에스퍼라도 이번엔 어림도 없다. 단단히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거다. 눈앞에서 죽음을 맛보게 해주지." 의아해하는 승휘 앞에서 우현은 마치 재미있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감독관님 얼굴 보는 게 죽음보다 더 끔찍한 거 알죠?" "이 개새끼가 입만 살아가지고!!" 감독관의 발이 우현의 얼굴을 거세게 차고 지나갔다. 범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우현의 얼굴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또 피가 고인 침을 내뱉을 뿐이었다. "정우현, 니가 언제까지 여기서 까불 수 있나 보자. KG건물 지하에는 모든 초능력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니 순간이동도 여기서는 절대 통하지 않아. 제어프로그램이 작동중이다. 초능력 통제 시스템은 니 생각만큼 허술하지 않아. 씨발새끼, 넌 이제 진짜 끝이야." 감독관은 거친 숨을 몰아 내쉬더니 욕지거리를 중얼거리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혼자 힘으로 혈기왕성한 고등학생 남자 두 명을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듯 보였다. 감독관이 나간 후 육중한 철문이 쇳소리를 내며 단단히 닫혔다. 문이 닫히자마자 우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먼지로 가득한 더러운 바닥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등 뒤에도 승휘와 마찬가지로 은빛 수갑이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로 눕고 싶어도 그 수갑 덕분에 제대로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일부러 엎드린 것 같았다. 감독관에게 맞을 때 반항하지 못했던 것 또한 저 수갑때문이리라. "정신없이 얻어맞았는데 그래도 엎드리니까 존나 편하다." "정우현, 어떻게 된 거야?" "난 얼굴 좆같이 얻어터졌는데 넌 몸이 병신됐네. 4시간마다 감독관이 마구잡이로 패버린다는 소문이 진짜구나. 이제까지 구라인 줄 알았는데. 이제 나도 그 꼴 되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왜 사람을 의자에 묶어놓고 패냐." "정우현!!!!!!!!!!" 승휘의 큰 고함소리에도 우현은 아무 말 없이 숨을 들이쉴 뿐이었다. 잠시의 침묵 후에 우현은 감겨있던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니가 감독관 기억 지운 거 바로 들통난 이유는 녹음기 때문이야." 병신처럼 그런 간단한 수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승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에스퍼가 되어 대단한 능력을 통제하다 보면 오히려 간단한 수를 계산하지 못하게 된다. "녹음기를 들은 감독관이 바로 민지율을 잡아들였나봐. 우리가 자꾸 민지율 도와주니까 그걸 파헤치기 위해서라도 심문이 필요했대. 뭘 물어봤는지는 모르지만 간단한 취조 끝에 민지율을 여자 기숙사로 데려가더라. 식당을 거쳐서 데려갔는데 나도 그 때 봤어. 난 그 때 이재준하고 우연히 식당에서 만나 이야기 중이었고. 도하진이 민지율 끌고 가더라." "씨발, 그 여자 뭔가 수상했어." 승휘의 말이 들리기는 하는건지, 우현은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민지율 뺨이 뻘겋게 부어있더라. 몇 번 맞은 모양이지. 눈에는 안대쓰고 손에는 수갑차고. 낮에 니가 그랬던 것처럼 이재준도 그거 보고 눈이 돌아가던데. 내 귀에 대고 어떻게든 민지율 좀 빼내달래. 안 도와주면 날 죽이겠다고. 병신, 어차피 국가에 걸려도 죽는 건 똑같은데. 지만 살면 된다 이건가. 내가 입 닥치고 있으면 이재준은 살 수 있을 테니까. 24시간 도하진이 민지율 옆에서 감시할 거라고 말해줬더니 그건 자기한테 맡기라대. 그 순간 미친놈이 갑자기 자기 감독관한테 덤벼들더니 총을 훔쳐버리잖아. 그걸 지 머리에 대고 자살하겠다고 지랄을 하는 거지. 방금 전 지 스토커 여자애를 봤다고, 그 여자 있으면 트레이닝 거부하고 죽어버린다고. 그 여자 매니저 빨리 데려오라고 온갖 승질을 다 부리더라. 감독관들이 도하진한테 호출하는 순간 이재준이 나한테 눈짓하길래 생각할 시간도 없이 나도 모르게 여자 기숙사로 순간이동 했어. 집으로 빨리 옮겨놓고 와버리려고 했는데 여자 기숙사 경보장치 때문에 다 걸렸어." 우현은 재미있는 모험담 이야기를 하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쉬운 대로 이재준 옥탑방에 두고 왔는데 당분간은 걱정안해도 될 거야. 감독관은 우리 고문하느라 정신없을 거고, 도하진은 너 빼내느라 정신없을 거고, KG보물인 이재준은 민지율 데려오면 트레이닝 거부하고 자살하겠다고 지랄하고. 데려오고 싶어도 상황 좀 정리된 다음에 데려오려고 할 걸." 어쨌든 지율이 무사하다는 소리에 승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근데 너 오늘 스케줄 없었다면서, KG에는 왜 왔어?" 승휘의 질문에 우현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재수없어도 니가 내 파트넌데 나 혼자 편하게 있겠냐." ".............." "완벽하진 않아도 동반 순간이동 해보려고 했는데 지하 고문실에 초능력 제어 프로그램 작동중인 줄은 몰랐지. 구해주러 왔는데 도리어 내가 잡혔어, 존나 병신처럼." 어린아이처럼 투정하는 우현을 보며 승휘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내 생각해준 것도, 지율이 도와준 것도. 너로선 목숨을 건 선택이었는데. 하루에도 수십 번 지율이 신고하고 싶다고 해서 걱정 많이 했었다." "나도 남자야, 민지율 그 조그만 거 신고하래도 안 해." 우현은 엎드려있던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승휘와 얼굴을 마주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동안 너 약올리려고 민지율 앞에서 얼쩡거렸는데." "............" "이제 진짜 포기 못하게 되어버렸어." "정우현....." "이재준이랑 민지율은 서로 이성적인 감정 없으니까 경계안해도 되는 거 맞지? 나 너만 이기면 되는 거야." "병신." "제대로 한 판 붙어야 되니까." "............" "우리 절대로 이런 데서 죽지 말자." * 3일간 이어진 고문은 승휘와 우현의 몸과 정신을 모두 피폐하게 만들었다. 온 몸이 묶여있는 상태에서 감독관이 휘두르는 각목을 당해낼 힘은 없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초능력을 써 봐도, 오히려 지하실에 걸려있는 제어 프로그램에 튕겨 2배의 부담으로 변해 몸에 되돌아왔다. 4시간에 한 번씩 진행되는 고문은 승휘와 우현이 편히 잘 수 있는 시간도 허락해주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말 한 마디 꺼내기도 힘들 정도의 한계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지하 고문실에 갇힌 지 4일째 되는 아침, 감독관은 평소와 달리 각목이 아닌 종이 쪼가리를 든 채 그들을 방문했다. "이제 둘 다 국가에 복종할 마음이 좀 들었나?" 힘겹게 고개를 들어 감독관을 노려보는 승휘와,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 내뱉는 우현. "죽이려면 그냥 목을 매달지. 진짜 괴롭히는 방법 더럽다." 빈정대는 우현의 대답에도 웬일인지 감독관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의자에 묶여있는 그들의 무릎에 종이 한 장씩을 내밀었다. "계약서다. 싸인만 하면 바로 내보내주겠다. 바로 병원으로 호송해서 상처도 치료해주지.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받던 대우보다도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겠다." "씨발, 또 어떤 데다 써먹으려고...." 승휘는 말없이 종이에 시선을 고정했고, 우현은 계속 불만을 털어놓았다. "국가가 계획하고 있는 워너비 프로젝트다." 평소와 달리 감독관은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재준, 가승휘, 정우현으로 이루어진 팀이 될 거야. 워너비 프로젝트 제 1조다." "이...재준....." 승휘가 재준의 이름을 발음하자 감독관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는 이미 싸인을 했지." "..........." "너희들은 킬러 팀이 될 거야." 감독관의 말에 승휘의 눈이 커졌다. 우현은 재빨리 고개를 쳐들고 소리쳤다. "씨발, 결국 진짜 이런 일에 써먹으려는 거야? 악마!!!!!!! 누가 쉽게 당할 줄 알아????" 감독관은 우현의 발악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싸인을 하면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간단한 이야기만 일단 해주지. 이재준은 너희들이 킬러 일을 하기에 적당한 환경을 만들어줄거다. 밖에서 너희들을 서포트할 거야. 그럼 정우현은 동반 순간이동으로 가승휘와 잠입한다. 가승휘는 총으로 제거대상을 쏘아 죽이고, 그의 기억을 모조리 뽑아오면 돼. 물론 살인을 목격한 자의 기억도 사라지게 만든다. 아니면 기억을 조작해. 목격자의 기억에 박아넣으란 말이야. 그러면 목격자를 살인자로 만들 수도 있어." 아무리 냉정한 승휘라고 해도 담담히 넘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물며, 본래 불의를 참지 못하는 우현은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국가에 해를 입히는 자들이 제거대상이야. 정의를 실현한다고 생각하면 죄책감도 들지 않을 거야. 지금 너희들 손에 피가 흥건하니까 따로 도장도 필요없겠군. 바로 지장만 찍으면 된다. 그러면 바로 풀려날 수 있어. 그동안 해왔던 대로 학교에 다니면서 정우현은 동반 순간이동 마스터하고, 가승휘는 총 다루는 트레이닝으로 들어가면 돼." "이재준이.... 이런 프로젝트에 싸인을 했단 말입니까." 승휘는 입술을 깨물며 감독관에게 물었다. "바로 싸인하더군. 한 마디로 싸인하게 만들었지. 너희도 그렇게 만들 수 있어." 증오의 감정을 한껏 뿜어내는 승휘와 우현의 눈동자가 감독관에게 향했다. "민지율을 가만히 놔두지. 다신 그 애를 건들지 않으마." 치졸하고 얍삽한 거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인을 하지 않겠다면, 너희 생은 여기서 끝이다." 감독관은 허리춤에서 총을 빼들었다. 승휘는 아무 말 없이 우현에게 눈길을 돌렸다. 우현은 씁쓸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끝까지 가보자 이거지. 언젠가 내 팔목 절단하고 당신들에게서 벗어나고 말 거야. 위치추적 칩만 없으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어." "지금 죽으면, 도망도 못 가지." 이죽거리며 웃는 감독관의 얼굴. "지율이... 건들지 않는다고 약속 한 거죠?" 승휘는 감독관을 쏘아보며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묶인 수갑 풀어줘요. 싸인 할 테니까." 감독관은 승리에 감격하는듯한 미소를 지으며 우현을 돌아보았다. "정우현, 너는?" 우현은 고개를 쳐들었다. 감독관을 무시하는 비웃음을 눈에 가득 담아내면서. "...... 내 수갑도 풀어요." ".............." "끝까지 장단 맞춰 병신춤 춰 줄테니까." Writer. 청몽채화 21. 혼자 학교를 다니게 된 지 족히 일주일은 넘은 것 같다. 항상 당해왔던 따돌림은 견딜 수 있었다. 물론 항상 내 옆을 지켜주던 재준이 덕에, 재준이가 사라지고 나서도 내 곁을 맴돌던 승휘와 우현이 덕에, 뭘 하든 혼자 지내본 적은 없었지만. 하지만 요즘은 내가 겪는 외로움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승휘는 이미 KG의 지하실로 끌려가서 고문을 받고 있다고 했다. 우현이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는 두 번이나 나를 돕다가 적발되었다. 우현이는 승휘보다 더 큰 희생을 감수하고 있을 수도 있다. 재준이는 아무 이상 없어야 할 텐데, 그저 자살시도를 벌였을 뿐이니까 감시체제만 강화되었겠지. 우현이가 나를 재준이의 옥탑방으로 데려다준 그 날, 무서워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집 밖으로 한 발자국 내딛기가 무서워서 다음날은 학교도 결석해버렸다. 갑자기 처하게 된 이 상황이 낯설고 공포스러웠다. 세상 그 어디에도, 우리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새벽에라도 갑자기 나타나 나를 잡아갈 거라는 예상과 달리, 나는 일주일간 그나마 겉으로는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유지하고 있었다. 승휘와 우현이가 끌려간 뒤로 더 위험해지기는커녕, 납치의 위험에서 해방되고 있었다. 설마 그 두 사람이 나를 위해 자신들을 더 희생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KG의 위치를 모르니 무작정 찾아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하진언니의 휴대폰 번호를 알고있는 것도 아니고, 승휘와 우현이의 전화기는 맨날 꺼져있었다. 점심시간마다 벌어지는 남자아이들의 농구시합은 재준이, 승휘, 우현이 세 사람의 빈자리를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저기, 승휘랑 우현이 왜 학교에 안 나오는 지 알아?" 같은 반인데도 불구하고, 말 한 마디 해보지 않은 여자아이가 나를 향해 물었다. ".......... 잘 모르겠는데." "왜? 너 친했잖아." 나는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설마 너 때문에 안 나오는 건 아니지?" 직접적인 그녀의 질문에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쏠렸다. "너랑 관련있는 애들마다 없어지잖아. 어떻게 그 세 명만 다 사라질 수 있어? 근데 넌 걱정도 안 되니? 혼자 너무 멀쩡하게 학교 잘 다닌다? 걱정을 안 할 거면, 걔들이 뭐하고 지내는지라도 알아야 되는 거 아냐? 전학을 갔든, 이민을 갔든 니 옆에서 사라지면 넌 그냥 연락도 안해?" 평소 내가 그들 옆에 있다는 점을 불만스럽게 여기던 여자애였다는 건 알고있다. 하지만 놈들이 없어진 지금, 내 앞에서 이렇게 비난을 퍼부을 줄은 몰랐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내 작은 키는 그녀의 목 부근에 닿을 듯 말 듯한 정도였다. "일어나? 왜? 치기라도 하시려고?" 이제 대놓고 빈정대는 그녀를 확 밀치고 교실밖으로 나와버렸다. 교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교실 안에서 울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 정말 미치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니들보다 내가 힘들어, 그 애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빌어먹을 예지능력도 지금은 나에게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고있다구.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가며 교무실로 발을 내딛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교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반쯤 머리가 벗겨진 우리 반의 담임 선생님과 노처녀 히스테리가 심한 6반의 담임 선생님이 서로 나란히 놓여진 책상 양 옆에 앉아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양쪽 선생님을 보면서 이야기하자 두 분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5반 가승휘, 6반 정우현. 일주일간 왜 결석인지 궁금해서요." 워낙 학교에서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던 내가 당돌하게 묻자 선생님들은 조금 놀란 듯 했다. "가승휘? 그 놈 잠시 외국여행 나갔다고 들었는데, 가족여행이라고." 담임선생님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고... "정우현은 아프대. 집에서 연락이 왔었어." 히스테리가 심한 6반의 노처녀 선생님도 어리벙벙한 얼굴로 알려주신다. 말도 안돼. "저기요." ".............." "그 애들 집 좀 가르쳐주세요." 도저히 그냥 보고있을 수만은 없었다. 동반 순간이동으로 놈들의 집에 갔었기 때문에 그 위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일주일이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 다행히 놈들이 거짓 주소를 쓰지는 않은 것 같았다. 승휘와 우현이는 동일한 주소를 사용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꽤 멀리 떨어진 오피스텔 건물로 향했을 때, 이곳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건물을 보자마자 마치 미친 사람처럼 건물 안으로 마구 뛰어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맨 끝 층의 버튼을 눌렀다. 제발, 제발, 벨을 누르면 승휘와 우현이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오게 해주세요. 아니면 하진언니라도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제발, 제발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떨리는 손을 꼭 맞잡은 채 끝 층에서 내렸다. 장소는 이곳이 맞다. 전에 와본 곳과 똑같았다. 초인종 밑에 놓여진 깔끔한 검은 판때기도 여전했다. 그 곳에 자신의 지갑을 올려놓으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우현이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한숨을 한 번 깊게 내쉰 후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길게 울려퍼지는 초인종 소리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와... 문 열어봐요...." 나는 주먹을 쥐고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제발 나와봐요!! 애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혼자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만이라도 알려달라구요, 제발!!! 그냥 다시 날 끌고가요!! 어떤 짓이든 당해줄테니까 제발 애들 풀어주고 날 다시 데려가라구요!!!"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한 마디를 내뱉었을 때, 이삿짐센터의 자켓을 걸친 아저씨들이 상자 여러개를 들고 집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보니 집 앞에서 이삿짐센터 트럭을 본 것도 같았다. 이사치고는 단촐한 느낌의 상자 여러개가 내 눈 앞에 쌓여있었다. "아가씨 뭐예요?" "............" "비켜요, 짐 넣어야 되니까." "여기 누가 이사와요?" 절박한 내 질문에 이삿짐센터 아저씨는 매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 이사오니까 짐을 옮기지, 빨리 비켜요."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나 자신의 무력함을 그보다 뼈저리게 느낀 적은 없었다. * 아침이 밝았으나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제 승휘와 재준이의 오피스텔까지 찾아갔으나 아무 소용이 없자 많이 지친 것 같았다. 하지만 기를 쓰고 눈을 뜬 후, 씻고 바로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젖은 머리를 채 말리지도 못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내 눈을 의심했다. 평소엔 볼 수 없는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있었다. 마치 산간지방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안개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안개 때문에 한 발자국을 걷는데도 신중을 기해야 했다. 학교가는 다른 학생들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다. 특수효과처럼 퍼져있는 안개 길을 헤치고 길을 걷고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런 망할. 안개가 이렇게 끼어있는데 갑자기 웬 비람. 이미 학교까지 거의 다 온 상황이라 집에 다시 돌아가 우산을 가져오기엔 무리가 있었다. 나는 달랑 노트가 하나 들어있는 책가방을 머리 위로 올린 채 뛰기 시작했다. 기상청에서 연구할 가치가 충분히 있을 법한 이상한 날씨였다. 온갖 투정을 다 부리면서 교문 앞에 도착했을 때, 짙은 안개와 비를 피하기 위해 내 눈 앞을 막은 책가방 덕분에, 나는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힌 뒤 쓰러져버렸다. "아, 어떡해... 정말 죄송합니다." 가만히 한 자리에 서 있던 사람과 박은 것은 엄연한 내 잘못이었기에, 나는 일어설 생각도 하지 않고 사과의 말부터 먼저 건넸다. 그 때, 내 머리 위로 빨간색 우산이 드리워졌다. 나와 부딪힌 사람이 내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아.... 감사합니....." 대충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동시에 짙은 회색의 교복을 쭉 훑어올라가며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민지율........." .............. 거짓말........ "내가 우산 갖고 다니랬지." "................." "진짜 징글맞게 말 안 들어먹는 건 알아줘야 된다니까." ...............재준이가 돌아왔다. 마치 꿈결을 걷는 듯 몽환적인 느낌에 나는 재준이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놀란 모양인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 이재준.........." "일어나." 그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의 손을 잡는 즉시 놈이 없어져버릴까봐 무서웠다. "이거 꿈이지?" "꿈 아니야. 일어나." 한참을 망설이다가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재준이 손의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쥐고 일어났다. "약속 지켰지? 한 달 안에 나타났어. 한 20일 걸렸나." ".............." "울진 않아도 더 환영해줄 줄 알았는데 뭐야, 재미없게." 나는 멍하니 재준이의 얼굴만을 올려다보았다. 재준이를 믿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한순간에 다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이재준.... 너 돌아온 거 맞아?" "우리 학교 교복 다시 입은 거 안 보여? 완벽히 돌아왔어."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설마, 어제 승휘와 우현이의 집에 이사온다는 게 재준이였을까. 어제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옮긴다는 짐이... 재준이의 짐? "민지율, 내가 쪽지에 적었던 말 기억나?" 순간, 짙은 안개가 거짓말처럼 거두어지고 언제 내렸냐는 듯 비가 그쳤다. 밝은 햇살이 우리를 다시 비추는 바람에, 재준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다시 만난 기념으로 정식으로 내 소개 다시 해볼까?"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녕, 카운트 겸 날씨조종 에스퍼 이재준이야." ............ 말도 안돼............ "나, 하늘을 데리고 돌아왔어." 재준이는 약속했던 것처럼 한 달 안에 돌아왔다.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하늘을 가지고. Writer. 홍양 22. 거짓말처럼 맑게 개인 하늘.. 포근한 바람.. 그리고 돌아온 재준이. 모든 것이 완벽한 상황에도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건 "우현이랑 승휘는?" 어느새 내 안에 깊게 들어온 두 녀석 때문일거다. 재준이만 돌아오면 모든 게 다 제자리로 돌아올거라 여기고 약속한 한달이 지나가기만을 빌며 하루하루를 버텼는데, 그 녀석들은 언제 돌아올지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주질 않았다. 난 막연히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금방 돌아올거야." 날 위로해서 하는 말이라고 하기엔.. 확신에 가득찬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재준이.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상하게 여기는 내 표정을 읽은건지, 애써 웃어보이며 내 어깨에 팔을 걸친다. "그런데 KG엔 어쩌다 잡혔던거야? 너 끌려가는 거 보고 내가 얼마나 속이 뒤집어졌는지 알아?" KG 소리만 들어도 경기가 날것 같은 나는 살짝 재준이를 째려봤다. 지나간 얘기를 왜 꺼내는 걸까. 안 그래도 마음이 복잡해 죽겠구만. "그렇다고 총들고 자살한다는 쇼까지 하면 어떡해. 혼나면 어떡하려구..." "얌마, 오빠 아무도 못건드려. 혼나긴 누가혼나." "허풍떨지마." 재준이를 떼어내고 앞서 걷자, 녀석은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너 끌려가는 거 보는데 내 머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겠냐?" "......" "볼은 퉁퉁부어있지. 수갑차고 끌려가는데.." 나도 녀석을 위해 그럴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봤다. 지그시 재준이를 쳐다봤다. 그러자 녀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내 팔을 잡아끈다. "우리 뛰어들어가자. 나 운동장 뛰고 싶어 죽는 줄 알았거든!"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한마리 야생마마냥 운동장을 달린다. 보폭을 맞추느라 죽어나는 나는 신경도 안쓰고.. 힘차게 달리는 재준이. 밝은 아침햇살 아래 그애가 웃고 있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정말.. 하늘을 가진 재준이가 돌아왔다. - "너 전학간 거 아니었어?" "갔다가 돌아왔지. 내가 그 학교에서 짱이랑 맞짱을 뜨는데 어디서 한 100명이 몰려와서 나한테 개떼처럼 달려드는거야. 날 못이길 거 같으니까 치사하게 똘마니들을 데리고 나온거지......" 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개뻥을 치고 있는 재준이. 그 이야기의 마지막은 '그 학교를 제패하고 이재준이가 돌아왔다' 였다. 그 말도 안되는 얘기를 귀기울여 듣고 있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재준이의 책상위에 있는 승휘의 물건을 하나하나 내 사물함에 옮겨 담았다. 짐이라고 해봐야, 건드리지도 않은 것 같은 교과서가 다였다. "나 없는 사이에 승휘랑 짝이었다며?" "응...." "어쩜 그럴 수가 있냐. 내가 돌아온댔으면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야지." 어느새 무용담을 다 마치고 돌아온 재준이가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 어째 변한 게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미안미안이라고 하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 나 돌아왔다고 농구게임 한판 하재." 들뜬 목소리로 내 옆에 앉으며 재잘대는 재준이. 농구란 소리를 듣자마자 또 두 녀석이 생각나버려 마음이 아팠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참 많은 일을 함께 했구나.. 이렇게 곳곳에서 나타나니.. 원... "나 얼마나 농구가 하고 싶었는데..."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운동을 좋아해 한시도 가만있질 않는 재준이가 그곳에서 얼마나 갑갑했을까를 생각하니 코끝이 시큰했다. 안타깝게 재준이를 쳐다보는데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재준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건 두번째고.." "........" "제일 첫번째로는.." "응?" "너 활짝 웃는 모습 보고 싶었단 말이야." 그토록 바라던 재준이가 돌아왔는데도 내가 활짝 웃질 않았단 말이야? 재준이를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터질것 같이 기쁜데.. 왜 웃지 못하겠는지 내 자신이 미웠다. 녀석은 애꿎은 종이에 낙서를 해가며 나에게 말했다. "나 없는동안 정우현, 가승휘가 되게 잘해준건 알겠는데.. 너 구해주다 두 사람 위험해 처한것도 알겠는데..." "......" "그 애들한테 너무 마음주지마." 선생님이 들어와 수업을 시작했음에도 재준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KG일 하면서 돈 많이 모은 다음에 너 시집도 내 손으로 보낼거고..집도 내가 사줄거고.. 그러니까 너 남편 될 사람도 내가 고를거야." "......" "난 니가 사랑할 사람이 그냥 평범했으면 좋겠어. 가승휘나 정우현처럼 잘생겨도 안되고, 까칠해도 안돼. 차라리 못생겨서 평생 너하나만 볼 수 있고 내말에도 복종해야 돼." "재준아.. 너 무슨 소릴...." "특히 에스퍼이면 아예 탈락." 재준이가 평생을 함께 갈 친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에대해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리라곤 상상도 못했었기에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알수없는 감정이 들었다. "마음 주지마.. 정우현... 가승휘... 둘중 아무한테도. 알았지?" 나는 재준이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그러자 재준인 한숨과 함께 말을 멈춰버렸다. - 워낙 감정기복이 심한 녀석인줄은 알았지만 저 정도 일줄은 몰랐다. "아싸! 가승휘땜에 우리반이 이겼다고? 정말 3점슛?" "어. 정우현 교실돌면서 벌칙 춤추고! 니가 봤었어야 됐는데.." "푸하하하하하!!! 가승휘 자식 그렇게 안봤는데 되게 맘에 드는데?" 아까의 진지한 모습은 간데없이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호탕한 웃음을 짓고 있다. 반면에, 소심한 나는 아까 재준이가 했던 말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며 체육복을 갈아입었다. "민지율! 이게 미쳤나! 남자들 다 보는데서!" 화장실까지 가기 귀찮아 교실에서 갈아입으려 하자 눈에 불을 켜고 내쪽으로 달려오는 재준이. 결국 화장실에서 체육복을 갈아입고 나오자 재준이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씨발." 내가 나옴과 동시에 복도창문쪽을 내다보더니 작게 욕을 한다. 나한테 하는 소린가 해서 깜짝놀라 뒤로 물러나자 재준인 내 손을 잡고서는 밖으로 나간다. 뛰진 않았지만 급한 발걸음이었다. "재준아 왜그래?" 불길한 느낌에 급히 묻자.. 재준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내 손을 놓는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 "그애 데리고 도망이라도 치려고?" 내 앞에 있는 건.. 보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는 감독관과 전에 본적이 있는 카운트 에스퍼였다. 그는 나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우리.. 초면은 아니지, 귀여운 아가씨?" 어째서 또 내 앞에 나타난 것인지 이번엔 꼼짝없이 예지력을 들키겠다는 생각에 몸이 절로 움츠려 졌다. 그런 내앞을 가로막은 재준이가 감독관을 향해 따지듯 말했다. "약속 잊으셨어요? 이렇게 나오시면 저도 협조 못합니다." "그냥 찝찝해서 확실하게 해두려는거야. 별다른 의미는 없어." 뭔가 미심쩍은 재준이의 말에도 아무것도 묻지도 못한채 힐끔 카운트 에스퍼를 쳐다봤다. 내 모든 걸 들킬 것 같은 두려운 느낌에 재준이에게 기대고 싶었지만 감독관이 우리 사일 의심할까봐 함부로 기댈 수도 없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침을 넘기기조차 힘든 분위기였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선글라스를 낀 카운트에스퍼. 그는 KG의 넉넉한 재정지원을 증명이라도 하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명품으로 휘감고 있었다. "확실해요. 아무리 봐도 에스퍼는 아니에요." "다시한번 살펴보시죠. 아니라면 그 애들이 왜 기를 쓰고....." "아니에요."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감독관은 이번엔 내 옆에 서있는 재준이를 향해 물었다. "넌 뭐 안보여?" "이 녀석한테 물을 필요가 있나요." 대답하려는 재준이의 말을 끊으며 카운트에스퍼가 피식 웃었다. 곧이어 시선을 짐작할 수 없는 기분나쁜 선글라스를 벗고 뱀같은 눈으로 날 노려봤다. "이 세상 둘도 없는 친군데, 감싸주려 들겠죠." 역시 카운터에스퍼답게 나와 재준이의 사이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감독관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재준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약속도 있고하니 이 아이가 에스퍼라고 해서 잡아들이진 않을거야. 솔직히 말해. 나중에 에스퍼인게 밝혀지면 그땐 너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약속...? 수상한 느낌에 머리를 굴리고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 재준이. 그러다 흠칫.. 뭔가에 놀란 듯 동공이 흔들렸다. 그런 재준이의 반응을 용케 알아차린 악마같은 감독관이 물었다. "왜, 뭔가가 있나?" "......." 재준인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뭔가가 혼란스러운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한참을 그 상태로 굳어있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평소 재준이 답지 않은 축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에스퍼 아닙니다." 재준이의 대답에 감독관은 난감한 표정이었고, 카운트 에스퍼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내게서 시선을 거뒀다. 재준이는 그렇다쳐도..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카운트에스퍼의 행동은 좀 이상했다. 어째서 날 보호해주는거지? "아가씨.. 속을 보면 볼수록 매력있네. 이런 느낌은 처음인데.." 실실 웃으며 나를 향해 이야기 하는 카운트 에스퍼. 하지만 감독관의 시선을 느낀건지 사무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사주카페에서 알아주는 점술가라기에 예지력이나 카운트능력을 의심했지만.. 그냥 말그대로 용한 점쟁이인가봐요. 전에 한번 봤을때도 그랬고.. 전혀 아무런 능력도 감지되지 않아요. 전 바빠서 이만 퇴근해도 되겠죠?" 어느새 내가 사주카페에서 일했다는 정보도 입수한 모양이다. 참 무서운 기관이었다. KG는... 감독관은 돌아서려는 카운트에스퍼를 불러세웠다. "아뇨, 아직요." "뭐죠, 또?" "저 아이가 가승휘랑 무슨 관련이 있는건지 알아봐주세요." 느끼하게 생긴 에스퍼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감독관이 저렇게 쩔쩔매며 존댓말을 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가승휘라..." 감독관의 말에 카운트는 다시 한번 나를 쳐다봤다. 그의 눈빛은 너무 날카로워 기분이 나빴다. 내 모든 걸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내려는 게 눈에 보였다. "알게 된건 최근이네요....." "그런거 말고, 저 아이가 가승휘를 좋아합니까?" 감독관의 물음에 카운트에스퍼는 하하 하고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 사람의 마음 속까지는 읽을 수 없다는 거 아실텐데요?" "......." "잘 아시는 분이 그런걸 저한테 물어봤다는 건.. 많이 급하셨나보죠?" 감독관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후... 일반인을 기를 쓰고 숨기려 했다는 게.. 내 참.." "......." "알 수 없는 놈들이야." 그에게는 우현이나 승휘와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한 내가 눈엣가시 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날 KG로 끌고 가면 어쩌나 하는 겁이들었다. 재준이는 살짝 감독관을 노려보며, 나를 향해 눈짓으로 안심하라고 했다. 이젠 내가 옆에 있으니 안심하라고.. "알았어. 이제 그만 가봐. 이제 나타날 일 없을거야." 재준이는 감독관을 향해 90도로 고개를 숙인 뒤 나를 향해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한참을.. 긴장을 하며 걸어가자 멀리 농구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웃으며 뛰어갈거란 예상과 달리 재준이의 표정은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민지율..." "응?"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는데..." 한참 뜸을 들이는 재준이. 설마 다시 가야한다는 건 아니겠지? 불안해진 내가 무슨일이냐고 묻자 재준이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너... 예지력없어." Writer. 홍양 23. "무슨 소리야, 그게..." 재준이가 날 놀리는 말이라고 여기려 했지만 그러기엔 녀석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다. 조금씩 몸이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후.. 지금은 나도 좀 혼란스러운데 감독관 눈 피했으니까 다행으로 여기자." "이재준... 나 놀리지마. 재미없어." "놀리는 거 아니야."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내가 예지력이 없었다면, 10년간이나 함께 있었던 카운트에스퍼인 재준이에게 먼저 보였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와서야 이런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는 건... "잠깐 없어진거 아니야? 예지력이 없었다면 이재준 니가 몰랐을리가 없잖아!" 혼란스러움에 소리를 지르자, 재준이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담배 한까치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평소 같으면 녀석의 뒷통수를 때렸을테지만.. 지금 그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녀석은 하늘을 향해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말했다. "전에 내 능력은 통제가 되질 않았어."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날 그날 니 기분상태나 상황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어. 예지력에 대해선 관심도 없었어. 당연히 있는 건줄 알았으니까.."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재준이는 얕게 미소를 지으며 다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발로 비벼껐다. 그리고 내 이름을 불렀다. "민지율." "재준아 나 이해할 수 없어. 말도 안되잖....." "지금은 혼란스럽겠지만..." "......." "난 다행이라고 생각할래. 널 지키기가 더 쉬워졌으니까." 재준이의 말이 어떤 뜻인지 대충 이해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에스퍼가 아니라면 더이상 KG의 눈에 띌 일은 없었다. 녀석은 걱정거리를 하나 덜었다는 듯한 태도였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난 그런 녀석이 얄미워 소리를 질렀다. "이번만은 단순하게 결론짓지마! 내 인생 전체가 달린 문제야!" 떼쓰듯 소리를 질러봐도, 재준이는 아무런 흔들림 없는 눈을 한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냥 평범하게 살아줘, 지율아.." "........" "넌 에스퍼가 아니야." - 어느새 신나는 표정으로 농구를 하고 있는 재준이. 나는 구석에 혼자 쳐박혀 혼자 생각에 빠져들었다. 재준이나 그 남자의 카운트 능력이 틀렸을리는 없다. 그럼... 내가 예지력이 없는건데.. 어쩜 그렇게 잘 맞출 수가 있었던거지? 혹시.. 나 신이라도 들린걸까? 늘 원망해왔던 능력이었지만 막상 없다고 생각하니 두려웠다. 예지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지금까지 내가 했던 예지는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건지가 궁금했다. 그저 때려맞춘거라고 하기엔 너무 정확했다. 이게 예지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는 걸까? "....."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 시키는데 일가견이 있는 재준이는 해맑은 표정으로 나에게 응원을 강요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난 더 구석으로 들어가 생각에 잠겼다.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다리를 굽히고 앉아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렇게 보고 싶던 재준이의 얼굴조차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았다. "와와와!! 차 죽인다!!" "오- 운동장으로 들어오는데?" 진지한 생각을 하려던 찰나, 스탠드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복잡한 심경도 잊은 채 궁금함에 머리를 쳐들었다. 농구를 하던 아이들도 행동을 멈추고 어딘가를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보니, 웬 삐까뻔쩍한 차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오고 있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 차를 바라봤을때.. 우리의 코앞에서 자동차가 멈췄다. 차유리가 온통 까만색으로 썬팅된 고급외제차였다. 너나 할것 없이 그런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누굴까를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 긴장되는 순간, 반짝반짝 빛나는 차문이 열리고 내린 사람은.. "아, 나 깁스해서 못 뛰는데... 놀리는 것도 아니고 웬 농구?" 정우현이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얼굴은 온통 멍에 상처투성이.. 교복을 입어서 알 수 없지만 온 몸이 저 상태일 거란 생각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게다가 다리에 한 깁스까지 보자 나는 뒤에서 누가 수근거리든 신경쓰지 않고 정우현쪽으로 달려갔다. 그 순간.. "야! 정우현!! 목발 갖고 내려!!" 당장이라도 던져버릴듯한 기세로 목발두개를 정우현쪽으로 내미는 가승휘와 눈이 마주쳤다. 가승휘 역시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가승휘...." 둘다 돌아온것이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 같은 것 때문에 이렇게 엉망인 꼴로 다시 돌아와준 것이다. 가승휘까지 차 안에서 내리자, 멋진 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를 빠져나갔다. "괜찮아?" 일단은 더 심각해보이는 정우현에게 다가가, 몸을 구부려 깁스한 다리를 쳐다봤다. 부러진 건 아니겠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자 정우현은 피식 웃으며 '안녕' 이라고 인사를 했다. "너희 진짜.... 괜찮은거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 KG에 대한 일을 물을 수 없어서, 빙빙 돌려 묻자 정우현은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승휘가 옆에 던져놓은 목발을 집어들었다. "많이 맞은거야? 얼굴 좀 제대로 봐봐..." 내가 정우현의 얼굴을 잡으며 이리저리로 돌려보자 뒤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간혹 욕까지 들려왔지만 꾹 참아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이 무모한 두 녀석이었다. 이 잘난 놈들이 나땜에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게 한스러웠다. "야야야.. 아파. 살살 만져." "많이 아파? 어디? 어디?" "가승휘 봤어? 민지율이 나한테 먼저 달려오는거.." "......." 깜짝놀라 옆을 쳐다보자, 승휘가 살벌한 표정으로 우리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겁나 죽겠건만.. 정우현은 끊임없이 깐죽댔다. "너도 큰일이다, 자꾸 나한테 빠져서.." "무슨 소리야!" "자자, 이제 승휘도 좀 걱정해줘." 정우현은 실실 웃으며 내 등을 승휘쪽으로 떠밀었다. 덕분에 나는 전보다 더 얼음장 같아진 녀석과 마주보게 되었다. 승휘의 눈은 똑바로 나를 향해 있었다. 말없이 나를 혼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내가 먼저 괜찮냐고 물으려는데 가승휘는 성난 표정으로 쌩- 학교안으로 들어가버린다.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보다 뒤를 돌았다. "정우현! 너 진짜!" 얄미운 우현이 자식에게 따지려는데 농구공이 내 앞으로 쌩 지나간다. 정확히 목발 윗부분을 맞추는 바람에, 우현이는 휘청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 아무래도 다리에 무리가 간 모양이었다. 나는 악덕한 농구공의 출처를 알기 위해 서둘러 뒤돌아 봤다. 그곳엔 재준이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와 우현이를 바라보고 있다. "재준아, 너 왜 그래! 아픈애한테!" 내 말을 무시한채 공을 주으려는 모양인지 천천히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이로써 아이들의 모든 시선은 우리 쪽으로 향했다. 그나마 시선을 분산시켜주던 재준이마저 이쪽으로 왔으니 말이다. "같은 방법으로 나온거야?" "......" 아주 작은 목소리로 우현이를 향해 묻는 재준이.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는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아무대답도 않던 정우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가승휘도?" "응." 우현이의 '응'이라는 대답에 재준인 크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향해 웃었다. 억지 웃음이었다. 분명히... 재준이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게 이 순간만큼은 두려웠다. 녀석의 표정만 봐도 얼마나 불안한 상태인지를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 - "여긴 원래 내 자리였다니까! 이 자식이!" "비켜." 이럴 땐 어떻게 해야되는거지? 재준이와 승휘가 내 옆자리를 두고 서로 자신의 자리라며 싸우고 있다. 당연히 재준이 편을 들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상대가 워낙 막강한지라 아무말도 못하고 책에 눈을 고정시켰다. "야, 민지율 니가 대답해봐!" "......" "대답해보라니까!" "어.. 저.. 그게...." 내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재준이는 섭섭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고 가승휘는 여전히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봤다. 아까 일이 아직도 맘에 남아있는 모양이다. 녀석의 잘생긴 얼굴에 밴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KG의 지하실에 끌려가 얼마나 맞은건지 상상이갔다. 가슴이 뻥 뚫린 것 처럼 아파왔다. "야, 민지율! 너 왜 촉촉한 눈으로 가승휘를 쳐다봐?" ".....어.. 내가 언제..." "아.. 알았다. 딸자식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더니!" 재준이는 해괴망측한 소리를 진심인양 하더니, 주번이 가져다 놓은 승휘의 옛날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씩씩대며 계속 내 등을 샤프로 쿡쿡 찔러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승휘는 꿋꿋하게 내 짝꿍을 사수했다. 승휘가 옆에 앉자 괜히 두볼이 화끈거렸다. "고마워..." 고민고민하다가 가승휘를 향해 꺼낸 첫마디는 '고마워'였다. 나같은 걸 지켜주기 위해 무모한 짓을 벌인 가승휘, 정우현, 그리고 우리 재준이까지.. 그들에겐 한없이 감사한 마음 뿐이였다. 더불어 미안한 마음은 두배로 더 든다. "너만 괜찮으면.. 난 괜찮아." 재준이가 들을까봐 신경쓰이는지 가까이 붙어 얘기하는 승휘. 그럴수록 샤프가 더 깊숙히 내 등에 꽂혔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삭히며 승휘를 향해 말했다. "앞으론 이러지마... 나 정말 너희한테......" "계속 이럴거야." "......." "너만 지킬 수 있다면." 순간 전기에라도 감전된 것처럼.. 찌릿하는 느낌이 들었다. 헷갈리는 말은 그만 해줬으면 좋겠건만, 승휘는 말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널 밀어낼 필요도 없어졌으니까.." "....." "이제부터 시작이야." Writer. 홍양 24. 그간의 피로가 한번에 밀려온 탓일까. 깜빡 잠이 들었다. 예비 종소리를 듣고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짝꿍이 승휘였음을 깨닫고 얼른 침을 닦아냈다.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눈곱까지 뗐다. 모든 정리를 끝내고 슬쩍 옆을 쳐다보자 가승휘는 보이질 않았다. "......" 뒤를 쳐다보니 재준이도 어딜 갔는지 자리에 없다. 의아함도 잠시.. 화장실을 원하는 뱃속신호 들리기에 나는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시원하게 일을 마친 후, 무심결에 화장실 옆으로 난 쪽문을 바라봤을 때 나는 두눈을 의심했다. 저 뒷모습은 분명히 이재준인데.. 그의 머리위로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그렇게 끊으라고 신신당부했건만 KG를 들어갔다 나온 이후로 부쩍 담배가 늘어난 듯했다. "이씨.. 이재준.." 배신감에 이를 갈며 저놈을 어떻게 족칠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교복을 입은 남자 둘이 재준이의 등뒤로 나타났다. 가승휘와 정우현이었다. 그들은 내가 쪽문을 통해 지켜보고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하는 모양인지 스스럼없이 마주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러고보니 저렇게 셋만 모여있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모아놔도 참 멋지구나. 잘나신 그들끼리 뭐라고 중얼거렸으나 잘 들리진 않았다. 훔쳐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궁금한 마음에 나는 한달음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세 남자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벽 뒤에 숨어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민지율..." 그때 갑자기 재준이가 작게 내 이름을 읊조린다. 나는 들킨 건 아닌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벽쪽에 더 몸을 밀착 시켰다. "에스퍼 아니야." 이번엔 제법 또렷이 들려오는 재준이의 목소리. 이래선 안된다는 걸 알지만.. 나는 숨을 죽인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예지력이 없었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너.. 그게 말이돼?" 많이 당황한듯한 정우현의 목소리. 사실.. 내가 에스퍼가 아니라고 했을 때 우현이와 승휘의 반응이 궁금했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있는 척을 해서 자신들을 위험에 빠뜨렸는데.. 다시 날 쳐다봐줄까? 에스퍼도 아닌 나를 그들 세상에 끼워줄까? 역시나 그들 사이에는 지루한 적막감이 흘렀다. 약간 상기된 듯한 우현이가 무슨말을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말고를 반복했다. "확실한거야?" 그러던 와중에 가승휘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저렇게 묻는 걸 보니 녀석도 재준이의 카운트가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 듯 했다. "확실은 무슨! 예지력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정우현, 목소리 낮춰." "지금 내가 흥분 안하게 생겼어?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재준 말 끝까지 들어. 계속 말해." 이 순간 마저도, 지독하게 담담한 승휘가 재준이의 말문을 터주자.. 재준이는 담배를 바닥에 버리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아무 능력도 감지 되지 않았어. 엑스 그 놈도 지율이가 에스퍼가 아니라고 그랬고... 말 안하려다가 너희는 알아야 될 거 같아서 말해주는거야." 엑스라는 사람은 선글라스를 꼈던 카운트에스퍼를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정우현은 여전히 흥분감을 감추지 못한채 재준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럼 우린 무슨 지랄을 한건데? 민지율 에스퍼 인거 감춰주다가 우린......" "지금 가장 혼란스러운 건 지율이야. 함부로 다그치지마." "말도 안돼...씨발....." 혼란스러운 듯 말끝을 흐리는 우현이. 괜히 나 때문에 그런 고생을 했다는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일까? 미안함에 고개조차 들기 힘들었다. 심각한 세 남자 사이에도 여전히 언성이 높은 건 정우현 뿐이었다. "그럼 우리 워너비 프로젝튼가 뭔가 안해도 되는거지?" "......." "왜 아무 대답이 없어? 민지율이 에스퍼가 아니면 상관없잖아!" 워너비 프로젝트? 생소한 단어에 길게 목을 빼며 그쪽을 바라봤을 때 재준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무슨 얘기를 하려던 찰나에 승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달라지는 건 없어." "무슨 소리야. 민지율이 에스퍼가 아니라면......." "감독관 그 자식이 지율이가 우리의 약점이란 걸 눈치 챈 이상, 에스퍼이건 아니건 계속 인질취급 할거야." 같은 소리를 하려했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재준이. 우현인 그제서야 뭔갈 깨달은 눈친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저 말 대로라면.. 내가 저 세남자의 발목을 붙잡는 KG의 인질노릇을 하고 있다는 건가? 불안한 느낌에 치맛단을 꽉 붙잡았다. 태어나 내 자신이 이렇게 부끄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도움이 될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짐은 되기 싫었는데... 비참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장난스런 미소를 띄고 있는 우현이가 승휘의 어깨를 툭치며 말했다. 역시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었다. 정우현은.. "이렇게 된거.. 갈데까지 가보지 뭐." "....." "이제 핑곗거리는 나만 남은거지? 동반이동만 제대로 되면 바로 투입하겠다던데.. 개자식들이 진짜 안되는데 연기한다고 어찌나 날 패는지... 봐봐. 아직 다리도 많이 아픈데..." 아이마냥 입을 댓발 내밀며 투덜대는 우현이. 그나저나 저건 또 무슨 말일까, 동반이동만 되면 바로 투입하겠다니? 어딜 투입한다는 거지? "가승휘 너 사격술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던데.. 적당히 하라고." "......." "이재준도 날씨조종하는 훈련.. 힘빼면서 하고 있대. 잘하면 잘할 수록, 그 개같은 프로젝트 날만 앞당겨 지는거야. 알지?" 사격술? 총을 쏜다는거야? 게다가 날씨조종까지... 대체 무슨일을 하길래... 뭔가 살벌한 느낌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승휘쪽을 바라봤다. 승휘는 보일락말락한 작은 미소를 띄며 답했다. "똑바로 안하면, 민지율 잡아들이겠다는데 어떡하냐.." "......" "나라고 사람 죽이려고 하는 훈련을 열심히 하고 싶겠냐?" 사람을... 죽여? 말릴 새도 없이 격하게 뛰기 시작한 심장. 혹시나 이런 내 심장소리가 그들에게 들리기라도 할까, 나는 더욱더 작게 몸을 웅크렸다. 나 때문에..나로 인해.. 저 세 남자는 어떤 엄청난 일에 휘말려 들어간걸까 상상조차 두려웠다. 내가 가까스로 눈물을 참아내고 있을 때, 정우현은 마이 안주머니에서 작은 서류봉투를 꺼내 재준이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워너비 프로젝트 정식 계약서야. 나랑 승휘는 싸인했으니까 너만 싸인하고 감독관한테 주면 돼." 워너비 프로젝트라는 게 대체 뭐지? 내가 갖가지 상상에 빠져드는 사이 재준이는 씁쓸한 얼굴로 서류봉투를 받아들며 물었다. "나는 그렇다쳐도 너희까지 이러는 이유가 뭐야." "......." "너희 둘 다.. 지율이 좋아하기라도 하는거야?" 직설적인 재준이의 질문에 승휘는 알수없는 웃음과 함께 '교실에서보자' 라며 먼저 들어가버렸고.. 우현인 마이 단추를 잠그며 대답했다. "민지율은 KG랑 더럽게 안 어울려. 약해빠져서 일주일만에 지쳐 죽을지도 몰라." "....." "근데 그건 걔 사정이고.. 사실은 내가 안되겠어서." "정우현...." "나도 한개쯤 갖고 싶은걸... 바깥세상에다 놔두고 싶어." "......." "아니면 여기도 그곳이랑 다를게 없거든." -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승휘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디 아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는 승휘. 역시 나는 지지리도 감정을 못 숨긴다. 그러나 잠시후 재준이가 시끄러운 목소리를 내며 교실로 들어오는 바람에 승휘는 내 이마에 올리려던 손을 내려놓았다. "어이.. 민지율 재미 좋으시나보네? 가승휘가 잘해줘? 나보다?" 아까의 진지한 모습은 간데없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정우현에게서 건네받은 계약서를 가방안에 구겨 넣는다. 당장이라도 저게 뭐냐고 따져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서두르면 될것도 안되는 법이었다. 때마침 선생님이 종례를 하러 오셨다. "이제야 우리반에 빈자리가 없네. 그쪽은 어째 하루도 평안하질 않냐." 우리쪽을 보시며 얘기하는 선생님. 그러고보니 셋 다 이렇게 앉아있는 게 참 오랜만인 듯 했다. 어린 우리에게 너무도 잔인한 시간들이었다. "무단결석한 지율이가 분리수거 좀 하고.. 재준이랑 승휘는 선생님 좀 따라와." "...네..." 맥아리 없이 대답하자 선생님은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내려가신다. 나는 아이들이 다 교실을 빠져나가는 걸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들어다 줄게." "놔." 오지랖 넓게 쓰레기봉투를 집어드는 재준이에게 싸늘히 '놔'라고 말한 후, 쓰레기 봉투를 뺏어들었다. 그러자 왜 그러냐는 눈으로 날 멀뚱히 쳐다보다 한 손으로 내 머리를 흐트린다. "도와주려고 그랬더니.. 알았어, 그럼 분리수거 하고 교실로 와. 집에 데려다...." "우리 이제 방향 완전히 다르잖아. 혼자갈 수 있으니까 넌 신경꺼." "야.. 무슨말이 그래... 나한테 화난거 있어?" "내 일은 내가 하게 내버려 두라고, 제발!" 결국은 녀석에게 소리를 지르고 교실밖으로 나가버렸다. 많이 당황한 모양인지 따라나오진 않았다. 나는 끙끙대며 쓰레기 봉투를 들고 학교 뒤에 있는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나 때문에 곤란한 일을 겪는 거.. 이제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데, 녀석들이 어떻게 되려는지라도 가르쳐 주고 싶은데 예지력이 없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로 부터는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온갖 짜증을 부리며 쓰레기봉투를 바닥에 내팽겨친채로 주저 앉아버렸다. 그리고 이제껏 못다한 울음을 터뜨렸다. 모든 게 나 때문이라는 자책감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한참을 서럽게 울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나는 재준이 일거란 생각에 눈물을 닦아내며 뒤돌아봤다. "........" 내 어깨를 두드린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그 상태로 얼어붙고 말았다. "나한테 왜 울고 있는지 말해줄 수 있어? 아가씨 마음상태까진 몰라서 말이야." "....." 오늘까지, 세번째 보는 카운트 에스퍼였다. 본명이 아니겠지만.. 엑스..그래, 엑스라는 남자. 나는 뒤에 감독관이 따라온 건 아닐까 얼른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엑스는 안심하라는 듯 살짝 웃으며 '나 혼자 온거야' 라고 말한다. "무슨.. 일이시죠?" 나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엑스라는 남자는 길다란 손가락을 내 얼굴로 뻗는다. 운동신경이 좋지 않은 나였지만 재빨리 피하자 허공에 머무는 손이 민망한 듯 피식 웃는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어.. 갑자기 웬 비지?" 거짓말처럼.. 후둑후둑..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엑스는 비를 피할 생각조차 없는지 점점 내 앞으로 다가와, 강한 힘으로 주저앉아 있는 날 일으켰다.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묘한 눈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 했다. "카운트를 가진채로 살다보면 말이야.." "......." "아무리 겉모습이 예쁜여자라도 예뻐보이지가 않지. 나같은 카운트에스퍼들이 본능적으로 끌리는 여자는 따로있어." "......." "사랑한 경험이없더군. 내가 처음이 되려나?" 엑스는 나를 향해 알수없는 말을 내뱉었다. 남자라기엔 지나치게 높은 음색이 빗소리와 섞여 더욱 소름끼치게 내귀를 파고 들었다. 점점 거세지는 비가 아프게 느껴진다. 두려운 모양이다. "아악!!!" 그 남자가 점점 내 앞으로 다가오길래 뒤로 물러서다, 돌에 걸려 넘어지고야 말았다. 엑스는 그런 나를 보고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왜, 어째서 이런 일이 나한테만 벌어지는 걸까? 두려움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해도 미친듯 퍼붓는 비 때문에 시야를 확보하기조차 힘들었다. 이제 내 코앞까지 온 남자는 여유로운 미소를 흘리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순간.. 팡.. 하고 폭죽터지는 소리와 함께 "......." 거짓말처럼 엑스가 내 발아래에 꼬구라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놀란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소리를 질러선 안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쓰러진 그의 등 위로 비가 억세게 쏟아진다. "....피?" 그의 등에선 새빨간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 옆으로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일으키며 그를 쿡쿡 찔러보았다. "왜.. 왜이래요.. 일어나봐요!!" 그를 흔들수록 더욱더 많은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나는 얼른 손을 거뒀다. 사람들은 피를 보면 이성을 잃는다던데, 나는 그 피를 보자마자 번뜩하고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라고 사람 죽이려고 하는 훈련을 열심히 하고 싶겠냐?" 워너비 프로젝트... 나는 얼른 그의 등을 확인했다. 총에 맞은 자국이 확실했다. 아까 그건 총소리였고... 게다가 일기예보에도 없던 이런 거센비가 내린건... 복잡하게 널려 있던 퍼즐조각이 드디어 완성되버렸다. 나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하늘에 대고 소리쳤다. "너희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거야!!!!" Writer. 청몽채화 25. 내가 신고있던 하얀 운동화가 엑스의 빨간 피로 물들고 있었다. 피와 비가 징그럽게 섞여 내 신발을 물들였다. 엑스의 몸이 축 늘어졌다. 옆을 향한 그의 얼굴을 보았으나 숨을 전혀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죽었다. 다시 살려볼 여지도 없이, 그가 완벽히 죽었다. 등 뒤로 식은 땀이 흐르는 동시에, 소름이 끼쳐 견딜 수가 없었다. 시체를 뒤로 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교실로 올라갔다. 그의 손이 갑자기 내 발을 휘어잡을 것만 같았다. 교실까지 뛰어가는 그 잠깐의 시간이, 억만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손이 아직까지 떨리고 있었다. 소나기 덕분에 내 몸은 흠뻑 젖어있었다. 몸에 묻은 물기가 복도와 교실에 사정없이 흩뿌려졌다. 우현이와 승휘를 만난 뒤로, 재준이가 KG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뒤로...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무서운 일과 마주치게 되는 걸까. 영화에서만 보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고, 공포는 언제나 내 눈 앞에 있었다. 교실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서둘러 재준이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검은 책가방이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나는 놈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집에 따로 가자고 말했지만, 그는 나를 두고 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마 지금쯤 같은 반 아이들과 체육관에서 농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농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비가오는 날에는 항상 체육관에서 시합을 벌였다. 재준이는 언제나처럼 쓰레기통을 비운 내가 자신의 책가방을 들고 체육관까지 마중나갈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마치 미친 사람처럼, 나는 재준이의 검은 가방을 집어들고 지퍼를 잡아당겼다. 재준이의 가방을 거꾸로 든 채 탈탈 털어내자, 필통과 노트 몇 개, 작게 접힌 서류봉투 한 장이 힘없이 떨어져내렸다. 가벼운 가방의 무게처럼, 간소한 학용품만이 가방 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젖은 손으로 서류봉투를 집어들었다. 분명히 재준이는 우현이에게 건네받은 이 봉투를 가방 안으로 밀어넣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얼굴로, 태연하게 웃으면서. 내가 봐주겠어. 정말 이 안에 아무렇지도 않은 내용이 적혀있는 건지. 놀란 마음은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다. 거칠게 서류봉투 안에 있는 종이를 꺼내들었다. 계약서라고 크게 적힌 종이의 제목이 한 눈에 들어왔다. [워너비 프로젝트 제 1조 : 카운트 겸 날씨조종 에스퍼 - 이재준 (19) A+급 메모리 컨트롤 에스퍼 - 가승휘 (19) A+급 순간이동 에스퍼 - 정우현 (19) A-급 총괄 매니저 : 투명인간 에스퍼 - 도하진 (25) 총괄 감독관 : 박형렬 (43) 외 5명] 사람이름이 어지럽게 적힌 계약서의 첫 장. 일단 첫 장은 무난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 다 내가 이미 알고있는 내용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음 장을 넘겼을 때, 나는 막연하게 느꼈던 공포의 정체와 마주할 수 있었다. [워너비의 의미는 킬러의 임무 수행과 동격으로 친다. 이는 혹시라도 앞으로 마주칠 문제에 태연하게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워너비 프로젝트를 수행함에 있어서 실제 임무를 처리하는 위 3명 에스퍼를 갑, 명령을 지시하는 국가기관 KG를 을이라 하여, 다음 사항을 약정한다.] 계약서에는 22조나 되는 조항이 3장에 걸쳐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하지만 그 전까지 계약서를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내가 그런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단지, 나는 킬러의 임무 수행이라는 단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기를 쓰고 아닐 거라 믿어왔던 사실이 진실로 확인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장을 펼쳤을 때,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감독관의 명령과 매니저의 지시, KG의 지휘 아래 워너비 프로젝트가 성립된다. 위 3인 중 워너비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는 것은 최근 승격된 이재준으로 한다. 서열체계는 희귀 능력 보유 순서대로 이재준의 뒤를 이어 가승휘, 정우현으로 이어진다. 가승휘를 중심으로 두고 이재준, 정우현의 서포트로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프로젝트는 정우현의 동반 순간이동 트레이닝이 완벽해지는 즉시 시행된다. 이재준, 반경 1km 이내에 잠입하여 날씨 조종. 정우현, 능력을 사용하여 가승휘와 동반 순간이동. 가승휘, 대상의 기억을 빼낸 후 목표물 제거 (목격자의 메모리 컨트롤도 허용). 탄알이 장전된 총은 가승휘 뿐만 아니라 이재준과 정우현에게도 지급된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일원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할 경우. 이재준과 정우현에게도 총기 사용을 허락한다. 워너비 프로젝트 시작 후, 현재 특 3급 에스퍼 이재준은 특 2급 에스퍼 지위 획득, 현재 제 1급 에스퍼 가승휘는 특 3급 에스퍼 지위 획득, 현재 제 2급 에스퍼 정우현은 제 1급 에스퍼가 될 수 있도록 시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믿을 수 없는 사실 밑에는 불독 감독관과 하진언니의 도장이 찍혀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재준이, 승휘, 우현이의 싸인이 차례대로 휘갈겨져 있었다. .... 미쳤어, 너희들은 제정신이 아니야. 무슨 생각으로 이런 프로젝트를 받아들인 거야? 엑스도 너희들이 죽인 거야? 왜?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세상에 죽어야할 만큼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어디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걸 처리하는 사람들이 왜 너희들이어야 해? 승휘와 우현이는 그렇다치고.... 이재준... 20일 안에 니가 돌아온 결과가 이거야? 현재 승휘보다 니 계급이 높다는 건 뭘 뜻하는 거야? 우현이도 통과하지 못한 시험을 치르고 니가 돌아왔다는 뜻이야? 너... 도대체 돌아오기 위해서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구!!! 계약서를 무지막지하게 찢어버리고픈 충동을 억누른 채 손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내가 계약서를 찢어버린다고 해서 계약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젖은 손으로 만졌기 때문에 계약서는 이미 더러워져 있었지만 KG 입장에서, 이런 종이 쪼가리쯤은 몇 번이라도 다시 작성할 수 있었다. "야, 내 다리만 멀쩡했으면 니네 반이 이기지도 못했거든? 니들 조금만 기다려. 내가 다리만 나으면 환상적인 덩크슛을 보여줄 테니까." "놀고있네. 너 내가 모를 줄 아냐? 너 나 없었을 때도 가승휘한테 농구 개발렸다며." 그 때, 교실 뒷문이 열리면서 재준이와 승휘, 우현이가 들어왔다. 바보같이, 승휘의 책상에도 책가방이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다리에 한 깁스 때문에 농구에 참여하지 못한 듯한 우현이는 오만 인상을 다 쓰며 맨 마지막으로 우리 교실로 발을 내딛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승휘는 그저 씨익 웃고만 있었고, 재준이는 그를 놀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세 명의 눈길이 모두 다 나를 향했다. "뭐야, 민지율!!? 비 왔었어?? 너 비 맞았어? 어쩐지 땅이 좀 젖어있더라니. 잠깐 소나기 왔었나보다. 괜찮아?? 야, 그래도 이 새끼들이 보면 어쩌려고 이렇게 섹시한 모습으로 앉아있냐!! 얼른 일어나, 안 추워? 내가 비오는 줄 알았으면 비 멈춰줬을건데 전화라도 하지. 농구 시합 중지하고라도 내가 너 도와줬을 텐데." 재준이가 급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짚은 순간, 나는 그의 손을 차갑게 쳐냈다. 가까이 다가온 재준이의 표정이 굳었다. 그제야 눈 앞에 엎어져있는 자신의 검은 책가방과, 계약서를 든 채 놀란 숨을 몰아 내쉬며 주저앉아 버린 나를 보고 상황파악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뒤에 서 있는 승휘와 우현이도 마찬가지였다. “...........민지율..........” 재준이는 내 손에 들린 계약서를 순식간에 잡아챘다. “너 내 가방 뒤졌어????” 그리고 소리친다. 매우 화가난 듯한 목소리로. “지금.... 왜 니가 화를 내는 거야?” 승휘와 우현이가 차마 나서지 못하는 이 상황 속에서, 나는 재준이를 향해 싸늘하게 물었다. “민지율, 내 가방 뒤진 건 명백히 니 잘못이야!! 나도 숨기고 싶은 건 있는 법이야.” “당연히 숨기고 싶겠지, 사람 죽이는 게 계약이 될 순 없으니까!! 너도 알잖아. 이름만 계약서지, 이건 살인행위야. 합법적으로 국가가 눈 감아준다고 해서 죄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착각하지마, 너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에스퍼라고 해서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여기지 말란 말이야!!!“ “.......... 너... 이걸 다 읽었어?” 뒤에 있던 승휘가 내게 물어보는 그 즉시. “너희들은 살인자야!!!!!!!!!!” 나는 크게 고함쳤다. 눈가에 눈물마저 맺힐만큼 악에 받힌 채로. 내 말에 재준이는 계약서를 쥔 손을 아래쪽으로 힘없이 떨어뜨렸다. 승휘는 아무 말 없이 한숨을 내뱉었고, 우현이는 목발을 짚고 그들을 헤치며 내 앞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야, 너 말 좀 함부로 하는 거 아니냐.” “............ 내 옆에 오지마. 너희들 무서워.” “씨발, 민지율,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 개고생을 하는 건데!!!!!” 우현이는 한 쪽 어깨에 메고있던 책가방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하지만, 재준이는 폭발직전에 이른 듯한 우현이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왜, 다들 내 핑계라도 대려고? 영웅심리에 빠지지마, 난 도와달라고 한 적 없어.” 너희들이 내 마음을 알고나 있는 거야? 재준이가 나 대신 끌려갈 줄 알았다면, 승휘와 우현이가 나 때문에 고문받을 줄 알았다면, 너희들이 이런 살인에 휘말리게 될 줄 알았다면.... 나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악하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순순히 끌려가서 얌전히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을 거라구. 가족도 없는데 그런 곳에 끌려간다고 해서 내가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거야. 아니, 재준이가 말한대로라면 처음부터 나는 에스퍼가 아니었던 거잖아. 이제 너희들이 나를 위해 이렇게 신경쓸 필요도 없는 거잖아. 이렇게 잔인하고 끔찍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너희들 모습이 낯설어서 미치겠어. 내가 알던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아서 정말 죽겠다구. “가승휘, 부탁한다.” 재준이는 잠시 동안 말없이 자신을 진정시키며 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바닥에 떨어뜨린 계약서를 집어들며 승휘에게 말을 걸었다. 마치 명령과도 같은 재준이의 말에 승휘는 입술을 깨물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저리 가. 또 기억 없애려는 거지? 이제 안돼, 내 기억 건드리지 마.” 하지만 이제 나도 적당히 그들을 상대해줄 마음이 없었다. “민지율, 고개 들어. 내 눈 봐.” 이제야 확실해진 사실 하나. 가승휘는 상대방이 자신의 눈을 쳐다보지 않으면 기억을 지울 수 없었다. “너희들이 이런다고 해서 이미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될 줄 알아???” 비명처럼 소리치자 그들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고개를 쳐들지 않았다. 승휘의 시선과 마주하게 되면 나는 기억을 잃을 것이다. “민지율, 그게 무슨 말이야.” 재준이는 아무 억양없이 물었다. “너희들은 이미 사람을 죽였잖아. 내 눈 앞에서 그가 죽었어. 내 눈 앞에서 쓰러졌어. 그 사람 피가 내 발을 적셨다구, 왜 그래야 했어?? 죽일 필요까진 없었잖아!!!!“ “..........민지율....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죽어? 누가?” “............엑스라는 카운트 에스퍼..... 너희들이 죽였잖아.” 참고참던 눈물이 마구 터져나왔다. 이들은 에스퍼이기 전에 항상 내 옆을 지켜주는 친구들이었다. 지금 처해있는 이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아, 잠깐 정리 좀 하자. 너 일단 감기 걸릴지도 모르니까 이것부터 좀 입어. 기지배가 조심성 없기는. 젖어서 속옷도 다 보이겠다. 암튼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죽이긴 누굴 죽여? 엑스? 엑스가 죽었다고?" 우현이는 머리가 아픈 듯 한숨을 쉬다가 자신의 마이를 벗었다. 가볍게 떨리는 내 몸 위로 그의 마이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너 꿈꿨어? 그 된장남 지금 어느 백화점에서 명품가방 사고 있을걸?” “죽었어!!!! 학교뒷편 쓰레기장에서 죽었단 말이야!!!!” 우현이는 미치겠다는 듯 한숨을 쉬다가 내 실내화에 자신의 시선을 멈췄다. 아직 엑스의 피가 선명하게 묻어있는 실내화였다. “씨발......... 진짜야.....? 이거.... 뭐야......” “갑자기 비가 내렸어. 분명히 재준이 니가 한 짓이잖아, 지금은 햇빛이 쨍쨍하잖아!! 그 뒤에 승휘가 총으로 쏴서 죽인 거 맞지? 숨기려고 한다고 내가 모를 것 같아? 차라리 나를 KG로 데려다 줘!!! 다른 사람 죽일 바에는 그냥 나를 죽여!!!! 그냥 지금 죽여줘!!! 니들이 다른 사람 죽이는 꼴 보는 것보다 내가 죽는 게 나아!!“ 울부짖으며 소리친 덕분에 목소리가 뭉개지고 있었다. 우현이는 답답하다는 듯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고, 재준이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는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승휘가 내 손목을 휘어잡았다. 그는 주저앉아 있는 나를 강제로 일으켜세웠다. “민지율!!!” “싫어, 나 너 안 쳐다볼거야, 기억 지우지마!! 나 가지고 놀지 말란 말이야!!!” “기억 안 지울테니까 나 똑바로 봐!!!” 승휘가 크게 소리치는 바람에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 내 기억을 지우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의 눈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믿어줘.” “...........” “우리는 아직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어.” 참고있던 눈물 한 방울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만은 우리를 비난하면 안 돼.” 내 손목을 잡은 그의 손에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내 손을 놓아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나에게 많은 의미를 전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너를 위해 우리는 자신을 버렸어.” “.............” “니가 잡히면 우리가 죽어.” “............” “그러니까 넌 우릴 위해서 잡히면 안 돼.” 재준이와, 승휘와, 우현이. 세 명 모두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 “살아.” Writer. 청몽채화 26. “엑스가 어디서 죽었다고?” 재준이는 낮은 음성으로 조용히 내게 물었다. 그 놈은 땅에 꽂힌 시선을 절대 위로 쳐들지 않았다. 많이 불안한 모습이었다. 승휘는 엑스를 죽인 건 자신들이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오히려 내 앞에서 놀란 척 연기를 하는 그들의 모습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학교 뒤편, 쓰레기 처리장.”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재준이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씨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머리를 긁적이던 우현이도 재준이의 뒤를 따라 목발을 움직이며 급하게 교실 밖으로 나갔다. “너는 보러 안 가? 니가 한 일, 제대로 처리됐는지 궁금하지 않아?” 나는 아직도 내 손목을 꽉 붙들고 있는 승휘를 향해 비웃듯이 물었다. 오늘, 그것도 방금 전, 눈 앞에서 살인을 보았고 시체를 보았다. 떨리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스스로 강한 척 해야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꼬지 마.” 승휘는 그 한 마디를 남긴 채 내 손목을 놓고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승휘가 꽉 잡고있었던 내 손목이 빨갛게 부어있었다. 우현이가 내게 덮어준 마이에는 좋은 향이 가득 배어있는데 이렇게 좋은 향기를 풍기는 그들이 어떻게 피를 찾아 돌아다닐 수 있을까. 바닥에 주저앉아 울면서 마구 투정이라도 부려보고 싶었다. 이 모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게 보잘것 없는 민지율, 바로 나 자신이라면... 나를 제물로 바쳐서라도 시간을 돌이키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쓸모없는 예지력조차도 가지지 못한 힘없는 열아홉살 학생에 불과했다. 예지력이 없다고 재준이가 내게 말해준 이후로, 사람을 마주했을 때 머릿속을 스쳐가던 영상조차 모두 단절되었다. 이제껏 예지력이라고 믿어왔던 능력은 예민한 내 감이 빚어낸 환상이었던 걸까. 빠른 시일 내 점집이라도 가서 신내림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 교실 밖을 뛰쳐나가 학교 뒤편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뛰면서도, 내내 불안했다. 아닐 거라고 쉴 새 없이 나 자신을 타일러도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는 초능력자가 아니다. 나는 예지력을 사용할 수 없다. 그들과 동등해질 수 없다는 사실, 그들이 어떤 짓을 해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비춰질 수 있다는 사실. 그게 정말 나를 미치게 했다. * 학교뒤편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향했을 때,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엑스의 시체가 사라져있었다. 마치 증발해버린 것처럼. 하지만 소름 끼칠만큼 땅바닥을 적시고 있는 피는 여전했다. 갑작스런 소나기의 빗줄기와 섞여 연한 색을 띄고 있기는 했지만 덕분에 피는 더 넓게 퍼져 바닥에 놓인 쓰레기봉투들까지 적시고 있었다. 피만 아니었으면 놈들은 내 말을 의심했을 지도 모른다. 재준이와 승휘는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고, 우현이는 그들과 거리를 둔 채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천천히 쓰레기 처리장으로 다가간 나는 우현이와 조금 거리를 둔 채 옆에 섰다. 우현이는 씁쓸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바로 옆에는 못 오겠어? 내가 무서워?” “...........” “그래, 나도 내가 무섭다.” 우현이의 한 쪽 입꼬리가 씩 올라갔지만 그가 웃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우현이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재준이와 승휘의 모습에 내 눈을 고정했다. “아무 데도 없어, 시체가.” “국가가 수거해갔을 거야.” 다급한 재준이의 말을 승휘가 여유롭게 받아넘겼다. “염력이야. 염력 에스퍼가 시체를 옮겼을 거야.” “다른 사람이 엑스의 시체를 보진 않았겠지? 일이 더 커지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염력이라고? 웃기지마. 우현이 짓이겠지. 우현이가 동반 순간이동으로 시체를 옮긴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럴 순 없어. 재준이가 소나기를 내리고, 승휘가 죽이고, 우현이가 옮긴 거라구. 재준이와 승휘가 상황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우현이는 그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혼잣말같았지만 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국가가 죽였을 거야.” 나는 우현이에게로 시선을 주었지만 끝까지 자신들이 죽이지 않았다고 발뺌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 못 들은 척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에게까지 비밀을 만드는 그 모습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우현이는 내가 자신의 말을 듣고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에스퍼들의 능력은 A부터 Z까지로 나뉘어져. 같은 A등급이라도 다시 세 개로 나뉘어지지. 에이 플러스, 에이 제로, 에이 마이너스. 이재준과 가승휘는 에이플러스 급이야. 나는 아직 에이 마이너스지. 동반 순간이동을 성공하면 에이 제로가 될 거야. 3인 동반 순간이동까지 마스터하면 그 때는 에이플러스 급으로 올라가겠지.“ 우현이가 그런 이야기를 왜 내게 하고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능력과 계급은 엄격히 다른 문제로 분류되어 있어. 능력은 알파벳으로 분류되는 반면에 에스퍼들의 계급은 숫자로 나뉘어지지. 1급에서부터 12급까지야. 1급이 제일 높은 반면, 12급은 제일 낮은 계급이야. 제 1급 정도 되면 거들먹거리고 다닐 수 있지. 그걸 획득하기는 어려워. 어려운 만큼 획득한 사람들도 흔치 않고.“ 중세시대의 신분처럼, 엄격히 나누어져 있을 에스퍼의 계급 사회. “1급 위에는 특별 계급이 존재해. 특별 계급은 총 3단계까지 있지. 국가를 위해 큰 공을 세웠다거나, 도움이 되는 새로운 능력을 획득했다거나, 아니면 제 1급일 때 국가의 말을 잘 들으면서 충실한 개로 활동했거나. 이재준은 날씨조종으로 특 3급 에스퍼가 되었고, 가승휘는 제 1급 에스퍼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 나는 아직 그냥 제 2급이야.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밖에서 나돌아다니지도 못해. 제 2급은 국가를 도와준다는 서약을 한 후에 시험을 거쳐야 자유를 획득할 수 있거든. 자기 능력을 컨트롤하면서 국가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게 관건이야. 난 하고싶은 대로 해야만 하는 새끼라서 시험을 볼 자격조차 금지되어 있었어. 그래도 나올 수 있었어. 원거리 순간이동이 가능한 에스퍼는 별로 없으니까. 대신 서약서에 싸인은 오지게 많이 했지. 물론 난 지금도 제 1급 에스퍼가 되고 싶어. 현재의 난 언제든 KG에 끌려갈 수 있지만, 제 1급은 함부로 막 다뤄지진 않으니까.“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지만 거미줄처럼 나름 체계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는 KG의 조직도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아마 특별 계급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지위는 감독관들일 것이다. 그 감독관들조차 지휘할 수 있는 계급은 매니저의 위치일 것이고. “하지만 난 특별계급으로 올라가긴 싫어, 이재준과 가승휘도 조심해야 할 거야.” 우현이의 말이 궁금했지만 나는 아무 질문도 던지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투명인간이나 천리안의 능력을 가진 에스퍼들은 그런 걸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 능력만 에이 플러스 급이 되면 국가는 계급에 상관없이 그들을 매니저로 승격시켜줘. 매니저가 되면 한 사람당 두 명에서 다섯 명의 사람들을 관리하게 돼. 왜, 그렇잖아. 사람 감시하기 제일 편한 게 투명인간이나 천리안 능력이니까. 하지만 그 외의 에스퍼들은 아니야.“ “...........” “특별계급으로 승격되면 분명 KG 안에서 남부럽지 않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어. 한 달에 받는 월급도 장난이 아니고, 국가에서 최적의 환경도 제공해주지. 있잖아, 대한민국의 특 1급 에스퍼는 단 한 명밖에 없었어. 그게 엑스야.“ “................. 뭐?” 나는 그제야 고개를 우현이 쪽으로 돌렸다. 그의 눈은 아직까지 씁쓸한 빛을 담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민지율?” 우현이도 나를 보았다. 그리고 억지로 웃어보이는 것 같았다. “특 1급 에스퍼는 국가에게 무서운 존재야.” “.................” “특 1급 에스퍼가 되면.” “..................” “국가가 직접 죽여.” "...... 지금 무슨....." "정신 나간 새끼들은 특 1급이 되고 싶어 지랄하지만, 정부는 특 1급을 죽이려고 해. 자신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국가에 해가 되는 존재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엑스를 누가 죽였다는 거야? 국가의 명령을 받은 너희들? 아니면 국가에서 파견된 다른 킬러? 나는 이제 초능력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야. 그런 나에게 너무 많은 진실을 알려주지 마. 지금 너희들에게 신경쓰는 일만 해도 나는 너무 벅차. 이제 너희들이 특별 계급으로 올라가는 일까지 무서워해야 한다는 거야? 겁 먹은 눈으로 우현이를 바라보고 있을 때, 쓰레기를 뒤지던 재준이가 한숨을 쉬며 우리를 불렀다. “엑스 시체는 여기 없는 것 같아. 민지율, 정우현. 창고 안으로 들어와. 흔적이라도 없애야겠어. 엑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다른 사람이 여기 오게 되면 분명히 놀랄 거야. 피 자국을 완전히 없애는 게 좋겠어.“ 뒤처리까지 하려는 거야? 봐봐, 너희가 저지른 짓이 맞잖아. 그 살인을 너희가 하지 않았다면, 너희들은 이렇게 사건을 은폐하려 들지 않았을 거야. 우현이가 쓰레기 처리장의 창고 안으로 들어서는 와중에도, 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의 살인사건에 동조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일단 첫째로, 나는 놈들을 지켜야 했고, 둘째로 KG의 권력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KG는 경찰보다도 높은 권력을 휘두르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우현이는 한 쪽 팔로 나를 창고 안으로 휙 끌어들였다. 덕분에 놈이 끼고있던 목발이 땅에 떨어졌다. 놈의 목발을 다시 가지고 오기도 전에 하늘에서 비가 투두둑 내려오기 시작했다. 재준이가, 뚫어져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다시 봐도 기가 막힌 능력이었다. 아까도 이렇게 소나기가 내렸다. 우현이가 떨어뜨린 목발 위로도 빗방울이 세차게 내리치고 있었다. 아까 내린 소나기보다도 거센 빗줄기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엑스가 흘린 피가 서서히 씻겨나가고 있었다. 계약서에서는 죽일 대상의 발을 한 곳에 묶어버리기 위해 재준이의 능력을 사용한다고 적혀 있었으나 이런 증거 은폐의 용도로도 놈의 능력이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또 다시 소름이 끼쳤다. 한참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재준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빗줄기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깨끗하게 비가 그쳤다. 하지만 쨍쨍한 햇살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흐린 날씨인 걸 보면, 재준이의 기분도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비가 그치자마자, 나는 창고 밖으로 발을 내딛었고, 교문으로 향했다. 아직 교실에 놓여있을 가방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가방 안에 중요한 물건이 든 것도 아니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집에 가서 쉬는 것뿐이었다. 하루만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인지 머리가 아파왔다. 재준이가 돌아오고, 승휘가 돌아오고, 우현이가 돌아온 날. 마냥 행복해도 모자랄 오늘,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다시 돌아온 이들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인해져 있었다. “민지율!!! 어디 가!!! 집에 가는 거야?” 뒤에서 재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고,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내 갈 길을 찾아 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급하게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어깨를 휘어잡아 내 몸을 돌렸다. 재준이였다. “너 정말 왜 그래?” “내가 뭘?” 내 어깨에 붙어있는 재준이의 손을 내려놓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도저히, 이들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우리가 한 짓이 아니라고 했잖아.” “오늘 너, 그 감독관 같았어.” “...........” “일을 너무 능숙하게 처리하는 모습이, 정말 감독관 같았어. 승휘보다 더 진지해보였어. 언제나 냉철하게 생각하는 건 승휘 몫인 줄 알았는데 오늘은 니가 더 했어. 계약서에 적힌 말을 이제야 확실히 알겠어. 워너비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너라는 거. 넌 이제 승휘보다도 높은 계급인 거야. 승휘도 무조건 니 명령에 따라야 하는 거고.“ 재준이가 낯설게 느껴졌다. 재준이는 이런 일에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일 뿐이었다. 놈은 너무도 익숙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고작 20일을 KG안에서 보낸 것 뿐인데도.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재준이를, 국가에서 가만 두려고 할까. 재준이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과, 그를 감싸고 싶은 마음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나는 재준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뒤돌아섰다. 내가 떼어낸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재준이가 중얼거렸다. “많이 놀랐을 텐데, 우리집에 가자.” 이제 그가 말하는 집이란, 허름한 옥탑방이 아니라 삐까번쩍한 오피스텔일 것이다. “싫어.” “....... 그럼 데려다줄게.” "됐어." 망설임없이 발을 내딛었다. 재준이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나, 아직 너희들을 용서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어. 누가 뭐라 해도 지금의 너희들은 살인자야. ......... 물론,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Writer. 청몽채화 27. “야, 아니라고 몇 번 말해.” 집까지 데려다줄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도 세 남자는 내 뒤에 딱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재준이는 아까 내가 한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아직도 표정이 굳어있었다. 하긴, 이제까지의 나는 재준이에게 싫은 소리를 하거나, 그의 손을 내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나는 재준이의 손이 더러운 물건이라도 되는 양 그의 손길을 뿌리쳤고, 살인자라고 대놓고 말하기까지 했다. 승휘는 그런 재준이가 걱정되는지 그의 옆에 딱 붙어 걷기만 했고, 우현이는 내 옆에서 졸졸 따라오며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젖은 목발을 사용하는 바람에 이미 그의 한 쪽 팔은 모두 젖어있었다. 나한테 마이까지 벗어줬기 때문에 추울 법도 한데 놈은 끈기있게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깁스까지 하고서 힘겹게 나를 따라오는 놈이 조금 가여워보이기도 했다. 순간이동 해서 그냥 집에 가면 편할텐데, 정말 왜 이렇게 쫒아오는 걸까. “가, 가라니까? 너희들 사는 곳 반대편이잖아.” 나는 뒤로 돌아 세 명의 남자에게 소리쳤다. 승휘는 아무 표정 없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넌 오늘 사람 시체를 봤어.” “..................”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들어가면 분명히 공포에 떨 거야.” 그런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자신들조차 두려움의 대상이라고는 깨닫지 못하는 걸까. “그래, 집에까지만 데려다줄게.” 재준이가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재준이는 한 번도 나를 향해 저렇게 애매한 미소를 보인 적이 없었다. 기분 좋으면 웃고, 기분 나쁘면 인상쓰는 게 재준이 스타일이었으니까. 능글맞은 재준이 놈에게 저렇게 씁쓸한 표정이 나올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나는 승휘와 재준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홱 뒤돌아섰다. 어차피 내가 가란다고 해서 순순히 갈 놈들이 아니었다. “야, 근데 진짜 우리가 한 짓 아니라니까.” 옆에서 우현이가 나를 향해 속삭였다. 귀찮아서 제발 너희들 갈 길이나 가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우현이가 쫒아오지 못할 정도로 빠른 걸음으로 발을 옮겼다. 아까 재준이가 소나기를 내린 덕분에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걸을 때 철벅거리는 물에 젖은 아스팔트 거리가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방금 전 비를 맞은바람에 온 몸이 축축해서 기분이 나빴다. 우현이가 벗어준 마이도 이미 나 때문에 축축해졌을 것이다. 비 맞았다는 생각만 해도 엑스가 죽는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분명히 난 오늘부터 악몽에 시달리겠지. 사람이 눈앞에서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보게 되는 고3 학생은 흔치 않을 텐데. “아, 씨발!!! 민지율!!!!” 빠르게 걷고 있는 나를 따라오기 힘들었는지 뒤에 있던 정우현이 소리쳤다. 그는 어느 새 승휘나 재준이보다도 훨씬 더 뒤처져있었다. 돌아보지 않으려 했지만 우현이의 목소리에 짜증이 한가득 담겨있었기에 못 이기는 척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증거 보여줄게. 우리가 엑스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 보여주면 되겠어? 그럼 믿을래?” 그는 얼굴 한가득 인상을 쓰고 있었다. “.......니가 무슨 수로....” “내가 말한 적 있지, 동반 순간이동 성공한 게 너밖에 없다고.” 나와 함께 했을 때, 우현이가 동반이동에 성공하지 못한 적은 없었다. 말로 표현한 적은 없었지만 우현이는 그 점에 매우 만족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씨발, 남자가 돼서 쪽팔리고 드러워서 말은 못했는데 아직도 그거 잘 안돼.” “..............” “너랑 할 때는 백 퍼센트 다 성공이었는데, 다른 사람하고 했을 땐 성공률이 2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된다고. 그거 때문에 우리 지금 킬러활동 못하고 있어. 내가 못해서!!“ “..............” “야, 생각을 해 봐. 내가 가승휘랑 같이 사람 죽이러 어떤 건물에 잠입했다 쳐. 근데 나중에 다시 빠져나올 때 가승휘 홀랑 두고 나만 나오면 어떡해. 그럼 가승휘 새끼 죽을 지도 몰라. 그래서 지금 우리 투입안되고 있다고.“ 우현이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가 남에게 꿀리는 걸 죽기보다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런 놈이, 지금 자신의 치부를 다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세 명 중에서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 프로젝트가 미뤄지고 있다는 말, 킬러일이기는 해도 우현이는 자기 때문에 일이 연기된다는 사실이 끔찍한 것 같았다. “그래, 물론 나 킬러일 존나 하기 싫어!! 동반 순간이동이 잘 됐어도 안 되는 척 했을 거야. 근데 민지율, 나 진짜 안 돼. 하고 싶어도 안 돼. 세 명 이동은 꿈도 못 꿔. 그래서 사람 죽이러 갈 때도 가승휘만 동반하고 가는 거야. 이재준까지 데리고 가려면 한 2년은 더 걸릴걸.“ 우현이는 진지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나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다 다시 뒤돌아서려 했다. “그러니까 씨발, 보여주겠다고.” 하지만 우현이가 급하게 중얼거린 말이 다시 내 관심을 집중시켰다. “야, 가승휘, 이리와 봐.” “미친놈, 하지마.” “아, 빨리 와 보라고!!!” “너 조금 있다 또 KG가서 트레이닝 해야 돼. 지금 힘 빼면 감독관들한테 맞을지도 몰라. 다리까지 다쳐서 한 번만 순간이동 해도 너 완전 힘들어하잖아.“ “아, 맞아도 내가 맞고, 힘들어도 내가 힘드니까 이리 와보라고!! 민지율 저거 저대로 그냥 둘래?? 진짜 치사해서 내가 의심받고는 못 살겠다!!! 나 거짓말은 안하는 놈이야!!! 했으면 했다고 하지, 더럽게 안 숨긴다고!!!“ 우현이의 고함소리에 승휘는 못 이긴 척 우현이의 옆으로 다가갔다. “잘 봐, 민지율.” 우현이는 승휘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친하지도 않은 두 놈이 손을 맞잡는 모습은 매우 볼썽사나웠다. 재준이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나와 마찬가지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학교까지 다녀올게.” 눈을 감은 우현이가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하지만 곧, 사라진 건 우현이 뿐이었다. 승휘는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3초 정도의 차가운 적막이 흐른 뒤, 다시 우현이가 나타났다. “봐, 잘 안되잖아!!!” “정우현....” 왠지 놈의 모습이 안쓰러워 그를 불렀지만 놈은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다시 해볼까?” 승휘는 포기한 듯 자신의 몸을 우현이에게 내맡기고 있었다. 또 다시 우현이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번에는 성공한 모양인지, 우현이와 승휘의 모습이 동시에 사라졌다. 뭐야, 잘만 성공하잖아... 생각하면서 재준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재준이는 말없이 그들이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내가 그냥 집에 가려고 돌아서려는 찰나. 다시 우현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승휘는 어디다 두고 왔는지 혼자였다. “봐, 맨날 이렇게 돼.” “...........” “지금 나 가승휘 어디다 떨구고 왔는지도 모르겠어.” “............” “다시 데려와 볼까? 나 몇 번만에 성공하는 지 볼래?” 그 후로, 우현이는 승휘가 있는 곳까지 갔다가, 다시 이 쪽으로 오는 것을 반복했다. 능력을 거듭해서 사용할수록 놈이 나타나는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처음엔 3초, 그 다음엔 5초, 그 다음엔 8초, 그 다음엔 11초. 다섯 번째가 될 무렵에는 오래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우현이는 두 번을 더 실패하고, 여덟 번째 시도를 하고 나서야 승휘를 데리고 내가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실제로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우현이는 이제 말하기도 벅찬 것 같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숙였다. 아무리 순간이동이라고 해도, 몸 전체에 무리가 가는 것 같았다. 여러 번의 순간이동은 깁스를 한 그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온 듯 했다. “.......... 봐.... 민지율..... 이런 내가.... 엑스를.... 죽일 수 있었다고.. 생각해?” “여러 번 하면 성공하잖아. 넌 죽은 엑스를 옮겼을 거야.” “................” “그리고 넌 지금 내 앞에서만 못 하는 척 하는 걸 수도 있어. 진짜 니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내가 어떻게 믿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내 말투는 싸늘했다. 왠지 직감적으로, 재준이에 이어 이번에는 우현이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내 입은 적당히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쇼 보여줄 필요없어.” 나는 우현이의 마이를 벗어 가만히 서 있는 승휘에게 안겨주었다. “나 정말 갈 거야. 이제 부르지 마.” 우현이는 여전히 숨이 찬 듯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숨소리가 공간에 가득 찬 것 같았다. “그래, 우리가 죽였다.” 승휘의 목소리였다. 그의 말투는 매우 건조했다.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제야 드디어 인정하는 건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니가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데, 우리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하지?” 승휘는 내가 건네받은 마이를 우현이의 머리 위로 덮어주었다. 왠지 그 행동이, 힘들어하는 우현이를 위로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승휘의 날카로운 눈이 나를 한 번 노려보는 것 같았다. 그는 마지막 시선을 던져놓은 채, 내게서 등을 보이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승휘가 떠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재준이와 나, 우현이 뿐이었다. “왜 그렇게 우리를 믿지 못하는 거야?” 재준이가 슬픈 목소리를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었어?” 없었다. 단 한 번도.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놈들을 믿을 수 없게 된 내 마음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너희들.... 보기 싫어....”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후회할 말을 내뱉고 만다. “.....됐어, 그만해.... 나도 이제 진짜... 변명하기 지친다.” 몸을 숙이고 거친 숨을 몰아내쉬며 중얼거리는 우현이. 그는 자신의 위에 놓인 마이를 천천히 집어들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 씨발.... 병신 짓 했네.....”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우현이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우현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순간이동을 사용해 집으로 가버린 것 같았다. 재준이와 둘만 남은 상황에서, 나는 악에 받혀 소리쳤다. “그럼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너희는 내 옆에 있어도 점점 멀어지는데!! 내가 손을 뻗어도 니들을 잡을 수가 없는데 그걸 보면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 너희들은 앞으로 더 비밀도 많아질 거고, 거짓말도 밥 먹듯이 할 텐데!!! 앞뒤가 딱딱 맞는 일들이 내 눈 앞에 벌어지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무시해?? 난 이제 너희들이랑 다른 세계에 살게 되는데!!! 그럼 내가 어떡해!!!!“ 또 다시 눈물이 터져나오려 했지만 억지로 참으면서 주먹을 꽉 쥐고 소리질렀다. “너를 위해 20일을 견뎠어.” “............” “니가 나한테 거리감 느끼는 것조차 섭섭해.” 재준이는 천천히 나를 향해 말하는 그 순간, 어두운 하늘 위에서 번개가 쳤다. 재준이가 지금 화가 나 있다고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놈과 내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동안 천둥과 번개가 쉴 새 없이 쳤다. 평소 천둥소리와 번개의 번쩍임에 기겁을 하는 나였지만 무서운 티는 내지 않았다. 그래,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꼴까지 봤다. 이제 무서울 것도 없었다. “비는 내리지 않을 테니까, 집에 빨리 가.” 재준이는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뒤돌아섰다. 세 명이 모두 사라지자마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흘렀다. 내가 왜 이런 상황을 겪고 있어야 하는지, 모든 게 다 원망스러웠다. Writer. 홍양 28. 이제는 익숙한 나홀로 등교길. 어젯밤.. 흉흉한 꿈에 시달리는 바람에 제대로 잠도 자질 못했다. 악으로, 깡으로 멀쩡한 척 하고 있었지만, 사람이 내 앞에서 죽었다는게 꽤 충격적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혹시나 만날 녀석들을 피하려 빨리 왔건만, 운동장을 쳐다보자 재준이가 선도부일을 하고 있었다. 학교로 복귀한 지 하루만에 선도부일을 하는 놈의 부지런함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녀석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해줄 맘이 추호도 없었기에 재준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걸었다. "명찰." "....." 그렇게 놈을 모르는 척 지나치려는데 학주가 늘 지니고 있는 막대기로 내 어깨를 치며 앞길을 막는 재준이놈. 학주의 막대기까지 손에 넣을만큼 이 녀석이 막강하단 말인가... 나는 짜증이 담긴 눈으로 어깨에 놓인 막대기를 쳐냈다. "명찰 안달고 왔어? 벌점 10점." "야...." "운동장 세바퀴 돌고 들어가." 나는 분노의 콧김을 내뿜으며 놈을 노려봤다. 하지만 재준인 표정변화 하나없이 안돌고 뭐하고 있냐며 나를 다그친다. "어이, 이재준! 아침도 안먹고 가면 어떡하냐!" 그때, 뭔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기에 뒤를 돌자 정우현과 가승휘가 나란히 등교중이었다. 다리가 불편한 정우현의 보폭에 맞춰 걷는 승휘의 모습이 꽤 자상해보였다. 하긴... 그 엄청난 일을 같이 하는데 팀워크가 잘되야겠지. 지금 내눈엔 그들이 무슨짓을 해도 좋게 보이질 않았다. "운동장 안돌고 뭐하냐니까?" 재준이는 막대기로 쿡- 내 등을 찌르며 운동장 가 쪽으로 떠밀었고 우현이는 그런 나를 본척만척 하며 재준이의 손에 우유를 쥐어준다. "남자는 자고로 속이 든든해야 돼." "오... 하얀우유..." "너 뼈 튼튼하라고 칼슘 많이 든거 샀다." "정말?? 너 밖에 없다! 10년을 사귄 친구보다 낫네!" 10년을 사귄 친구는.. 나를 말하는 거겠지... 꼴랑 우유 하나를 주고받으며, 별 시덥잖은 소리를 하고 있는 우현이와 재준이. 겨우 하루만에 베프라도 된 듯한 그들의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한심한 둘을 지켜보다 승휘와 눈이 마주쳤다. 기억을 지우는건 아닐까 얼른 시선을 피하려는데.. 오히려 승휘가 먼저 시선을 거둔 채 교실로 향했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미친듯 운동장을 돌았다. 재준이나 우현이는 삐친것을 대놓고 표현하는 반면에 승휘는 겉으로 표현은 안하지만.. 나를 향해 던지는 시선 하나하나에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으으으!! 죽겠네!!" 평소같았음 장난으로 한바퀴 돌리고는 교실로 들여보내줄 재준이이건만 오늘은 무슨 독한 마음을 먹은건지 세바퀴를 다 돌린 다음에야 교실로 돌아가란 말을 한다. 분했지만... 주먹을 불끈 쥔 채 교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어폰을 꼽고 앉아있는 승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거마냥 불편한 얼굴로 승휘의 옆자리에 앉았다. 처음 만났던 그 날보다 100배는 더 싸늘한 얼굴이었다. "살인자 옆에 앉기 무서우면 뒤로 가." "......." 승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전..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얼굴에 표정이 나타나나 싶었는데 오늘은 완벽한 포커페이스였다. "내가 뒤로 가려다가 이재준이랑 앉는 것도 무섭기는 마찬가지 일테니까.. 그냥 니가 이재준이랑 바꾸라는거야." 나는 울컥 치밀어오르는 걸 참아내고 가방을 들고 뒷자리로 향했다. 화를 내야할건 난데.. 밀쳐내야 할건 난데.. 오히려 그들이 날 밀쳐내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왜 니 기억을 지우지 않는지 알아?" 그때.. 의자에 가방을 걸어놓으려 뒤돌아선 내게 승휘가 물었다. 나는 보일턱이 없지만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승휘는 자연스레 말을 잇는다. "느끼라고.." "....." "니가 얼마나 우리한테 잔인한 짓을 했는지." - 점심시간.. 내 옆에는 이름도 모르는 여자애들만 득실득실 앉아있고 이재준, 정우현, 가승휘 얄미운 삼인방은 나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고 있다. 내가 괜찮다는 걸 알리기위해 밥이며 반찬을 힘차게 입으로 우겨넣었다. 금방이라도 역류 될 거 같은 느낌에 찬물을 넘기며 그쪽을 쳐다보자 그들은 내가 안중에도 없는 듯 웃음꽃을 피우며 밥을 먹고 있었다. 저 삼인방을 멀리 하겠다 마음 먹은 건 나였건만.. 뭐가 이렇게 허전하고 쓸쓸한건지 모르겠다. 나는 버려도, 그들은 날 버리지 말았음 하는 이기심일까? 더이상은 못먹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직 많이 남은 식판을 그대로 비워버리고 교실로 향했다. "저기요..." 그때 갑자기, 뚫어져라 땅만 보고 걷는 나를 붙잡는 가녀린 손.. 금방이라도 울듯한 목소리이기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학교 옆에 있는 사립 중학교의 교복을 입고있는 여자애였다. 어쩐지 나랑 키가 비슷하더라니.. 나는 중학생 수준의 키라는 건가? "왜...?" 여러번 말했듯, 낯선 사람들과 말을 섞는것에 공포심이 있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왜' 라고 물었다. 그러자 여자애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듯한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연예인으로 데뷔한다면 국민여동생 칭호를 들을 정도로 귀엽고 예쁜 외모였다. 여자인 나조차도 안아주고 싶을만큼 사랑스러웠다. "재준.. 오빠 어느반인줄 아세요?" "재준이...?" "이재준이요, 이재준." "........" 지겨울정도로 머리에 박힌 이름에 흠칫 놀라 여자애를 쳐다봤다. 이제 누가됐든 재준이를 찾는다는 말만 들으면 경계심이 먼저 생긴다. 이 곱디고운 외모로 재준이를 꼬셔서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는 건 아닐까.. 별의별 상상을 다 하고 있을 때, "재준이 오빠...." 갑자기 여자애가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놓고 등 뒤에 있는 누군가에게 뛰어간다. 재준이 이름을 부른 걸로 봐서, 재준이겠지. 나는 단순한 결론을 내리며 빙그르르 뒤를 돌았다. 그런 나에게 보이는 충격적인 장면하나. 그 천사같은 여자애는 엉엉.. 서러운 울음을 토하며 재준이의 품에 안겨있고 우현이와 승휘는 그런 둘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기들도 남자란건가... 그 천사같은 여중생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재준이는 영문도 모른채 여중생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그리고 옆에 있던 우현이가 목발이 불편한지 몸을 틀더니 웃으며 말한다. "어, 주아맞지? 너 어떻게 나온거야?" ".......오빠...." 우현이도 아는 여자앤가? 그렇다면 KG와 연관이 되어있나? 설마... 재준이가 꼬셨다는 그 얼짱 여중생이 저 아이란 말인가? 나는 냉전중이란 사실도 잊고 멀뚱히 서서 그들을 쳐다봤다. 그때.. 재준이의 품에서 얼굴을 뗀 주아라는 여자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죽였어요...." "......." 저 천사같은 여자아이에게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 나오자 우리넷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죽이다니, 누굴...? 미친듯이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어제 내 눈으로 목격한 엑스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또 누가 죽었단 말이야? "엑스.. 아저씨를.. 죽였어요.." 엑..스? 그 이름을 듣자마자 둔탁한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 맞은 거 마냥 멍한 느낌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들쪽으로 발을 옮겼다. 하지만 충격을 받은 건 세남자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다가오는 날 눈치도 채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저 나오고 싶어서, 돈 욕심나서.. 그런 계약 한거 아니에요... 정말..." 계약?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어깨를 떨며 이야기하는 주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승휘는 뭔가 짐작가는 게 있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욕을 뱉었다. "싸인안하면.. 총을 쏘겠다고.. 막 협박했어요.. 오빠도 없고.. 무서워서..." "......." 불길한 느낌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재준이는 주아의 어깨를 약하게 움켜쥐었다. "재준이오빠, 저 이제 어떡해요? 너무 무서워요..." "주아야.. 무슨 소리야, 그게.. 울지말고 차근차근 천천히 말해볼래?" "워너비 제2조팀..." "......" "어제부터.. 활동 시작했어요." - 주아라는 여중생과 세남자는 나가서 얘기하자며 나를 따돌리고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결국 혼자,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수업을 받는 중이다. 나는 아까 그 여중생이 했던 말들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손톱을 깨물었다. 워너비 제2조 팀... 그럼 킬러역할을 하는 팀이 또 있었단 말이야? 어제 엑스를 죽인사람이 그 어린 여중생이 있는 팀이라면.... 나는 이제껏 엄한 사람을 의심한 꼴이된다. 이제 그 애들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지 앞이 막막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제 같은 일이 없었다면 영영 그 애들이 어떤 일을 하게될 지 모른채로 살았을거란 걸 생각하면 다행이기도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KG 그 또라이같은 기관에 대해 화가났다. 아직 어린 여중생까지 끌어들여 그런 프로젝트를 진행시킨다는 데에 새삼 충격을 먹었다. 비 인간적이라는 건 알았지만... 어째서 재준이를 비롯한 세남자가 날 그곳에 집어 넣지 않으려 용을 썼는지를 알것 같았다. "이재준, 가승휘 그 자식들 또 말없이 조퇴를 해? 내일 보면 교무실로 튀어오라그래!" 결국 학교가 끝날때 까지.. 녀석들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미안함과 씁쓸함이 뒤섞인 아주 더러운 기분으로 집으로 향했다. "......" 자꾸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 같은 느낌에 걸음을 빨리했다. "아악!!" 그런 내 앞을 누군가가 턱- 막아버린다. 나는 바로 방어자세를 취한 채 앞을 쳐다봤다. "정우현...." 내 눈앞에 있는 건 거짓말같게도 정우현이었다. 어쩐지 눈 깜빡할새에 내 앞에 오더라니...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녀석을 노려봤다. 하지만 더 사납게 노려보는 정우현 덕분에 눈을 깔고야 말았다. 녀석들이 킬러일에 관련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말을 믿어주지 않은 건 엄연한 내 잘못이었다. "세명을 대표해서 왔다." 숨을 죽인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나에게, 선언문 발표하듯 크게 말하는 정우현. "어째서 넌 우릴 믿지 못했는지.. 변명할 시간을 1분 주겠다더라." "......" "같이가자." Writer. 홍양 29. 너무 잘 통해서 불만인 우현이의 동반이동을 이용해 단숨에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나는 아주 멀쩡히 도착했지만.. 우현이는 착지가 잘못된 모양인지 바닥을 뒹굴며 다리가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또 보네..." 오늘 역시 섹시한 자태를 맘껏 뽐내고 있는 하진이언니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둥그런 쇼파에 둘러앉아 있는 승휘, 재준이, 그리고 아까 본 주아라는 여중생. 나는 아직까지 엄살을 부리고 있는 우현이를 일으켰다. 그러자 내 등을 쇼파쪽으로 떠민다. 마치 한가족 처럼 둘러 앉아 있는 그들은 보기에도 엄청난 양의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주지마요.." 하진언니가 건넨 스푼을 뺏으며, 나를 노려보는 재준이. 저 자식이.. 내가 얼마나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지 알면서... 분개한 나는 녀석을 째려봤다. 뭐니뭐니해도 이 가운데 가장 만만한건 재준이 뿐이었다. "언니 안녕하세요.." 그때, 재준이 옆에 앉아있던 예쁜이가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아마 울고 있을 때 옆에 있었던 나를 기억하는 듯 했다. 다행히 안정을 찾은 듯 보이는 여자애에게 '응, 안녕' 이라고 말한 후 다시 한번 뻘쭘하게 섰다. 내가 가장 눈치가 보이는 건 바로 가승휘.. 마지막으로 승휘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 그 애는 날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오히려 하진이 언니 쪽을 쳐다보며 뭔가 심각한 얘길 나누었다. "누나가 제 2조까지 매니저일 해준다고?" "응.. 워낙 극비라 너희한테 얘기 못한건 미안해.." "우리랑 똑같은 일 하는거야?" 2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왔음에도 여전히 사무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승휘의 모습에 마음 한켠이 시렸다. "응. 이유진이라고 천리안 에스퍼랑, 김하영이라고 독심술 에스퍼.. 그리고 주아까지.." 예상대로였다. 주아라는 저 아이도 에스퍼였다. 저렇게 가녀린데.. 그곳에서 어떻게 버텼을까... 불쌍한 마음과 함께 존경심마저 들었다. "주아는 아직어리니까 빼려고 난리를 피웠는데도, 그 악마같은 놈들이 말을 들어먹어야 말이지.." "......" "주아가 어려도 염력 에스퍼들 중엔 제일 낫잖냐.." 주아는 염력에스퍼였나보다. 그러고보니 시체를 옮길 때 염력을 사용했을거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주아가 시체를 옮기는 일을 했단 말이야? 내가 충격에 빠져 있는 사이에 재준이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민지율, 변명할 기회 1분 주겠다는 말 들었지?" "무슨 변명?"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하진이언니가 흥미롭단 표정으로 물었다. 저 자식이.. 어린 예쁜이까지 보는 앞에서 날 망신주려 작정한 게 틀림없다. 나는 속으로 생각해 놨던 말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변명 같은 거 하러 온거 아니야." 첫번째로 생각해놨던 말을 하자, 내쪽은 보지도 않던 승휘마저 나를 쳐다봤다. 주변공기가 점점 냉각되어갔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준비했던 말을 아낌없이 내뱉었다. "오해의 여지가 있었잖아. 너희가 나라도 똑같았을거야. 거짓말처럼 딱딱 들어맞는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아니.." "......." "아무리 앞뒤가 맞아도 니가 아니라면 아니야. 적어도 나한테는." 가만히 있던 승휘가 말하자, 하진언니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했던 대로 얘기가 흘러가지 않자 말문이 막힌 나는 고개를 떨궜다. 그 때, 뒤에 있던 정우현이 살짝 굳은 얼굴로 내 어깨를 잡았다. 적어도 사과는 할줄 알았는데 사과조차 하지 않자 화가난 듯 했다. 나 역시 왜 바보같은 말만 중얼대는지 내 자신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1분 지났다." "......." "너 그냥 집에 가라." 순간이동으로 데려다 줄 모양인지 손을 붙잡기에, 나는 손을 떨쳐냈다. '의심해서 미안해.' 이 한마디가 어쩜 그렇게 나오질 않는건지... "어차피 똑같은 거 아니야? 이번엔 다른 팀이 했다지만.. 너희도 똑같아 질거잖아!"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모두들 놀란 듯이 나를 쳐다봤다. 정우현은 한숨과 함께 뒤돌아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자켓을 걸치고 나왔다. "속이 존나 갑갑해서 밖에 좀 나갔다올게요, 매니저님." 쾅- 소리 나게 현관문을 닫고 나가버린 우현이 덕분에, 나는 더 궁지로 몰리고 말았다. 아이스크림은 점점 녹아갈텐데.. 급히 스푼을 놀리지 않고 빤히 나를 쳐다보는 네 사람. 주아마저도 약간 실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이, 아가씨.." 그 때 턱을 괸채로 나를 부르는 하진이 언니. 나는 대답대신에 언니쪽을 쳐다봤다. "워너비 프로젝트.. 그거 때문에 싸웠나본데.." "......" "그거 다 너 때문이거든?" 언니가 거기까지 말을 마치자 승휘가 벌떡 일어나 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가자며 갑작스레 내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게 언니를 더 자극한 행동이었는지 싸늘한 눈을 한채로 내게 말했다. "애들 사람 죽이는 거 싫어? 그럼 니가 애들 인생에서 빠져." "......." "애들 약점.. 우리끼리는 워너비콤플렉스라 그러는데 그게 누군줄 알아?" "닥쳐." 그 때, 심장을 관통할만큼 싸늘한 목소리로 승휘가 하진이언니를 향해 말했다. 언니는 당황한 듯한 얼굴로 승휘의 얼굴을 쳐다본다.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세상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감독관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하진이언니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 건 명백한 하극상이었다. "미안.. 주제넘었지? 너희들 일인데." 이윽고 평정심을 찾은 듯, 담담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하진언니. 한바탕 폭풍이 불 줄 알았더니.. 이렇게 넘어가는 걸 보니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승휘를 좋아하는 마음이 큰 듯 했다. 그렇게 모두가 숨을 죽인 와중에 재준이가 하품을 하며 주아를 향해 물었다. "너희조도 세명이면 우리 미팅이나 할래?" ".......미팅이요?" 저게 어린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승휘는 내 팔을 놓고 다시 쇼파쪽으로 향했다. "매니저님. 우리 미팅 시켜주세요!" 생글생글 웃으며 부탁하자, 하진언니 역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매니저라는 사람이!! "대신 승휘한테는 못 찝쩍대게 해라." 하진언니가 허락할 줄은 몰랐기에 난 너무 놀라고 말았다. 저 여잔 승휘를 좋아하지 않나! 어쩜 저리 쿨하게! "내일 저녁 여섯시. 학교 근처 스토리카페." 누구 들으라는 듯 크게 약속장소와 시간까지 정하는 재준이. 나는 힐끔 그쪽을 쳐다봤다. 가승휘 저 자식은 그런데 안끼겠지? 그럼 3 대 3이 안될텐데...... "콜."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가승휘는 재밌겠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오케이 해버린다. 낙동강 오리알마냥 넓은 오피스텔에 고립되어버린 나. 저들 눈에 내가 보이기는 하는걸까? 결국 정우현이 돌아온 뒤에야.. 나는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야! 그런게 있으면 미리 말을 해줘야지! 나 옷도 준비 안했는데!" 오늘도 역시 우리반에 온 우현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어제 저녁.. 나가 있느라 미팅소식을 방금 접한 정우현이 안나가겠다는 말은 안하고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냐며 따지고 있다. 자리를 옮긴 탓에, 나는 그들과 떨어져 혼자 앉아있고 승휘와 재준이 그리고 방금 합세한 우현이까지 셋이서 내 앞에서 떠들었다. 재준이가 혼자 여기 앉아있을 때 기분이 이랬을까... 나는 억지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자는척을 해야 지금 이 상황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내 귀에 정우현의 한껏 들뜬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쁘대?" "몰라. 주아빼고 이유진이랑 김하영이라는데." "이름은 들어본 적 있는데.... KG여자애들은 전체적으로 예쁘니까!" 상당히 들떠보이는 세 남자. 왜 섭섭한거지? 설마.. 너 질투하냐? 대체 셋중에 누구를? 오랜 친구인 재준이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질투한다고 여기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여러여자를 만난 재준이를 보면서, 한번도 이런 느낌을 받아본적이 없었기에 확실히 재준이는 아니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상야릇한 느낌이다. - 학교를 마치고.. 멋지게 옷을 빼입겠다는 말과 함께 오피스텔로 가버린 삼인방. 이제는 데려다 준단 말도 하지 않은 덕택에 혼자 집으로 가는 길.. 그냥 집으로 가면 될 것을 나는 미련이 가득한 이혼녀마냥 그들의 뒤를 밟고 있었다. 그러다 힘에 부쳐, 미리 스토리카페에 가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못났다 싶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집으로 간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지 않았다. 미팅이란걸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호기심도 있고... 그렇게 내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쥬스한잔을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세 남자가 걸어왔다. 다행히도 내가 염탐하기 좋은 자리에 나란히 앉는다. "거봐, 안왔잖아! 좀 더 늦게 오자니까.." "정우현 니가 그래서 나보다 인기가 없는거야. 여자들은 이렇게 미리와서 기다려 줘야 된다고." "나 인기 많거든? 지나가는 여자애들 마다 내 손을 막 잡아대서, 봐봐.. 지문 없어졌지?" 가승휘, 정우현, 이재준.. 순서대로 앉아 있었다. 심플한 체크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못보던 뿔테안경을 끼고 나온 가승휘와 흰색 후드티에 까만바지, 깔끔한 비니를 눌러쓴 정우현. 재준이는 정열적인 빨간하트가 그려진 티셔츠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셋 중.. 제 짝을 찾으려는 의지가 강해보였다. 더럽게 멋있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쇼파뒤로 몸을 숨기며 감탄을 했다. 아이고, 잘생기긴 더럽게들 잘생겼네. 삼인조 아이돌같구나. "어, 주아다." 그때, 재준이가 문쪽을 가리키자 주아를 필두로.. 긴 생머리를 한 여자와 숏커트의 여자가 카페안으로 들어왔다. 확연히 구분되는 상반된 이미지였다. 그녀들은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세남자를 향해 다가오더니, 망설임없이 자리에 앉았다. 완벽한 미팅 분위기를 내고 있는 에스퍼들. "아, 너희같은 여자들이 있는 줄 알았다면.." "......" "담을 넘었을텐데.."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가승휘의 선제공격에 여자들은 자지러지게 웃고, 우현이와 재준이는 나와 똑같은 표정으로 얼고야 말았다. 그렇게 그들의 심상치 않은 미팅은.. 시작됐다. Writer. 홍양 30. 블루블랙 숏커트 머리에 음침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여자가, 독심술을 한다는 김하영이었고 시종일관 환한 미소를 띄고 있는 긴 생머리의 여자가, 천리안을 지닌 이유진이란 여자였다. 둘은 스물둘 동갑내기였다. 세 남자보다는 누나라는 뜻이다. 하지만 당돌하기 그지없는 놈들은 친구마냥 말을 편하게 놨다. 외모로 치자면 주아가 가장 훌륭했지만 어린 나이 때문인지 약간 겉도는 느낌이었다. "굼벵이가 기어가다 달팽이를 만났어. 굼벵이가 너무 힘드니까 나 좀 태워달라 그러고 달팽이 등에 탔거든?" 우현이는 어디서 본건지 모를 유머를 벌써 세개째 치고 있었다. 그녀들은 KG에 오래있어선지 처음듣는 이야기라며 웃었지만.. 나는 헛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런데 때마침 거북이가 기어가는거야. 그래서 달팽이랑 굼벵이랑 거북이 등에 탔는데.." ".......탔는데?" "달팽이가 굼벵이보고 뭐라 그랬게?" "뭐라 그랬는데?" 다들 기대에 찬 눈으로 우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스퍼들은 바깥세상을 몰라서인지, 모아놓으니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많았다. 가승휘마저도 궁금하단 눈으로 정우현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야, 꽉잡아. 이 새끼 존나 빨라!!" 우현이의 말에, 구석에 음침하게 자리잡고 있던 김하영이라는 여자까지 풋 하고 웃음을 날렸다. 반면에 나는 썩소를 지으며 돌아앉았다. 재준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런 유머같으면 하루종일이라도 떠들 수 있었다. 저 흔해빠진 유머. 게 중 웃음이 흔한듯한 이유진이라는 여자는, 한참을 웃다가도 힐끔 승휘쪽을 바라본다. 객관적으로 가승휘가 가장 남자답게 잘 생겼으니 눈길이 가는 건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정우현이 아무리 시덥잖은 유머를 쳐도, 재준이놈이 하트 티셔츠를 입어도 여자 입장에서 첫 만남에 가장 끌리는 건 승휘쪽이었다. 물론 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우현이오빠." "응?" "자리 좀 바꿔주세요." 그때 갑자기.. 가운데 앉아있는 우현이를 향해 자리를 바꿔달라는 주아. 아까부터 느꼈던 거지만 녀석은 재준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듯 했다. 당당하게 옆자리를 요구하는 게 꽤 멋져보였다. 나이만 먹은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우현이는 선뜻 자리를 바꿔주었다. 덕분에 우현이와 주아는, 여자둘.. 남자둘 사이에 낀 채 꽤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김하영이라는 독심술 에스퍼만 빼면 훈훈한 분위기였다. 저 여잔 뭐가 불만인지 아까부터 표정이 딱딱히 굳어있었다. "다들 1급에스퍼야?" 미팅까지 와서 급을 따지려 드는 우현이의 물음에 여자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1급인 승휘나 특 3급인 재준이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2급 에스퍼인 우현이는 존경스럽다는 눈빛을 보낸다. "저.. 저는 3급이요.." 재준이와 무슨 얘기를 나누던 주아가 3급이라고 하자 우월감에 젖은 미소를 날렸다. 어쨌든 나는 완전히 잊혀졌다는 기분에, 씁쓸한 패배감에 젖어 이만 갈까 하고 못 다마신 쥬스를 빨대를 뺀채 한입에 털어넣었다. 우걱우걱 얼음까지 씹어먹었다. 그리고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카페안에 낮게 울려퍼진 여자목소리에 나는 흠칫 놀라 다시 쇼파에 몸을 기댔다. 좋은 분위기에서 뜬금없이 화를 낸건 김하영이라는 독심술 에스퍼였다. "민지율이 누구야?"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길래, 나는 너무 놀라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려 몸을 웅크렸다. 설마 내가 왔다는 걸 눈치챈건가? 이 모습을 들키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세달간 재준이의 놀림감이 될 것이 뻔했으므로 숨마저 멈춘 채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여자지?" 김하영이 다시 한번 따져묻자, 모두들 언채로 아무말도 하질 않았다. "야, 이유진 일어나." "갑자기 왜이래..."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승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이유진이라는 여자와 함께 나가려 한다. 주아는 난감한듯 자리에서 일어나 말려 보지만 "민지율.. 민지율.. 그 여자생각을 왜 이렇게 하는거야, 너희들?" "......." "둘이 동시에 그 여자 사랑이라도 하는거야?" 김하영이라는 여자는 상기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그 여자가 말하는 둘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에 나는 누굴까 머리를 굴렸다. "기분나빠서 더는 같이 연기 못해주겠으니까 간다." 독심술 에스퍼답게 녀석들의 속마음을 읽은 모양이었다. 주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줄 몰라했고 재준이는 '독심술 무섭네' 라고 말하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주아를 안심시킨다. 그렇담.. 지금 녀석들이 내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거야? 찔리는 마음에 얼른 자리를 벗어나려 책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이곳에서 벗어나려던 그때. "민지율.. 나와, 이제.." "....." "거기 있는거 알아." 승휘가 나를 부른다. 나는 못들은 척 카페 한바퀴를 돌아 뛰어나갔다. 그리고 카페 뒤 벤치에 앉아 거친 숨을 골랐다. 가승휘.. 내가 자기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단 말인가! 형언할 수 없는 쪽팔림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이대로 혀를 깨물고 죽고만 싶었다. "어억!!" 그때, 내 바로 코앞에 정우현이 나타났다. 언제든 내 얼굴만 떠올리면 나타날 수 있는 정우현이 얄미웠다. 이럴 땐 그냥 보내줘도 좋건만.. 날 찾아서 뭘 하겠다는 건지.. 녀석을 노려보고 있는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 우현이는 전에 봤던 호출기를 꺼내 누군가에게 말한다. "카페 뒷편이다. 오바." 오바 같은 소리하네.. 녀석이 호출을 하자마자 승휘와 재준이.. 그리고 재준이 옆에 있는 주아까지 한심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나마 주아의 눈에는 동정심이 가득했지만, 세 놈은 달랐다. 더이상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초탈한 채로 물끄러미 재준이를 쳐다봤다. "쥬스가 먹고 싶었어." "민지율.." "진짠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건 정우현의 전문분야이건만.. 어째서 난 이 순간까지도 녀석들에게 솔직한 내 심경을 털어놓지 못하는 걸까? 살인자 취급한것도 미안하고, 상처주는 말만 골라한것도 미안하고, 이렇게 미팅장소까지 쫓아와서 산통 깨놓은것도 미안하고.... 미안한 거 투성이인데.. 차마 미안하단 말이 입 밖에 떨어지질 않았다. 이 상황에 제일 답답한 건 나, 민지율이다. "사과하러 왔음 사과를 해." 재준이가 답답하다는 듯 한마디 했다. 결국 나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말했다. "그래, 미안해.. 너희들 못 믿고 의심한거..." 세 남자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혼잣말하듯 말을 뱉어내고 있는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무슨 얘기라도 더 하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풀이라도 붙여 놓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은 입을 다시 한번 떼냈다. "너희가 그런일을 하게 될 거라는거..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너희한테 화내서 미안해.." "우리가 서운한건.." "......" "니가 화를 내서가 아니야." 잠자코 말을 듣던 우현이가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람을 죽였어도 감싸주는 건 바라지도 않아." "...." "대신 믿어는줘야지.. 우리가.. 아니랬잖아." 우현이의 말을 듣자마자 녀석들이 무슨말을 해도 들으려하지 않았던 내 모습이 떠오르며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언니..." 그 때, 재준이의 옆에서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주아가 나를 부른다. 비교될까 무서운 예쁜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에스퍼들의 인생에서 행복이나 사랑이 차지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뜬금없이,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멀뚱히 주아를 쳐다봤다. "일생 전체를 24시간으로 친다면.. 1시간도 안돼요." "....." 어린 주아마저 못난 나를 가르치는걸까?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부끄러웠다. "오빠들한테 등 보이지 마세요. 그 시간을 언니한테 바치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 재준이는 주아를 데려다주겠다며 먼저 사라져버리고 나와 우현이, 승휘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누가봐도 주아 쪽이 더 위험해보이긴 했지만.. 망설임없이 주아쪽으로 간 재준이가 얄밉기도 했다. 정우현이 순간이동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걸 승휘가 말리는 바람에 간만에 찬바람도 쐴 겸 셋이서 나란히 걷는 중이었다. 그놈의 다리는 언제 나을 예정인지 계속 절뚝거리는 우현이. 볼 때 마다 내가 그렇게 만든것 같아 찔리는 걸 아려나.. 우현이가 입을 다무는 바람에, 우리는 가는 동안 아무말도 나누지 않고 집앞에 도착했다. 무거운 공기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제 들어가봐.." "위에 이사온 모양이네?" 우현이의 말에 위를 올려다보자, 옥탑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어제 하루종일 시끄러웠던 이유가.. 이사였구나. 왠지 재준이의 흔적마저 아예 사라진 것 같아 씁쓸한 느낌에 녀석들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열였다. 그리고 발을 들여놓으려는데.. "미팅하면서 자꾸 니 생각한 두남자 중 하나가 나다." 우현이가 목발을 척.. 대문에 걸치며 말했다. 나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녀석을 올려다봤다. 장난인 줄 알았건만 놈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 때.. 뒤에 있던 승휘가 우현이의 목발을 쳐내는 바람에 우현이는 쓰러질 듯말듯 위태로운 포즈로 승휘를 노려봤다. "나머지 하나는 나고.." 그 말을 끝으로 승휘는 우현이를 질질 끌고 사라졌다. 나는 알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혀 녀석들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만 보고 있었다. Writer. 홍양 31. ※재준번외 1※ "야, 신입! 물 좀 떠와라."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녀석들 말을 듣고 짐작하긴 했었지만 이 정도 일줄은 상상도 못했다. 지겨우리만큼 촘촘히 짜여진 틀 속에서, 나는 훈련을 받았고.. 또한 선배라는 것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살았다. 성질같아서는 발로 차버리고 싶은걸 속없는 놈마냥 실실웃으며 물 한잔을 가져다주자,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쓰다듬는다. "아우- 귀여운 녀석." "시키실일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지율이랑 약속한 기간, 한달. 한달안에 어떻게든 나가야했다. 난. 그러기 위해선 KG에 대해 많은것을 알아둬야 했다. 깐깐하게 굴때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지난 일주일동안 나는 거의 기계처럼 훈련만 받고 살았다. 이곳사람들이 날 괴물이라고 부를만큼 놀라운 습득력이었다. 최단기간만에 카운트능력을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와있었다. 이제 예전처럼 원치 않는 정보를 볼일은 없었다. 내가 필요한 사람의 정보만 캐낼 수 있었다. 그걸 습득하는 게 힘들다고 했지만, 내겐 어렵지 않았다. 진작 방법만 가르쳐 주었더라면 KG 안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나혼자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들의 말대로 카운트라는 능력은 한계가 있었다. 굳이 밖으로 내보내야 할 명목이 없는 능력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날 기관안에 두면서 필요할때마다 불러다 쓰는 게 유리하다고 여겼을 터였다. 미칠 것만 같았다. 한달안에 나가지 못하겠다는 약한 마음이 들수록 나는 KG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점점 더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첫번째 타겟은 나와 트레이닝 시간이 겹치는 유일한 여자에스퍼가 임주아. KG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염력을 가진 여자아이였다. 사람 몸속에 장기를 빼내는 훈련을 받고있다니 끔찍하긴 해도 나중에 도움이 될 법했다. 게다가 예쁘다는 게, 내가 그애를 첫번째 타겟으로 여기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얘기로만 들었을땐 몰랐는데, 식당에서 마주친 순간 나는 3살이나 어린 꼬마라는 것도 잊고 '예쁘네...'라고 혼잣말을 했다.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 얼른 시선을 거두는 모습이 귀여워 먼저 다가가주기로 했다. "너 참 예쁘다." "....네?" "왜, 예쁘단 말 지겨워?" 뒤에 감독관들을 대동한채로 거침없이 말하자, 임주아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감독관은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얼른 가자고 했지만 나는 임주아를 향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또봐." "....." "임주아." 그리고 두번째 타겟은 도하진. 젊은 나이임에도 KG의 총괄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내 편으로 만들면 확실히 도움이 될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트레이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커피를 마시고 있던 도하진과 마주치자 나는 이때다 싶어 인사를 건넸다. 도하진은 도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듣던대로 굉장히 예뻤다. 전형적으로 예쁘게 생긴 얼굴이라기 보단 매력있는 얼굴이었다. 어딜가도 눈에 띌만한 외모였다. 천하의 이재준마저도 위축되게 하는 포스가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커피 사주세요." "몇 급이지?" 이곳에서는 이름을 먼저 묻기보다는 급을 먼저 따졌다.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들어온지 얼마 안되서 급은 모르겠는데, 외모론 A급 아닌가요?" 내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시던 커피를 나에게 건네준다. 남이 입댄걸 못먹는 깐깐한 나였지만 기분좋게 받아마시자 도하진이 팔짱을 낀채로 나를 쳐다본다. 이건 웬 놈이냐는 표정이었다. "이름이 뭐지?" "이재준." 내 대답에 도하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아, 니가 말로만 듣던 괴물이구나. 듣던대로 당돌하네." 괴물이라. 썩 마음에 드는 별명은 아니었지만 비위에 맞춰 웃어주자 도하진은 날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 역시 카운트를 쓸 생각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능력은 듣던대로 투명인간, 나이 25세. 키 172에 몸무게 52kg, 가슴 C컵... 오 괜찮네, 이 여자. 가장 마지막에 눈에 띈 정보는 가승휘와 정우현의 매니저라는 사실이었다. 놀랍고도 구미가 당기는 정보였지만 담담한 척 도하진에게 빈 컵을 건넸다. 이 여자를 어떻게든 이용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만 구슬리면 지율이가 어떻게 사는지도 알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지끈 머리가 아파왔다. 또 비가 오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두통이 밀려옴에도 꿋꿋하게 도하진을 향해, 작업멘트를 날렸다. "언제 밥한번 같이 먹어요." "뭐?" "엉덩이가 섹시해서요, 한눈에 반했거든요." "너, 내가 누군지 알고 까부는 거야?" 도하진은 내가 싫지 않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나는 주특기인 윙크를 날리며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알수 없는 놈이다. "내 능력이 카운트인데, 모를리가요." "어쭈." "누나한테만 알려주는건데요... 비 많이 올거에요, 우산 챙기세요." "까분다, 이렇게 맑은데 무슨 비야." 도하진이 헛소리 하지말라는 듯 웃자 나는 두고보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1분뒤..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녀가 등지고 있는 창문을 가리켰다. 그러자 도하진은 뭐냐는 표정으로 뒤돌아본다. "오잖아요, 비." "........" "아, 이럴 때 밖에 나가서 뛰고 싶은데.. 누나가 나 데리고 나가주면 안돼요? 비오는 날 데이트 하는 거 좋아해요?" 도하진은 멀뚱히 서서 퍼붓고 있는 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일기예보에 비온단 소리 없었는데...' 하고 혼잣말인듯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도하진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다른 여자들은 이쯤하면 나한테 반했다 어쨌다 귀찮게 굴 터였다. "일기예보 보지말고, 앞으로 나한테 물어봐요. 내가 백발백중이거든요." "뭐?" "내가 머리아프면 비오고, 내 기분 좋은날엔 해가 쨍쨍하고... 아 또.. 감기몸살로 앓아누우면 폭설. 내 몸이 일기예보보다 정확하거든요." "......" 도하진이 눈이 동그래진 채로 날 쳐다봤다. 아까까지만해도 볼수 없었던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작업이 먹혀들어가는건가, 역시.... 나는 여자들이 껌뻑 넘어가는 미소를 지으며 도하진에게 한걸음 더 다가갔다. 넘어왔어, 도하진... 이제부터 내뜻대로 움직여줘야겠어. 하지만 다 넘어온 것 같았던 도하진이 한 팔을 들어올려 나를 제지한 뒤 말했다. "자세히 말해줄래?" "뭘...." "니가 했던말. 니 몸이 일기예보보다 정확하다는거." - 그 뒤로 나는 도하진 덕분에, 카운트 말고도 내게 다른 능력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날씨를 조종하는 능력. 조종하는 건 1km에 불과했지만, 날씨를 감지하는 능력은 탁월했다. 수많은 에스퍼들이 있지만 날씨조종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트레이닝 시간이 5시간 더 늘어났고 감시하는 감독관도 2명이나 늘었다. 급도 A+급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당연했다, 이곳에선 능력의 희소성을 최고로 쳤으니까. "하아-" "괜찮겠어, 더해도?" "네. 더해요." 운동을 많이해서 탈진할 때도 있었지만 초능력을 많이 사용해서 탈진할 때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를정도로 아팠다. 숨도 못쉴만큼 괴로웠다. 링겔도 소용없었고 단지 고도의 정신력으로 버티는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트레이닝을 더 받겠다고 욕심을 부린 적도 많았다. 하루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야했기 때문이었다. "이재준." "......." "그러다가 너 죽어! 급할 거 없어, 뭘 그리 서두르는거야? 천천히해도 돼." 용케도, 내가 무리해서 힘을 키우려는 걸 눈치챈 도하진이 내게 다그치듯 말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지켜줘야 할 꼬마가 있어서." "........" "나 빨리 나가야돼. 도하진.. 나 좀 도와줘. 더해,. 더." 도하진은 못말린다는 눈으로 다시한번 트레이닝 시스템을 가동시킨다. 익숙하고도 낯선 통증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느껴진다. 민지율.. 넌 뭐하고 살아.. 난 이렇게 잘하고 있는데 바보처럼 질질 짜고 있는거 아니지? 나도 너없이 살아본적이 없어서 낯설고 힘들어. 그래도 약속했으니까 어떻게든 나갈게. 나 약속은 지키는 놈이니까. 오빠가 간다. 기다려. - 오랜만에 주어진 꿀맛같은 시간. KG에서 특별히, 한달에 한번씩 자유시간 3시간을 주는 날이었다. 지겹도록 따라붙던 감독관들과 연구원들도 없다. 순간이동에스퍼들은 집을 다녀오겠다고 했지만 나는 3시간안에 지율이를 보러갈 수가 없어서 KG 건물 뒷편에 자리한 잔디밭에서 다른 에스퍼들과 축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멀리서 임주아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민망하리 만큼.. 빤히.. 또 나한테 반한건가, 피곤해죽겠네. 이렇게 알아서들 빠져주시니.... 어쨌든 친해져두면 쓰일데가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억지로 공을 주아쪽으로 찼다. 그러자 놀란 표정으로 공을 주워든다. 참.. 예쁘긴 더럽게 예쁘네. 열여섯이라... 아, 열일곱만 되도 한번 해보는건데.. 나는 다시한번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주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주아에게서 공을 빼앗아 잔디밭쪽으로 던진 뒤 말했다. "임주아." "....네?" "사진 같이 찍어줄래? 너랑 사진 한번 찍어 놓고 싶어서." 주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KG가 지급한 최신형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더 붙어야 나오지." 멀뚱멀뚱 서있는 주아를 내쪽으로 끌어당겼다. 녀석의 몸이 살짝 떨리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런데 하필 이때, 감독관 여럿을 대동한 우현이가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더니 KG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여기까지와서 이러고 있는 내가 한심하다 이거지? 정우현 나는.. 반쪽같은 친구 민지율을 위해 비지니스 중이라고. 억울한 마음을 숨긴채 가증스럽게 브이를 하며 웃는다. KG를 온 이후로 마음이 시켜서 웃는 일은 없었다. 매일 계속되는 트레이닝은 나를 지치게 했고, 그래서 예민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그 누구도 나를 사람으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괴생명체. 이용할 가치가 있어보이는 물건에 불과했다. 천하의 이재준이가 말이다. 그러고보니 나때문에 얼굴을 붉히고 있는 임주아가 참 귀여워 보인다. "치~즈" 주아의 천진난만한 외침에, 나도 모르게 방긋 웃었다. 그애에게서 기분좋은 향기가 풍겨왔다. Writer. 홍양 32. ※재준번외 2※ KG에 들어온지 꼬박 2주일이 흘렀다. 생각없이 보냈던 2주가, 이렇게 긴건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KG에 있는 모두가 나의 능력에 집중했고, 어떻게든 더 키우려고 발악을 했다. 조금만 더 흡족하게 하면 나갈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난 무조건 열심히.. 주어진 모든일을 해냈다. Z로 시작해서 A+로 단숨에 올라온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난 별다른 시험을 거치지 않고도, 최고로 치는 특 3급의 지위까지 획득했다. 그럴수록 나는 고립되어갔다. 날씨조종이란 능력은 내 모든걸 바꿔놓았다. 이제 감독관이나 매니저가 날 가만두는 시간은 밥먹는 시간에 불과했다. 오늘도 역시 식당에서 마주친 임주아가 쭈뼛거리며 내게 편지를 건넨다. 열통째라지, 오늘로써. 나는 기계적으로 손을 내밀어 편지를 받은 후 주머니안에 구겨넣었다. 사람들을 이용해 KG에서 나가려던 계획이 진행되지 않는 이상, 내가 임주아에게마저 신경써줄 필요는 없었다. 이 아인 내가 초반에 좀 잘해준 걸 가지고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모양이었지만. 내가 자신의 편지를 구겨넣는 것을 보고 황급히 뒤돌아서는 주아. 내 몸이 조금만 덜 힘들었더라도 가식적인 웃음이라도 지어줬을테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힘들었다. 입맛도 없어서 물 한컵을 입에 털어넣고 식판을 비워냈다. 그러자 기다렸단 듯이 감독관이 따라붙는다. 지겹다.. 뭐든 내맘대로 하길 좋아했던 내가 견디기 힘든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때, 멀리서 도하진과 함께 가승휘가 걸어온다. "어, 이재준." 도하진이 나를 향해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든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승휘에게 다가갔다. 얼음장같은 자식이 마음에 들리 없었지만 지율이의 안부라도 물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녀석이 내가 뭘 궁금해하는지 눈치챈 모양인지 도하진을 향해 "먼저 가있을래?" 하고 자리를 피해주라고 하자, 도하진은 둘이 아는사이냐며 몇번 캐묻더니 먼저 걸어갔다. "저기, 할말이 있어서 그런데.. 5분만 시간을 주세요." 정중한 말투로 감독관들에게 말하자 거짓말처럼 물러서주는 감독관. 새삼 가승휘가 이곳에 얼마나 오래간 머물렀는지를 알 수 있었다. 가승휘는 내가 묻기도 전에 먼저 대답했다. "지율인 잘있어." "후, 그래?" "초반엔 많이 힘들어했는데, 이제 점점 마음정리하고 있어. 니가 말한 한달 약속... 믿는 모양이야." 가승휘는 한달이 말도 안된다는 양 말했다. 하긴, 나도 장담할 수 없었다. 능력을 키워서 A+급까지 올라왔다해도 KG에서 날 내보내줄지는 미지수였다. 특3급같으면 벌써 사회로 파견됐을테지만.. 그들은 끈질기게 나를 붙잡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고이 접어뒀던 쪽지를 승휘에게 건넸다. CCTV가 돌고있는 통에 길게쓸 수가 없어서 단 세마디만 적은 쪽지였다. 그러고보니.. 임주아 그애는 그 장문의 편지를 어떻게 쓸 수 있었던 걸까, 비법이라도 배워야하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가승휘는 주변을 살피며 쪽지를 받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재준.. 넌 괜찮아?" "응, 나 여기 체질인가봐." 이 녀석의 말이 지율이에게 곧장 전달될 것을 알기에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멀리 서 있는 주아를 가리키며 계속 거짓말을 이어갔다. "저기봐, 쟤 나 좋아하는 앤데 예쁘지? 여기 예쁜애들도 많고 시설도 짱 좋다. 이제 곧 사회로 파견되면 돈도 엄청많이 준다며?" 내 대답에 승휘는, 어느새 넷으로 늘어난 감독관들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그새 감독관들이 또 늘었네, 눈에 띄지 말라고 했잖아. 너 무슨 일을......." "바보 멍청이 민지율도 눈에 밟히고, 계속 여기있단 미칠 것 같아서 무조건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어." "......" "사실.. 너무 무리해서 여러번 실신해서 쓰러졌어. 그래도 약속 지키려면... 뭐... 너가 나래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 거야." 승휘는 동조의 뜻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내가 옳았던건지 모르겠다. 지율이대신 널 보낸거." "......." "지율이 못지않게 너도 소중한데." 승휘는 토나오는 소리를 진심처럼 내뱉더니, 내옆을 스쳐지나간다. 뭐야.. 저새끼. 뭐라는거야. 내가 지한테 왜 소중해. - 트레이닝을 마치고 나가는 길. 임주아도 마침 트레이닝이 끝난 모양인지, 평소 못보던 체육복 차림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질끈 하나로 올려묶은 머리나.. 자그마한 체격.. 갑자기 민지율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런 날 보고 주아는 평소와 다르게 차가운 표정을 한다. 내가 자신을 비웃고 있는다고 생각하는걸까? 뭐, 딱히 오해를 풀어주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그냥 지나치려는데.. "이재준." 임주아가 다짜고짜 내 이름을 부른다. 재준이오빠가 아니라 이재준이라고...? 내가 잘못들었나? 내가 놀란 눈으로 주아를 쳐다보자, 주아는 금방이라도 울듯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쓰레기통한테 주려고 밤새도록 편지 쓴건줄 알아?" "......." "진짜... 너무하잖아." 내가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린걸 용케 본 모양이었다. 순간이자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임주아쪽을 쳐다보지 못했다. 다른 여자들이 이런식으로 했다면 나는 어디서 반말이냐고, 누가 달랬냐고.. 뻔뻔하게 받아쳤을텐데 이상하게도 임주아에겐 그럴 수 없었다. 대신에 나는 마음을 담은 충고를 했다. 내가 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나같은 놈한테 마음주지마. 너만 힘들거야." '재준이오빠' '오빠' 하며 수줍게 웃던 주아의 얼굴을 떠올리자 죄책감이 든다. 난 이런 아이를 이용이나 하려들었으니. 난 태어나 진심으로 여자를 좋아해본적이 없다. 당장 하루하루 사는게 힘든 상황에서 사랑이란 감정은 사치였다. 그냥 외모에 혹해, 몸매에 혹해 여러 여자에게 찝쩍대긴 했지만 단한번도 진심을 준적은 없었다. 그런 내게 이렇게 맑고 예쁜 아이가 마음을 준다니, 당치도 않는다. 게다가 지금 내겐...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가장 중요하고... 나는 주아의 어깨를 스치며 차갑게 지나쳤다. - 다음날. 언제나 그랬듯 남자들에게 둘러싸인채 주아가 힘겹게 걸어오고 있다. 나는 억지로 걸음을 빨리 했다. 녀석과 마주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때.. "임주아!" 익숙한 목소리가 주아를 부른다. 웬놈인가 해서 보니 정우현이 우리학교 교복을 입은채로 KG안을 활보하고 있었다.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주아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녀석은 내가 주아에게 작업을 걸고 있는 모습을 여러번 목격한 터라, 내가 질투라도 해주길 바라는 눈이었다. 병신.. 뭐.. 어쩌라고... 주변에 서있는 감시인들도, 다른놈들 같았으면 떼놓았을 테지만 저놈은 원래 저러기에 가만두는 것 같았다. 내 어깨를 고의적으로 부딪히며 식당안으로 들어선 정우현과 임주아. 나란히 식판을 받더니, 정우현은 내 옆에 앉고 임주아는 진혁이라는 에스퍼놈 앞에 앉는다. 평소 주아를 좋아하는 티를.. 내도 너무냈던 놈이었다. 역시나 주아가 자신의 앞에 앉자 몸둘바를 몰라 하고 있다. 그 꼴이 우스워 헛웃음만 나왔다. "와, 저새끼 운도 좋아." "......" "예쁜 우리 주아랑 같이 밥도 먹고. 밥이 술술 넘어가겠다, 그치?" 우리 주아..? 나는 가승휘놈보다 이놈이 훨씬 마음에 안든다. 사람을 살살 약올리는 게 영 밥맛이다. 대꾸도 하지 않고 소세지를 입에 한가득 넣었다. 그러고보니, 이놈은 바깥으로 파견되었으면서도 KG엔 왜 이렇게 자주오는건지.. 결국 감독관에게 걸린 우현이가 끌려나가고 나는 그제서야 여유로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임주아, 나 니 책상 위에서 이걸 발견했는데 말이야." 22살짜리 감독관놈의 얇은 음성에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봤다. 어리다는 건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로 주아에게 찝적대는 게 영 꼴보기 싫었던 놈이었다. 수치스럽게 사람들앞에서 주아에게 자신의 볼에 뽀뽀해보라며, 내 신경을 건드렸던 놈이기도 하다. 그놈의 손에는 얇은 종이 한장이 들려있었다. 주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다. 나는 수저를 내려놓은채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밤새도록 이불뒤집어쓰고 한다는 짓이 뭔가 했는데..." 어린 감독관놈이, 주아를 쳐다보며 야비하게 한쪽 입술을 올리고 웃었다. 그나저나 저놈은 CCTV를 이용해, 밤까지 주아를 훔쳐보고 있었던걸까. 대체 어디까지 감시했던걸까.. 순간 입밖으로 욕이 터져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음흉한 눈으로 주아를 훔쳐봤다는 상상만해도 머리가 쭈뼛서는 기분이었다. "이딴 연애편지 쓰려고 그런거였어?" 연애편지....? 그놈의 말에 모든 시선이 주아쪽으로 집중됐다. 주아는 팔을 뻗어 그 종이를 빼앗으려 하지만 그놈은 그런 주아를 한팔로 감싸안는다. 앞에 앉아있던 진혁이란 놈은 그런 둘을 못본척 눈을 내리깐다. 저 새끼가 진짜... 순간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귀엽기도 해라. 편지 주인공이름은 안 써져있던데, 누구야? 나야?" "........" "이런거 쓰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KG내에서 남녀에스퍼의 연애는 금기사항이었다. 주아는 놈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놈은 그런 주아가 귀엽다는 듯 능글맞게 웃으며 편지를 읽어내려간다. "오빠, 안녕하세요. 주아에요. 저요... 처음이에요. 누구를 좋아해본건. 오빠가 이 편지를 읽지 않고 있단 건 알지만 이렇게라도 제맘을 전해야될 것 같아서요. 오빠는 언제나 이곳에서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급해요." 그놈은 역겹게도, 여자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 편지는 분명 내게 주려던 편지가 틀림없다. CCTV를 피해, 밤새도록 저 편지를 썼을 주아를 생각하니 머리가 돌것만 같았다. 성깔을 못이기고 물컵이라도 놈의 얼굴에 던지고 싶은걸 참았다. 소란을 피우면 이곳에서 교육받을 기간만 길어질 뿐이었다. "요새 많이 힘드시죠? 트레이닝 때문에 지쳐서 걸어가는 오빠 뒷모습보면 마음이 아파요." "그만해요!!" 주아가 참지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애의 고운 두볼에 눈물이 쉴새없이 흐르고 있다. 주아는 내쪽을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한채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하지만 저 개새낀 그런 주아반응이 재밌다는 듯 계속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오빠가 행복할 수 있기를, 언제나 빌어줄게요." "그만 하라구요!" "앙탈은, 이거 누구한테 쓴거야? 내꺼야, 이거?" 결국은 참지 못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감독관놈을 세게 밀쳐냈다. 차가운 식당바닥에 넘어진 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장이라도 날 죽일듯이 노려본다. 난 그런 놈에게서 편지를 뺏어들었다. "누구꺼긴. 내꺼다, 이 개자식아." "너....너...." "왜 남의 편지를 읽고 지랄이야." "이 새끼가 죽을라고!" 만약 이곳에 KG가 아니었다면, 난 주저없이 이놈을 딱 죽기 직전까지 팼을 것이다. KG에 있는 동안 얻은 것이라곤 다혈질이었던 내 성질을 죽인 것 뿐이었다. 어떻게든 나가야 했기에 소란을 피울 순 없었다. 지금까지 공들여 세운 탑을 한번에 무너뜨릴 순 없다. 하지만. 이 자식은 지금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에게 감사해야될텐데 눈을 부라리며 달려들었다. "이 새끼가, 너 에스퍼 아니야? 감히 이게!" "죽기 싫으면 입 닥치고 있어." 나는 그놈때문에 구겨진 편지를 곱게 펴서 주머니에 넣었다. 주아는 어깨를 떨며 울고 있었다. 그런 주아를 감싸줄새도 없이 감독관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총을 빼려다 말고 봉을 휘둘렀다. 요령없이 휘두르는 통에 내가 피하기는 쉬웠지만 주아가 맞을까 걱정이 되 그애를 내 온몸으로 감쌌다. "이 새끼가! 감히 에스퍼 놈이 나한테 기어올라!!" 한 일곱대를 연거푸 맞고 있을때, 주아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미안하다는 눈빛이었다. 뭐, 상관없었다. 별로 아프지도 않고 편지버린 벌받는거라 여기면 그만이니까. 다만 행여나 주아가 봉에 맞기라도 할까 두렵긴 했다. "그만!" 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며 급하게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식당에 있는 CCTV를보고 누구라도 달려올때가 됐다 싶었다. 놈이 휘두르던 봉을 집어넣고 분한듯 씩씩거렸다. 나는 안고있었던 주아를 떼어내며 욱씬거리는 뒷통수를 손으로 문질렀다. 아오. 개자식... 뒷통수까지 쳤어? 너 내가 나가기만 해봐. 그 생각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있을 때, 도하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내쪽으로 다가왔다. 감독관놈은 기다리기라도 한듯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매니저님, 이 새끼가....." "이 새끼 아니라 이재준." 내가 말대꾸를 하자 분한 듯 길길이 날뛴다. 도하진은 그런 우리 사이에 섰다. 혼나는 건 내쪽일거란 예상과는 달리 도하진은 감독관놈을 향해 쏘아붙였다. "당신도 들은적 있겠지, 이 애가 그 KG의 보물이야." "......네?" "흠집이라도 났으면, 너.... 죽을 각오해." "매니저님..." "가자, 이재준. 트레이닝 시간이야." 도하진은 그렇게 말한 뒤 내 팔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문득 뒤돌아보자 주아가 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다. 나는 그런 주아에게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도하진을 향해 말했다. "누나.. 임주아, 안 다치게 해줘요. 앞으로 저 변태같은 감독관놈도 접근 못하게 하고. 아오, 내가 저 새끼 밖에서 만나면 그냥.. 확!" "........니가 남 생각도 해줘? 의외네?" "몰랐어요? 나 따뜻한 남자에요." "능청스럽긴. 자기꺼 왜엔 신경도 안쓰면서. 맨날 나갈 궁리만 하는 놈이." 나는 주머니속에 있는 편지가 구겨질새라 한발한발 조심히 걸었다. 그런 내게 도하진이 꽤나 매력적인 웃음을 날리며 물었다. "너란 놈. 얼굴만 예쁘면 다 좋은거야?" "아뇨,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누나같이 섹시한 스타일인데..." "근데? 그래서 주아가 별로야?" "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내가 왜이러는지..." "너 사랑이라도 하니?" "오늘 트레이닝은 뭐에요? 오늘은 기분 망쳤으니까 세시간만해요, 알았죠?" 인정하기 싫지만.. 저 꼬마가.... 점점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지켜줘야할 꼬마가 하나 더 늘었네, 귀찮게 참. Writer. 청몽채화 33. 늦은 저녁을 혼자 챙겨먹고 침대에서 뒹굴 거리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갑자기 누가 찾아온 건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하긴, 이게 원래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낯선 기색도 없이 너무나 익숙하게 불쑥불쑥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우현이에게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다. 이제는 갑자기 뿅 나타나는 순간이동보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더 무섭다. 재준이가 있을 때는 무슨 일이 생길까봐 무서워할 필요도 없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할 생각에 지레 겁먹어버린다. 재준이, 승휘, 우현이 모두 KG에 신경쓰는 것만도 벅찰 텐데, 괜히 나까지 처신을 못해서 걱정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화해는 해서 다행이지만, 솔직히 무섭다. 그들이 정말 워너비로 활동하게 되면 나는 어떤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봐야 할까. 경멸이나 공포의 시선없이, 편견 없이, 그들의 눈과 마주할 수 있을까. 내가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는 걸 알기라도 하듯이, 누군가가 또 다시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얼른 달려가 부실한 현관문을 열어제꼈다. 그리고 문 앞에는 음침한 모습과 음흉한 시선을 가진 한 남자가 나를 보며 웃고있었다. "누.... 누.... 누구세요?" 등 뒤로 감춘 손에 쥐어진 핸드폰의 폴더를 몰래 열었다. KG의 끄나풀이던가, 아니면 지나가던 변태든가. 둘 중에 하나가 분명하다. 은밀하게 핸드폰 액정에 112라는 숫자를 입력하고 있던 찰나, 남자가 내 앞에 무언가를 척하니 내밀었다. 시루떡이었다. "옥탑방에 이사왔습니다." 맙소사. 목소리마저 음산했다. 하지만 곧 안심했다. 이사떡을 전해주려고 온 걸 보면 그다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핸드폰 폴더를 그대로 닫고 주머니에 넣은 뒤 이사떡을 받아들었다. 이제 재준이의 옥탑방에 깃든 추억도 다 기억 속에만 담아두어야 하나, 씁쓸한 기분이다. 재준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피식 웃으면서 내 머리를 치며 중얼거리겠지. [오빠가 옆에 있는데도 꼭 이렇게 어리광을 부린다니까.] "혼자.... 사시나 봅니다.... 고등학생?" 남자는 자신의 눈을 다 가린 앞머리를 치울 생각도 하지 않으며 내 방을 재빠르게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아, 네. 고 3이예요. 반가워요, 민지율이라고 해요." 전혀 반갑지 않았으나 반가운 척 웃음을 지으며 밝게 인사를 건넸다. "고3. 열아홉살. 인생의 시름을 다 짊어진 나이죠. 누구도 그들의 고통을 대신하지 않죠. 그것은 마치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낙엽과도 같은 심정이랄까요. 아니, 마지막 순간을 눈 앞에 둔 사형수의 심정이랄까요." 누가 들으면 이 나라의 고3이 다 죽으러가는 줄 알 법한 말이었다. 공부 걱정은 전혀 하지 않고 KG에 소속된 놈들의 걱정이나 예지력 걱정만 하고 있는 나로서는 매우 공감하기 힘든 말이었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자기의 표현에 만족한 듯 웃었다. 매우 괴기스러운 웃음이었다. "예술.... 하시나 봐요?" 심오한 남자의 표현에 대충 지껄였다. 이상하다는 말을 돌려한 것이었으나 남자는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죠. 제 이름은 조덕배. 나이는 스물 일곱이죠. 저는 인생의 회한과 쓰라림을 종이 한 장에 그려낸답니다." 그는 내 눈앞에 4B연필을 내밀었다. 뾰족한 저 연필로 내 배를 찌를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그는 껄껄 웃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요즘 싸이코패스들이 판을 친다는 신문기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앞으로 그 남자와 더 이상의 친분을 이어가면 안 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 "재준아, 너 살던 옥탑방에 누구 이사왔어." 놈들과 다시 화해했지만, 나는 여전히 맨 뒷자리에 혼자 앉아있었다. 재준이와 승휘 둘 다 내 옆에 앉으려 싸워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두 놈을 짝으로 같이 앉히는 수밖에. 그리고 나는 내 앞에 앉은 재준이와 이야기 중이었다. 재준이는 의자를 아예 돌려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승휘는 어제 새벽까지 계속됐다는 고된 트레이닝으로 인해 깊은 잠에 빠져든 상태였다. "누구?" "조덕배라던데. 스물 일곱 살 남자야. 화가래. 옥탑방에 너 말고 다른 사람 오니까 이상해." 재준이는 풀이 죽은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척 하면서 마구 헝클어놓는다. "오빠가 옆에 있는데도 꼭 이렇게 어리광을 부린다니까." ........... 뻔한 새끼. 재준이는 어제 내가 예상한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맞다. 정우현 잡혔어. 감독관한테." 그리고, 재준이가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내뱉은 한 마디. 그 말을 듣자마자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며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하긴, 점심시간이 되면 부리나케 우리 교실로 달려올 놈이 오늘은 잠잠하길래 이상하다는 생각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왜 끌려간건데????" 나도 모르게 내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재준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동반 순간이동 더럽게 안 되길래 하루종일 그 연습만 하라고 가둬놨어. 근데 뭐야, 지금? 왠지 매우 걱정하는 분위긴데 내가 잘못본 건 아니겠지?" "아, 아니야!!! 난 그냥!! 또 끌려가서 고문이라도 당할까봐!!!!" 매의 눈을 지닌 재준이다. 아무리 사소한 행동이라도 저 놈의 의심에 걸렸다간 골치 아파진다. "맞진 않을 거야. 몸은 혹사당하겠지만. 한 일주일 정도 못 나올 거 같은데. 오늘 난 트레이닝 없는데, 어때, 간만에 우리 둘이 데이트나 할까? 떨거지들 제껴 놓기는 좋은 기회잖아. 가승휘도 오늘 트레이닝 빡세게 있거든." 재준이는 엎드려 자고 있는 승휘를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그 순간, 승휘가 마치 좀비처럼 벌떡 일어났다. 눈밑의 다크서클이 어제 그가 겪었을 잔인한 트레이닝의 과정을 짐작케 했다. 저렇게 트레이닝 과정이 몰려 있는데도 어제 기어이 미팅을 한 거란 말인가. "둘만 가면 죽인다." 그 말을 내뱉고는 도로 책상 위로 쓰러지는 승휘. 정말 징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참 너도 정우현 못지않게 골때리는 새끼야. 내가 진짜 이런 놈들을 부하라고...." 딱히 승휘와 우현이가 재준이의 부하로 들어간 건 아니었다. 그저 팀에서 리더라는 직책을 맡은 것이 재준이였을 뿐. 하지만 자존심 빼면 시체인 재준이기에, 나는 그냥 웃으며 수긍하는 척 해주었다. "데이트 다음으로 미루자. 나 오늘 어차피 할 일 있어." 내 대답에 재준이는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무슨 일인데?" "그냥, 내 일." "너 나한테 숨기는 일도 있냐? 와, 완전 서러워. 이거 진짜 배신이야." 나는 한껏 인상을 쓰며 투정부리는 재준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누나가 옆에 있는데도 꼭 어리광을 부린다니까." 재준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갚아주며 복수했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밀려왔다. * 재준이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며 오피스텔로 향했고, 승휘는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트레이닝을 위해 하진언니가 몰고온 고급 외제차에 몸을 실었다. 저들 사이에서 항상 분위기를 한껏 띄우던 우현이가 없으니 뭔가가 텅 빈 것 같았다. 활력이 없달까, 재미가 없달까. 뭐, 그래도 일주일만 지나면 볼 수 있는 거겠지? 기지개를 켜며 오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어제 인터넷으로 찾아본 곳을 향해 쉴 새 없이 발을 놀렸다. 그리고 아랫동네의 구불구불한 길 너머로 이어진 허름한 주택가에서 발견한 그 곳.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조용하게 속삭이듯 말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오색빛깔로 화려하게 꾸며진 제단과 각종 음식, 은은한 촛불이 한 눈에 들어왔다. "거기 누구야?" 뒤에서 카랑카랑한 젊은 여자의 음색이 들려왔다. "아, 저기....." "점보러 온 거야?" "............여쭤.... 볼 게 있어서요." 용하다는 점집. 인터넷에서도 입소문이 자자한 처녀보살은 못 맞추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녀는 샐쭉한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신당 안으로 발을 옮겼다. "따라와." 나는 엉거주춤하게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재준이를 데리고 올걸, 후회가 되었다. 역시 이런 곳은 혼자 오기에는 부담스럽다. 날카로운 여자의 눈매와 마주해도, 그녀가 입고있는 분홍빛 한복자락을 보아도, 몽환적인 신당의 분위기와 눈이 아플만큼 선명히 새겨진 벽화를 보아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내기가 아닌데, 말해봐, 점 보러 온 게 아니지?" 여자가 내 생각을 관통하듯이 톡 쏘며 말했다. 역시 점쟁이는 다르구나, 생각하며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래가 보여요." 내가 진짜 무당의 운명을 타고났다면, 이 방에서 무언가라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요즘은 잘 안 보이는데, 그래도 전에는 자주 보였거든요. 틀린 적도 없어요. 미래를 바꾸지는 못했어도 확실히 보이긴 했어요. 머릿속에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어요. 저기, 제가.... 그러니까... 신내림을.... 받아야 하는 운명일까요?" 초능력자로 알고 평생을 살아왔는데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는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믿어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건방진 년."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던 처녀보살이 무서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음 속에 신을 품지도 않은 년이 어디서 건방지게 함부로 입을 놀리지? 그게 아니란 건 니가 더 잘 알고있을텐데." 모른다. 맹세코 모른다.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자기를 뒤돌아보는 시간이라도 좀 가지지 그래? 수백명을 위험으로 몰아넣고도 너만 위험에서 한 발 빠지면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나?" ".......... 저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 "모든 불행이 너로부터 시작된다. 니 뜻대로 주변을 휘두르니 그 아픔이 보일 리가 있나. 내 말 명심해. 넌 신을 모실 자격따윈 없어. 너 자신을 돌아보란 말이다, 너 자신을." 처녀보살은 아예 신내림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못박아 말했다. 그렇다면, 있었다가 사라진 나의 예지력은 도대체 무엇을 뜻한단 말인가.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나가!!!!" 그녀가 서슬퍼런 목소리로 내게 소리쳤다. * 나로부터 불행이 시작된다는 소리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걸까. 미치고도 팔짝 뛸 노릇이다. 착하게 살진 못했어도 남에게 해 입히고 산 적은 없었다. 정답을 눈앞에 보여주지 않는 처녀보살님을 욕하면서도 나는 그녀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나 자신을 돌아보라는 게, 실질적인 면이 아닌 정신적인 면을 뜻하는 건 잘 알고있다. 하지만 도저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집 안을 뒤엎고 물건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대청소라도 하면, 무언가 조금 더 나아진 나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까. 한 쪽 구석에 치워둔 재준이와 나의 사진을 집어들었다. 재준이와 나는 언제나 가족이었다. 진짜 내 가족과, 진짜 재준이의 가족은 어디로 간 걸까.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언제나 함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이 남매가 아니라는 사실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재준이나 나나, 실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나 애틋함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KG에 끌려가는 바람에 가족조차 못 만난다는 우현이의 말을 들었을 때도, 그 문제에 대한 동정심은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런 감정조차 일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이미 어떤 한 부분이 틀어진 괴물이라는 걸까. 설마, 내 가족도 나로 인해 시작된 불행으로 사라져버린 걸까. 나 때문에 재준이의 가족도 사라진 거란 말이야? 예지력처럼 쉽게 말해주면 덧나냐구, 예언자들은 너무 어렵게 말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액자를 내려놓고, 옷장을 열어 모든 옷가지를 밖으로 내놓았다.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옷들을 하나하나 개고 있을 때, 눈앞에 익숙한 옷이 하나 떨어져있었다. 아, 아직 버리지 않았던가. 중학교 때 교복이다. 웃으며 교복을 주워들었다. 초록색 교복이라 주변 학교들에게 외계인복이라 불리곤 했었지. 한껏 줄여 입었던 교복 치마를 내 몸에 대보고는 곱게 접어놓았다. 짜증나게도 중학교 교복 치마 길이가 지금 고등학교 교복 치마 길이와 비슷한 것 같았다. 내 키는 전혀 자라지도 않는단 말인가. 지겹다, 작다는 소리 듣는 것도. 그리고 교복 마이를 집어드는데 가슴 쪽에 달린 왼쪽 포켓이 불룩하게 나와있었다. 뭐지? 이쪽 주머니는 실용적인 용도로 쓰이려는 게 아니라 디자인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하도 작아서 뭘 넣는데 쓸 수가 없잖아. 이상하게 여기며 작은 포켓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손가락 두 개가 겨우 들어갈만한 작은 공간이었다. 졸업했을 때 하도 밀가루를 뒤집어써서 깨끗하게 세탁을 했는데 왜 발견하지 못했을까. 겨우겨우 꺼낸 물건의 정체는 바로 명찰이었다. 우리 학년을 나타내던 노란색 명찰. 뭔가 했더니 그냥 명찰이었어? 피식 웃으며 명찰 위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민지율, 그것도 아니면 이재준이겠지. 추억으로 간직해둬야겠다, 생각하며 명찰을 확인한 순간, 난 멍하니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노란 명찰 위에 까만 글씨로 [가승휘]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Writer. 청몽채화 34. 일주일간 쉴 새 없이 고민하고, 쉴 새 없이 생각했다. 중학교 교복 마이 주머니에 있던 승휘의 명찰을 고등학교 교복 치마 주머니에 옮겨놓고 수업시간에도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명찰을 만지작거렸다. 손에 피가 맺힐 때까지 명찰을 꽉 쥐어보아도 명찰은 사라지지 않았고, 손에 땀이 맺힐 때까지 명찰을 꽉 쥐어보아도 명찰은 녹아내리지 않았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리면 차라리 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한낮에 꾼 꿈처럼, 그냥 없었던 일 셈 치면, 나 그냥 그렇게 믿어버릴 자신 있는데. 틈 날 때마다 내 눈을 비비고 명찰을 확인했지만 명찰에 선명하게 적혀있는 이름은 [가승휘]였다. 그렇다고 해서 중학교 때 사용하던 명찰이 아니라고 우길 수는 없었다. 지금 다니는 고등학교는 따로 명찰을 사용하지 않았다. 각자의 이름은 교복에 직접 수놓아져 있었으니까. 가승휘, 너 날 알고있었어? 왜 내 중학교 교복 마이 주머니에 너의 명찰이 들어있는 거야? 몇 번이나 중학교 졸업앨범을 뒤져봤지만 그 어디에도 너는 없었어. 언제든 기회가 있으면 승휘에게 물어보리라 다짐했지만 줄곧 내가 먼저 승휘를 피해버렸다. 모르겠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처녀보살님은 나에게 무엇을 전하려 했던 걸까. 나, 꼭 진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민지율, 나 오늘 조퇴해." 6교시를 마친 후, 재준이가 책가방을 싸며 나에게 말했다. "뭐??? 왜!!!!??" 나는 의자에서 벌떡 튀어오르며 반문한다. 안 된다. 나는 일주일간 승휘와 둘이 있는 시간을 절대적으로 피해왔다. 안 그래도 까불대고 깐죽대는 우현이가 없어서 우리의 침묵은 끊일 줄을 몰랐건만, 재준이마저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예상도 할 수 없었다. 밤마다 기도했다. 우현이가 제발 빨리 돌아오게 해달라고. 승휘와 둘이 남겨지면 언제든지 진실을 파헤쳐보리라 생각했으면서도 나는 승휘와 둘이 남겨지는 상황이 절대 오지 않도록 상황을 조작하고 있었다. "오늘 일 있어."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준이는 너무나 태연하게 대답한다. "7교시면 수업 끝나잖아... 그냥 수업 마치고 가." 눈빛에 간절함을 가득 담고 애원했다. 하지만 재준이는 밥 좀 더 달라는 개새끼를 보듯 나를 무시했다. "빨리 안 가면 불독이 나 물어죽일걸." 그 한 마디를 남긴 채 바람처럼 사라지는 재준이. 나는 7교시 때까지 책상에 고개를 처박은 채 있다가 수업종이 땡 하고 치는 즉시 집으로 가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재준이가 가방을 챙겨 나가는 즉시, 승휘는 대각선으로 몸을 틀어 나를 바라보았다. "민지율 너." "................" "요즘 왜 나 피해." 어색해진 나는 쓸데없이 휴대폰을 집어들며 대답했다. "나, 나.... 피, 피한 적 없는데....?" "너 요즘 재준이가 화장실 가도 따라나가잖아. 밥만 먹으면 배 아프다고 양호실 가고. 체육시간에는 안 나가려고 주번 대신 청소하고, 수업 끝난 뒤에 종만 치면 재준이랑 인사한 뒤에 바로 나가버리고." "나, 그, 그런적 없는 것 같은데......" "말은 왜 더듬어." "나.... 워, 원래 말 좀 더듬어. 말 늦게 배, 배웠어." "끝나고 남어." 승휘는 7교시에 쓰일 국어교과서를 내 책상 옆에 펼쳐놓으며 자리를 옮겼다. 제기랄, 먼저 나가버릴 수도 없다. 먼저 나가려고 했다간 꼼짝없이 잡힐 게 뻔했다. 7교시는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으며, 마치 1초가 천년과도 같았다. 승휘는 화가 난 듯 아무 말도 없었다. 청소당번인 아이들이 집에 가고, 주번이 마지막 점검을 할 때까지 그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꼿꼿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오.... 오늘은 트레이닝 없나 봐?" "말 해, 너 요즘 왜 그러는지." 아무도 없는 교실.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승휘 앞에서 놈의 명찰을 꺼내들 용기따위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재준이나 내가 못 느꼈을 것 같아? 너 요즘 눈에 띄게 날 불편해하잖아." 설마, 재준이도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 걸까. 하긴, 굳이 6교시까지 다 듣고 나서 가는 꼴이 이상하긴 했다. "아니야, 나 그냥.... 저기 미안, 나 어지러워서 집에 빨리 가서 좀 쉬러...."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가방을 급히 집어들고 일어섰다. 그러나, 이미 내 손목은 승휘에게 잡혀있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데?" "그, 그런 거 없는데....." "민지율!!!!!!" 결국 화가 폭발한 듯 놈은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현이가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나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나에게는 지금 내 손을 잡고 이 자리를 떠나게 해 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 승휘는 내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고 나는 그런 놈의 시선을 피하며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실실 웃다보니 어느 새 등에 게시판이 맞닿아있었다. 이제 더 이상 피할 자리도 없었다. 승휘는 게시판을 짚으며 내가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봉쇄해버렸다. "싫으면 싫다고 해." "응.....?" "가만히 있는 사람 자극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의 얼굴이 점점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래, 민지율. 그냥 지금 말해. 중학교 때의 니 명찰이 왜 나한테 있는 거냐고. 그냥 말해버려. 내가 무서워할 필요 없잖아,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나는 정말 궁금해서 질문하는 건데 거기다가 화를 내진 않겠지. "저기, 승휘야....." 나는 결심을 굳힌 뒤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승휘는 허리를 숙여 내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맙소사.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입술이 뜨겁다. 불에 덴 것처럼 뜨겁다. 나 이거 첫키슨데.... 기분이 좋고 말고를 떠나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차버렸다. 언제나 냉철하고 이성적인 승휘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야, 너......" 내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승휘가 다시 나를 향해 돌진했다. 버둥거리기 위해 몇 번 손을 들었으나 승휘의 큰 손이 내 팔목을 붙잡아버렸다. 순식간에 눈물이 고였다. 그냥 참고있을 수만은 없었다. 잠시 후, 승휘가 나를 놓아주자마자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쳤다. "너 정말 미쳤어???? 이게 무슨 짓이야!!!!!" 승휘의 눈빛에 후회가 스쳐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누가 너 좋아해서 말 더듬은 줄 알아? 너한테 잘못한 거 있어서 자리 피한 줄 아냐구!!" "말해, 그럼.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왜 피한 건지."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유가 넘쳐보이는 그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나는 교복 주머니 속에 있는 명찰을 꺼내 땅바닥에 힘차게 던졌다. 플라스틱으로 된 명찰이 두 동강 나서 먼지로 가득 찬 교실 바닥을 뒹굴었다. 승휘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명찰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뒤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민지율.......... 너....." "일주일 전에 집에서 대청소하다가 발견했어. 중학교 교복 안에 있었어. 너 도대체 뭐야?" "................" "너..... 언제부터 내 인생에 끼어들고 있었어?"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동강 난 명찰을 손바닥 안에 꽉 집어넣었다. "이제.... 니가 나 좋다고 하는 것도 무서워."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우현이가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일주일간 우현이를 보지 못한 서러움이 급작스럽게 파도처럼 밀려왔다. 승휘 옆에서 있으면 나는 언제나 공포에 떨어야 했고, 강한 척 해야 했고, 작아졌으며, 초라해지기만 했다. 하지만 우현이는 나를 편히 쉴 수 있게 해주는 안식처같은 존재였다. "도대체 나를 얼마만큼 가지고 놀았던 거야? 니가 과거에 나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기억을 다루니까 사는 게 참 편한가보다, 넌. 그냥 맘에 안 들면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우고!!!!" "민지율......" "니 능력도 무섭고, 너도 무서워!!!!" "내가 하는 말 좀 들어." "가승휘............" "다 말해줄게." 승휘는 진정하라는 듯 나를 잡으려 했지만, 나는 그의 어깨를 잡은 뒤 그가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지워줘..........." 그리고,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내가 그 말을 꺼낸 뒤 승휘의 표정이 어땠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계속 땅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 지워줘......" "................." "니가 나한테 키스한 것도.... 내가 니 명찰을 가지고 있는 것도..... 나 다 잊고싶으니까..... 제발..... 다 지워줘......." 그는 천천히 두 동강 난 명찰을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내 눈 봐, 민지율." 떨리는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고개를 들어 승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승휘의 표정은 누가 봐도 크게 상처입은 것 같았다. 순간 심장이 욱신거리는 바람에 그를 안아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나는 가까스로 참아내며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안....." "..........." "항상.... 나는 네 기억 뒤편에만 존재하지." "..............." "주제넘게 앞에 나서면 안 되는 거였는데." 승휘의 눈과 똑바로 마주한 순간 무언가 몽롱한 기분이 사로잡혔다. 다리의 힘이 살짝 풀려 주저앉을 뻔 했지만 승휘가 나를 부축했다. "괜찮아?" "아아, 미안. 잠깐 힘이 풀려서. 그나저나 우리 여기 왜 있지? 청소당번 우리였나?" "........... 너 아침에 지각했잖아. 난 담임 과학시간에 잤고." "아, 맞다. 미안. 요즘 자꾸 까먹네."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고 승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씁쓸한 미소가 온 얼굴에 퍼져있었다. 나는 가방을 집어들며 어서 가자는 듯 승휘의 어깨를 툭툭쳤다. "난 하진누나가 데리러 오기로 했으니까 너 먼저 가." 평소에는 어떻게든 데려다주겠다고 성화인 승휘였기에 이런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밤새 반복되는 트레이닝에 다른 사람을 신경쓸 여유는 없을 것이다. "그럼 내일 봐. 나 갈게." 힘내라는 의미로 한 번 웃어주고 아무도 없는 쓸쓸한 복도를 지나갔다. 요즘 왜 이렇게 이유없이 힘이 빠지는 건지 모르겠다. 기지개를 켜면서 운동장을 걸었다. 아무도 없는 학교는 매우 을씨년스러웠다. 운동장 한복판을 걸으며 뒤를 바라보았다. 교실에서 승휘가 나를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환히 웃으며 힘차게 손을 흔들었지만, 그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반응이 없자 시들해진 내가 고개를 다시 돌린 그 순간. 눈 앞에 우현이가 보였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한 쪽 입꼬리를 씩 올려 웃고있는 우현이. "너 보고 싶어서 무작정 찾아왔어." "............ 정우현......?" "동반 순간이동 완벽 마스터하고 돌아왔는데." "................" "나 없는 일주일간 완전 외로웠지?" 우현이는 해맑게 웃으며 안기라는 듯 자신의 팔을 쭉 뻗어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그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겨버리고 말았다. 아무 것도 모르겠지만... 일주일 동안 미친듯이 그를 그리워했다는 감정만은 느낄 수 있었다. 우현이는 설마하니 내가 정말 안길 줄을 몰랐다는 듯이 당황스러워했다. ".............야... 민지율.... 뭐야.... 너 왜그래....."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우현이는 피식 웃는 듯 하더니 허공에 있던 자신의 손으로 천천히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지금 너희 반 교실 창문에서 가승휘가 우리 보고 있어." 나는 말없이 우현이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알려줬으니까 나 반칙한 거 아니야." 우현이는 품에 안겨있던 나를 잠시 떼내는 듯 싶더니, 바로 내 입술에 키스했다. 첫키스였는데도, 그 놈의 키스를 받아들이면서. 뭔가 낯설고도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우현이는 살짝 입술을 떼더니 감미로운 목소리로 내 귓가에 중얼거렸다. "돌아왔으니까." "............." "이제 너 두고 아무 데도 안 가." Writer. 홍양 35. ※승휘번외 1※ 눈을 돌려버리면 되건만.. 내 눈은 벌써 5분째 지율이를 쫓고 있다. 이곳이 교실이었다는 것도 잊고 담배를 물 뻔 했다. ....비참했다. 장난스럽게 벌린 우현이의 양팔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안겨버린 민지율.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일주일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 그 이상은 아닐거라고 만약 지율이가 딴 남자를 사랑한다면.. 난 지율이의 기억을 조작해서라도 다시 내 옆으로 오게 할 생각이었다. 아니, 그 전에.. 지율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일 따윈 없을거라는 오만함이 있었다. 아무리 내 손으로 지운 기억이라도 그 애가 무의식 속에 다시 날 사랑하게 될거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후...." 겁이 난다. 낯선 KG를 처음 들어갔을 때 만큼이나.. 참고.. 참고 또 참고.. 다시 지율이를 찾았을 때.. 예전으로 돌리는 건 쉬울줄 알았다. 개같은 감독관이 지율이를 알아챌까봐 싸늘하게 대했던 게 이제와서야 후회되기 시작한다. 녀석은 매일 날,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 지율이가 내게 말했다. 마음대로 기억을 조작하니까 편하냐고.. 내 손으로 니 기억을 지워야할 때, 난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는 걸 알기나 하는걸까.. 5년만에 미치도록 그리웠던 널 다시본 날.. 그날. 니가 날 모르는 사람보듯 날 쳐다봤을 때 난 하루에 수백번이고 무너졌다는걸. 나만이 모든 아픔을 떠안아야 하는 능력을 얼마나 원망해야 했는지... 넌... 모르겠지. "......" 그때... 정우현과 지율이의 입술이 닿는다. 순간 이성을 잃은 내 주먹은 책상에 가서 꽂혔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지금 당장 달려가 동료이고 뭐고 죽이고 싶은 걸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더이상 볼 자신이 없었다. "씨발..." 중간에서 지율이를 가로챌 사람이 정우현인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가까이 두지 않았을것을. 어째서 그 계산까진 하지 못했는지 내 자신에게 미칠듯 화가 난다. 지금이라도 지율이에게 달려가 날 기억해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 지워진 기억을 되살릴 힘은 없다. 그렇다고 모든 과거에 대해 얘기 해주려면.. 불가피하게 끔찍한 기억마저 딸려올 것이다. 그걸 지율이에게 강요할 수도 없었다. 민지율... 도대체 난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 ....... .... 아주 오래전.. 내가 어려서부터 살던 곳은, 가난한 달동네.. 그리고 가족이라고는 나와는 10살차이가 나는 형 뿐.. 다시 생각해도 암울한 유년기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성격이 어둡지는 않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쉽진 않지만... 그러던 어느 날, 우리 형제에게 거의 공짜로 임대 아파트를 분양해준다는 고지서가 날라왔다. 순진하고 어렸던 나와 형은 앞뒤 잴 것 없이 그저 가난한 우리에게 하늘에서 주신 행운이라 여기며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그 날.. 처음으로 민지율이라는 아이를 만났다. 8살 때 인 걸로 기억한다. "안녕.. 너 오늘 이사왔지? 나 옆집 사는데.. 왜 떡 안돌려? 나는 무지개떡 좋아하는데..." "......" "으악.. 대답안한다. 민망해라!" "지율아, 아빠가 함부로 사람들한테 반말하지 말랬잖아. 너보다 오빠면 어떡하려 그래." "내 또래겠구만, 뭐. 몇살이야, 너?" "민지율.. 말버릇 못 고치지?" 다리가 불편하신 아빠의 휠체어를 끌면서도 세상에서 제일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던 그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남과 어울리려 하지않는 지금의 지율이가 낯설만큼.. 과거의 그 애는 놀라운 붙임성을 가졌었다. 무엇이 그앨 변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율인 세상 누구보다 밝은 아이였다. "이씨- 이재준! 너어!!!" "......" "아빠! 이재준이 어제 내 숙제노트 훔쳐갔어!!" 그 때, 지율이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오던 스포츠머리의 남자아이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남에겐 별 관심이 없었던 나의 첫번째 변화였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젤리 드실래요?" 휠체어를 탄 지율이 아빠의 다리 위로 주머니에 있던 젤리를 우수수 꺼내놓는 녀석. 그러자 지율이의 아빠는 난감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재준아. 아저씨 젤리 싫어하는데.." "그럼.. 아저씨 딸 줘요." 휠체어를 밀고 있는 지율이를 가리키며 아파트 안으로 사라지나 싶더니.. 날 빤히 쳐다보는 이재준. 나는 반사적으로 녀석을 노려봤다. 그러자 녀석은 씽긋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 철권 좀 하게 생겼다?" "......" "우리집에 철권CD있는데 같이할래?" 그렇게 처음.. 민지율, 이재준을 만났다. 이상한 아인 줄 알았던 그 둘과 친구가 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리가 불편한 아빠와 단둘이 살고 있는 지율이, 일찍 아빠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식당에 다니는 엄마와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이재준, 그리고..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 10살 터울의 형과 살고 있는 나까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우리였으니까. - 14살.. 같은 초등학교를 나오진 않았지만 우리 셋은 같은 중학교에 입학했다. 형은 학교를 나가는 날 두고 항상 이런말을 하곤했다. "승휘야.. 너 기억조종하는거 아무한테도 들키면 안된다." 어렸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 능력이 얼마나 위험한것인지.. 굳이 자랑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난 지극히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상황에서 내가 남의 기억을 조종할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인생의 유일한 낙은.. 지율이의 얼굴을 보는 것 뿐이었다. 여느 남자들과 다를바 없이 사랑에 빠진 것이다. 지율이는 놀라울만큼 나를 바꿔놓았다. 늘 비관적이던 내 생각도.. 남에겐 한없이 적대적이던 내 태도도.. 어떤 상황에서도 밝았던 지율이였기에, 나는 나와 반대인 그애에게 본능적으로 끌렸다. "내 얼굴에 빵꾸나겠다. 칠판 좀 봐." 내가 맨날 자기만 쳐다본다는 걸 느낀건지 볼멘소리로 투덜댄다. 교복을 입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그 애의 모습은 정말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한번도 사랑한적이 없었기에 방법을 몰랐고, 그렇기에 지금보다 과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눈을 떠 처음 본 여자가 민지율.. 다른 여자가 어떻게 생긴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난, 심각한 첫사랑을 앓았다. "나 좀 그만보라니까?" "싫어." "휴- 못말린다니까. 앞으로 내 얼굴보면 돈 받을거야." "부자되겠네." "칫." 그러던 어느날.. 오래간만에 셋이서 나란히 하교를 하던 날이었을거다. 지율이를 사이에 둔 채 나란히 걷고 있는데, 지율이가 우는 소리로 말한다. "승휘 너랑 재준이 때문에 나 왕따 당한다구..." "......" "그러니까 승휘 넌 수업시간에 나 좀 그만 쳐다보구, 재준이 넌 교실로 찾아오지마! 알았어?" 나는 지율이와 재준이만 있으면.. 다른 친구는 필요없는데 지율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우는 소리로 투정해도 어쩔 수 없었다. 지율이가 다른 여자친구를 사귄다면 나와 함께 있을 시간이 줄어들 것이고, 다른 남자친구를 사귄다면.. 생각도 하기 싫었다. 나는 울상을 짓고 있는 지율이를 향해, 거침없이 말했다. "민지율.." "왜..." "나 돈 많이 벌테니까, 크면 나랑 결혼할래?" 내 말에.. 옆에서 가만히 듣던 재준이는 미쳤냐며 토를 하는 시늉을 하고 지율이의 볼은 새빨개진다. 그러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며 휘적휘적 앞서걷는다. 나는 그런 지율이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놀란 토끼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씨.. 지금 너희둘이 뭐하냐!! 나 먼저 가라는거지!!" 재준이는 짜증난다는 얼굴로 먼저 골목을 돌아 가버린다. 예나 지금이나 눈치 하난 끝내주는 녀석이었다. 둘이 남겨지자 어려도 남자는 남자였는지.. 지율이를 끌어안았다. 평소에도 다짜고짜 끌어안곤 했지만 이번엔 느낌이 달랐다. 지율이도 이상한 걸 느낀건지.. 나를 밀쳐내려 용을 쓴다. 하지만 내 힘을 당해내진 못했다. 결국 포기한 지율이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왜그래.. 무슨 일있어?" "아니." "아니라 그럴줄 알았어. 가승휘... 넌 내가 왜 좋니?" "좋아서." 바보같은 내 대답에 됐다는 듯 피식 웃는 지율이. 나는 지율이의 향기, 체온.. 모든것을 기억해놓은 다음에야 서서히 지율이를 품에서 떼어냈다. 그러자 지율인 새빨개진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두 팔로 내 목을 감싸 끌어내렸다. 그리고 내 입술에 살짝 입술을 갖다댄다. 너무 놀란 나는 녀석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창피한지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런 녀석에게, 내가 먼저 남자답게 씨익- 웃어주자 집쪽으로 뛰어간다. 지율이의 입술이 닿았던 내 입술에 살며시 손가락을 갖다댔다. 나는 천천히.. 그 애의 뒤를 따랐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아파트쪽으로 걸어갔을 때.. 재준이와 지율이의 가방이 바닥에 내팽겨쳐 있었다. 나는 녀석들의 가방을 동시에 집어 들었다. "민지율!!! 여기다 가방을 벗어놓으면 어떡해! 민지율!! 이재준!!!" 녀석들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아파트쪽으로 달려갔다. "........" 그리고.. 그런 내 눈엔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집이, 지율이 집이.. 그리고 재준이 집마저 불에타고 있다. 교묘하게 딱 세 건물만이. "민지율!!"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고 있음에도 주변엔 불구경을 하는 사람조차 없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형의 얼굴. 하지만 나는, 형의 안전을 확인하기 전에 지율이의 이름을 부르며 주변을 살폈다. 그 많던 이웃들이 어째서 나와보지도 않는건지 의아할 새도 없이 나는 겁에 질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지율이를 발견했다. "민지율!! 위험하니까 건물에서 떨어져!!" 나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 건지 실성한듯 한곳만 쳐다보고 있는 지율이. 나는 집안에 형이 있음에도, 일단은 지율이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녀석을 일으키려 손을 잡았다. "아빠.." 절망적인 목소리로 아빠를 부르는 지율이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세상에서 지율이가 가장 사랑한다던 아저씨가 "아빠!!!!!!"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죽어가고 있었다. Writer. 청몽채화 36. ※승휘번외 2※ 지율이의 통곡 소리가 내 귀를 가득 채웠다. 더 이상 다른 데 신경쓸 여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눈으로 재준이를 찾았다. 우리보다 앞서간 재준이는 이 상황을 우리보다 더 일찍 발견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성격이 불같은 그 놈은 화염으로 가득한 집으로 뛰쳐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이재준!!!!!!!!!!!!!!" 땅바닥에 주저앉은 지율이를 뒤로 하고 재준이 쪽으로 튀어나갔다. "엄마!!!!!!!!!!!!!!!" "이재준!!!!! 그만해!!! 들어가면 너도 죽어, 이 새끼야!!!!" "놔!!!!! 엄마 죽을 바에 나도 같이 죽어버릴거야, 놔!!!!!!!" 나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율이에게 아버지가 전부고, 재준이에게 어머니가 전부였듯이... 나에게는 형이 전부였다. 그런 형이 불길 속에 휩싸여도 나는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형을 애도하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지율이와 재준이마저 위험했다. "놔, 가승휘!!!!! 놔!!!!!!" 미친듯이 소리치는 재준이를 돌려세워 뺨을 때렸다. 생각보다 강하게 내려쳤기 때문에 손이 얼얼했다. 재준이는 휘청거리면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확실히 아까 전보다는 제정신이 든 것 같았다. ".............승휘야......어떡하지...... 이제.... 어떡하지...." 우리는 그 때 열네살, 중학교 1학년생이었다. 하늘은, 우리에게 너무 잔인한 현실을 선물해주고 있었다. 그걸로 끝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것은 불행을 알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일단 119에 신고라도 해야 돼. 왜 아무도 연락을 안해주는 거지?" 가난한 우리들에게 휴대폰이 있을 리 없었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찰나, 반대편 벽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중학교에 사람을 보내!!! 무조건 애들을 찾아!!!!!" "병신들, 그러게 애들만 KG에 보내면 잘 살게 해준다는데 그걸 거절해?" "시체 확인하고 애들을 찾아. 그래도 한 군데에 몰아넣길 잘했다." 검은 제복을 입은 여러 명의 남자들이 언뜻언뜻 보였다. 하지만 딱 봐도 경찰은 아닌 것 같았다. 갑자기 등 뒤에서부터 소름이 끼쳐왔다. 왠지 멀리해야 될 것만 같은 사람들이었다. 설마, 저 사람들이 불을 질러 우리의 가족을 죽인 걸까.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애들'이란 우리를 일컫는 걸까. "감독관님!!! 저기 있습니다!!!!" 그 순간, 허리춤에 봉을 낀 한 남자가 나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지만 나는 주저앉아있는 지율이의 손목을 거세게 붙들었다. "일단 피하자,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해." 지율이의 눈은 공허했다. 방금 전의 사랑스러움이나 수줍음을 뿜어내던 눈길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달렸다. "이재준!!!!! 달려!!!!! 저 사람들이 우릴 잡으려고 해!!!! 저 사람들이 불을 질렀어!!!" 재준이의 눈이 그들을 향했다. 그들은 이미 달려오고 있었다. "옆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만나!!! 오른쪽 구석에 숨어있을게!!!!" 이미 쫒아오는 제복군단을 피하기 위해서 골목길로 계속 꺾어들어갔다. 지율이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유인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급작스럽게 도망친 우리들 때문에 재준이는 그들의 추격을 받고 있을 지도 몰랐다. "잠깐, 승휘야.... 나...." 힘이 풀린 다리로 너무 심하게 달렸기 때문인지 지율이의 신발이 벗겨져있었다. "괜찮아?" 발목이 다친 건 아닌지 걱정되어 지율이 앞으로 다가간 그 순간이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까만 총에 흰 글씨로 KG라고 적혀있었다. 도대체 KG가 뭐기에, 이렇게 우리를 쫒다가 죽이려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않았다. 나는 무작정 지율이의 손을 붙잡고 다시 달렸다.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내 귀 밑을 스쳐지나갔다. 쓰라림을 느끼기도 전에 위험하다는 생각에 나는 골목길에 몸을 숨겼다. "승휘야, 괜찮아????" 지율이가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율이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주었고, 나는 그 손수건으로 피가 나고 있는 귀를 막았다. 핏자국을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게 관건이었다. 피를 흘리면서 걷게 되면 우리의 위치가 바로 발각될 것이다. 조심스럽게 옆아파트의 지하주차장으로 숨어들어가 오른쪽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지율이의 손이 안쓰러운 만큼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심장이 벌렁 거리는 주제에 지율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마....." 그 순간, 누군가가 덮치듯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놀란 심장을 부여잡으며 누군지 확인했으나, 다행히도 재준이였다. "......... 나..... 들켰어.... 그 사람들이..... 날 봤어..... 내가 여기 들어오는 걸... 봤어.." 미친듯이 뛰었는지 재준이는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했다. 재준이가 지금까지 무사한 건 다행이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지율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남자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제복을 입은 남자 2명이 나타났다. "분명히 그 꼬마가 여기로 들어갔단 말이야. 내가 봤어." "감독관님. 손잡고 달리던 여자애와 남자애는 밖에서 놓쳤답니다." "제기랄!!!! 니들이 제정신이야??? 왜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불독같이 생긴 남자가 멀대처럼 키가 큰 남자를 발로 차며 욕을 중얼거렸다. "씨발, 남자애 하나는 여기로 들어온 게 확실하니까 걔는 똑바로 찾아내!!! KG 에스퍼 전용 아파트를 괜히 그 거렁뱅이들에게 나누어준 건 줄 알아?? 병신들, 눈치만 좀 있었으면 그게 임대아파트가 아닌 거야 진작 알았을 텐데. 어차피 굶고 살 거지 애새끼들, KG로 보내는 게 뭐 어떻다고 지랄들이야." "화재는 이미 뒤처리가 된 것 같습니다." "이제 가족이 죽었으니까 애들도 정신 차리고 KG에 순순히 걸어들어올 거야. 안 그래도 초능력자 숫자가 부족해서 미치겠구만....." 감독관이라는 남자가 담배를 하나 피워 물었다. 방금 알게 된 엄청난 사실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임대 아파트라고만 생각했던 곳이, 사실은 KG라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구역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초능력자 운운 하는 것을 보니, KG는 초능력자들을 모아 훈련시키는 곳 같았다. 형과 함께 아파트로 이사가게 된다고 좋아했던 옛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이미 내가 초능력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를 KG라는 곳으로 끌고 가려했으나, 우리형이 거절했고....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불을 질러 형을 죽인 것이다. 당연히 자기들 관할 지역이니 119를 불러주지도 않은 것이고... 퍼즐조각처럼 모든 사실들이 정확하게 끼워맞춰졌다. 잠깐.... 그러면.... 설마 지율이와.... 재준이도.....? 지율이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내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여전히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미안해..... 이거 다 나 때문인가봐....." ".............." "나.... 예지력이 있어.... 미래를 볼 수 있어....." 지율이는 그들의 대화를 다 이해하지 못한 듯, 모든 사건이 자신 때문에 발생했다고 믿고 있었다.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병신아...." 재준이가 지율이를 나무라듯 주의를 주었다. "나도 초능력자란 말이야...." 나는 놀라서 동그래진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숨겨서 미안, 나는 사람들의 프로필을 읽을 수 있어. 카운트라고 해." 재준이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담배를 피우는 감독관을 훔쳐보았다. "저 남자 이름은 박형렬이야. 나이는 서른 여덟. KG라는 국가기관에서 감독관을 맡고 있어. 씨발, 자꾸 옆에 있는 다른 남자랑 얽혀서 잘은 안 보이지만.... 성격이 매우 악독하고 잔인해.... 절대 걸리면 안돼, 우리 잡히면 죽을 지도 몰라."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정신을 차려야 살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기억을 조종할 수 있는 초능력자라는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괜히 지율이와 재준이에게 이야기했다가 더 큰 혼란을 유발시킬 것 같았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때는, 혼란이 독이 되는 법이다. 감독관은 담배를 물고 왼쪽 주차장부터 서서히 살펴보고 있었다. "이 쥐새끼같은 새끼... 내가 니 놈들을 낚아채려고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다렸는데... 자, 꼬마야. 어차피 잡힐 거 그냥 지금 나와라. 시간 지체했다간 얻어맞을 테니까." 그는 마치 사냥을 즐기듯 여유롭게 발을 놀렸다. 그가 점점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 말 잘 들어....."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속으로 기도했다. 형, 나에게 힘을 줘. "저 사람들은 남자 한 명이 이 곳에 숨은 걸 봤어. 어차피 누군가는 나가야 해." 재준이는 심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갈게." "저 사람들이 본 건 나야, 왜 니가 거길 가!!!" 나는 재준이를 향해 애써 웃어보였다. KG라는 기관에 끌려가면 언제 다시 나올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지율이를 잘 지켜줄 수 있는 건 재준이였다. 거칠고 냉정하며 반항적인 내 성격은 지율이를 오히려 더 힘들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임마, 나 대신 지율이한테 잘해." 작게 중얼거리며 나는 내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를 풀어 재준이에게 내밀었다. 형은 엄마의 유품이라며 그 목걸이를 나에게 주었다. 목걸이에는 엄마의 결혼반지가 달랑거리며 달려있었다. "그거 우리 엄마 대신이니까 지켜줘." 재준이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총알이 스쳤기 때문인지 귀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지율이의 손수건이 빈틈없이 빨갛게 젖어가고 있었다. 왼손으로 귀를 지혈한 채 오른 손으로 마이에 달린 명찰을 재빨리 떼어냈다. 그리고 떨고있는 지율이의 손을 잡고 그 위에 명찰을 올려놓았다. 지율이의 손은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너 내 꺼 맞지?" "...............승휘야......" "민지율은 가승휘 꺼라고 이름표 붙여두는 거야, 지금." 나는 지율이를 향해 웃어보였다. 또 다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피가 묻지 않게 조심하며 천천히 그녀를 안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독관은 점점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율이를 꽉 안고는 절대 풀고싶지 않은 손을 풀어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재준, 민지율, 내 눈을 봐." "..............." "나는 사람의 기억을 조종할 수 있어." 지율이의 눈빛이 몽롱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 가족에 대한 걸 잊고.... 나에 대한 걸 모두 잊어...." 나 대신 너희들이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 "...........미안해....." 재준이의 눈꺼풀도 점점 감기고 있었다. "난 기억을 다시 살리는 일은 못 해." 너무 많은 기억을 잊어버려서 정신을 잃은 지율이의 뺨을 한 번 쓸어보았다. "민지율." 대답없는 너. "............나 꼭 돌아올테니까... 그 때도 지금처럼 사랑해줘." 재준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재준이의 뺨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때렸지만 괜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재준......." ".............." "민지율 못 지키면.... 너 그 땐 두 배로 맞는다." 천천히 일어섰다. 감독관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 얼굴을 보며 한 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찾았다.... 쥐새끼." 우리를 지켜주는 누군가에게 빌고 싶었다. 우리 다시 만나게 되는 날, 아름답게 웃을 수 있게 해달라고. Writer. 홍양 37. 꽤나 긴 키스를 마친 우리는 서로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승휘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가슴이 터질듯이 설렜다. 나... 이래도 되는걸까? "오늘은 훈련을 너무 많이해서 동반이동으로 못가. 오랜만에 같이 걸을래?" "......."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는 우현이. 그러고보니 깁스를 풀었네.. 아직 다리에 힘이 있어보이진 않았지만 두발로 걷는 녀석이 기특해 쳐다보자 우현인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왜, 봐도 봐도 좋아죽겠지?" "우리....." "책임지란 소리는 안할테니까 걱정마. 첫키스도 아닌데 뭘.." 난 첫키스인데... 왠지 손해를 본것 같은 더러운 느낌에 녀석을 쏘아보자 우현이는 손을 앞뒤로 힘차게 흔들며 말한다. "너 잘 때 한번 했었어. 자는 게 너무 예뻐서..." "....." "이번이 두번째야." - 내가 정우현을 좋아하기라도 하는걸까? 나는 거울 속 내 입술을 한참동안 쳐다보며 고뇌에 빠졌다. 그나저나.. 정우현이 내가 잘 때 종종 이곳을 오곤 했다는 건 참 쇼킹한 일이었다. 게다가.. 키...키... 스까지.. 머릿속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찬물에 세수라도 하려 뒤돌아선 순간 "......." 유리창으로 검은 그림자가 스윽 지나간다. 오싹한 느낌에, 나는 사람만한 도둑고양이겠지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다시 욕실로 향했다. "아악!!!" 그러다 문득 건조대를 쳐다봤을 때, 내 속옷이 하나도 없이 사라진 걸 발견했다. 나는 악을 지르며 이불 속으로 쏘옥 들어가 사시나무마냥 몸을 떨었다. 하필이면 속옷만 사라졌다는 사실과 아까 본 검은 그림자가 겹쳐지며, 굉장히 공포스러운 이미지 하나를 만들어낸다. '동네변태...?' 이맘때 쯤 한번씩 고개를 내민다는 동네변태가 나한테 붙은 건 아닐까, 하는 추리를 해봤다. 하지만 동네변태가 사이즈를 아주 중시한다는 것에서 의구심이 들긴했다. 내 가슴은 내가 봐도... 속옷을 노릴만큼 그닥 크진 않았다. 날이 새면 당장에 재준이한테라 말해줘야겠다 생각이 들면서도 일단 이 긴긴밤을 어떻게 보낼까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설마..." 문득 떠오른 순간이동 에스퍼 정우현.. 게다가 집에도 자주오고.. 아무래도 정우현일 확률이 높아졌다. 그러고보니 쥐도새도 모르게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그 애 뿐이었다! 나는 신경질 적으로 입술을 손으로 문질렀다. 내가 그런 변태싸이코에게 내 첫키스를 뺏겨버린걸까! - 쉬는시간.. 정우현을 몰래 불러낸 뒤 취조를 시작했다. 역시나 순순히 불지는 않았다. "내가 니 속옷을 뭐하러 가져가!" "목소리 좀 낮춰!" 정우현은.. 문제가 한두개가 아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흥분하면 주변신경 안쓰고 악을 질러댄다는 것이었다. 나는 녀석이 발뺌 할 줄 예상하고 있었기에 담담한 얼굴로 타이르듯 얘기했다. "솔직히 얘기하면 봐줄게." "뭘 봐줘. 진짜 나 아니라니까! 아 씨발, 됐고.. 그 새끼가 누구야! 감히 내 여자 속옷을!" "너잖아! 누구긴 누구야!" "아니라니까! 날 뭘로보는거야!" 그렇게 한참동안 우현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승휘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우린 약속이나 한듯이 말을 멈췄다. 아까부터 계속, 화가난 것 처럼 보여서 말조차 붙이질 못했다. 아무래도 어제 우현이와 내가 키스하는 걸 봐서 그런거겠지... 역시나 굳은 표정의 승휘는 나와 우현이를 번갈아 노려봤다. "민지율." 그러다 내 이름을 부른다. 왜 하필 나인가! 우현이를 두고! 나는 잔뜩 쫀 채로 '응.. 왜..'라고 대답했다. "정우현이랑 있지마." 사춘기소녀가 누군가를 따돌리려할 때 쓰는 말을 승휘가 하자 이상해 쳐다보았다. 그냥 해보는 말일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녀석의 얼굴은 진지했다. "기억이라는 건 지울 수는 있어도, 지운걸 다시 되돌릴 순 없으니까. 좋을 때 멈춰." 나에게 말하면서도 눈빛은 우현이를 향해 있었다. 항상 수수께끼처럼 들리는 승휘의 말을 해석하기도 전에 우현이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승휘는 말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야. 거기서 더 가면.. 내가 무슨짓을 할지 나도 장담못해." 승휘가 낮은 어조로 우현이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우현인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두 남자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 부딪히는 걸 느낀 순간.. 이곳에서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가운데서면 뭔가가 콱 막힘과 동시에 가슴 한켠이 아릿하다. 우현이는 승휘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가승휘, 페어플레이하자."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 "싫어." 승휘의 단호한 대답에, 철없이 웃기만 할 줄 알았던 우현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천하의 우현이도 어떻게 할 수 없을만큼.. 승휘의 능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 녀석이 같잖다는 듯 피식 웃던 승휘는 천천히 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덥썩 내 손을 잡는다. 내가 우현이의 눈치를 살피며 손을 빼내려 할수록 더욱 더 세게 잡는다. "내가 뺏는거 아니야." "....." "니가 뺏어가려고 하니까 지키려는 것 뿐이야." 승휘는 그 말을 끝으로 내 손을 잡고 교실로 향했다. 몇번이고 거절할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이게 내가 승휘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배려라고 여긴거였을거다. 이미 우현이쪽으로 기울어버린 내 맘을 이젠 숨길 수 없었다. 솔직히 승휘가 남자로 느껴진 순간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고보면 승휘는 정작 중요한 순간에 마음을 다 주진 않았다. 그게 우현이와 승휘의 결정적 차이라면 차이였다. 여러번 마음을 내비치긴 했지만.. 난 그 마음이 어느정도인지 가늠할 수도 없다. 그만큼 녀석은 내게 한없이 차가운 사람이었다. 우현이는 장난스럽긴 했지만 적어도 차갑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늘 녀석의 마음을 느낄 순 있었으니까. "밀어내지만 마. 내가 다 할게. 넌 그냥 어디가지말고 그 자리에 있어." 교실앞에 다다랐을 때, 승휘가 내 손을 놓으며 말한다. 그 말에는 끝끝내 고개를 끄덕여주지 못한채 나는 교실안으로 들어가버렸다. - 오늘은 특별히 세남자 모두가 집으로 데려준다고 나섰다. 승휘와 우현이는 서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했지만 어색하기 짝이없었다. "너희 분위기 이상하다? 싸웠냐?" 귀신같은 재준이가 우리 셋 사이에 흐르는 이상기류를 눈치 챈 모양이다. 우현이는 그런 재준이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두른다. 말을 돌릴 모양이었다. "민지율 속옷을 훔쳐간댄다, 누가." 우현이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재준이와 승휘는 눈을 꿈뻑이며 우현이를 쳐다봤다. "너희 둘중에 누구야? 난 아니야." 우현이가 자신은 발뺌하며 수사망을 좁혀나가자 재준이가 질새라 말을 이었다. "나도 아닌거 알지? 지겹도록 본 니 속옷을 뭐하러 훔쳐." 재준이가 거기까지 말을 끝내자 두남자의 시선은 승휘에게 떨어졌다. 참으로 허접스러운 수사방법에 나는 녀석들의 어깨를 손으로 때렸다. "씨, 됐어! 됐다고!" 내 나이 열아홉이건만... 아무렇지도않게 속옷 얘기를 하다니. 해도 너무한 녀석들.. "너희들 다 너희집가! 앞으로 우리집에 출입금지야!"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얼른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세 녀석들이 뒤에서 킥킥 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고이 씹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한참 뒤 옥상에서 그들을 내다봤을 땐,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라지고 없었다. "지율양." "어억! 안녕하세요." "남의집 마당에서 뭐하십니까." 그러고보니 이제 이 옥상의 주인이 바뀌었구나. 어째, 전보다 수염이 길어진듯한 덕배씨가 뭐가있냐는 듯 옥상밑을 내려다본다. 내가 인사를 하며 서둘러 내려가려 하자 덕배씨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 야경이 좋던데.. 아참..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덕배씨가 잠깐만 기다려보라고 해놓고는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돌돌말린 하얀색 도화지를 내게 건넨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뭔가가 그려져 있을것으로 예상되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러고보니 덕배씨가 화가랬지.. "선물입니다. 펴보셔도 돼요." "아, 정말요? 그런데 왜 절.." "이 좋은 야경을 저만보기 아까워서 그려봤어요." 자신만만한 얼굴로, 떡이진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나는 가식적으로 웃으며 그림을 펼쳤다. 그리고 나는 할말을 잃고야 말았다. 예의상 '와~ 멋지네요'라고 말해주려 했으나 다섯살짜리 아이가 그려도 이것보단 낫겠다 싶은 난잡한 그림을 보자 말문이 막혀버렸다. 색색의 동그라미들만 가득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딜봐서 이게 야경이라는 건지.. 예술 세계의 심오함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네온사인입니다." 그 중 형광펜으로 그어진 직선을 가리키며 네온사인이라고 당당하게 그림을 소개하는 덕배씨. 자신의 그림에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어보였다. "부담갖지말고 받아주세요. 지친 지율양 마음에 위로가 됐으면 좋겠네요." "......감사해요..." 마음의 위로는 커녕 더 난잡하게 만들것 같은 그림을 받아들고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조덕배. 색깔이 변한건지.. 아니면 원래 그 색깔인지 알수 없는 꾸질꾸질한 회색 트레이닝복에 하늘로 뻗친머리,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까지.. 내 옆에 있는 세남자들에게서는 수염자국조차 찾아보기 힘든데.. 새삼 남자라는 존재가 두렵게 만드는 외모였다. 어쨌든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의 외모뿐만이 아니라 음습한 기운까지 모든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덕배씨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지율씨 초상화를 그려주고 싶은데..." "아뇨. 전...." "돈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돈은 받지 않을테니까!" 소름이 끼치는 음성으로 나를 자신의 집안으로 에스코트하는 덕배씨. 갖가지 핑계를 대며 도망치려 해봤지만 끈질기게 나를 붙잡았다. "괜찮아요.. 괜찮다구요!" "지율양의 젊음이 싱그러워서 옮겨담고 싶어서 그래요!" "저기요!!" 덕배씨의 손이 내 팔을 덥썩 잡음과 동시에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그의 집안으로 들어서고야 말았다. 생각할수록 이상하고, 상종못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이 늦은시간에.. 여자인 나를 그려준다며 집안까지 끌고 들어 올 수가 있는 것일까! 더러운 느낌에 얼른 뒤돌아서려는 나를 붙잡은건 벽면가득 걸려있는 괴기한 그림들이었다. 아니 그림이라기보단 낙서에 가까웠다. 다 이상했지만.. 그 중 가장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온통 빨강색으로 칠해진 종이 한장. 내 시선이 그곳을 향해 있다는 걸 느낀건지 덕배씨가 턱수염을 만지작 거리며 말한다. "바다에요." "......" 상상도 못한 그의 대답에.. 나는 깜짝놀라 덕배씨를 쳐다봤다. 그리고 어두침침한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을 돌려버렸다. 하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미친사람일줄이야. 나가려 문고리를 잡은 순간.. 문득 왼쪽 벽면을 쳐다봤을 때.. 나는 숨이 멎는 듯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율양.. 저기 의자에 앉으세요. 초상화 그려드릴게요." "......." 내가 잃어버린 속옷이.. 보란듯 그의 집 못에 대롱대롱 걸려있었다. Writer. 홍양 38. 덕배씨.. 아니 미친 이웃남자가 주머니에서 4B연필을 꺼내더니 내 얼굴에 갖다댔다. 담담한 척 하려했지만 주먹을 쥔 손 안에 땀이 흥건한 게 느껴졌다. "뭐하시는거....아악! 놔요!!" 따져묻기도 전에.. 조덕배는 세게 내 팔을 당겼다. 덕분에 신발도 벗지 않고 방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내 신발이 더러워질까 걱정될 정도로 방안 상태는 엉망이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물통이며, 붓... 그리고 오만가지 색깔의 물감들.. 깔끔했던 재준이의 방이 가물가물했다. 같은 집이 맞나.. 의심이 될 정도였다. "지율양, 이리 앉아보세요." "아악!!! 놓으시라구요!!!" 내 악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방 한구석에 있는 의자위의 먼지를 손으로 탈탈 털어내더니 어깨를 짓누르며 앉혔다. "지율양, 웃으세요. 예쁘게 그려드릴테니까.." "아저씨! 저 진짜 신고할거에요!!"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이며 서랍장에서 크레파스를 꺼내더니 내 앞에서 1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다. 이런 기막힌 상황들이 어째서 한번에 몰아서 닥치는 건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안그래도 충분히 혼란스러운데... 나는 민망스럽게 걸려있는 내 하늘색 속옷을 바라보다 도망쳐야 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대로 조덕배와 함께 있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카운트를 세고 조덕배의 앞에 있던 물통을 쏟으며 달려나갔을 때.. "하, 지율양..." "......" "나, 그리는 중에 움직이는 거 싫어해요." 굼뜬 줄만 알았던 조덕배가 어느새 내 앞을 가로막으며 달칵.. 소리나게 문을 잠궜다. "지율양.. 어서 저기가서 앉아요." "문 열어요! 진짜 진짜 신고할거에요!" 말로는 안될 사람이란걸, 이제서야 파악한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꾸역꾸역 번호를 누르려던 순간.. "어억!! 아저씨!!" 조덕배가 휴대폰을 바닥에 내던지고 나를 번쩍 안아들더니 음흉한 웃음소리를 냈다. 알수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려가며 발버둥치는 나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 "지율양.. 예술을 할때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에요." "아저씨!! 왜 이러시는...읍..." "이렇게까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좀 참아요." 말도 안되는 소리와 함께, 옆에있던 청테이프를 무지막지하게 이로 뜯어내고 내 입을 막았다. 필사적으로 거부하려 했지만 남자의 힘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놀란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왔다. "으으음~ 음" 그런 나는 아랑곳없이 콧노래를 불러가며 서랍에서 노끈을 꺼내 의자다리와 내 발목을 묶고는 남은 끈으로 팔을 묶었다. 이 기막힌 상황에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얼굴은 정우현이었다. 당연히 재준이가 생각날 줄 알았건만.. 어째서 우현이의 얼굴이 먼저 떠올라 버리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당장 이곳으로 와줄 사람이 우현이란 것 때문일것이다. 불행중 다행인건, 이제 웬만한 일에는 울지않을만큼 내성이 생겨선지 정신줄은 놓치지 않았다는 거다. 나는 무섭게 눈을 치켜뜬 채 조덕배를 노려봤다. 입이 청테이프도 막혀있는 바람에 욕을 해주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이건 미국에 사는 조카가 왔을 때 그려준 거에요." 가장 가운데 위치한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배실거리는 조덕배. 아무리봐도 사람얼굴 같지는 않은데.. 조덕배는 마치 사람이라도 되는 것마냥 손가락으로 그림을 쓸었다. "눈이 참 예쁘죠? 지금쯤 지율양 나이가 되있을까요?" 동그라미 안에 점이 찍어져 있는 모양을 가리키며 눈이라고 말하는 조덕배. 하아, 저게 눈이란 말인가. 아무리 내가 미술에 대해 문외한이라지만 예술과 낙서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조덕배의 그림은 아무리봐도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벽면에 있는 그림중에 그 어떤 것도 건질 게 없었다. "자, 이제 지율양을 그려볼까요?" 잠시 쓸쓸함에 젖는 듯 했던 조덕배가 자리에 앉아 스케치북에 뭔가를 끄적댔다. 계속 움직이다간 저 남자의 손이 내 몸에 닿겠다는 생각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똑바로 뜨고 조덕배를 쳐다봤다. 여차하면 혀를 깨물고 죽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다행히도 조덕배는 예술혼을 불태웠다. 지금 당장 날 건드리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그렇게 약 30분간 나는 꼼짝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물이 없네..." 밑그림을 다 마친 모양인지, 내가 차서 다 쏟아져버린 물을 쳐다본다. 이제 채색에 들어갈 건가보다. 조덕배는 물통을 들고 화장실쪽으로 향했다. 나는 그 순간 어떻게든 도망쳐야 겠다는 생각에 몸을 틀었고.. 쿵..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의자와 한몸이 되어 쓰러져 버렸다. 턱을 찧은 모양인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 가장 절망적인 순간... 내 눈앞에 보인건, 누군가의 하얀 운동화였다. 왠지 익숙하단 느낌에 서둘러 위를 올려다 봤을 때.. "깜짝아.. 잘못온 줄 알았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잔뜩 인상을 쓴 정우현이 서 있었다. 나는 구세주를 만난거 마냥 눈을 반짝였다. 이제 됐다... 이제 나갈 수 있어! 내가 마음을 놓고 있는 사이, 정우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을 느끼며 사방을 둘러봤다. 설마.. 나인줄 모르고 돌아간걸까? 아니면 내가 맘에 안드는 게 있어서 이런식으로 날 놀리려는 걸까? 내가 자기를 좀 의심했다고... 그것 때문에 삐져서 이런식으로 복수하려는건 아니겠지? "지율양.. 괜찮아요?" 내가 본건.. 간절함이 빚어낸 정우현의 신기루였나보다. 간절히 원했던 정우현 대신에 조덕배가 내쪽으로 다가와 서둘러 나를 일으켰다. "그러게 가만히 있으랬잖아요." 태연하게 물통을 가져다 놓으며 다시 내쪽으로 다가와 욱씬욱씬 아파오는 무릎을 손으로 쓰다듬는 조덕배. 그의 손이 닿자.. 한여름 밤 귀신을 만난 것 같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변태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아, 재준아 나 어떡해? 귀신마냥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정우현을 원망하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 "...." 우르르 쾅쾅...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조덕배와 나는 동시에 놀라 몸을 움츠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한점 없이 맑았었는데 난데없는 천둥이 치다니.. 조덕배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문을 닫았다. 창문에 투둑투둑..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빗방울이 맺혔다. 그리고 그 순간.. "봐봐! 이래도 거짓말이냐!"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을 때, 난 너무놀라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정우현과 가승휘가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승휘가 입에 붙여진 청테이프를 아프지 않게 떼는 동안 우현이는 손발을 묶었던 끈을 능수능란하게 풀었다. "너희들......"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을 불렀을 때..그들의 시선은 이미 조덕배를 향해 있었다. 조덕배는 갑자기 나타난 이들의 등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꿈뻑거렸다. "아니, 갑자기.. 어떻게..." "니가 민지율 건드렸냐..." 나이가 한참 많아보이는 조덕배에게, 낮은 목소리로 묻는 승휘. 우현이는 더러워진 내 교복을 손으로 탈탈 털었다. "난 그냥...초상화를 그려주려고.. 지율양이 그려달라기에.." 승휘에게 기가눌린 조덕배는 슬금슬금 도망나갈 구멍을 찾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나저나 내가 그려달랬다고! 저 사람이!! 내가 따지기도 전에 승휘는 휘적휘적 앞에 다가가 손을 번쩍 올렸다. "이름 함부로 부르지마." 그러자 조덕배는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는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그의 비굴한 모습에 승휘는 손을 내리고 미치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우현이는 그런 승휘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나도 모르게 덜덜 떨리고 있는 내몸을 한팔로 감싸안았다. 승휘가 보면 안될것 같아 떼어내야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너무 놀란 모양이다. "야! 이 개자식아!!!! 당장 문열어!!!" 그 때였다. 재준이로 추정되는 아이가 옥탑방 문을 사정없이 두드린다. 어쩐지 재준이만 없는 게 이상했다. 우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뛰어들어온 재준이가 무릎을 꿇고 있는 조덕배에게 달려가 퍽.. 소리나게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그러자 조덕배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진다. 재준이는 만족한듯이 주먹을 털더니 정우현의 팔에 안겨있는 나를 발견하고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현이는 그런 재준이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니가 내린비를 니가 맞고오냐, 병신아." 역시나 갑작스러운 비와 천둥은 재준이의 짓인가보다. 재준이는 우현이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나를 쏘아봤다. "민지율! 너는 나 없다고 아무남자한테나 끌려오냐! 내가 이래서 안심하고 잠이나 자겠어!" "...." "아 씨발.. 그리고 정우현 너는 나만 떼놓고가면 어떡하자는 거야!" 하수구 새앙쥐마냥 비에 흠뻑 젖은 재준이가 나와 우현이를 향해 투덜댄다. "내가 아직 세명까진 안된다고 했잖아. 상관없다고 해보자 그런게 누군데." "그럼 가승휘를 떼어놨어야지, 왜 나냐고!" "가승휘보다 니가 더 날 못 믿으니까 그런거겠지." 언성을 높이고 있는 그들 사이에서도 가승휘만이 진지한 표정으로 쓰러져 있는 조덕배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단 느낌에 나는 승휘쪽으로 발을 옮겼다. "어떻게 해줄까.." 다가서려는 그 때, 승휘가 내게 물었다. 정신을 잃은 척 누워.. 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조덕배가 살려달라는 듯 내 눈을 바라봤다. "괜찮아.. 난.." 내 대답에 안심한듯 다시 눈을 감는 조덕배. 그 때.. 내 등뒤에서 흥분한 재준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바보야, 괜찮긴 뭐가.....아, 저거 니 속옷 아니야???" 그때 구석에 걸린 내 속옷을 발견한 세남자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저새끼가... 봐줄랬더니.. 진짜 민지율 스토커잖아!" 뒷편에 물러나있던 정우현마저 흥분한듯 앞으로 나섰다. "가승휘, 일단 기억지워." 정우현의 말에 조덕배가 놀란 얼굴로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눈이 풀렸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듯 벽에 몸을 축 늘어뜨린다. "씨발.. 나 이 새끼 경찰에 데려다 놓고 올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낑낑거리며 조덕배를 어깨에 걸치더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동반이동을 마스터했다더니.. 생전처음보는 사람도 가능한것에 놀란 내가 눈을 꿈뻑이자 "넌.. 진짜... 한시도 눈을 못떼게 하냐." 재준이가 해야 어울릴 말을 중얼거리는 승휘. 왠지 또 짐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내 일이라면 이렇게 앞뒤 안가리고 쫓아오는 녀석들이 곁에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울컥한다. Writer. 홍양 39. 어제 옥탑방에 경찰들이 쳐들어와서 덕배씨의 모든 짐을 가져가버렸다. 경찰아저씨에게 조심스레 덕배씨의 행방에 대해서 물었더니, 아저씨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놈, 심각한 변태에다 정신병자예요. 아, 글쎄 제 발로 경찰서에 들어왔는데, 왜 경찰서 앞에 있는 건지 자기도 설명을 못하더라니까. 아마 정신병원에 갇혀서 감시 받을 거예요. 한동안 못 돌아올 거니까 아가씨도 마음 푹 놓고 자요.] ........ 승휘의 능력이 다시 한 번 대단하게 느껴졌다. 덕배씨는 변태이긴 해도 미친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승휘는 순식간에 그를 구제불능의 정신병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의 능력을 보면 언제나 소름이 끼치는데 승휘는 내 기억도 건드린 적이 있을까. 이미 한두 번쯤은 내 기억을 건드렸을 지도 모르지. 내가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면, 난 얼마나 무서운 상황에 놓여있는 걸까. 바로 이거다. 승휘를 스스럼없이 대할 수 없는 이유. 그는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대단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거기다 원래 성격조차 이성적이고 냉철하니, 마음놓고 그를 대하기는 어려웠다. "후우-" 어쨌든 깔끔하게 비워진 옥탑방을 보자 기분이 좋았다. 재준이와의 모든 추억이 되살아난 느낌이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더욱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일요일이니 짜파게티 요리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찬장을 뒤지자.. 사놓은지 얼마안된 짜파게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세 남자가 우리집을 드나들때마다 생기는 현상이었다. 살림살이가 거덜나고 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구석에 던져두었던 지갑을 집어들고 집밖으로 나섰다. 동네슈퍼를 갈땐 문을 잠그지 않았지만, 요즘들어 사나운 내 일진을 생각하며 열쇠로 문을 잠그고 있는데.. "동네가 왜 이 모양이야! 이게 산이지! 아후- 사람 죽겠네!" 걸걸한 목소리의 남자가 우리집 벽을 발로 쾅 차는 소리에 놀라고 말았다. 남자는 쉴새없이 욕을 내뱉으며 집 앞에 죽치고 서있었다. 덕배에 이은 이상한 남자란 생각에, 집밖으로 나가기가 두려웠지만.. 어쩄든 지금은 대낮이고 또 뱃속에서 배고프다는 신호를 자꾸 주는 바람에 당차게 대문을 열자 근육질에 구릿빛 피부를 가지고 있는 남자가 문을 차려던 발을 뒤로빼며 헛기침을 한다. 달달달..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는 구형 스쿠터에 '만리장성' 이라고 쓰여져 있는 걸로 보아 배달맨이 틀림없었다. 예상대로 집앞에 놓여있는 그릇을 수거한다. 친절이 생명이건만.. 남의집 대문이나 차고 있었다는 생각에 괘씸해 살짝 노려보자 배달맨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내 얼굴을 유심히 살핀다. 그제서야 나는 두려움을 느끼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저기...." 근육질의 배달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붙잡았다. 놈의 솥뚜껑만한 손이 어깨에 닿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직 덕배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쉬워보이지 않기위해 턱을 치켜올리며 도도하게 말했다. "짜장면 안 시켰는데요." "저기.. 너 나 몰라?" "......네?" 그런데 이 놈이.. 근육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흰색쫄티로 내 안구를 짓누르며 천천히 다가왔다. TV속에 나오는 근육남들을 보며 내심 멋지다고 느꼈던 내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던가. 실제로 보니 부담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는데... "민지율!!" 근육남이 활짝 웃더니 내 이름을 외치며 성큼성큼 다가온다. "윽....." 놀란 내가 악을 지를 수도 없게끔, 격하게 끌어안았다. 부담스러운 근육들이 몸에 닿자 공포심이 들었다. "맞지.. 너? 지율이!" "......." 머리로는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는 게 나을거라고 계산했으나, 지나치게 솔직한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졌다. 그러자 이번엔,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과도하게 높은 목소리로 반가움을 표시한다. "이야- 넌 어쩜 하나도 안 변했냐!!" "누구신데요?" 참다못한 내가 그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묻자, 무안한 듯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한다. "너, 오빠 기억안나? 조금 섭섭하려고 그런다?" "......." 이게 재준이가 말했던 '작업' 이라는건가. 나는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경계태세를 갖춘채 배달맨을 노려봤다. 내 이름까지 안다는 건 조금 이상했으나.. 여기까지는 재준이가 말한 '피해야 할.. 뻔-한 작업 제1조'에 해당됐다. "진짜 기억 안나나보네... 이름들으면 알걸?" "이름이..." "김영희." 아무런 쑥쓰럼없이 이름을 밝히는 배달맨을 보며 나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저 근육에, 남자다운 얼굴을 하고선 김영희라니... 그의 부모님의 얼굴이 궁금한 순간이었다. 내 반응에, 배달맨.. 아니 김영희군은 기분이 상한 듯 째려본다. "왜 웃어. 임마!! 아직도 기억안나? 오빠, 너희집 가까운 곳에서 중국집 했었잖아!" "우리집이요?" "그래.. 너 태양아파트 살 때, 재준이랑 너랑 나랑 셋이서.... 엥? 진짜 기억안나? 오빠 얼굴이 너무 변해서 그래?" 덥수룩하게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손으로 들어올리며 내게 기억해낼 것을 강요하고 있었으나, 그의 말을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태양아파트...? 그게 뭐지? 재준이와 내가 살았던 곳은 달동네 단칸방.. 그 전에는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시골에 있는 고아원이었던게 여럼풋이 기억이 난다. 태양아파트라는건 들어본적도 없다. "그때 왜.. 너희 아빠랑 너랑....." "민지율!"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너희 아빠' 라는 소리에 김영희의 말에 집중할 찰나 내 등뒤에서 재준이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요일에 웬일인가 해서 뒤돌아보자, 재준이와 승휘가 같은 트레이닝 복을 입은채로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난 녀석들을 무시한 채 김영희에게 따지듯 물었다. "방금 그거 무슨 소리에요? 제 아빠를 알아요?" 하지만 김영희는 내말을 무시한 채 두녀석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더니 순식간에 쪼르르 달려가 재준이를 한팔로 감싸안았다. "아, 씨발.. 뭐야!!!" 남자가 스킨십을 하는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재준이가 욕을 하며 떼어냈으나 김영희는 반가워 죽겠다는 듯 다시 한번 재준이를 안는다. "이재준.. 아니 철수야!!!!!" 이번엔 재준이를 '철수'라고 칭하며 얼굴을 부벼댔다. 영희와 철수...를 염두에 두고 붙인 별명은 아니겠지? 승휘는 그 꼴을 역겹다는 얼굴로 쳐다보다 내 손목을 이끌고 집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야!!! 가승휘!!!" 재준이가 살려달라는 듯 크게 승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김영희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승휘를 쳐다본다. "뭐야, 니가... 가승휘?" "그런데?" 승휘가 반사적으로 나를 자신의 등뒤에 숨기며 김영희를 노려봤다. 저 남자에게 무슨 소리든 듣고 싶었지만.. 지금은 나설 상황이 아닌것 같아 가만히 승휘의 등 뒤에 서있었다. 녀석만 아니었다면.. 나는 숨도 안쉬고 물었을 것이다. 날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고 아는건지. 우리 아빠란 사람은 어떻게 아는건지.. "이 자식.. 눈빛 사나운건 여전하네." "......." "형 기억 안나? 김영희!" 재준이의 팔을 질질 끌고 우리 둘쪽으로 다가온 김영희. 그나저나 김영희 저 사람은 누구길래 승휘까지 아는 걸까? 위험한 사람같진 않아보였지만 왠지 두려웠다. "너희 태양아파트 살때, 우리집에서 짜장면 많이 시켜먹었잖아." "......." 김영희의 말에, 뭔가 기억이 난건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승휘의 표정. 나와 똑같이 '태양아파트'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재준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넌 뭣좀 기억나느냐고 눈빛이기에, 모른다는 뜻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 신기하다. 너희셋 아직까지 붙어다니....." "닥쳐." 김영희의 말을 끊으며 승휘가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서려던 찰나에, 재준이가 김영희를 향해 물었다. "우릴 알아요?" "당연히 알지! 너희셋 다.. 나 기억 못하는거야?" 김영희는 실망했다는 듯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아까부터 그가 누군지를 기억해내기위해 갖은 애를 써봤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미칠지경이었다. 나를 알고, 재준이를 알고, 승휘를 알고.. 게다가 내 기억에 없는 아빠까지 알고 있는 남자. 그의 정체를 의심하기도 전에.. 난 그에게서 무슨 얘기라도 듣길 원했다. 재준이도 마찬가지인듯 했다. 약속이라도 한듯.. 어렸을때 기억이라곤 단편적인 몇가지 사건밖에 없고 부모님의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우리로썬... 과거의 어떤 사람과 마주칠때면 뭐든 알고 싶은게 당연했다. 근육맨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섭섭한 듯 인상을 굳히며 말했다. "셋이 짰냐? 어떻게 기억을 못해!! 내가 널..." "......" "얼마나 아꼈는데, 이 자식이!" 갑작스레 어깨를 세게 치는 바람에 재준이가 균형을 잃고 넘어질뻔 했다. 평소 성격같았음 욕을 했을테지만 웬일로 차분하게 물었다. "우릴 어디서, 언제 봤었는데?" 그래도 기분이 상했는지 반말로 묻는다. 하지만 그런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쿨한 남자 김영희가 무슨 대답을 하려던 찰나.. "짱개 너... 배달왔으면.. 배달이나 해." "짱개?"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여." 승휘가 신경질적으로 스쿠터를 발로찼다. 녀석이 지나칠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준이도 승휘의 태도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는 와중에 김영희가 분노에 가득찬 얼굴로 승휘앞에 바짝 선다. "너 지금 우리 꼬마를 발로 깠냐?" 꼬마란 배달용 스쿠터를 칭하는 듯 했다. 승휘가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자 기분이 나쁜듯 푸우- 하고 거친 한숨을 내뱉었다. 브릿지를 넣은 앞머리가 콧김에 흔들거렸다. "이 자식은 커서도 성깔머리는 그대로네, 이게 죽을라고." 승휘의 어깨를 손으로 밀치며 말을 잇는 김영희. 살벌한 분위기에 나는 촉촉히 젖은 눈으로 재준이를 바라봤다. 어떻게 좀 해봐! "형." 그때... 뒤에 가만히 서있던 재준이가 꽤 다정한 목소리로 김영희를 불렀다. 설마 녀석.. 뭔가 기억이 난걸까 해서 놀란 눈으로 쳐다보면 "쟤 무시하고, 차근차근 설명해봐요." "......" "지율이랑 나.. 몇살때 말하는 거에요?" 재준이가 물음에 승휘는 다시 한번 스쿠터를 발로 찼다. 이해 할 수 없는 돌발행동에, 재준이가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 "아 씨발, 이 자식이 미쳤나!!" 김영희군은 거의 울듯이 스쿠터옆에 주저 앉아 승휘를 노려봤다. 재준이 또한 사납게 승휘를 노려봤다. 저건 녀석이 진짜 많이 화났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노려보더니 경고하듯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가승휘 너.. 방해하지마." "방해아니야. 모르는 놈이 아는척하니까 짜증났을 뿐이야." 재준이는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승휘 등뒤에 있는 내 팔을 세게 잡아 끌었다. 그리고 김영희와 같은 눈높이로 꿇어 앉았다. 녀석이 내 팔목을 잡고 있던 덕분에 나 역시 덩달아 자세를 낮췄다. 재준이의 눈이 반짝였다. 이 사람이 우리 과거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형.." "응, 철수야 왜?" '철수'라는 말이 어지간히 듣기 싫은 듯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을 잇는다. "지율이랑 나 몇살 때 봤었냐고." "음... 너희 초등학생일때부터 쭉 알았지." 까마득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년수를 세며 바보같이 히죽거렸다. 재준이가 남자.. 여자를 떠나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럼에도 꾸욱 참으며 김영희에게 물었다. "우린 그렇다 치고.. 승휘는 어떻게 아는데?" "승휘?" "응, 저기 서있는놈." 재준이가 손가락으로 승휘를 가리키려 고개를 들었을때.. 승휘는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버린건지 보이질 않았다. 있을 줄 알았던 녀석이 없자 머쓱한 듯 손을 거두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물었다. "가승휘.. 안다 그랬잖아요, 형이." "응? 그게 누군데?" "........" "아, 방금 내 꼬마 발로 찬놈 이름이 가승휘냐? 그 새끼 어디갔어!" 방금전만해도 우리 셋 전부를 안다고 했던 김영희의 말이 순식간에 바뀌자 재준이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욕을 내뱉었다. "씨발.." "......." 설마.. 그 짧은 순간에 승휘가 근육맨의 기억을 지운걸까? 재준이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혹시나 싸움이 날까, 나는 어떻게든 녀석의 화를 풀어주고자 실실 웃었다. 하지만 재준인 그런 나를 옆으로 밀쳐내며 크게 소리를 지른다. "왜 지워... 니가 뭔데 지워!!!!!"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재준이. 한번 화가나면 눈에 뵈는게 없는 재준이의 성질을 알기에, 나는 발을 동동 구르다 얼떨결에 김영희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재준!!!! 뭐하는거야!!" 김영희와 내가 부랴부랴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재준이가 승휘의 멱살을 잡고 거친 욕을 내뱉고 있었다. Writer. 홍양 40. "이재준!! 놔놔!!! 싸우지마!!" 팔에 대롱대롱 매달리며 뜯어말리자 재준이는 인상을 썼다. 이럴때.. 등치도 좋고 힘도 좋아뵈는 김영희군이 말려줬으면 좋겠건만 승휘가 멱살이 잡혀있는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 방긋이 웃고 서있었다. 그러고보니 재준이와 승휘가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그들은 친하지도, 그렇다고 안 친하지도 않은 애매한 관계를 유지중이었으니까. "민지율, 너 누구편인데!!" 이 와중에도 편가르기를 하려하는 재준이의 말을 무시한 채, 있는 힘을 다해 재준이의 손을 떼어냈다. 내 힘으로 떼어냈다기보단 재준이가 제 풀에 지쳐 놓은 것이다. 그러자 승휘는 어깨를 손으로 탈탈 털며 김영희를 노려봤다. "왜 여기까지 따라 들어와." 승휘의 말에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하는 김영희. "이 새끼가!! 남의 새끼를 발로 찼으면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해야지!!" "미안하니까, 이제 가라?" 승휘는 목끝까지 차오른 화를 누르며 말했다. 승휘답지 않게 너무 당황한 상태란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 "치사하게 니들끼리만 짜장면 시켜먹냐!!!" 등뒤에서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안 나타나나 하던 참이었는데 우현이마저 똑같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타났다. 김영희의 티셔츠 뒤에 적힌 '만리장성' 이라는 단어만 보고 자신만 빼놓고 짜장면을 시켜먹은 줄 아는 모양이었다. 이런 정신없고 산만한 분위기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재준이는 뭔가를 캐내려 눈에 불을 켠 상태고... 이상하게도 승휘는 그것을 막고 있고 아무것도 모르는 우현이는 화가난 데다가 근육질의 김영희가 자꾸 내 눈을 괴롭혔다. "형." 그때.. 재준이가 다시한번 김영희를 부르자 놈은, 승휘를 노려보던 눈에 힘을 풀며 생글생글 웃는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김영희는 재준이를 많이 예뻐한 모양이었다. 여자인 나한테보다도 더 살갑게 대하고 있었다. "방해받으니까 우리 나가서 얘기할래요?" "어어!!" 김영희는 기다렸단듯이 호탕하게 웃으며 재준이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러자 재준이가 내 손을 잡았다. 내가 얼떨결에 같이 끌려가자, 김영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지... 율이도 같이?" 나의 동행이 탐탁치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런... 굉장히 뻘쭘했다. 재준이는 내 손을 더욱 꽈악 잡았다. "지율이 얘도 알아야 하니까." "뭘?" "우리 과거 말이에요." 그렇게 작당한 듯 셋이서 발걸음을 옮길 때, 등뒤에서 승휘가 낮게 속삭였다. "카운트로 보일거아니야." "........" 일반인인 김영희가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카운트 얘길 꺼내는 승휘. 다행히도 알아듣지는 못하는 듯 했다. '식당 카운터가 뭐 어째?' 라는 소릴 하는걸 보니 말이다. 어리둥절해 있는 나와 재준이에게, 승휘는 다시 한번 말했다. "단 하나라도 너희랑 연관된 정보가 있어?" "......." 재준이는 물끄러미 김영희를 쳐다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관련된 게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재준이의 표정을 포착한 승휘는 픽. 하고 비웃음을 날린다. "야, 지금 너희끼리 뭐하는건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턱이 없는 우현이가 물어봐도 우리 중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갑갑한듯 자신의 가슴을 팍팍 두드린다. 그런 그를 무시한 채 재준이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나랑 지율이.. 너까지 이름을 알았어." "그거야..." 재준이의 말에, 갑자기 뒤를 도는 승휘. 트레이닝복 등뒤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가승휘'라고 적혀져 있었다. 그러고보니 세남자의 트레이닝복 뒷편에, 하나같이 이름 석자가 새겨져 있다. 대체 왜 그런 옷을 입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승휘는 등을 보인채로 고개만 살짝 돌리며 말했다. "이게 아니더라도 이름쯤이야 알아내는 거 쉽지." "......." "의도적으로 우리한테 접근하는 놈이면 어쩔거야." 그의 말에 다시 한번 발끈하는 김영희. "지금 저 자식이 뭐래는거야! 내가 왜 재준이한테 의도적으로 접근을 해!" 재준이는 뭔가가 혼란스러운 듯 잡고 있는 내 손에 힘을 주었다. 승휘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나조차 받았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승휘는 지나칠 정도로 김영희를 견제하고 있었다. 재준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뒤돌아서서 승휘를 향해 말했다. "거짓말이라도 들을래." "......" "가요, 형." 재준이가 김영희와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간다. 승휘의 표정이 딱딱히 굳어지는 게 보였다. KG일로 녀석이 예민해져 있었기에, 뭘 걱정하고 있는지 모르는건 아니었지만 나 역시 궁금했다. 흩어져있는 우리의 과거가.. 우리 가족은 누구였고... 아니, 그전에 나는 누구인지.. 지어내는 소설일 뿐이라도, 누군가가 말해준다면 그걸 믿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워지니까. 나와 똑같은 상황인 재준이도 마찬가지일거고... 그 생각으로 한걸음 내딛었을 때 우현이가 내 뒤로 따라나선다. 반면에 승휘는 그 자리에 서서 멀뚱히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너희 알아서 하라는 듯,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커튼을 치며 말했다. "알았어. 정 그러면 여기서 얘기해." "싫어." "저 자식 하는얘기 곧이곧대로 다 믿을 생각이잖아. 여기서 얘기하라고." 승휘는 김영희를 KG의 스파이쯤으로 여기는 듯 했다. 그의 말을 다 알아듣진 못하는 듯 했으나, 김영희는 기분 나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올렸다. 결국 재준인 승휘의 말을 들을 모양인지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김영희의 팔을 떼어내며 식탁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가승휘를 빤히 올려다 보며 말한다. "뭐가 무서운건데?" "......." "너답지 않게 웬 당황?" 아까완 다르게 재준이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승휘를 놀리기라도 하듯.. 살짝 비꼬는 말투였다. "가승휘. 니가 찔리는게 없다면 기억은 왜 지웠는데?" "그런적 없어. 그리고 그런소리 일반인 앞에서....." "그래. 너도아네.. 저 형 그냥 일반인이라는거." "........" 날카로운 재준이의 말에 승휘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제서야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감지한 우현이가 분위기 반전을 위해선지 하이톤의 목소리를 냈다. "아, 나 탕수육 먹고 싶다! 월급 제일 많이 받는 이재준 니가 한턱 쏴!" "....." "싫어? 싫음 통장에 제일 돈 많은 승휘 니가 쏴!" 우현이의 말에 분위기는 더 싸해지고... 재준이와 승휘가 팽팽히 대립하는 상황에서 이번엔 김영희가 말을 꺼냈다.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 이상한놈 아니야. 간만에 재준이랑 지율이 만나서 기분 좋은데.." "그래. 여기서 얘기하지 뭐." 재준이는 김영희의 말을 끊으며, 나를 자신의 옆에 앉히고 김영희를 앞쪽에 앉혔다. 철저한 삼자대면.. 승휘와 우현이는 멀리 떨어져 선채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심문이라도 하듯, 진지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재준이가 먼저 목소리를 냈다. "지율이랑 저... 어디서 봤어요?" "태양아파트랬잖아. 너희 살았던 곳.. 기억안나?" 재준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이자, 김영희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우리둘을 내려다본다. "너희 재준이, 지율이 맞긴 맞아? 몇년을 살았었는데 기억을 못해?" "그럼, 저희.. 몇살때부터 못봤었는데요?" "중학교 들어간 이후로... 너희 교복입은 모습 몇달 못봤지, 아마." 맞다. 나와 재준이의 기억이 흐릿한 때가 14살 이전이니까. 뭔가 맞아들어간다는 생각에 나와 재준이는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김영희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큼지막한 두손을 재준이쪽으로 내밀었다. 잡아달란 뜻 같았으나.. 재준이는 애써 무시한 채 우현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김영희는 굴하지 않고 재준이의 턱선을 손으로 만지작대며 말했다. "내가 너 철수라고 부른건 기억나? 난 영희.. 넌 철수." "........" 재준이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철수라는 이름도 맘에 안들 뿐더러, 영희와 한세트라는건 더 싫은 모양이었다. "우리 철수, 넌 어렸을때부터 얼마나 멋졌는지 몰라." "......" "성격도 밝고, 운동도 잘하고, 게다가 잘생기고... 임마, 형이 널 얼마나 좋아했었는데.." "무슨 소릴 하는거에요." "크니까, 짜식... 더 내 스타일이다." 미친걸까? 재준이가 주먹을 꽉 쥔채 몸을 파르르 떨었다. 분노도.. 뭣도 아니다.. 천하의 재준이가 겁을 먹은 것이다. 우현이는 속이 안좋은건지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뭐든 캐내야 하는 재준이는 애써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며, 진지하게 물었다. "저희 가족은요?" "아까 우리 아빠 아신댔잖아요." 어렵게 꺼낸 재준이의 가족 얘기에, 덩달아 내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라면 나와 재준이에게도 가족이 있어야 한다. 아니.. 옆에 없어도 좋으니 기억이라도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억울하게도 우리에겐 조각난 기억도 없다. 또렷이 기억나는 건 14살 이후.. 고등학교 입학전까지 나와 재준이는 시골에 있는 작은 고아원에 살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이곳에 정착했다. 고아원에 계시던 원장님의 말에 따르면 우리를 처음 발견했을때 둘다 뭔가에 겁을 먹은 듯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그런 기억은 우리에게 없다. 약속이라도 한듯.. 재준이와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어릴때 기억이라곤 우리둘의 즐거웠던 한때... 몇개의 단편적인 추억들에 불과했다. 살던곳은 커녕, 가족조차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재준이와 내가 둘도없는 친구였단 기억만 또렷했단건 불행중 다행이었다. 평소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던 우리가 왜 이렇게 기를 쓰고 알아내려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처음일것이다. 가족에 대한 관심. 재준이와 내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김영희는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철수야." "......." "너희 가족없이 둘이 살지 않았나? 왜 그런걸 나한테 물어?" 뭔가 다른 얘기를 들을줄 알았건만, 김영희가 말하는 우리의 과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느새 화장실에서 돌아온 우현이가 들으면 더 비참해질거란 걸 계산한건지, 그만 하라는 듯 재준이 앞을 막아섰다. 그런 우현이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쳐낸 재준이가 언성을 높였다. "하, 처음부터 우리 둘이었다고?" 김영희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쩌면 예상했던 대답이었기에 나는 가만히 수긍을 하는 반면, 재준이의 눈이 촉촉히 젖어들었다. 녀석은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까까지만해도 기대감에 차 있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덩달아 내 마음까지 아팠다. "그딴게 어딨어." "......" "처음부터 혼자인게 어딨냐고!!" "철수야.." 김영희가 나지막하게 재준이를 부른다. 가승휘는 뭔가가 괴로운지.. 재준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채 인상을 찌푸렸다. 재준이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아냈다. 사나이는 우는게 아니라며 언제나 그랬듯이.... 꾹... 모처럼 담담한 내 마음과 바꾸고 싶었다. 차라리 내가 그랬다면 녀석대신에 펑펑 울어줄 수 있었을텐데.. 이 순간까지도 재준이는 울지 않았다. 가족없이 단둘이 사는 동안, 재준이는 울음을 참는 법을 배웠고 나는 녀석에게 기대 우는 법만 배웠다. 바보같이 재준이는 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나는 위로의 뜻으로 녀석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재준아, 그만해... 알고 있었던 거잖아." "......" "재준아..." "민지율, 처음부터 우리 둘이었대. 뭐 이런게 다있냐..."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던 재준이가 승휘쪽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 어느때보다 차가운 목소리였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 "가승휘, 너 좀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Writer. 홍양 41. 뜬금없는 재준이의 말에 승휘의 동공이 옅게 떨려왔다. 설마 재준인, 김영희의 기억마저 승휘가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승휘는 우리에게 용서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 난 녀석이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럴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재준이는 다른듯..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다 잠시후.. 재준이가 모든것을 단념한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는다. "너... 지워진 기억은 다시 되살릴 수 없다 그랬지?" "........" "하, 눈뜨고 당했네." 김영희는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우리 네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승휘에게 기억을 지우는 능력이 있는줄은 상상도 못하는 듯 했다. 확실히 위험인물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승휘는 견제를 풀지 못했던걸까? 재준이는 승휘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눈빛이 꽤나 살벌해, 괜히 내가 몸이 떨려왔다. "지금은 그냥 넘어가지만." "......" "가승휘 너.. 나중에 다 설명해야 될거야. 오늘일." 재준이는 그말을 끝으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김영희가 졸졸 그 뒤를 따르는 바람에 남은 건 나와 승휘, 우현이 뿐.. 정말 승휘가 기억을 지운걸까? 왜 어째서? 혼란스러움에 나는 승휘에게 어떤말도 꺼내질 못했다. 그 와중에, 기분이 그나마 나아 보이는 우현이가 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일요일이라 데이트 좀 할랬더니, 망했어." "........" "민지율.. 지금 기분은 영 아니겠지만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어?" 우현이의 말에, 승휘가 찌릿- 날카로운 눈빛을 던지며 우현이의 한쪽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명령조로 말했다. "동반이동해. 숙소로 가." "징그럽게 왜이래! 걸어가, 너! 아무리 마스터했다 그래도 왜 내가 너랑 동반이동을 해야돼!" 우현이는 기겁을 하며 승휘의 팔을 떼어냈다. 그러자 승휘가 눈썹을 꿈틀거린다. 화가 났으니 말을 들으라는 표시였다. "말 안들어? 동반이동 하라고." "내가 왜 니말을 들어......" "잊었어? 내가 니 상관인거? 하라면 해." 승휘의 말에 우현이는 치사하다는 듯이 팔을 휘어감고 나를 향해 찡긋 눈인사를 했다. 승휘는 그마저도 보기 싫은 모양인지 우현이의 다리를 발로 찼고 '악' 하는 비명이 들림과 동시에 두 사람이 사라졌다. 동반이동을 완벽하게 마스터했다더니.... 진짜인 모양이다. 마음이 안맞는 승휘와도 동반이동이 가능한걸 보니 말이다. - 다음날도 승휘와 재준이 사이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뒤끝없기로 유명한 재준이이건만, 이번일만큼은 단단히 화가난 듯 했다. 나 역시 승휘가 기억을 지웠다면 화를냄이 마땅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아는 가승휘는.. 좋은 기억을 지우진 않을것임을 알기에 설사 지웠다 해도.. 그게 나쁜기억일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차라리 재준이와 내가 모르는 게 나을것이다. 아직까지도, 김영희라는 남자가 승휘까지 알고 있었다는 건 찝찝하긴 했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 여기기로 어젯밤에 마음 정리를 해둔 상태였다. "재준아, 기분 풀어~ 니가 그렇게 축 처져 있으니까 나까지 우울하잖아~" 콧소리까지 섞어가며 녀석 옆에서 재롱을 떨어봐도 재준이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녀석이 어쩌다 한번씩 가승휘를 살벌한 눈으로 쳐다볼때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큰 싸움이 나겠다 싶어 가슴이 콩닥콩닥 댔다. 다행히도, 승휘는 재준이를 한번도 뒤돌아보진 않았다. "이재준.." 내가 재준이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며, 반강제적으로 기분을 풀어주고 있을 때.. 승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재준이를 불렀다. 재준이는 대꾸도 하지않고 못들은 척 이어폰을 귀에 꼽는다. 엠피쓰리에 연결되지 않아서 노래도 나오지 않을텐데,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리듬을 타는 모습이 초등학생 같았다. 유치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가승휘는 말을 이었다. "이재준 니말대로 나중에 다 말할게." "......." "그 놈 입말고, 내 입으로.... 지금은 아니야." "무슨 말이야, 지금은 아니라니.." "너흰, 그 모든거... 절대로 이겨내지 못해." - 체육시간. 체육선생님이 체육부장인 재준이를 부르시는 바람에, 재준이가 평소보다 빨리 나가자 승휘와 나.. 단둘이 어색하게 체육관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저- 쪽에서 호루라기를 옷에다 침을 스윽 닦아내며 체육선생님이 걸어오고 계셨다. 피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 만났다는 듯 내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망해버렸다. 저 인간 또 일 시키려들텐데... "어이, 민지율!!" "네?" "이리와봐." 아니나 다를까..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나를 부르자, 뒤따르던 승휘까지 내옆에 섰다. 체육 선생은 다짜고짜 열쇠를 내품으로 휙 던지더니 "체육관 뒷쪽에 창고있지? 거기서 테니스 라켓 좀 꺼내와." "제.. 제가요?" "응. 요놈이랑 같이 갔다오면 되겠네." 체육선생은 좋다 싫다 의사도 들어보지 않은 채 그대로 뒤돌아 서버렸다. 승휘에게 차마 같이가잔 말을 못하는 내가 멀뚱히 서있자, 승휘는.. 열쇠를 뺏어들며 앞서 걸었다. 난 그 뒤를 강아지마냥 쫄래쫄래 따라붙었다. 쥐들이 우글우글.... 불청결하기로 악명높은 허름한 창고앞에 도착하자, 승휘는 능숙하게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다. 어색해 죽을것만 같은 상황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녀석의 뒤를 따랐다. 후미진 창고에는 빛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뭐가 이렇게 깜깜해.. '쾅' 그 때, 강한 바람이 불어옴과 동시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너무 놀라는 바람에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승휘쪽으로 다가갔다. "아씨, 스위치가 어딨어?" 승휘는 짜증섞인 목소리로 스위치를 더듬거리며 내 손을 끌어와 자신의 체육복 끝을 잡게 했다. 내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하지만 끝끝내 스위치를 찾지못한 승휘가, 아까 우리가 들어왔던 문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문을 여려는데... '끼익..끼익..' 소름끼치게 문끼리 부딪히는 소리만 들릴 뿐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당황한 듯 문을 발로 쾅- 차도 문은 묵묵부답이었다. 승휘의 한숨소리가 허름한 창고에 울려퍼진다. "왜 그래? 안 열려?" 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승휘는 얼른 자신의 체육복 주머니를 뒤진다. 핸드폰을 찾는듯 했지만 핸드폰이 있을리 없었다. 내 핸드폰 또한 교복마이주머니 안에 고이 잠들어 있고.. 승휘는 아까보다 더욱 급하게 스위치를 찾았다. 약 5분후, 어둠속에서 용케 스위치를 찾아낸 승휘가 스위치를 켜자 창고안에 어두운 주황색 불이 켜졌다. 형광등일 줄 알았건만... 내 주먹만한 전구가 머리위에서 달랑달랑 거렸다. 사람 얼굴만 겨우 식별할 수 있을정도의 약한 불이었다. 다시한번.. 우리 학교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 화가 내려던 찰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쥐가 내 발앞을 지나갔다. "아악!!!!!!!" 나는 엄청난 하이톤 악을 내지르며 가승휘의 옆구리에 찰싹 붙었다. 세상에.. 쥐가.. 쥐가 내 발앞을 지나갔어...... 팔뚝만한 쥐가!! 겁을 잔뜩먹은 나를 보며 승휘는 안되겠다는 듯 다시 한번 문을 발로 찼다. 하지만 딱딱하고 녹슨 쇠문은 몇번을 차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전구밑에 주저 앉았다. 이럴 때, 우현이가 있었다면 밖으로 나가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텐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계속 문을 차대던 승휘도 지치는지 쇠문에 몸을 기댔다. "그만해.. 사람들 오겠지..." 나는 애써 담담하게 승휘에게 말했다. 그러자 전구밑에 쭈그려 앉은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던 승휘가 물었다. "너.. 몸을 왜 이렇게 떨어?" "응?" "추워?" 속으로는 괜찮다, 괜찮다 백번을 외치고 있었지만 그놈의 폐쇄공포증이 또 도진 모양이었다. 보통의 폐쇄공포증 같은 경우에는 혼자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이나,차에 타는 것을 무서워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것은 괜찮았다. 다만 이렇게 어두운곳에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공포증이 생기곤 했다. 재준이와 내가 약속이나 한듯 똑같이 겪는 공포증이었다. 가장 두려운 곳은 지하주차장.... 그곳에만 가면 온몸에 기운이 빠지고 패닉상태가 되어버린다. 이곳 창고분위기가 그와 비슷해서일까. 괜찮을거라는 마음과는 다르게 식은땀이나고 정신이 아득했다. "민지율...." 승휘는 걱정스런 얼굴로 내 옆에 앉아 내 어깨를 두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본다.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것 같은 모습에 가슴이 욱씬 아파왔다. 왜일까, 승휘만 보면 마음이 아프고 내가 죄라도 지은 사람마냥 한없이 작아진다. "왜 자꾸 몸을 떨어."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승휘와 내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힌 순간.. 왜 였을까. 내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툭 떨어졌다. 예고 없는 내 눈물에 녀석은 적잖이 당황했는지, 소매로 내 눈물을 닦으며 묻는다. "왜 그래. 너.. 무서워서 그래?" "......." 그래, 무서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갇혔다는게, 어둡다는게 무섭다라기보단... 승휘와 단둘이 있는 이 상황이 무서웠다. 놈의 얼굴을 볼때마다 알수없는 잔상들이 머리속을 헤집었다. 나도 모르게 주책맞게 눈물이 또 흘렀다. 이번엔 나도 모르게가 아니라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서였다. 숨이 턱 막히는 통증이었다. 나의 그런 모습에 승휘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녀석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알 수 없었다. "승휘야, 넌 누구야?" 그리고.. 그 와중에 나도 모르게 내뱉어진 말. 어쩌면 승휘와 나는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는 아니였을까, 김영희라는 남자가 나와 재준이 말고도 승휘를 안다는것도 이상하고.. 냉혈한인것 같은 녀석이 날 지나치게 감싸주는것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지금, 승휘와 단둘이 어두운 공간에 있는 이 상황이 익숙해서 이상했다. "너랑 이렇게 어두운 곳에 같이 있었던 적 있었어?" "........" "나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뭔진 모르겠지만.." "........." "너야, 확실해." 내 말에 승휘가 얕은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리고 체육복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명찰을 꺼냈다. '가승휘'라는 이름이 선명히 드러났다. 매일 봐왔던 명찰이지만 이번만은 느낌이 달라 멍한 눈으로 승휘를 올려다봤다. "너 내꺼 맞지?" 뜬금없는 승휘의 말.. 곧이어 내 손바닥 위에 자신의 명찰을 올려놓았다. '가 승 휘' 녀석의 이름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욱씬거렸다. 왠지모를 기분나쁜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자.. 승휘는 입가에 미소를 띄며 말했다. 너무나도 슬퍼보이는 미소였다. "민지율은 가승휘꺼라고 이름표 붙여두는거야, 지금." "........." "말했지, 돌아온다고." "........" "나 돌아왔으니까, 이제 너 내꺼하면 안되냐.." 평소 승휘의 말투와 조금 다르다는 생각에 잠겼을 때.. 가슴 속 한가운데서 알지못할 서러움이 북받쳤을 때... "민지율!!! 너 안에 있지??"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창고안에 빛이 새어들어왔다. 나와 승휘는 동시에 눈을 찌푸리며 빛과 함께 들어온 누군가를 빤히 쳐다봤다. 그곳엔...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한 우현이가 서있었다. 이제서야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쉴새없이 뛰던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우현이가 와줬어. "체육쌤 특별지시받고 왔지롱. 창고 문 고장나서 밖에서만 열린대. 너희 계속 안 오니까 나보고 가보라대?" "......." "둘이 얼마나 갇혀있었어? 설마 둘이 이상한 짓 한거 아니지?" "......" "농담인데 둘다 정색할래? 어라, 너 왜 울어? 가승휘가 때렸냐?" 쉴새없이 떠들던 우현이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벌떡 나를 일으켰다. 그런 우현이의 손을 승휘가 거칠게 떼어냈다. 그러자 우현이는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승휘를 쳐다본다. 하지만 놈의 눈빛에 아랑곳 없이, 승휘는 나를 자신의 쪽으로 끌며 말했다. "너 까짓것한테 뺏길 것 같았으면.. 기를쓰고 참지도 않았어." "......" "민지율... 내 여자야." 매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는 승휘.. 혹시 내가 모르는 게 있진 않을까 의심하면서도, 자꾸 우현이에게 향하는 내 마음이 야속했다. Writer. 청몽채화 42. “맹장수술 했다고 그래, 그러면 학교 며칠 못 나온다니까.” “병신아, 그러면 진단서 떼오라 그러잖아!!” “그러면 할머니 상 당했다고 그래.” “안 돼, 담임이 가족 없는 거 알아.” 점심시간. 나를 따돌린 채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는 세 놈들. 요즘 세 놈 모두 서로에게 불만과 적대감을 표시해오긴 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기에 안심했건만, 사람 불안하게 지금은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걸까. 진심으로 세 명이서 저렇게 무언가를 진지하게 하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본다. 더군다나, 우현이놈은 자기네 반도 아닌데 왜 맨날 여기서 죽치고 있는 걸까. 그것도 저렇게 심각하게. 재준이를 중심으로 놓고 승휘는 계속 인상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으며, 우현이는 쉴 새 없이 입을 열어 재잘거리고 있었다. 재준이는 때로는 눈빛을 반짝이고, 때로는 타박을 주며 그의 의견을 경청하는 중이었다. “야, 뭐하는데?” 뒤에서 그들의 등짝만 바라보고 있던 나는, 슬쩍 일어나서 그들이 책상 위에 둔 종이 한 장을 쳐다보려 했으나, 키 작은 나에게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야, 뭐하냐고!!” 나는 결국 재준이의 등을 찌르며 불만을 토로했고, “아, 민지율!! 오빠 바쁘다!! 좀 가만 안 있을래!!?” 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 성질을 부려대고 있었다. 서러움이 밀려왔다. “니들 설마 워너비 임무 이야기하는 중이야?” 내가 그렇게 물어봤을 때에야, 세 명은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우현이도 동반 순간이동 마스터했으니까... 임무하러 가는 거야?” 그들이 킬러 짓을 한다고 해도, 놈들이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은 있었다. 하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에 변함이 없다고 해도 그들의 성격이 여전히 지금과 같을 거라는 보장 또한 없다. 언제나 해맑은 미소로 밝게 세상과 자유를 만끽하는 그들이, 죄책감에 찌들어 어두워질까봐 이제는 그게 겁이 났다. 재준이의 한숨소리가 깊이 들려온 찰나, 승휘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울렸다. "그런 거 아니야." "걱정하지마, 바보야.“ 우현이의 손이 내 머리 위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놈은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위험한 일 할 때는 너한테 반드시 말할 테니까.” “............” “물론, 아무리 위험해도 꼭 다시 돌아온다는 각서도 쓰고 갈게.” 그딴 각서, 있어봤자 지킬 놈들이 아니란 건 내가 더 잘 알고있다. 더 이상 투정을 부릴 수는 없었다. 이미 놈들을 믿지않아서 한 번 크게 데인 후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놈들은 다시 몸을 홱 돌려 하던 일에 집중했다. ......... 그것은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을 모르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 모습과 흡사했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애가 우는데도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잠시 장보러 나간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며 보고있던 텔레비전 야구경기에 다시 시선을 돌리는 무심한 아버지의 상. 놈들은 여자를 달래는 방법 따위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괜히 더 서럽고 치사해서, 나는 잠자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무단결석은 안되겠지...?” “돌아오면 담임한테 존나 맞을걸.” “야야, 그냥 감기몸살로 해, 나한테 방법이 있어.” “진단서 끊어야 된다니까!!” “나 KG에 아는 애 있어, 변신술 하는 앤데 걔더러 의사인 척 하고 대학병원 가서 진단서 좀 끊어오라 그러면 돼.“ “해줄까?” “그 새끼 4급이야. 우리 손 안에 있다니까.” 더럽고 치사해서 가만 있으려고 했으나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매우 거만한 놈들의 모습을 보면서... “깡패들...” 욕을 해보아도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야야, 재준아, 근데 너 주아랑 사귀냐? 그 애 귀엽더라.” 밀려오는 심심함에 재준이의 등을 찌르며 물어봐도 놈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순간, 우현이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는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괜시리 얼굴이 빨개져서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책상에 얼굴을 박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민지율.” 정말 미쳤어, 나. 이제 목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저렇게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때, 저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를 때. 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귀여워서 미치겠어.” 점심시간이 끝나기를 간절히 원했다. 승휘에게도, 재준이에게도, 우현이에게도... 이 떨리는 마음을 들키기 싫었다. * 놈들에게 원치않는 따돌림을 당한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학교갈 준비를 하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오늘 꿈에 나온 재준이는 나를 향해 썩소를 날리면서 중얼거렸다. [이 인기많은 오빠가 왜 너 따위랑 놀아줘야 하지?] 오늘도 놈들이 나를 따돌리고 저들끼리 모여서 속닥거릴 예정일까? 재준이나 우현이를 족쳐서라도 그들이 꾸미고 있는 비밀을 캐내야 했다. 승휘는... 왠지 건드리지 못하겠다. 재준이나 우현이는 쉽게 막 대할 수 있는 것에 반해, 승휘의 앞에 있으면 비정상적으로 내가 작고 초라해지는 느낌이다. 교복 치마에 넣어둔 승휘의 명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나에게 이 명찰을 건네준 이유는 무엇일까. 마땅히 보관해둘 곳이 없어서 주머니에 넣어버렸지만, 승휘가 실제로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 들어 뭘 하든 불편함이 느껴졌다. 재준이나 우현이가 이걸 보게 되면, 화난 황소처럼 길길히 날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왠지 그리운 느낌이 들어, 차마 이걸 버려둘 수는 없었다. 승휘 자신이기라도 한 듯,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의 명찰. .......재준이랑 우현이 명찰은 엄청 더럽던데. 그나저나, 승휘는 나에게 명찰을 줘놓고도 학주에게 걸리지 않았단 말인가. 명찰 다시 신청하려면 적어도 3일은 걸릴텐데. 아, 재준이가 선도부니까 그 후광으로 무사한 모양이다. 재준이놈은 내가 규칙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악착같이 잡아서 놀리는 주제에 정우현과 가승휘는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봐주곤 했다. 옷차림을 점검하고, 승휘의 명찰을 다시 주머니에 고이 넣어둔 후, 책가방을 싸고 집 밖으로 나간 바로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 제 자리에 서 버리고 말았다. 이재준, 가승휘, 정우현. 세 남자가 학교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었다. “뭐야, 너희들 나 마중나왔어?” 셋이 나란히 서 있는 꼴이 마치 지구를 지키는 용사들 같았다. “잠시 같이 가줘야겠는데.” 재준이가 눈을 찡긋 하며 내게 중얼거렸다. “뭘? 어딜 가? 학교 가야지.” 이 놈들이 왜 요즘 안하던 짓거리를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현이는 씨익 웃더니 내 눈 앞에 어떤 종이쪼가리를 들이밀었다. 나는 종이를 받아들고 대충 훑어보았다. 병명이 감기몸살이라고 적힌 진단서 한 장. ......... 그런데 왜 여기 적힌 이름이 왜 내 이름이란 말인가. 나는 분명히 감기에 걸리지도 않았고, 멀쩡하게 두 다리로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뭐야, 이거?” 그들을 향해 묻는 순간, 갑자기 어제 이 세 놈이 책상에 모여 무언가를 끄적거리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다. 어제 세 명이서 작성하던 건 민지율의 결석 사유서였다. “니들....... 설마.....” “학교 결석할 방법 생각하느라 존나 애먹었다. 이 진단서도 직접 만들어왔어.” “갑자기 왜 이런 짓을 하는데?” “여행가자!!” 우현이가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무 갑작스러운 소리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여행?” “워너비 임무 시작하기 전에 휴가 받았어. 악마년한테 너도 데려간다고 하니까 허락했어. 우리 세 명하고 악마년, 임주아, 너. 이렇게 여섯 명이 가기로 했어. 사실 악마년 데리고 가기는 싫은데 매니저라 어쩔 수 없어.“ “야, 그럴거면 나한테 미리 말을 해주던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두려움이 온 몸을 휘감았다. 카운트 겸 날씨조종 에스퍼 이재준, 메모리 컨트롤 에스퍼 가승휘, 순간이동 에스퍼 정우현, 투명인간 에스퍼 도하진, 염력 에스퍼 임주아... 이들과 여행을 한다는 자체가 공포였다. 예지력이 있는 줄 알고 한평생 살아왔으나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판정난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이제야 절실하게 느낀다. 내가 예지력이 있는 줄 알고 날뛸 때, 다른 이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다른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줄 알고 착각한 모양이다. 실제로 요즘의 나는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머릿속을 스쳐가는 영상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제는 나도 어쩔 수 없이 내가 예지력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준비할 거 아무 것도 없어, 필요하면 그냥 가서 사면 돼. 그럼 가자.” “야, 그래도 그게 말이 되냐. 기다려봐, 내가 빨리 방에 들어가서 짐 싸고....” 내가 말하는 순간, 재준이는 너무나도 가볍게 내 몸을 들어올렸다. “악!!!!!!!! 야, 뭐하는 짓이야!!!!!” “자, 가자가자, 즐거운 여행, 출발하자.” 이건 납치와 다름없는 행각이었다. 정말 이 놈들이 제멋대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왜 이들은 평범한 삶을 거부하는 걸까. 놈들이 조금만 평범했다면, 나에게 솔직히 말하고 나와 함께 합의를 거친 뒤 여행계획을 조정했을 것이다. 재준이는 놈의 등에 매달려 버둥대는 나를 무시하며 이미 대기하고 있는 승합차 안에 밀어넣었다. “꼬맹이 아가씨, 하이.”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하진언니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언니, 반가워요. 요즘 자주 보네요.” 그리고 나를 마주보며 앉아있는 주아까지. 귀엽게 미소짓고 있는 모습은 여전했다. 진짜 내가 남자라면 주아를 사랑했을 지도 모른다. “승휘가 내 옆자리 안 앉으면 나 운전 안해.” 하진언니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씨익 웃었다. 진짜 섹시하긴 더럽게 섹시했다. 승휘는 나를 돌아보더니 한숨을 쉬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리하여, 재준이는 주아 옆에, 우현이는 내 옆에 앉게 되었으니... 맙소사. 괜히 더 어색해진다. “너... 너... 너희들은 사귀는 것이니? 나 진짜 매우 궁금해서!!!” 민망해진 나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재준이와 주아를 번갈아보며 물었고, 주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익어버렸다. 피식 웃고있는 재준이와의 모습과 매우 비교되었다. “아, 아닌데요, 언니!! 그냥 좋은 오빠동생 사인데요!!!” 주아가 급히 대답하지만... “모르지. 돌아올 땐 여보 자기 되어있을지.” 하진언니의 쿨한 한 마디에 주아는 거의 울상이 되어버렸다. 나를 KG에 신고까지 한 하진언니지만 그래도 그녀를 미워할 순 없었다. 그녀 나름대로 승휘를 너무 사랑해서 그를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이었을 테니. 어쨌든 KG에 소속된 놈들을 가장 잘 알고있는 건 하진언니였다. 그걸 알기에 우리는 모두 아무 일 없던 듯이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아, 씨발 속도위반 걸리겠다.” 순간, 차를 몰던 하진언니가 투명인간으로 변했다. “누나, 그 짓 좀 하지마!!!! 아무리 그래도 속도위반 딱지는 날아온다니까!!” 재준이가 소리치고... “승휘야, 너 카메라 필름의 기억 지우는 건 못해?” “못해, 그딴 거.” “하진언니, 그게 제가 염력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그래? 그럼 빨리 해봐, 이거 KG소속 승합차라서 속도위반 딱지가 기관으로 바로 날아오면 내 월급에서 깎여.” 이게 무슨 코미디란 말인가. 내가 이래서 여행오기가 싫었던 거다.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억지로 웃으면서 인상만 찌푸리고 있을 때, 우현이가 내 귀에 살짝 속삭인다. “돌아올 때 여보 자기가 되는 거.” “.............” “재준이네가 먼저일까, 승휘네가 먼저일까.” 마치 퀴즈문제를 내듯이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놈. “아니면....” “............” “우리가 먼저일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현기증마저 일었다. 너무 떨려서, 나는 창 밖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Writer. 청몽채화 43. 도착한 곳은 정동진이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걸 보며 새로운 다짐을 되새겨야 한다는 게 놈들의 설명이었다. 솔직히 그 다짐이라는 게 뭘 뜻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국가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도 웃기고, 무조건 반항하는 것도 위험했다. 힘겨운 일에 옭아 매인 놈들의 인생이 너무 서글퍼서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호텔 방을 두 개 잡았다. “니네는 302호, 우리는 303호.” 하진언니는 재준이에게 열쇠를 내밀며 중얼거렸다. 사실 나는 하진언니랑 같은 방 쓰는 게 무서웠다.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고, 그녀를 미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좋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주아가 있으니까 안심할 수 있었다. 순수하고 여린 주아가 있으니 그리 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나 자신을 위로했다. 짐 하나 없이 책가방을 달랑대며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갔다. ........ 망할 놈들.... 뭐? 준비할 게 아무 것도 없어? 필요하면 그냥 가서 사면 돼? 장난하냐? 내가 여기 있는 동안 계속 교복을 입고 있을 수는 없잖아!!! 짐정리를 하는 하진언니와 주아 옆에서 나는 필통이 든 책가방만 뒤적거리고 있었다. 뒤적거려봤자 아무 것도 나오지 않을 것이 뻔했지만. “저기, 지율언니, 옷 없어요? 제 옷이라도 드릴까요?” 주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묻는다. 당장이라도 손을 벌리고 옷을 구걸하고 싶었지만 미안해서 그냥 실실 웃고만 있었다. “언니, 이거요!!!” 주아는 내게 옷을 내밀었다. 검은 바지에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흰 후드티. 주아가 입으면 그냥 귀여운 거겠지만 내가 입으면 초딩 소리밖에 못 들을 것 같았다. 나는 나보다 세 살 어린 주아보다 키가 더 작았다. 요즘 애들은 발육이 빠르다더니. 그래도 교복을 입고 있을 수는 없으니 애써 웃으며 주아의 옷을 받아들었다. “야, 그래도 얘가 고3인데 이런 옷 주면 어떡해?” 하진언니가 담배를 빼물며 중얼거렸다. “이미지의 탈피. 이런 거지.” 언니는 주아가 준 옷을 빼앗으며 자신의 옷을 몇 개 집어 나에게 건넸다. 매우 짧은 청치마에 몸에 딱 달라붙는 주황색 줄무늬 티. “언니.... 이걸 저더러 입으라구요?” 언니는 대답도 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 여자 미친 거 아니야?]라고 소리치며 그녀 목을 조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내가 싫다는 건 알겠지만 왜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려는 걸까. “저 그냥 주아 옷 입을게요.” “왜, 자신 없어?” 언니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긴 다리를 섹시하게 꼬며 말했다. “왜 꼭 몸매를 가리는 옷을 입을까.” 하진언니는 대놓고 유아적인 내 몸매를 비웃고 있었다. “승휘가 왜 너한테 반했는지 낱낱이 봐두고 싶어서 그래.” “..............” “몸매부터 보고 싶으니까, 한 번 입어봐.” 그녀는 내게 도전적인 시선을 보냈다.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난 이런 일을 참을만큼 인내심 강한 성격은 못 되었기에, 언니를 쏘아보며 대답했다. “승휘가 꼭 섹시한 사람을 좋아하라는 법은 없을 텐데요.” “그렇다고 어린애를 좋아하진 않겠지. 변태가 아니고서야.” 눈에서 불이 활활 타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승휘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하진언니에게 무시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에게 존재하는 지도 몰랐던 도전 정신이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좋아요, 입어요, 입죠!! 입어봅시다.” 일부러 고개를 쳐들며 거만하게 대답하고는 언니가 준 옷을 집어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곧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하진언니가 입는 이런 옷을 내가 소화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작은 키, 마른 몸매, 들어갈 곳은 들어갔지만 나올 곳도 들어갔다는 치명적인 단점. 나는 궁시렁대며 교복을 벗고 언니가 준 옷에 내 몸을 우겨넣었다. 하진언니도 매우 마른 몸매이지만 키가 커서인지 언니가 준 상의는 내게 컸다. 굳이 의도한 건 아닌데도 한 쪽 어깨가 계속 내려갔다. 청색의 미니 스커트는... 나보다 다리 긴 하진언니가 어떻게 입고 다니는가 싶을 정도로 짧았다. 무릎 위로 족히 15cm는 올라오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민망함이 몰려왔지만 나는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하진언니는 마치 예술품을 훑어보듯이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았고, 주아는 놀란 눈빛으로 내게 소리쳤다. “언니한테 이런 매력이 있을 줄 몰랐어요!! 꼭 여자 아이돌 같아요, 하진언니랑은 다른 매력이네요!! 언니들 둘 다 너무 예뻐요!!“ 일단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 것만 해도 감사했다. 하진언니도 언제 갈아입었는지 아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검은 핫팬츠에 탑은 그녀의 유니폼이나 다름없었다. 집에서도 그렇게 헐벗고 다니더니. 그래도 바닷가의 찬 바람을 예상했는지 흰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주아는 분홍색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귀여웠다. 쟤는 정말 뭘해도 귀여울 것 같다. 부러웠다. 재준이놈이 주아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던데 주아같은 여자라면 몇 백번이라도 재준이 놈을 맘 편하게 맡길 수 있었다. 오히려 주아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앞서 말한 적 있었듯이 재준이 놈은 주체할 수 없는 바람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진언니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중얼거렸다. “나가지. 애들이 기다릴거야.” * 바닷가에 나갔지만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모든 일의 발단은 이재준일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주아에게 잘 보이고 싶은 놈은 갖은 수를 다 써서 멋을 부리고 있으리라. “바다 오랜만에 와요, 정말 좋아요.” 주아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너는.... KG에 언제부터 있었어?” 기뻐할 질문은 아니겠지만 순간의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버렸다. 물어보자마자 굳어지는 주아의 표정을 보고 내가 잘못 질문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주아는 애써 다시 웃고는 대답했다. “열 살요.” 아무 것도 모르는 열 살 꼬마 때. 섣불리 위로할 수도 없었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단체생활같은 거 익숙해요. 참는 것도 잘하고, 말도 잘 듣고. 근데 그거랑 사교성이랑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한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거, 솔직히 잘 못하겠어요. 어렵잖아요.“ 주아는 언제부터 자신과 평범한 사람들을 구분 짓기 시작했을까. 며칠 전, 사람을 죽였다고 울던 주아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무섭지 않아?” “국가는 날 지켜줘요. KG가 날 지켜줄 거예요.” “............” “말만 잘 듣는다면요.” 그렇게 대답하는 주아의 눈이 너무 슬퍼보여서 난 시선을 피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말을 듣지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곳이 이들이 속한 기관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곳에 기대야만 하는 그들의 일생이 슬펐다. “사람들은 날 무섭게 생각해요. 길가에서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가는 거예요. 힘드실 것 같아서 도와줬는데 그 때 제 감독관이 절 발견했어요. 그래서 끌려왔어요. 끌려오는 데 아무도 안 도와줘요. 오히려 무섭다고 피하고, 소리치고. 제발 도와달라고 어떤 대학생 언니 손목을 붙잡았는데 뿌리쳤어요.“ “............”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는데 엄마아빤 보고싶어요. 못 본지 2년은 된 것 같아요. 특별한 일 없는 이상은 면회 허락 안 해줘요. 괜히 쓸데없는 그리움 자극한다고.“ 주아는 말없이 쭈그려앉은 채 밀려오는 파도에 손을 담궜다. 그러고보니, 우현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3년간 가족을 보지 못했다고. “그게 에스퍼들의 일생이야.” 하진언니는 그동안 우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언니는 바다 저 너머를 보며 중얼거리다가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니가 피한 운명이기도 하지.” “저 예지력 없어요.” 하진언니가 인상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재준이가 없다고 했으니까 확실할 거예요.” “............” “이제 아무 것도 안 보여요.” “엉터리 맞네.” 그녀는 피식 웃었다. 왠지 씁쓸해보이기도 했다. 에스퍼 입장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이!!” 그 때, 뒤에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런데..... 우리를 부른 건 재준이도, 승휘도, 우현이도 아니었다. 처음보는 낯선 남정네들이었다. 철지난 꽃무늬 티셔츠를 입고, 머리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것이... 꼭 자기네 민박집에서 자라고 손님들을 꼬시는 양아치들 같았다. “요즘 휴가철도 아니라 이렇게 이쁜 아가씨들 보기 힘든데. 어디서 왔어요?” 껄렁껄렁 대며 우리 앞으로 다가서는 세 명의 남자들. 하진언니는 대답없이 담배를 피워물었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오우~!! 언니 너무 섹시하다.” 하진언니를 향해 감탄하고, “아, 자기는 너무 귀엽고.” 주아를 향해 느끼한 눈빛을 보내고. “.........너는... 너는.... 그래, 너는 그래... 뭐, 예쁘네.” .........나를 향해 이쁘다고 말하는 모양새가 매우 껄끄러웠다. 왜 내 칭찬을 할 때는 한 박자 쉬는 건지 정말 궁금했다. “어때, 같이 놀래? 우리가 끝내주는 데로 안내할게. 다들 나이가 어떻게 돼?” 천천히 하진언니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묻는 양아치. 다른 두 놈도 주아와 내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입 닥치고 있는 게 좋을 텐데, 험한 꼴 당하기 전에.” 하진언니가 웃었다. 정말 니 까짓 놈들은 두렵지도 않다는 투였다. “에이, 말 너무 무섭게 하지 말고, 응?” “주아야, 너 요즘 트레이닝 들어갔지? 사람 장기 뽑아내는 염력 트레이닝.” 하진언니의 말을 듣고 더 놀란 건 나였다. 주아가 저런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사람 장기를 뽑아내다니. 그건 정말 말 그대로 살인기술이었다. 주아는 울 것 같은 눈으로 하진언니를 바라보았다. 양아치에게 둘러싸인 이런 하찮은 일에 그런 심각한 초능력을 쓰기 싫다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니, 뭐. 울지는 마. 굳이 능력 쓰라는 건 아니니까. 내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어. 발로 거시기를 차버릴까, 뒷통수를 갈겨버릴까, 그것도 아니면...“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하진언니의 눈이 뒤쪽을 향했다.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네.” 나는 하진언니의 눈길이 향한 곳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에 재준이, 승휘, 우현이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셋 다 험상궂은 표정이었다. 놈들의 시선은 우리를 향해 고정되어있었다. “난, 우현이가 지랄한다에 한 표.” “저, 저는 재준오빠가 온다에 한 표요!!” 하진언니와 주아가 중얼대는 와중에도 양아치들은 느끼한 손길로 어깨를 어루만졌다. “.........저는... 승휘가 다가온다에... 한 표.” 내가 말을 마친 순간, 승휘가 재빠른 속도로 우리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양아치를 밀치고 내 손목을 휘어잡는다. “미쳤어?????” 큰 고함소리. 솔직히 내가 큰 소리 들을만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 남자들을 욕해도 모자랄 판국에 지금 무슨... 내가 그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려는 찰나. “내가 당신 이럴 줄 알았어!!!!” 양아치들이 경계하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애 엄마가 이래도 되는 거야? 장모님이 찾으셔, 장인어른도 배고프시대.” .......... 나는 그저 입만 떡 벌리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승휘는 바로 내 손목을 놓고 부드럽게 나를 돌려 자신의 품에 감싸안았다. 그리고.... 그 양아치들을 향해 묻는다. 여유로운 웃음까지 지은 채로. “내 부인한테... 무슨 용건이지?” Writer. 청몽채화 44. “왜 다들 대답을 안하지? 내가 묻잖아. 내 부인한테 무슨 용건이냐고.” 승휘의 말에 나는 경악했다. 나는 힐끗 하진언니의 얼굴을 확인했다. 기분이 좋지 않아보이는 건 확실했지만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아, 아닙니다. 저희가... 하하... 유, 유부녀신 걸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양아치 세 명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승휘의 눈빛과 말투에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야, 민지율 너 옷이 그게 뭐야!!?” 양아치 세 명이 달려가자마자 승휘는 무표정으로 내 목을 감은 자신의 팔을 풀어주었고, 재준이는 나를 향해 핀잔을 주며 소리쳤다. “잘하는 짓이다. 니 옷 꼬라지... 이건 뭐 나 꼬셔달라고 유혹하는 거지, 이게..” 마치 엄마처럼 잔소리를 시작하는 재준이. “야, 이 노출증 환자야!!!!!!!! 애한테 이런 걸 왜 입히냐!!!!!?” 그리고, 나를 보며 얼굴을 붉히더니 하진언니에게 소리치는 우현이. “야, 너는 또.... 이런 걸 입으란다고 입냐? 내가 미쳐요, 진짜!!!” 그리고 자신이 입고있던 외투를 벗어 내 허리에다 묶어준다. “졸지에 가승휘 부인 돼버렸잖아.” 우현이는 입을 댓발 내밀었다. 삐진 티가 그대로 드러났다. 하진언니는 피우던 담배를 던지며 우현이의 뒷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퍽 소리와 함께 우현이의 상체가 앞으로 숙여졌다. “악마년!!!!!!!!! 왜 때려, 자꾸!!!!!” “너 민지율 좋아하는 거 확실해?” “아, 그럼 당연히 좋아하지!!!!” 이렇게 불쑥불쑥 우현이의 마음을 확인하게 될 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승휘가 내게 보이는 관심은 부담스러웠지만, 우현이의 마음은 아니었다. “근데 왜 가승휘보다 반응이 늦어?” 하진언니 또한, 승휘가 내 남편으로 변해버린 상황이 매우 거슬리는 것 같았다. “저 새끼가 상황판단이 빠른 거지!! 내 여자한테 다른 남자가 껄떡대는데 그 상황에서 발이 빨리 움직이냐!!? 갑자기 굳어버려서 아무 것도 못하겠더구만!!!“ 우현이가 재빨리 변명하는 순간. “위험한 상황에서 여자를 빨리 구하는 게 순서 아닌가.” 승휘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리고, 민지율 아직 니 여자 아니야.” 또 다시 시작된 그들의 대립에, 재준이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재준이는 에스퍼와 내가 만나는 걸 극도로 반대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일은 너무나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 “언니... 재준이 오빠는 뭐 좋아해요?” 저녁을 먹고 호텔방에 돌아왔다. 하진언니와 재준이가 간식거리를 사러 나간 후, 남자들이 사용하는 302호의 침대위에서 주아가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차마 그 순진한 눈을 앞에 두고 재준이가 좋아하는 게 ‘여자’라는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내가 망설이고 있을 찰나, 의자에 앉아있던 우현이가 재빨리 대답한다. “담배 좋아해, 담배.” 저 미친새끼. 재준이 이미지 나빠지게 애한테 그런 걸 가르쳐주다니. “그에 못지않게 도박도 좋아하지.” 우현이에게 질세라 승휘도 한 마디 거든다. 재준이가 항상 즐기는 내기 농구나 판치기 등을 빗대어 한 말인 것 같았다. 주아의 표정이 금세 시들어버렸다. 안쓰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바로 그 때, 문을 열고 재준이와 하진언니가 들어왔다. 주아는 여자와 담배와 도박을 좋아하는 재준이 앞에서 또 다시 환하게 웃어보였다. “오늘 휴가가 끝나면 당분간 지옥일 테니까.” 하진언니는 검은 비닐봉투에서 각종 술과 안주거리를 꺼내들었다. “어쨌든 오늘은 광란의 밤을 보내자.” 결국 모두 둥글게 원을 그리고 모여앉아 술 파티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중학교 3학년인 주아는 모든 상황이 낯선 것 같았지만 그래도 발갛게 볼을 붉힌 채 기대감으로 충만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재준이와 우현이는 술 마실 생각에 매우 기뻐하는 듯 보였고, 승휘는 담담하게 앉아있었다. 그리고 나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이지만 그래도 즐기지 않는 나는... 그냥 머리만 긁적이고 있을 뿐.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제일 신난 건 하진언니였다. 그녀는 미친듯이 종이로 된 소주잔을 나눠주며 ‘원샷’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 “야, 내가 잘생겼어, 정우현이 잘생겼어?” “재준오빠요오....” “우하하하하!! 야, 그럼 내가 잘생겼어, 가승휘가 잘생겼어?” “재준이 오빠요오!!!” “우하하하하하.” 정말 진상도 진상도 저런 진상이 없었다. 주아가 취한 건 이해하겠지만 재준이도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마신 술에 흠뻑 취해버린 것 같았다. “분위기도 달아오르는데, 어때? 우리 진실게임 한 판 할까?” 아직도 눈이 초롱초롱한 도진언니가 우리를 향해 물었다. 물론 이미 취해버린 재준이와 주아에게 물은 건 아니었으나 오히려 격한 찬성을 드러낸 건 그 두 사람이었다. “좋아!!! 무조건 해, 다 죽었어!! 해!!!” “해요!! 우리 해요!! 진실게임 해요!!” 정말 잘 어울리는 바퀴벌레 한 쌍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커플이었다. 우현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승휘와 나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반대하는 사람들 없으니까 그냥 한다. 자, 일단 소주병이 가리키는 사람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엔 지명해서 돌아가고. 대답 못하면 무조건 소주 원샷이야.” 하진언니는 씨익 웃으며 바닥에 소주병을 눕혀놓고 돌렸다. 예사롭지 않은 솜씨였다. 한 두 번 해본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소주병이 처음 가리킨 사람은 바로 재준이. 별 웃긴 것도 아닌데 재준이는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댔다. 추접스러웠다. “뭐든 다 물어봐봐, 으하하하하. 역시 처음은 주인공이 장식해주는 거지.” “........오, 오빠랑 지율언니.... 사귀는 거 아니죠?” 주아가 빨개진 얼굴로 물었다. 주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나마저 어이가 없어 넋을 놓아버렸다. “...........나랑 민지율?” 재준이는 인상을 찌그러뜨리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야, 쟤는.... 쟤는.... 주아야, 너 불알친구라고 아냐.” 저 새끼 어린 애를 앞에 두고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그냥 친구야!!! 정말 그냥 친구!!! 사심없는 그냥 친구!!!!!” 나는 재준이가 어린 아이를 이상한 단어로 혼란스럽게 만들까봐 급히 나서주었다. 주아의 표정이 환히 밝아졌다. 재준이는 실실 웃으며 주아를 가리켰다. 다음 질문을 받을 타자가 주아라는 소리였다. “좋아. 그럼 주아 차례지? 내가 물어볼게. 재준이 좋아해?” 하진언니가 질문했다. 그녀의 성격처럼 정말 단도직입적인 물음이었다. 주아의 얼굴에 베시시 웃음이 떠올랐다. 술에 취해 이미 보이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좋아요, 무지 좋아요, 오빠만 보면 죽겠어요, 좋아서.” 재준이는 이미 술에 취해 그런 말이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놈은 눈을 감고 졸고있었다. 저딴 놈을 사랑해버린 주아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엔 하진언니요. 제가 물어봐도 되죠? 진짜 승휘오빠 좋아해요?” 주아는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지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들의 특성처럼 질문을 쉴 새 없이 퍼부었다. 하진언니는 피식 웃는 것 같더니 망설임없이 소주잔을 들어 원샷했다. 쿨한 반면에 자신의 진심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승휘가 지하 고문실에 끌려갔을 때 퉁퉁 부어버린 하진언니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승휘를 좋아하고 있었다. “난 우현이한테 물어볼게. 민지율 좋아하는 거, 진심이야?” 아까 바닷가에서도 했던 물음을, 하진언니는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계속된 질문에 불쾌했는지 우현이는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진심이라고 했잖아. 목숨걸고, 진심이야.” 하진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행운의 여자네, 민지율.” 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를 읽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나는 가승휘한테 질문할게.” 승휘는 내리깔았던 눈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승휘의 눈을 자세히 바라본 게 처음인 것 같았다. “내가 받은 질문이랑 똑같은 질문할게. 민지율 좋아하는 거, 진심이야?” 우현이의 대답은 바닷가에서 이미 한 번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떨리지 않았지만 승휘의 대답을 기다리는 순간은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가 단호한 얼굴로 아니라고 대답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내가 그럴리 없잖아, 그냥 장난이었어.] 그렇게 대답해주면 한결 편해질 것 같았다. 승휘는 언제나 무거운 짐의 무게처럼 나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진심이야, 오래 전부터.” 오래 전부터, 라고 발음하는 승휘의 말에 강한 의지가 스며들어 있었다. 승휘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가 나를 쳐다볼 때면 언제나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우현이는 거칠게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승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극도로 예민해진 두 사람의 감정이 미묘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남은 건 지율이 하나네.” 하진언니가 비웃듯이 말을 이었다. “내가 물어볼게. 가승휘야, 아니면 정우현이야?” 언니의 말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자고있던 재준이마저도 게슴츠레한 눈을 뜬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 저.... 그게....”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두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큰 실례였다. 물론 승휘는 내가 우현이와 껴안고 키스하는 장면까지 목격했지만 그래도 나를 좋아한다고 밝힌 상황에서 거절당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모두의 시선을 느끼다가 앞에 있는 소주잔을 급히 들었다. 특히 내 오른쪽에 있는 우현이와 내 왼쪽에 있는 승휘를 바라보는 건 힘들었다. 소주 한 잔만 마셔버리면 모든 것을 없었던 일처럼 끝낼 수 있었다. 소주를 원샷하기 위해 잔을 입가로 가져갔을 때, 우현이가 내 손목을 붙들었다. 덕분에 소주가 넘쳐흘러 내 팔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눈만 크게 뜨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숨기지마. 니 진심을 말해.” “.............” “더 이상... 쓸데없는 곳에다 니 마음 흘리고 다니지마.” 뻔히 널려있는 가시밭길을 피해가려는 내 심정을 정확히 간파한 말이었다. 지금 피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다시 마주치게 될 일이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려는 순간, 요란한 핸드폰 소리가 경직되어 있는 그 침묵을 깼다. “아, 미안. 내 꺼야.” 하진언니가 바닥에 놓여있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대답이 궁금해서 웬만하면 받고싶지 않지만 받아야겠어. KG에서 온 전화야. 전화받을 동안 지율이 넌 어떤 대답할 지 생각하고 있어.“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한순간 몸이 느슨하게 늘어졌다. “네, 도하진입니다. 네, 다들 같이 있어요. 잘 감시하고 있습니다.” 매니저에게도 저렇게 매번 전화가 오는 모양이구나. 에스퍼들은 정말 범죄자보다도 철저하게 사생활을 간섭받는 존재였다. “네, 알겠습니다.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딱딱한 어조로 대답하던 하진언니가 천천히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하진언니는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진실게임은 여기서 중단하자. 대신 재준이, 승휘, 우현이 너희들에게 전할 말이 있는데.”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서 거두어지고 하진언니를 향해 꽂혔다. “국가에서 방금 막 명령이 내려왔어.” “................” “워너비 프로젝트 제 1조.” 긴장감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휴가에서 복귀하는 즉시.” “..............” “국가의 비리를 알고있는 청신그룹 대표 송진식을 사살한다.” 모두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씨발.........” 재준이의 낮은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이제 모든 게 시작이라는 생각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Writer. 홍양 45. 산통이 깨져버린 술자리를 더이상 이어갈 순 없었다. 가장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난 하진언니를 시작으로 우리는 하나하나 차례대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휴가에서까지 그들은 시달리고 있었다. 새벽 6시 20분.. 주아가 해뜨는 시간을 문자로 알리자 마자, 동시에 침대에 누웠다. 급격히 어두워졌던 녀석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마음이 심란했다. 하진언니가 나와 주아가 있음에도 거침없이 워너비프로젝트에 대해 얘기 한 뜻은 뭐였을까. 사실 아이들이 킬러일을 하더라도, 나만 모르고 있으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생각도 했었건만 하진이언니는 들으라는 듯이.. 현실을 직시하라는 듯이 내게 말했다. 주아는 술에 취해선지 눕자마자 잠이 들었고 하진이언니는 뭔가가 마음에 걸리는지 계속 뒤척였다. "민지율.. 자?" 그러다 음산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하진이 언니. 나는 자는척 대답을 하지 말까 생각하다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을 해버렸다. 뭔진 모르겠지만.. 지금 그녀의 입에서 좋은 얘기가 나올리가 없다. 그냥 씹을걸.. "정우현.. 가승휘 둘중에 누가 널 더 사랑하고 있는것 같아?" "......."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를 내는 하진언니. 나는 애꿎은 천장만 쳐다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난데없이 두녀석의 마음을 확인해 버린 지금, 정작 나는 어떻게 녀석들을 대해야 좋은건지 감이 서질 않았다. 난.. 정우현을 더 좋아하는게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우현이가 승휘보다 날 더 좋아하고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아니.. 날 더 사랑해주는 건 승휘임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승휘를 볼때마다 가슴이 시리다. 우현이와 함께 있을 땐 즐겁고 설레는 반면에, 승휘를 볼때면 너무 마음이 아파와 본능적으로 피하게 된다. "알고 있는거지?" 하진이언니는 내 마음을 읽은 듯 말을 이었다. "승휘라는거.." "......" 내가 아무말도 하지않고 입을 다물자 하진언니는 반대로 돌아눕더니 아주 먼 옛날얘기를 하듯 아득하게 말했다. "녀석들이 열여섯일때 처음봤어. 내가 스물둘에 매니저가 됐거든..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본부내에서는, 하루 24시간 화장실을 제외하고 무인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어. 감독관이나 매니저만 볼수 있고.."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일까. 골똘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에 하진이언니는 반쯤 몸을 일으키더니 밤중에 미안하단 말과 함께 담배 한개피를 물었다. 그리고 창문가에 서서 담배를 피운다. 어째.. 세남자보다 더 골초인 것 같다. 하진언니가 내 맘에 들었다면.. 난 그녀의 건강을 위해 진지하게 금연을 권유했을 것이다. "난 에스퍼들의 삶을 실시간으로 봤지. 꽤 재밌어." "그러면 승휘나 우현이도...." "응. 난 녀석들을 집중적으로 봤어. 그렇다고 처음부터 승휘한테 마음이 있는건 아니고... 너무 어리잖아. 그냥 귀엽네.. 이 정도였지." 열아홉과 스물다섯.. 여섯살차이. 자신도 승휘가 한참 어린건 인정한다는 듯 피식 웃었다. "승휘는 열넷에 들어왔고, 정우현은 2년뒤.. 열여섯에 끌려왔어. 처음 1년간 집중관리대상일 정도로 KG에 적응을 못했었어. 걔..." 지금도 다르진 않다. 어쩔 수 없이 따르고는 있지만.. 우현인 KG를 경멸하고 있다. 3층까지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하진언니는 담배연기를 하늘로 흩뿌렸다. 그 모습마저 그림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결국 어떤 얘길 하고 싶어하는지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정우현 그 자식.. 전형적인 상류층 집에서 자랐대나봐. 그런데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거의 팔려오듯 했고." "......" "말로는 자기 버린 가족들.. 다신 보고 싶지 않다고 그러는데 난 알아. 얼마나 그리워 하고 있는지... 해만 뜨면 감독관이고 매니저고 할것없이 당돌하게 개기다가도 매일 밤마다 울다 지쳐 잠드는 모습 지겹도록 봤거든. 생각보다 마음이 약한 새끼야. 그걸 감추느라 누구한테 진심같은 거 안줘. 어떻게 보면 가승휘보다 더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지도 몰라." 우현이에게 그런 아픔이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언제나 장난스럽고 개구진 모습 뒤에 그런 상처가 있었기에, 어쩌다 한번씩 승휘보다 더 싸늘한 모습을 보이는걸까? 그나저나 밤마다 우현이의 그런 모습을 훔쳐본 하진언니는 대체 무슨생각이었을까. 내가 모르는 모습을 알고 있는 언니를 보자 괜히 경쟁심이 들었다. 하지만 하진언니는 내쪽은 보지도 않고 차가운 밤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계속 말을 이었다. "승휘는 먼저 적응할 시간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완벽해보였어. 훈련시간, 밥먹는시간, 자는시간까지.. 어기는 걸 못봤으니까. 24시간 테이프를 다 돌려봐도 흠이라곤 하나없었어. 제발로 걸어들어온 에스퍼들도 길어봐야 3개월 버티다 나가겠다고 난린데 걘 소란 한번 안 피우더라.. 다들 뭐가되도 될 놈이라고 난리도 아니었어.. 참.. 흥미로웠어. 난 저놈이 언제쯤 무너질까 기대했는데 KG에 있는 지난 5년간 가승휘는 한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어." 내가 알고 있는 승휘 그대로였기에, 새삼 놀랄것도 없었다. 나는 가만히 하진이언니 말을 새겨들으며 그녀의 옆선에 감탄했다. 콧대가 높구나, 참. 하지만 하진언니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랬던 녀석이 금방이라도 무너지려고 준비라도 하는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여." "......" "민지율 넌.. 가승휘를 위험하게 하는 애야. 유일한 약점인 셈이지.." 어느새 본색을 드러내고 막 쏘아붙이는 하진이 언니.. 또 싫은 소리를 듣겠다는 느낌에 잠이든 척 눈을 감았다. 그런 나에게 하진이언니는 나지막히 속삭였다. 일종의 경고와도 같았다.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녀석을 감당할 수 없어. 걘 내가 지킬거야." - 조덕배가 탈옥해서 다시 날 찾아오는 악몽을 꾸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일출을 보러 나섰다. 새해도 아니건만..우리말고도 꽤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 모여 있었다. 힘이 넘쳐보이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잠을 설친나와, 술병에 걸린 듯한 재준이가 골골대며 모래사장을 밟았다. "아씨.. 나 토할거 같애. 방으로 들어갈래.." "여기까지 와서 일출은 봐야죠, 오빠." ....... "정우현, 이거놔아. 나 졸려 죽겠어." "너 말 안들으면 모래사장에 심어버린다!" 어제, 같이 술에 취했었음에도 멀쩡해보이는 주아가 재준이를 질질 끌고 우현이는 내 팔을 질질 잡아끌고 있었다. 참으로 한심한 불알친구였다. 재준이와 내가 개처럼 헥헥 거리며 모래사장에 도착했을 때 "해 뜬다!!" 우현이는 내 몸위로 자신의 점퍼를 덮어주며 신이난 듯 외쳤다.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벌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잠이 달아났다. 와, 예쁘다. "야, 사람들 가려서 잘 안보이지?" "뭐하는거야! 내려놔!" "지율아. 그게 해다, 해! 믿겨져?" "창피하게 왜이래! 내려놔!" 번쩍 내 허리를 들어올리는 우현이, 명당을 사수하겠다며 맨 앞으로 앞서나간 하진이언니, 멀찍이 떨어진채 알수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걸어오는 승휘, 해가 뜨고 있음에도 술에서 덜깬듯 주저앉아 골골대는 재준이, 그런 재준이를 내팽겨둔 채 들뜬 얼굴로 웃고 있는 주아, 그리고 우현이의 손에 허리를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나까지. 우린 같은 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도 각자 다른 생각에 젖어있다. 그렇게 3분쯤 지났을 때.. 해를 보는 것도 지겨울 즈음, 하진언니의 '이제 그만 가자'란 말도 무시한채 모래사장에 세 남자가 나란히 섰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해가 전지현보다 예쁘다며 난리를 치던 우현이마저도 말이다. "니들 소원대로 해뜨는 것도 봤으니까 가자, 이제! 감독관 또 전화오잖아!" 하진이언니의 계속되는 재촉에도 꿈쩍도 않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후회안할 자신있냐." 그러던 중.. 승휘가 묻는다. 하진이언니는 한숨을 쉬며 차를 이리로 끌고오겠다며 가버리고 주아와 나만 남아 세 남자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죄책감이라면 승휘 니가 제일 많이 들거야. 괜찮겠어?" 배려하는 듯한 재준이의 말에 승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다 똑같아. 누가 더 힘들고 덜 힘들고는 없어. 다들 똑같이 힘들거야." 그들앞에 떠오른 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죽도록 밀어내고 싶던 내일이 오늘이 되버린 지금.. 어느덧 머리위에 떠있는 해는 끔찍한 신호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일의 시작인 나 민지율은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한 채 그들이 다치지 않기만을 빌어주는 수 밖에 없었다. - 하진언니의 난폭운행 덕분에 예정시간보다 1시간이나 빨리 집에 도착했다. "야! 도하진! 운전을 발로하냐! 무슨 여자가 그렇게 거칠어!" "언니.. 이제 좀 살살가요.. 저 멀미할 것 같아요." 나는 롤러코스터를 탄것마냥 즐겁기만 했는데 나머지 아이들은 죽을상이 되어 하진언니를 노려본다. "그럼 니들이 운전하던가!" 여기서 자기 혼자만 성인임을 내세우며, 다시 한번 핸들을 격하게 꺾자 우리집이 나왔다. 아무래도 날 먼저 내려다주고 갈 모양이었다. "다음에 또 보자. 볼일이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가시돋힌 하진언니의 마지막 인사. 오늘까지 병결을 잡아놨으니 학교는 내일부터 가도 된다는 반가운 말과 함께 덩그러니 나만 남겨놓은 채 승합차는 떠나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겨우 하루 집을 비웠을 뿐인데, 집안에는 적막감이 흘렀다. 하지만 이런 외로움에 익숙해진 나는 책가방을 구석에 던져놓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녀석들에 대한 걱정도 잠시.. 잠이 먼저 밀려온다.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채 길고긴 잠에 빠져들었다. - 꿈인지 현실인지.. 애매모호한 상태였다. 대체 얼마나 잔건지 어느덧 밖은 어둠이 짙게 내리깔려 있었다. "....." 나는 부스스- 눈을 뜬채, 바닥에 앉아 침대에 머리를 반쯤 걸치고 있는 누군가를 쳐다봤다. 나 아닌 누군가가 방안에 있음에도 놀라지 않은 건 익숙한 뒷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일어났어?" "......" "무슨 잠을 그렇게 오래 자냐?" 이런식이었을까? 나 잘때 몰래 오곤 했다는건.. 오늘과 같은 상황을 이야기 한건가보다. 불쑥 찾아온 무례에 화가난 내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를 켜려하자, 내 팔목을 꽉 붙든다. "정우현..." ".....이대로 있자." 내 팔목을 잡은 그의 손이 안쓰러울만큼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가만히 우현이를 내려다봤다. 어둠속의 그의 얼굴이 잘 보일리는 없었지만, 난 생생히 느끼고 있다. 지금 녀석의 얼굴이 얼마나 절망스럽게 일그러져 있을지를..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자, 우현이가 평소와는 다른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되게 이기적이다, 민지율..." 나는 가만히 들어주는 것 밖엔 어떤 위로도 해 줄 수 없었다. "다들 힘들텐데 나만 이렇게 너한테 왔어. 완전 비겁해.." "너희...." "가승휘가 너 좋아한다는 거 알았어. 알았으면서 시작했어. 그 새끼한테 못된짓 한거야, 나.. 이젠 되돌릴 자신도 없으면서.." 우현이는 이제껏 못한 말을 한번에 하겠단 기세로 말을 잇더니 갑자기 멈춘다. 그리고 쓸쓸한 눈을 들어 내게 말한다. "내가 다 벌 받을테니까.. 나 좀 안아줄래? 그러면 나...." 젖은 목소리.. 우현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는 우현이를 끌어안았다. 녀석을 안은 내 어깨가 젖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가슴이 찢어질 것 처럼 아팠다. 녀석들에겐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 상상하기조차 두려웠다. 그리고 다음날... 뉴스에서는 똑같은 보도를 시간마다 내보냈다. [청신그룹 송진식대표가 출국을 준비하던 중 자택에서 자살을 한 사실이 오늘 아침 가족들에 의해 발견되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총성을 못들었냐는 질문에 주민들은 하나같이 천둥이 치는 바람에 못들었다고 응답했습니다. 평소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있던 송진식 대표는 유서를 남겨놓고.....] 나는 아나운서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TV를 꺼버렸다. 결국 그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말았다. Writer. 청몽채화 46. ※ 우현번외 1※ “오빠, 나 오늘 책가방 진짜 무겁단 말이야. 순간이동으로 좀 가져다주면 안 돼?” “됐어, 내가 먼저야. 오빠, 나 오늘 미술시간에 서예 들었단 말야, 벼루 완전 무거워." 열여섯 살의 봄날. 푸른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하던 그 때였던가. 나는 토스트를 입에 베어 물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쌍둥이 여동생 수지와 지수의 다툼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일란성 쌍둥이인 수지와 지수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자타가 공인하는 학교의 퀸카들이었다. 두 살 위 오빠인 내 인기에는 못 미쳤지만 그래도 대단한 동생들이긴 했다. “니들 짐인데 왜 나한테 그러냐.” 괜히 동생들을 놀리기 위해 태연한 척 대답하며 신문을 펴들었다. 물론 일반신문이 아닌 연예인들의 가십거리가 적힌 스포츠 신문이었다. “오, 가수 제니랑 리나가 싸웠대. 얘네 라이벌이라더니 진짠가 보네.” “오빠!!!” “둘 다 병원 실려갔대. 제니가 더 예쁜데, 얼굴에 상처난 거 아냐?” 내 반응에 화난 듯한 수지가 지수를 끌어당기며 작은 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수지의 말을 듣던 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스럽게 킥킥 웃어댔다. 두 여동생은 마치 짠 듯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수지는 왼 쪽으로, 지수는 오른 쪽으로. “오빠... 오빠 어제 다른 학교 학생들이랑 싸웠었잖아.” “패싸움이라고 하지? 엄마가 그거 알면 어떻게 될까?” 유치하게 싸우던 쌍둥이 여동생 두 명은 이럴 때만 찰떡궁합을 자랑했다. 옆학교에 자기들에게 껄떡대는 남자들이 많다기에 내가 친구들을 이끌고 일부러 싸우러 가준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어제는 멍든 내 등짝을 보며 눈물을 펑펑 흘리던 동생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제 밤 내 등에 약을 발라주던 동생들은 천사였으나, 지금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두 여자 모두 미친듯이 사악해 보였다. 내 얼굴이 사색으로 창백하게 변하는 게 느껴졌다. 때마침 부엌에 있던 엄마가 우유를 컵에 담아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너희들은 바쁘면 지금 빨리 나가야지, 왜 또 아침 먹는 오빠한테 달라붙어서 그래? 엄마가 오빠 능력 함부로 쓰는 거 아니라고 했지!?“ 엄마는 내 능력이 쓰이는 걸 불안해했다. 우리 가족은 내 초능력을 다섯 살 때 발견했다. 아무 생각없이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중얼거렸을 뿐인데, 순식간에 서울에 있던 나는 수원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가 있었다. 숨이 차고 머리가 핑핑 돌았지만 어렸을 때는 그게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눈앞의 외할머니가 반가워서 헤벌쭉 웃고만 있었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기절초풍했고, 외할머니의 전화를 받은 엄마도 믿을 수 없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엄마의 전화를 바꿔 줬고, 엄마는 수원까지 어떻게 갔느냐고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엄마가 동생들을 목욕시키던 30분 전까지 우리집 거실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얌전히 놀고 있었으니까. 엄마의 목소리가 다급해보여서 나는 엄마 옆으로 가야 하나,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리고 그 때, 내 인생의 두 번째 순간이동이 이루어졌다. 하루에 너무 무리한 능력을 사용해서 그로부터 이틀 간은 앓아누울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그 후로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그 누구도 나의 비밀을 알게 되면 안 된다고 했다. 특이한 초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나는 여론의 주목을 받을 수도 있었고, 논란의 중심에 서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에게 좋을 것이 없다고, 엄마는 본능적으로 판단했다. 엄마의 말을 철썩같이 믿으며 능력을 전혀 안썼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나는 되도록 엄마가 한 말을 지키기 위해 웬만하면 걸어다녔다. 정말 급할 때는 내 능력을 사용했지만 사람이 많을 때는 그조차도 피했다. “엄마가 택시비 줄 테니까 짐 무거우면 둘 다 택시타고가.” 내 능력을 꺼리는 엄마가 말했지만 그런 엄마의 말로 포기할 동생들이 아니었다. 차를 타고 갈 수 있다면, 굳이 택시가 아니더라도 방법이 많았다. 아빠의 출근시간을 뒤로 늦추고, 비서 아저씨에게 데려달라고 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용돈 또한 항상 차고 넘치기 때문에 택시비가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동생들이 차에 타기 싫어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회사에 출근하는 회사원들 때문에 차를 타고 가는 등굣길은 언제나 막히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느릿느릿한 승용차보다 걸어가는 게 훨씬 빠를 정도였으니 솔직히 택시는 3초만에 학교에 도착할 수 있는 초스피드 순간이동과는 차원이 달랐다. “엄마, 나 할 말 있어!!!” 수지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악마의 주둥이다. 저 목소리의 톤은 ‘내가 지금 당신의 비밀을 폭로하겠다’는 고자질용이 분명했다. 16년간 동생들에게 당해온 나는 이제 그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수지의 입을 막아버렸다. “엄마, 나두 할 말 있는데!!” 제기랄, 순간 지수도 입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나는 남아있는 토스트를 한 입에 털어넣으며 빈 손으로 지수의 입도 막아버렸다. 엄마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내가 패싸움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엄마는 쓰러질 수도 있었다. 일부러 엄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얼굴에 상처나는 것도 피하면서 싸웠는데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들켜버릴 수는 없었다. 엄마는 궁금한 눈으로 동생들을 바라보았고, 나는 애써 실실 웃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자자, 동생들아. 학교 가자. 오늘 오빠가 택시비 낸다.”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순간이동으로 짐 나르는 짐꾼이 될 판국이었다. 무거운 짐까지 들고 오가면 실제로 무거운 물건을 들고 옮긴 것처럼 정신없고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심장이 두근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원수처럼 굴어도 나는 언제나 동생들과 함께였다. 나는 그 애들을 아꼈고, 그 애들은 나를 의지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친한 남매사이를 자랑했다. 수지와 지수를 현관으로 끌고 가서 급하게 신발을 신고있을 때, 2층 안방에서 아빠가 나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현관 앞에서 우리를 배웅하려던 엄마가 2층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보, 오늘은 늦게 일어났네요, 회사 늦게 가도 괜찮아요?” 아빠는 꽤 잘 나가는 중소기업의 사장이었다. 우리 회사는 가구를 만드는 업체였고, 만든 가구들을 해외에 수출하기도 했다. 당시 아빠는 회사의 해외 지부를 만들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집안은 부유하고 풍족했으며, 가족 간의 관계도 화목했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부족할 것 없는 생활을 누렸고, 가난의 뜻도 잘 알지 못했다. “아빠, 학교 다녀올게요.” 대답하며 아빠를 향해 웃어보인 그 순간, 아빠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보, 얼굴이 왜 그래요?” “아빠, 무슨 일 있어?” 아직 신발을 신지않은 지수가 아빠를 향해 달려갔다. 아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그제서야 느꼈다. “........부도가 났어.....” 해외지부의 건설을 도맡았던 이사가 돈을 가지고 도주했다. 그동안 벌었던 돈과 명성을 모두 쏟아부은 해외지부 건설 작업이 산산조각 난 것이다. 내 옆에 있던 수지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우리는 빈털터리야... 미안해, 여보.” 아빠의 목소리에 엄마가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아빠의 쪽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엄마가 비틀거린다고 생각하는 순간, 엄마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지수가 눈물을 터뜨렸다. 세상이 온통 내 눈 앞에서 핑핑 돌아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제 어떤 얼굴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 건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 집에 차압딱지가 붙었다. 동생들이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이층 침대도, 동생들의 등쌀에 밀려 컴퓨터도 제대로 만지지 못한 내게 아빠가 사준 노트북도, 넓은 정원과 연못이 딸린 큰 2층집도, 이제 더 이상 우리 가족의 것이 아니었다. 더 심각한 건, 음대를 가기 위해 애써왔던 수지와 지수의 악기마저도 차압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애들은 외국인 선생님에게 일주일에 세 번씩 레슨을 받고 있었다. 수지는 바이올린을, 지수는 첼로를 배우는 중이었다. 하지만 악기도 없는 그 애들에게, 음악 레슨은 말할 것도 없이 사치였다. “나 돈 벌 거야.” 대담하고 겁 없는 수지가 맨 처음 말을 꺼냈다. 수지에 비해 여성스럽고 순진한 지수는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리 남매들은 학교수업이 끝난 후, 휑한 운동장에 깔리는 석양을 바라보며 작은 나무벤치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니가 무슨 돈을 벌어.” 나름대로 단호하게 말했으나 수지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럼 집이 그 꼴이 됐는데 나더러 가만히 있으라는 거야? 아빠는 맨날 술만 마시고!! 엄마는 쓰러져서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병원비만 밀려있고!! 음악은 하지도 못하고!! 집에서는 언제 쫒겨날지 몰라, 하루하루가 불안해서 미치겠는데 어떡해!!“ 앞뒤 가릴 것 없이 무조건 일을 저지르고 보는 수지였다. 가만히 두고 있으면 무슨 일을 할지 몰랐다. 워낙 편한 방식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힘겨운 아르바이트보다는 원조교제로 돈을 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두려움이 몰려왔다. “너 그딴 소리 다신 하지 마.” “오빠!!!!” “내가 벌어!!! 돈은 내가 벌 거야. 우리 집 장남은 나야. 더 이상 토 달지마.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있어. 다들 돈 번다고 나가있으면 엄마 돌볼 사람도 없어.“ 그제야 수지가 조용해졌다. 지수는 여전히 울면서 나를 향해 한마디 건넸다. “오빠.... 우리,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사업은 도무지 다시 재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돈을 가지고 도주한 회사의 이사를 잡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돈을 모두 탕진한 후였고,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다. “돌아갈 수 있어, 걱정하지마.” 확신도 없는 주제에,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였다. 그 날, 바로 신문배달과 피자집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신문배달은 새벽에 했고, 피자집 배달은 학교가 끝난 뒤 밤 12시까지 이어졌다. 기본적으로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면서 일을 해결했지만, 너무 급할 때는 구석에 숨어 순간이동 능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잠도 편히 잘 수 없는데 순간이동 능력까지 사용하면 피곤함이 파도처럼 나를 덮쳐왔다. 온 몸에 무리가 가도 다음 배달을 가야만 했다. 언젠가, 피자배달을 하던 와중 하루에 순간이동 여섯 번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누군가의 집 담벼락에 기대 10분간 나 자신을 진정시켜야 했다. 거친 숨이 쉴 새 없이 몰아치고 입에선 피 맛이 감돌았다. 하지만 계속 쉬고있을 수는 없었다. 아빠는 이미 절망에 빠져있었고, 엄마는 병원에 누워있었으며, 동생들은 울고 있었다. 어지러워서 구역질이 밀려오려고 했지만 꾹 참고 다시 눈을 뜨며 발을 옮겼다. 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붙잡았다. 그들은 어떤 약품이 묻은 손수건을 내 코에 가져다댔다. 순간이동을 사용해서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도저히 더 이상 힘을 사용하는 건 무리였다. 어떤 약품을 사용한 건지, 내 눈이 천천히 감겨오고 있었다. 저항하기 위해 끝까지 휘두르던 팔에도 감각이 사라졌다. 나, 어떻게 되는 걸까...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내 목을 휘감은 남자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KG에서 나왔다.” ........ 그게.... 뭐지....? “불쌍한 새끼, 너희 아버지가 직접 너를 신고했어.” 무슨 말이야? 너희가 누군데, 아빠가 왜 나를 너희들에게 신고하지? “오늘 하루 종일 쫒아다녔다. 제법 순간이동을 쓰더군.” 들키지 말라고 했는데, 엄마가... 능력을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고 했는데. “너를 데려가는 대신, 너희 가족들의 생활은 보장해주겠다. 이제 너희 가족들은 평균이상의 수준을 유지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빚더미에 쌓여있는 우리 가족을 풍족하게 해주겠다는 거야? 엄마를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해줄 힘이, 동생들에게 다시 음악을 시켜줄 수 있는 힘이.. 당신들에게 있다는 건가? 그 조건이 뭐기에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잡아가는 거야? “너는 이제부터...” “..........” “국가의 개다.” Writer. 청몽채화 47. ※ 우현번외 2 ※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 보인 건 불독을 닮은 한 남자와, 서른 살 남짓 되어 보이는 한 여자였다. "당신들..... 도대체.... 뭐...." 약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내 몸도 말을 듣지 않았다. 누워있는 채로 고개를 살짝 들어보니 이미 내 몸은 침대에 묶여있었다. 공포가 내 몸을 사로잡았다. 다짜고짜 나를 잡아온 이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할 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사람을 납치해다가 해외로 장기를 팔아넘기는 신종 범죄자들일 수도 있었다. "이 놈이 깨어났습니다." 불독은 닮은 남자가 반투명 유리 너머를 향해 소리쳤다. 건너편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반투명 유리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켜본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죠. 시작하세요.]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젊은 여자의 중성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연하게 지껄이는 그 소리가 더 무서웠다. 이들은 나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일까. "당신들... 뭐야... 나 건드리지마, 빨리 꺼져!!!" 온 몸이 차갑게 굳어버리는 느낌이었지만 차마 살려달라고 외칠 수는 없었다. 그건 한 중학생 남자아이의 쓸데없는 치기였고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스피커를 통해 명령이 내려오자마자 서른 살 남짓한 여자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몸으로 반항할 수 없는 내가 소리를 지르고 욕을 지껄였지만 그런 내 반응은 아랑곳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불독을 닮은 남자는 서른 살 남짓한 여자에게 가로세로 3cm되는 정사각형 칩을 내밀었다. 여자는 기계적인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여자의 눈빛이 마치 차가운 로봇처럼 느껴져서 온 몸의 피가 식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묶여있는 내 오른팔 위에 칩을 올려놓았다.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내 팔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이 내 팔을 절단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똑바로 보아주겠다고 다짐했다. 서른 살 남짓한 여자가 천천히 내 팔을 쓰다듬었다. 거짓말처럼, 칩이 내 팔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뭐.... 뭐야... 당신들 뭐야!!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손목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껄끄러운 느낌이 온 몸을 지배했다. 불독을 닮은 남자가 내 얼굴 바로 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축하한다." 납치당할 때, 내가 들었던 그 음성이 분명했다. "도망치려면 마음껏 쳐 봐." ".............." "니 몸에는 이미 위치추적 칩이 박혀있어." * "수갑 풀어, 이거 풀라고, 이 개새끼들아!!!!!!!!!!" KG에 끌려온 지 일 년쯤 되는 어느 날. 계속 도망을 치는 바람에 초능력이 통하지 않는 독방에 갇힌 것도 벌써 일곱 번째였다. 언제나 순간이동으로 KG의 건물 밖으로 도망치는 것은 가능하지만, 빌어먹을 칩 때문에 언제나 감독관에게 도로 잡혀오곤 했다. 덕분에 끌려오자마자 지금까지 위축되어 있는 다른 신입들과 달리, 나는 집중관리대상이라는 이름표마저 달고 있는 신세였다. 트레이닝을 거부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덕분에 링거를 맞는 일도 수두룩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끌고 온 감독관은 줄기차게 나를 때렸지만, 나는 고작 그런 것에 겁먹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가족이 잘 살고 있다는 건 거짓말일 것이다. 아픈 엄마가, 예쁜 동생들이, 힘든 아빠가 나 없이 행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벌써 반년이다. 그들은 애타게 나를 찾아 헤매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더군다나 아빠가 나를 팔아 넘기다니, 그건 더더욱 말도 안되는 개소리였다. 국가가 관리하는 기관이든 뭐든, 지금 이런 수법으로 초능력자들을 납치하나 본데... 두고 봐. 내가 가만 있을 줄 알아? 어떻게든 도망갈 거야. 도망가서, 사람 인권을 무시하는 이런 기관이 있다는 걸 만천하에 폭로하고 말 거야. 독방에 갇힌 내가 발악하는 소리는 어느 새 KG내에서 당연한 일상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나를 패버릴 만한 물건을 가지고 감독관이 올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 날 나를 찾아온 것은 서류를 몇 장 들고 있는 큰 키의 섹시한 여자였다. "반가워, 정우현." 처음보자마자 대뜸 나를 보고 반갑다고 하는 여자. 순간, 그 여자의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항상 스피커 속에서 내가 듣던 중성적인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감독관들처럼 제복 차림이 아니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묶여있는 내 앞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자태가, 이 기관에 너무나 익숙하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넌 뭐야....." 목소리는 어느새 다 쉬어있었다. 집에 있을 때는 이런 거친 목소리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매니저 도하진이야. 너 같은 하급 에스퍼는 매니저라는 존재가 있는 것도 모르겠지만." ".......... 나 풀어줄 거 아니면 빨리 꺼져." "나도 풀어주고 싶지만 니가 하도 도망가니까 어쩔 수 없어. 불독한테 잡혀온 걸 불행하게 여겨. 나도 그 불독 감독관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닌데, 어쨌든 그 인간이 잡아온 애들은 다 그 사람 책임이야. 그리고 그 인간이 잡아온 애들을 관리하는 건 내 책임이지. 매니저와 총괄감독관은 일대일로 연계되어 있거든." 도하진이라는 여자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내뱉었다. 사무적으로 돌아가는 KG에서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말할 수 있는 여자도 있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지나치다가 가끔 보는 여자 에스퍼들은 언제나 시무룩하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하긴, 웬만한 남자도 쉽게 까불 수 없는 경직된 공간이 이 곳이다. 여자들은 조그만 폭력에도 쉽게 굴복하고 겁먹을 게 당연했다. "한 달이나 됐는데도 아직도 마음을 굽히지 않는 것 같아서 내가 왔어. 너 자신을 좀 더 대단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원래 너 같은 하급 에스퍼는 내 얼굴 보기도 힘든 경우가 많으니까. 3~4급 애들도 A등급 얻으면 그제야 겨우 내 얼굴을 볼 수 있어. 그 아랫것들은 상대해줄 가치도 없지. 쓸모가 없거든." "좆까. 나도 너 상대할 마음 없으니까 나가." 손이 수갑에 묶여있고, 발이 침대에 묶여있으면서도 나는 반항적으로 소리쳤다. 언제나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울 법 한데도, 나는 그 반항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의 말에 복종하는 건 결국 이 상황에 안주하겠다는 굴복이었다.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내 말에도 도하진은 입꼬리를 올려가며 웃었다. 공격적으로 굴어봤자 오히려 당하는 사람은 바로 너라는 듯이. 너무 침착한 비웃음이라 그게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넌 쓸모가 있지. 그래서 내가 왔어." "나 초능력 없어. 니들이 잘못 안 거야." "원거리 순간이동 능력자는 흔치않아." 역시나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무조건 자기 할 말만 내뱉고 있었다. "우린 너를 트레이닝 시켜줄 거야. 니가 왜 탈출에 실패했는 줄 알아?" 나는 도하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오히려 눈빛에 밀리고 있는 건 내 쪽이었다. "물론 위치추적 칩도 그 이유가 되지. 하지만 생각해봐. 니가 더 멀리 도망갔다면, 감독관에게 잡혀오는 건 며칠 후가 되었을 거야. 금방 잡혀오진 못하겠지. 달랑 KG 담장만 넘는 것과,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에 숨어있는 것. 이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잖아?" "웃기지 마... 그런 듣기 좋은 말로 나를 훈련시켜서 이 개같은 기관 밑에서 일하게 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똑바로 말해, 여기 국가기관도 아니지? 초능력자들 납치하는 폭력조직이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야 이럴 순 없어!!! 가족한테 보내줘!!!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지 모르겠다고!!!!" 도하진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몇 번 가로저었다. "충격받을 것 같아서 말해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내 눈 앞에 어떤 사진을 들이밀었다.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들의 가족사진이었다. 아빠는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엄마는 매우 건강한 모습이었다. 수지와 지수도 교복을 입은 채 밝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를 KG에 데려와준 신고비, 이제껏 너를 키운 양육비, 아들을 양도한 것에 대한 수고비, 에스퍼 가족들에 대한 정기적인 연금." ".............." "니가 끌려온 후부터, 너희 가족들에게 지급되는 비용은 한 달에 천만원이 넘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족사진이 합성이 아닌 최근에 찍은 사진이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저렇게 밝게 웃고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너희 가족에게... 이제껏 너의 양육비를 지급했다는 뜻이 뭘까? 생각해봤니?" "............." "너는 더 이상 이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KG의 소유가 됐다는 거야. 완벽히 우리의 것이지." 눈을 뜨고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빈 것만 같았다. 국가의 개가 되었다는 감독관이 말이 이런 걸 뜻하는 거였을까. 나는 돈에 팔려온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하진은 쉴 새 없이 내 눈 앞에 서류들을 들이밀면서 말을 이었다. "동생들이 음악레슨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하고 있어. 이게 그 서류야. 어머니의 병원비는 끝까지 우리가 책임질 거야, 자, 병원비 납부확인증이야. 그리고 이건 너희 아버지의 사업 투자계획서. KG가 그 사업에 투자할 거야. 벌써 너희 아버지 회사에서 만드는 가구들이 에스퍼들의 기숙사에 보급되고 있어." 국가기관이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었다. 기를 쓰고 믿지 않으려했던 사실들이 모두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도하진은 쐐기를 박으려는 듯 하얀 종이 한 장을 내 눈 앞에 들이밀었다. 각서였다. 아들을 양도한다는 각서에 적힌 글씨체는 아빠의 글씨가 분명했다. 그 밑에 적힌 아빠의 싸인도, 도장도... 모두 내가 알고있는 그대로였다.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하진의 모습이 흐려졌다. "이제 현실을 인정할 수 있을 거라 믿을게." 가족은 나를 버렸다.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울음소리가 새어나갈 것 같아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피맛이 감돌았다. 감독관에게 그렇게 맞아도 나지 않던 눈물이 계속 흘렀다. 도하진은 나를 보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비단 너 뿐만이 아니야. 이건 에스퍼들의 숙명이야." "................." "에스퍼는 가족따위 없어. KG에서 태어나고 KG에서 죽는 거야." ".........꺼져......." 진실 따위 알려주지 않는 것이 좋았다.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것이 나았다. 이런 개같은 현실을 감당할 힘 따위, 나에게는 없었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가족에게는 필요없을 지 몰라도, KG는 너를 필요로 해. 너희 가족에게 들이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을만큼,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뜻이야." ".................." "복수하고 싶어?"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무릎 위로 투두둑 흩어졌다. "복수하고 싶으면 그만큼 힘을 키워. 나약하게 엎어져 있어봤자 이루어지는 것은 없어. 니 가족에게 복수하고 싶든, KG에게 복수하고 싶든 그건 일단 니가 복수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진 다음의 이야기야." 도하진의 도도한 말투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나를 안쓰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일 년 동안 나는 의미 없는 반항만을 계속한 셈이다. 그 와중에도 가족은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KG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얼마나 비웃었을까. "트레이닝 일정을 잡아둘게." 도하진이 조심스레 말했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격하게 거부의 뜻을 표현했지만, 지금은 그조차도 할 수 없었다. 도하진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듯 중얼거렸다. "니가 롤모델로 삼아야 하는 사람을 가르쳐줄게." "................" "너와 동갑이야. 너보다 2년 먼저 들어왔지." 제발 그녀가 닥쳐줬으면 했다. 아무 말도 듣고싶지 않았다. "메모리컨트롤 에스퍼 가승휘." "...................." "KG가 키워낸 최고의 기계야." Writer. 청몽채화 48. ※ 우현번외 3 ※ 앓아누워버리고 말았다.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의 허무함이 내 몸을 감쌌다. 마음의 고통이 몸까지 갉아먹고 있었다. 밤새 고열에 시달리고 온 몸에 오한이 들었다. 지독한 몸살과도 같은 증상이었다. 나 없이 행복하게 웃고 있는 가족들의 꿈을 꾸다가 눈물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도 없는 쓸쓸한 독방을 예상하며 눈을 떴다. 초점이 안 맞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때, 이마에 놓여있던 수건이 툭 떨어졌다. 누가 이런 행동을 해준 건지 생각할 새도 없이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굳이 일어나지마. 더 누워있어."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가 읽고있던 책에서 시선을 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는 분명 내가 갇혀있던 독방이 분명한데 어떻게 된 일일까. ".........넌.... 뭐야....?" "매니저님이 보내서 왔어." 매니저님이라면, 도하진이라는 그 여자를 말하는 걸까. 일부러 내 병간호를 위해 사람을 보내준 거라면, 저 아이가 바로... "이름이...?" "가승휘." 그는 아무 표정없이 대답한 뒤 다시 읽던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보다 고작 2년 먼저 들어왔을 뿐인데 그의 태도에는 익숙함이 배어있었다. 가족과 세상을 포기하고 이곳에 정착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저 애의 무관심한 태도는 도대체 어떻게 얻게 된 것일까. 왠지 모를 부러움과 동경, 질투 등 많은 감정이 뒤섞이고 있었다. "가족 때문에 많이 힘든가 본데." 그는 마치 독심술을 하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매우 태연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억을 지워줄까?" 그제야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도하진에게 들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가승휘가 메모리 컨트롤 에스퍼라고 했었다. 그럼 기억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말이겠지. 가족에 대한 내 기억이 얼마나 엉망으로 흐뜨러져 있기에 가승휘가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누가 뭐래도 내 가족이다. 그들이 날 버렸다 해도 나는 그들을 버리지 못한다. 아무리 아픈 기억이라 해도 가족에 대한 기억을 잊은 채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가승휘는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괜찮아 보이니까 갈게. 침대 머리맡에 양호실에서 받은 약 넣어놨어." 기계적으로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은 KG에 익숙해진 여느 에스퍼들의 모습과도 같았다. 하지만 놈은 로봇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마음속의 열정, 그 안에 담고있는 초인적인 인내력. 그게 느껴져서 나조차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저기, 너는....." 문가로 다가가는 승휘를 향해 나도 모르게 말을 건넸다. "........너는..... 기계처럼 사는 삶에... 만족해?" 그는 멍하니 내 눈을 쳐다보았다. 침묵 속에서 공연히 심장만 두근거렸다. "사람인데 어떻게 기계처럼 살지?" 도하진은 그 놈을 기계라고 표현했지만, 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난 내게 내려오는 명령을 지킬 뿐이야." "............." "내 소중한 것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난 다 괜찮아." 그는 그 말을 남겨둔 채 독방 안에서 나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힘이 쫙 풀린 온 몸이 깊은 바다 안에 잠기는 것만 같았다. 가장 소중한 것이라. 내가 소중히 생각했던 것이 나를 버렸을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가족들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고 해서... 내가 KG에게 고마워해야 해? 그러기에는 지금의 내 고통이 너무 커서 마냥 웃어줄 수가 없어. 어쨌든, 이렇게 날 가둬두는 것 자체를 용서할 수가 없어. 나한테 가장 소중한 거? 그게 나에게 뭐지? 나한테 가장 소중한 게 내 자신이었나? 그래서 KG에게 굴복할 수 없는 거야? 가승휘, 너한테 묻고싶어. 니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대체 뭐야? * "오케이.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도하진이 미처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바닥에 철푸덕 누워버렸다. 순간이동을 연속으로 할 때마다 심장에 무리가 온다. 이러다 제 명에 못 살지도 모른다. 심장을 움켜잡고 미친 듯이 숨을 골랐다. 트레이닝 때마다 반복되는 현상이었다. "앞으로 응급처지 팀이라도 대기시켜야 되는 거 아니야? 트레이닝 때만 이런 거지? 통증이라도 느껴지면 바로바로 이야기해." 도하진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KG에서 시행되는 트레이닝에 협조하기로 마음 먹은 순간부터, 감독관과 얼굴 마주치는 시간부터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오히려 매니저나 트레이닝 코치, 연구원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들은 엄격했지만 감독관들처럼 덮어놓고 잔인하거나 악독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에스퍼의 건강상태나 컨디션 조절에 온 힘을 다했다. 국가의 도구로 취급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보호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대로 현재에 안주해버리고 싶은 달콤한 유혹에 여러 번 흔들렸다. "그럼 내일 보자, 정우현." 다른 에스퍼의 트레이닝 스케줄이 이미 잡혀있는 모양이었다. 나를 쫒아내는 듯한 그 말에 겨우 진정된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과도한 트레이닝은 나에게 부담을 안겨주었지만, 그래도 능력을 썩혀두는 것보다는 나았다. 연습을 하고나면 신기하리만치 몸이 가벼워졌다. 에스퍼들의 능력은 그런 식으로 쏟아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몸으로 때우는 초능력은 그나마 괜찮지만, 카운트나 예지력, 독심술, 메모리 컨트롤 등 머리를 사용하는 초능력 에스퍼들은 그 능력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해서 예민해지거나 신경질적이 되곤 했다. 몸을 풀며 남자 기숙사 쪽으로 향했다. 곧 있으면 식사시간이었다. 저 멀리에 가승휘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도하진이 말한 것처럼, 놈은 흐트러진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그 놈을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나와 같은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놈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 한 발 내딛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가승휘와 나 사이, 둘이 떨어져있는 20미터 남짓한 공간의 중간에 위치해있던 기숙사 문이 다급하게 벌컥 열렸다. 자주 봐오던 감독관이 어린 꼬마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가고 있었다. 투시력을 지니고 있는 7살 남자아이였다. 5살에 감독관에게 능력이 발각되어 KG로 끌려왔다고 했다. 어린 나이인데도 능력이 A+급이라 벌써 밖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아이였다. 공항 앞에서 관광객들의 가방을 지켜보는 직책을 맡고있었다. 그 아이가 잡은 마약범, 테러범, 도굴꾼, 밀수업자들의 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안 갈 거라구요. 이거 놔주세요." 꼬마가 울고 있었다. 감독관에게 잡혀가는 꼴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처량해보였다. 오다가다 얼굴을 몇 번 마주친 정이 있기에, 꼬마를 도와주기 위해 몇 걸음 다가갔다. 얼마 전까지 지독하게 앓아누웠던 꼬마다. 나조차 견디기 힘들었던 KG라는 기관에서, 저 어린 몸으로 견뎌내기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 정도의 어린 아이들은 부모님 곁에서 떨어져있다는 사실만 깨달아도 소름이 끼칠 텐데. "어리광 그만 부려, 지금 니가 일을 안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감독관이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7살. 당연히 어리광 부릴 나이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일을 할 나이는 아니었다. "엄마 보고 싶어요. 빨리 나으면 집에 보내준다고 했잖아요. 나 일 안할래요." 꼬마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마자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동안 숨겨왔던 KG에 대한 불만이 다시 샘솟았다. 멀리있는 가승휘를 바라보았다. 놈은 여느때처럼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선은 꼬마와 감독관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크게 신경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꼬마와 감독관의 대립 때문인지 기숙사 사람들이 하나 둘 그 곳으로 모여들었다. "따라와!!!!" 감독관이 꼬마를 잡아끌었지만 꼬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감독관이 꼬마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꼬마의 얼굴이 금세 피로 물들었다. 나는 급히 꼬마를 향해 튀어나갔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아저씨가 나를 잡아끌었다. "정우현, 지금 저 상황에서 튀어나가면 큰일난다. 저 감독관 성격 불같은 거 몰라서 그래?" 불독 감독관보다도 다혈질이라고 소문이 난 감독관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저씨... 애가 맞았어요, 피가 나잖아요." "가만히 있어,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도 나서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아저씨의 억센 손은 내 옷깃을 놓아주지 않고있었다. 세게 얻어맞았지만 꼬마는 더 이상 울고있지 않았다. 단지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있을 뿐이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새끼가 왜 이래, 진짜 돈 거 아니야??" 감독관의 고함소리가 기숙사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 낯선 상황에 미칠 것만 같았다. "뭘 봐!!!!? 구경났어? 이 개새끼들, 빨리 눈깔 안 돌려???" 감독관의 한마디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하지만 모두들 다른 곳으로 피하지는 않았다. 다른 일을 하는 척 하면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저씨, 놔 주세요, 말려봐야죠." 아저씨에게 애원하듯 중얼거렸지만 아저씨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는 가승휘를 향해 애틋한 눈길을 보냈지만 그의 시선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씨발, 이 새끼. 너 오늘 나랑 끝장을 보자." 감독관은 제복의 허리춤에 달려있는 총을 꺼내들었다. 주변의 공기가 긴장감으로 인해 꽉 조여들었다. 감독관의 총이 꼬마의 머리를 향해 겨누어졌다. 하지만 꼬마는 감독관을 바라보았다. ".........죽으면.... 집에 보내줘요?" "건방진 새끼." 감독관의 손이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안돼!!!!!!!!!!!!!!!" 아직도 내 옷깃을 단단히 잡고있는 아저씨의 손을 뿌리쳤다. 옷자락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입고있던 티셔츠의 옆자락이 튿어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꼬마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꼬마는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있었다. 상황을 바라보던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피를 흘리는 꼬마가 숨을 몰아쉬더니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뭐야, 왜 다들 가만 있는 거예요? 애가 쓰러졌잖아요, 왜 다들 가만 있어요!!!" 급박하게 소리쳐도,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쓰러진 꼬마와, 씩씩대고 있는 감독관과, 소리치고 있는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간신히 발을 움직여 꼬마의 곁으로 다가갔다. 꼬마의 눈이 내 얼굴을 담아내는가 싶더니, 곧 천천히 감기고 말았다. "씨발....." 참을 수가 없었다. "야, 이 개새끼야!!! 너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아직 애잖아!!! 아직 꼬마잖아!!! 왜 죽여!! 지금 너한테 이 애를 죽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감독관한테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그의 멱살을 쥐고 흔들자마자 경보장치가 울려왔다. 아마 내가 난동부리는 이 상황이 CCTV로 생생하게 찍혔으리라. "씨발, 이 좆같은 기관!! 이게 다 뭐야!!! 왜 사람을 죽여, 니들이 뭔데!!!!" 악에 받혀 소리쳤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감독관은 끈질기게 엉겨붙는 나를 바닥에 내치고 발로 차기 시작했다. 멀리서 다른 감독관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승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싸늘했다. ........ 묻고싶었다. 이런 상황이 와도.... 소중한 것을 위해 참아야 하느냐고. * 한달 남짓한 시간을 정신없이 고문당했다. 정신교육이라는 명목 아래 끊임없이 맞아야 했던 나의 죄목은 하극상이었다. 하급 에스퍼가 감독관에게 대들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무리 더럽고 치사한 꼴을 보더라도 참아야만 하는 것, 그것도 에스퍼의 숙명일까. 맞아서 정신을 잃어도, 양호실에서 파견된 의사들이 내 상태를 보러왔다. 죽게 놔뒀으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나는 이렇게 살리는 주제에, 왜 다들 그 꼬마는 죽어가도록 내버려둔 걸까. 한 달 간의 정신교육을 마치고 기숙사로 들어가는 그 날, 복도에서 가승휘를 만났다. 내가 동경했던 놈의 모습이, 증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 곧 1급 에스퍼 시험을 앞두고 있었어." 그는 사건에 나설 수 없었던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듯 말했다. "........ 그래서?" "....... 1급 시험에 붙었어. 곧 사회로 나갈거야." 비웃음이 터져나왔다. 사람이 죽어도 모두 조금이라도 더 잘 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나도 따라간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니 뒤에 붙어있어주지." ".............." "너한테 소중한 게 대체 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봐줄게." Writer. 홍양 49. 녀석들이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던 끔찍한 날, 그 후로 2주란 시간이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달라진 건 없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녀석들을 대하려 노력했고..그건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들리는 말로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계급이 올라, 전보다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넷은 그 어느때보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예전처럼, 매일 받는 트레이닝에 지친 기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기적이게도.. 나만 모른다면 평생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너희집에서 맛있는 거나 해먹을까?" 부쩍 먹을걸 밝히는 재준이가 나를 향해 묻는다. 나는 바쁘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제 날 위해 케이크를 만들어주겠다며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고 간 녀석들의 만행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던 참이었다. "이재준, 정신차려. 오늘 우리 시간 안돼. 벌써 잊은거야?" 그 때,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승휘가 재준이를 향해 말한다. 그러자 재준인 뭔가 잊고 있었던 걸 깨달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난 무슨 일인지 예상하고는 있지만 입밖으로 꺼내지 않고 애꿎은 책만 뒤적댔다. 재준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승휘, 화장실 갈래?" "기지배냐? 화장실을 같이 가게." 재준이만의 친밀감의 표시를 무시한채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승휘. 재준이는 완전 삐졌다는 뜻으로 승휘의 책상을 밀어버린 후 화장실로 향한다. 저런.. 초딩자식. 재준이가 화장실로 가는 사이, 승휘는 나를 사납게 노려보며 물었다. "어제 저녁에 정우현 또 사라졌어. 너희집에 또 갔어?" "아닌데!" 쪽집게같은 승휘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또 한번 무슨말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씨발.. 죽을래?" 어디선가 욕이 들려오자 나와 승휘는 교실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화장실을 간다던 재준이가 누군가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시비가 붙은 사람은, 평소 재준이를 견제하던 날라리 중 하나, 이름이.. 뭐랬지? 날라리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재준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발 좀 밟은거 가지고 되게 그러네.." "사과해." "뭐, 이런거 가지고 그러냐! 사과 안하겠다면?" "죽겠지.. 너도." "......." "죽는 거 한순간이거든. 후회하지말고 사과해." 또 시작이었다. 재준이는 요새 비정상적으로 화가 늘었다. 대화에 의하면, 실수인지 고의인지 모르겠지만.. 날라리가 재준이의 발을 밟은 모양이었다. 물론 저 껄렁이의 태도가 맘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같음 그냥 무시하고 돌아설것도 재준이는 맞서고 있었다. 재준이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낯선 모습이다. "3초줄게. 정중히 사과해. 1..2..3." "싫다니...." 껄렁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재준이의 날카로운 주먹이 배에가서 꽂혔다. 그러자 숨쉬기가 곤란한 듯 바닥에 꿇어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쉰다. 하지만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건지 다시 한번 주먹을 올리는 재준이. "악! 승휘야, 니가 좀 말려봐!!" "냅둬.. 저렇게라도 풀어야지." ".....뭐?" 승휘의 대답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저런식으로 사람을 패서라도 화풀이를 해야한다는거야? 그러는 사이 재준이의 입엔 얕은 미소가 걸렸다. 짜증나던 차에 잘 걸렸다는 눈빛이었다. "아악!!!!!" 여자아이들의 요란한 악소리와 함께 장렬히 쓰러지고야 만 껄렁이. 그의 비참한 최후를 보며.. 난 그가 걱정되기 보단, 하루하루 망가져가는 재준이가 걱정되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보는 요즘의 재준이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모습이었다. 누구든 불만 붙여주면 기다렸단 듯이 폭발했다. "야.. 이재준 그만해." 참다못한 승휘의 말에도 눈도 꿈쩍 않고, 한쪽발로 껄렁이의 허리를 짓밟는 재준이. 결국 발로 한번 더 찬 후에야 만족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선다. "민지율이 보고있어서 봐줄랬더니.. 나한테 자꾸 개기잖아, 짜증나게.." "....." "화장실 다녀올게." 나는 그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쳐다봤다. 지금 내가 본 저 악마 한마리는 내가 알던 재준이가 아니다. 얼떨결에 배를 맞은 남자아이는 배를 움켜잡으며 연신 욕을 뱉어냈다. 이재준이 변했다는 내용이었다. 다신 상종을 안하겠다는 말도 했다. 나 역시 상종못할 놈이란 건 동감하고 있었지만 가만히 입을 다무는 것 밖엔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녀석들은 충분히 힘들 터였다. - 점심시간.. 넷이서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다. 승휘가 내 옆에 앉고, 그앞엔 재준이와 우현이가 앉았다. 녀석들을 한번에 보자 더욱 마음이 심란해져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귀로 넘어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요새 잔뜩 날카로워진 녀석들 덕분에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을 걷는 것마냥 힘겨웠다. 나에대한 태도는 전보다 오히려 더 부드러웠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잔뜩 날을 세우는 녀석들이었다. "민지율! 내 말 듣고 있는거야?" 우현이는 내가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있지 않은걸 느낀건지 식탁위에 숟가락을 소리나게 놓는다. "듣고 있었어.." 오늘은 내 기분도 말이 아니라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우현이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 때.. 툭 하고 누군가가 우현이의 등을 치고 지나간다. 식판에 집중하느라 자신은 느끼지 못한 듯 그냥 지나치려 하는걸, 우현이가 팔목을 붙잡는다. 노란색 명찰을 찬것 보니 1학년 여학생이었다. 분홍색 머리띠가 상당히 앙증맞다. 얼떨결에 우현이에게 손목을 잡힌 여학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나는 요즘들어 날카로워진 우현이를 떠올리며, 얼른 여학생에게 도망치라는 안구신호를 줬지만.. 질투로 보인건지 코웃음을 치며 우현이에게 묻는다. "선배님.. 왜요?" 예쁘장한 얼굴로.. 콧소리를 섞어가며 '왜요?' 라고 묻자 우현이는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너 내 등치고 갔잖아. 사과 안하냐?" "아.. 죄송합니다." 설마 그게 용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여학생이.. 무엇이든 더 말해보라는 듯 눈을 반짝인다. 하지만 우현이는 더 할말이 없다는 듯 손목을 놓아주며 재준이 식판에 있던 소세지를 두개나 젓가락으로 집어먹는다. "아 씨발.. 니가 그걸 왜 먹어! 죽을래!" 나는 일이 커지기 전에 내 식판에 있던 소세지를 집어 재준이의 식판에 놓았다. 그러자 잠잠해지는 재준이. 어째 단순한건 변하질 않았구나. 이미 그들은 여학생을 잊은듯한데.. 계속 알짱거리다 비위가 거슬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됐다. 나는 다시한번 그녀의 신변보장을 위해 안구신호를 줬다. 하지만 그런 나를 무시한 채 우현이에게 조심스럽게 묻는 1학년짜리 여학생. "선배님... 더 하실말씀 있으시면 하셔도 되는데..." 우현이가 여학생의 말을 고이 씹은 채 재준이의 소세지쪽으로 젓가락을 올리려던 순간, 민망한지 꾸벅 인사를 하던 여학생의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며 물컵이 우현이의 마이위로 쏟아지고 말았다. "......아....." 다행히 반찬이나 국물이 쏟아지진 않았지만 우현이의 얼굴은 급속도로 냉각되어 갔다. "선배님 죄송해요!!" 여학생은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마이를 벗더니 우현이의 마이를 닦아준다. 순간.. 그녀의 얼굴엔 자신만만한 미소가 번지고 옆 탁자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여학생들 무리에게 브이까지 그려보였다. 아마도 이 모든게 저 여우같이 생긴.. 아니 예쁘게 생긴 여학생의 계략이었나보다. 디행히도 우현이는 보지 못한 모양. 하지만 내 옆에 앉은 승휘는 브이질을 본건지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러나 곧.. 관심없다는 듯이 밥만 먹었다. "아, 어떡해요.. 선배님 벗어주시면 제가 세탁해서 내일 갖다...." "됐어, 그냥 가." "아뇨, 이러면 제가 너무 죄송해서..." "너." "......" "여자로 낳아준 부모님한테 고맙다 그래... 가봐." 다행히도 여자니 때리지 않겠다는 듯 거칠게 마이를 벗어 왼쪽 의자에 걸쳐놓더니 다시금 밥을 먹는다. 아무래도 저 여학생이 남자였다면.. 우현이의 화풀이 대상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분위기 파악을 더럽게도 못하는 여학생이 굴하지 않고 의자위에 걸린 우현이의 마이를 집어들며 말했다. "선배님, 이건 제가 내일까지 가져다드릴게요..." 그러자 우현이는 밥을 먹다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학생의 손에 들려있는 마이를 뺏어 들었다. 무슨일이라도 날 기세였다. 소세지에 정신이 팔려있던 재준이는 재밌는 구경이라도 난듯이 미소를 띄우며 뒤를 돌아본다. 그 때, 우현이는 굳은 얼굴로 1학년 여학생을 물었다. "진짜 미안해?" "네... 그러니까 제가 내일까지 세탁해서..." "그럼 꿇어." 우현이의 말에.. 전교생이 우리를 쳐다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시선이 집중됐다. 승휘마저도 놀란듯이 밥을 먹다말고 그쪽을 쳐다봤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길.. "그런거 아니면 이리내놔." 다행히도 진심은 아니었던 듯 여학생의 팔에 들려있던 마이를 뺏어 입더니 급식소 바닥에 물을 뚝뚝 흘리며 밖으로 나간다. "아, 저 새끼.. 식판 또 내가 비워야 되잖아!" 식판을 그대로 남겨둔 채 가버린 우현이를 향해 재준이가 소리를 지른다. 나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식판은.. 승휘가 치워주겠지? - "야! 정우현!!" 기억도 안나는 부모님을 원망할 수 밖에 없는 내 짧은 다리. 우현이는 벌써 급식실을 벗어난 상탠데.. 바로 따라나간 나는 한참 늦게서야 급식실을 벗어났다. "어이, 쫌팽이! 거기 좀 멈춰봐!" 내 목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서는 우현이. "뭐? 좀팽이?" "그래! 너!" "내가 왜 쫌팽이야! 이렇게 멋있는 쫌팽이도 봤어?" 재준이의 왕자병은 전염병이었던가. 우현이는 되려 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나는 기다렸단 듯이 이제껏 보아온 녀석의 만행을 낱낱이 말했다. 다행히도 재준이와 승휘가 바로 따라붙은 덕분에, 한번에 몰아 말할 수 있었다. "일주일 전인가? 시비붙어서.. 너희들 3대3으로 패싸움한거 모를 줄알아? 그 사람들 지금 다 병원에 있다며?" "......." "그리고 기분푼다고 술집가서 술 마셨지? 니들이 제정신이야?" 내가 알거라곤 예상못했다는 듯..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세남자. 사실 이건 재준이의 탈선에 분노한 주아의 제보다. ♪---- 그때였다.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학교에서 방송을 시작했다. 개교이래 몇번 없는 방송소리가 어색해 더욱더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몇번의 지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학주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학생여러분, 윤석하 재정경제부장관님께서 피살되신채로 일주일만인 오늘.. 현재 시간 1시 46분에 발견되셨습니다.] 방송부 마이크에서 흘러나오는 선생님의 음성에 맞춰 저절로 내 고개는 그들을 향해 돌아갔다. 녀석들은 입을 꾸욱 다문채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라의 큰별이 지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을 애도하며.. 학생들 모두 한마음으로 명복을 빌어주길 바랍니다.] 평소 깨끗한 정치인 이미지로 온국민에게 사랑받아온 윤석하 장관의 죽음소식에 모두들 술렁이기 시작했다. 눈물을 터뜨리는 여자아이도 몇 보였다. 나역시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교내방송을 할 정도로 그분은 사랑받는 정치인이었다. 학교내에는 죽음을 애도하는 잔잔한 음악소리가 퍼지고, 나는 용기를 내어 승휘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애도를 표하고 있는 반면, 재준이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만 있었다. "이런다고 살아돌아오나." "....." "죽으면 끝이지." 모두 변했지만.. 셋 중, 가장 많이 변한 건 재준이였다. 타인의 죽음에대해 아무렇지도 않아진 녀석이 낯설었다. 하지만 난 그들을 무서워하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또.. 너희들이야?' 목끝까지 터져나오려는 물음도 겨우 참았다. 대체 내가 어디까지 녀석들을 눈감아줘야 하는걸까. 이 모든일의 시작이, 나.. 민지율이라는 사실이 끔찍하다. Writer. 홍양 50.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유명인사들의 죽음에 관한 기사들. 귀에 들려오는 소식들을 듣는것 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히 고역이었다. 과연 녀석들이 얼마나 많은 사건에 연루가 되어있는걸까? 사건이 터질때마다 녀석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도 진절머리가 난다. 더 괴로운 것은 나의 이런 심정을 털어놓을 곳이 한군데도 없단 거였다. 언제나처럼 내말을 들어주던 재준이 역시, 지금은 나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이제 가장 멀게 느껴지는 건.. 우현이도 승휘도 아닌 재준이였으니까. KG의 횡포에 승휘나 우현이는 비교적 담담히 넘기고 있었지만, 재준이는 아니었다. 위태로운 그애의 모습이, 재준이를 너무도 잘 아는 내 눈에 그대로 보여서 더 괴로웠다. 지나가는 강아지 한마리한테도 정을 내는 녀석인데, 얼마나 힘겨울까? "오늘은 우리 셋 다 너 못데려다 줘..미안해." "....." "열아홉살이니까 집 정돈 혼자 갈 수 있지?" "언젠 데려다 달라 그랬어? 니들이 멋대로 데려다 준거지.." "말에 가시가 돋혔네? 얼굴이 안 예쁘면 말이라도 예쁘게 하라고 그랬지? 자꾸 가시 세우면 오빠한테 혼난다." 재준이가 지친얼굴로 내 머리를 두어번 쓰다 듬는다. 그렇게 어두운 얼굴로 돌아서려는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셋다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들을 앞에두고..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어냈다. "윤석하 장관님 피살.. 너희야?" 그 전의 교훈은 까맣게 잊고 묻자 재준이가 힘없이 웃으며 내 머리에 손을 얹는다. 원망스러움과 미안한 기색이 겹쳐진 눈빛이었다. "후, 아니라고 하면 믿을래?" "......" "용케 버틴다했더니... 하필 오늘같은 날 사람 힘을 쫙 빼놓냐.." 듣기 싫은 모양인지 먼저 돌아서버린 승휘, 그리고 우현이 재준이 순으로 나에게 등을 돌린다. 이제 점점 익숙해져가는 세남자의 뒷모습. 난 어느새 아무것도 물어선 안되고, 궁금해서도 안되는 제3자가 되어 지옥을 향해 걸어가는 그들에게 손을 뻗을 수조차 없었다. - 힘없이 집으로 가는 길.. 하릴없이 돌멩이를 차대며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몸을 웅크린 채 계단에 걸터 앉아 있었다.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려는데.. 갑자기 고개를 들며 내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지율이 언니..." 주아였다. 자주 보긴 했었지만 집앞까지 찾아오는 건 처음이라 당황한채 그 애 앞에 서자 닭똥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려온다. "언니....." "갑자기 왜그래, 주아야. 무슨일 있는거야?" 나는 얼떨결에 주아앞에 꿇어앉았다. 그러자 주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두번째에요.." "뭐가?" "윤석하 장관 피살까지....두번째.." - 나는 일단 따뜻한 코코아한잔으로 주아를 진정시켰다. 힘없이 돌아서던 그들에게 '믿을게' 라는 말도 못해준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결국엔 이번에도 내가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이렇게 난 또 그들에게서 한발자국 멀어지고야 말았다. "언니.. 저 안 무서워요?" "니가 왜 무서워.. 그런말 하지말고 코코아 마셔." "난 내가 무서워죽겠는데..." 물에 젖은 강아지마냥 파르르 몸을 떠는 주아. 그들의 심정을 짐작밖에 할 수 없는 나는 담담한 척 TV의 볼륨을 높였다. 하필이면 윤석하장관의 피살을 다루고 있는 뉴스 중이라 나는 어색하기 짝이없는 손놀림으로 채널을 돌렸다. 다행히도 다른 채널에서는 개그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언니 처럼..." "......." "나도 어느날... 평범한 사람이 돼있었으면 좋겠어요." 평범한 사람. 아직은 낯선 단어에 코코아를 한모금 들이켰다. 주아의 눈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에스퍼일때의 내 삶보다, 평범한 사람일 때의 현재의 삶이 훨씬 더 비참한 꼴로 돌아가고 있었다. 주아가 그걸 알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동조의뜻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맨 마지막에 남는 사람은 역시 정우현이었다. 지워보려해도 오늘따라 자꾸만 떠오른다. "언니, 저 이만 가봐야될것 같아요. 하진이언니가 자꾸 부르네요." 빨간 빛을 내고 있는 호출기를 들며 나가려는 주아를 배웅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뭔가 이상한 영상이 하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두운 골목길.. 그리고 위태롭게 서 있는 남자 둘. 서로 총을 겨누고 있다. 영화에서나 볼법한 영상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한명은 모르는 얼굴인데.. 한명은.... "주아야!!" 나는 돌아서려는 주아의 팔을 얼른 붙잡았다. 그러자 놀란 눈으로 뒤돌아 보는 주아. "정우현.. 정우현 어딨어? 오늘 어디 간다 그랬어?" "언니.. 왜 그래요, 갑자기... 진정해요." "말해줘. 오늘은 어디로 가는거야? 목표물이 누구야?? 얼른, 주아야!" "언니.. 미안한데 그런건 말해 줄 수...." "정우현이 위험해!!!!!" - 주아는 내 말을 듣자마자 급히 하진이언니에게 호출을 했다. 나는 너무 불안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벽에 서서 숨을 골랐다. 아무리 나에게 예지가 없다해도.. 그저 과한 걱정이 부른 거짓된 영상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은 기가막히게 맞아 떨어지곤 했다. 이번에도 맞아 떨어진다면....? "정우현...우현아...제발.." 우락부락한 남자와 서로 총을 겨누고 있던 우현이. 이 영상이 몇분 후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 했다. 겨누고 있는 영상외에 그 다음 장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나마 다행인건 우현이가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상태라면 우현이가 이길 게 틀림없었다. 아니.. 우현이는 무조건 무사할거다. "정우현은 멀쩡히 돌아와... 진정해." 다짐하듯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주아는 긴 호출을 끝내고 내쪽으로 걸어와 시무룩한 얼굴로 섰다. "하진이언니가... 가르쳐 줄 수 없대요." ".....하.." 주아의 말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 내가 호출기를 뺏어들었다. "야!!" 나는 앞에 있는 버튼을 누르며 다짜고짜 소리쳤다. 용케도 바른 버튼을 누른 모양인지 도하진이 호출을 받았다. "야? 임주아 너 미쳤어?" "주아가 아니라 민지율이야!" 내 말에 그쪽에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끊어진건가 해서 호출기를 버튼을 다시 누르려 했을 때, 도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래, 민지율.. 니 입으로 예지력이 없다 그랬잖아. 그런데 이건 무슨경우지? 왜 쓸데없는 말로 불안하게 만들어!" "이것저것 따질 시간 없어! 애들 어디 있는지나 말해!" 어디서 나온 깡인지, 큰소리로 도하진에게 말하자 그녀는 나를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헛소리에 극비사항을 말해줄만큼 나.. 한가하지 않아." "도하진!!! 정우현이 위험하다고!! 다른사람도 아니고 정우현이!!" "백만분의 일 확률으로 니 말이 맞다해도.. 니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 "주제를 알고 까불어." 도하진의 말을 끝으로 호출은 끊어졌고.. 그 뒤로도 여러번 호출버튼을 눌렀지만 상대쪽에서 일방적으로 거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결국 난 호출기를 주아에게 넘겨주었다. "언니.. 미안해요.. 가르쳐 드리고 싶은데 저는 진짜 몰라요.." "응. 주아야.. 걱정말고 넌 얼른 숙소로 들어가봐. 언니가 알아서할게."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있는 주아를 뒤로 하고 일단은 뛰었다. 주아에게 알아서 한다고는 했지만 막막했다. 재준이에게 전화를 해도 안받고.. 승휘와 우현이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그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만히 있다간 더욱 불안할 것 같은 느낌에 무작정 뛸 수 밖에 없었다. 숨이 멎을것만 같았다. 청백전 계주를 할 때도 이만큼 열심히 뛰진 않았다. "하아 하아..." 나는 거친숨을 몰아쉬며 버스정류장 앞에 섰다. 머피의 법칙처럼, 오늘따라 사람들이 몰려 있는 바람에 걸음을 떼기도 어려웠다. 무슨일로 정류장에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있는걸까. "어머, 세상에... 장관님 돌아가신지 얼마나 됐다고..." "요새 왜 이렇게들 죽어나는거야?" 무슨일인가 했더니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전광판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는 사람들. 나는 뭔가 미심쩍은 느낌에 그쪽을 쳐다봤다. [선민대 이사장 피살] 대문짝만하게 찍힌 로고.. 나는 잠시 우현이도 잊고 전광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선민대라면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학이다. 요새들어 쇼킹한 뉴스를 많이 접하는 사람들은 말세라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때 글자가 바뀐다. [국소지역에 내린 폭우로 인해 증거소멸 수사에 난항 겪을뻔 했으나] [차안에 있던 목격자들, 경호실장 이장호 용의자로 지목] "이번엔 경호원놈이 살인을 했네.. 지키라고 붙여놓은 놈이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더니.." 이곳에는 가랑비만 내리고 있는데, 같은 서울하늘 아래.. 그곳에만 폭우가 쏟아졌단 사실에 뭐에 얻어맞은 것마냥 머리가 멍했다.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이, 꼼짝없이 진실이 되어 내 눈앞에 서있었다. 나는 애써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한번 발을 옮기려 횡단보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상에.. 저놈 얼굴좀 봐. 딱 살인하게 생겼네." 사람들의 말소리에 나는 범인의 얼굴이라도 확인하려 전광판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순간.. 내 심장은 덜컥 내려 앉고 말았다. 현재 도주중이라는 글과 함께 그의 증명사진이 전광판을 가득 메웠다. 현상수배였다. "저런 놈은.. 잡아서 콩밥을 먹여야돼.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사람을 죽여?" 우락부락한 얼굴.. 잠시 스친 영상이지만 기억 못할리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다. 사람들이 그런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을 때.. 속보라는 로고와 함께 충격적인 사실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1km 떨어진 인근지역에서 용의자 현상수배중이던 이장호 사체발견]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눈 자세로 보아 자살로 추측. 조사중] 조금씩 내리는 가랑비가 천천히 내 몸을 적셨다. 가늘게 몸이 떨려왔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다시 일어날 수도 없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 그 남자였다, "이봐요... 괜찮아요?" 우현이에게 총을 겨누던.. - 모든것이 명확해지는 순간. 겨우 몸을 가누고 버스정류장에 앉아 2시간을 보냈다. 얇게 입고 나와선지 밤바람이 차게 느껴졌지만.. 집까지 걸을 힘도 없었다. 그때... 허벅지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짐과 동시에 핸드폰액정 가득히 재준이 얼굴이 차올랐다. 사진 속 재준이는 더없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이때만 해도 우린 얼마나 행복했던가. 재준이와 나, 세상에 단둘이라고 생각했을 때.. 우린 생계 걱정만 할뿐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느새 우리들의 인생에 끼어든 승휘와 우현이는 모든것을 바꿔가고 있었다. 나는 잠긴 목을 풀며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 - 너.. 전화했었네, 일하느라 못들었어! 미안! 무슨 일? 사람 죽이는 거? 아님, 너희들이 죽인 사람.. 다른 사람이 죽인거라고 꾸미는거? 재준이 니가 카운트를 이용해서 신상명세 알아내고, 승휘가 죽이면 우현이는 그런 너희 둘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여차하면 목격자들 기억 조작해서 다른 사람을 용의자로 만들고.. 날씨조종으로 증거까지 다 없애고... 따져보면 따져볼수록, 치밀하게 짜여진 팀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KG는 대단한 기관이었다. 어떻게 셋을 팀으로 묶어둘 생각을 했을까 싶었는데, 이제서야 알겠다. 셋의 조합은 킬러팀으로 일하기에.. 너무도 완벽하다. 나는 목이 메이는 걸 겨우 참고 말을 이어갔다. "이재준." -어, 나 전화 좀 안받았다고 삐졌냐? 재준아~ 그래야지, 이재준이 뭐야.. "내 말들어.. 나 지금..." -너 지금 내가 사준 까만별티셔츠에 츄리닝 바지 입고 있지? 재준이의 말에 얼른 내 옷상태를 살펴보자 진짜였다. 나는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가며 재준이를 찾았다. "이재준, 너 어디야?" 내 물음에 전화가 뚝- 끊기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 서둘러 돌아보자 세 남자가 나란히 내 등뒤에 서 있었다. 녀석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참아냈다. 나는 제일 먼저 우현이를 쳐다봤다. 다행히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들 어디...." "보고 싶었어." 그러자 기다렸단 듯이 나를 껴안는 우현이. 나는 승휘의 눈치를 살피며 녀석을 떼어내려했다. 이 순간까지 승휘의 눈치를 살피다니, 참 우습다. 그 때... 내 코끝에 비릿한 피냄새가 닿았다. 나는 세게 우현이를 밀쳐내며 참고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우현이의 몸에서 알 수 없는 피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왜 그래.." 나의 이런 반응에 놀란 듯, 우현이가 한 발자국 다가온다. 그럼 나는 두발자국 물러났다. 나의 행동에 우현이 뿐 아니라 재준이와 승휘의 표정도 점차 굳어졌다. "민지율.. 너 왜 그래?" "......... 아니야.. 아무것도.." 어느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두번다시 녀석들에게 등을 보이지 않겠다는 다짐과 본능적인 무서움이 충돌했다. "우는 주제에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오지마, 정우현....." "......" "나 지금 좀 피곤해서, 내일.. 내일 얘기 하자." 나를 진정시켜야 했다. 전처럼 녀석들과 사이가 틀어지는 건 원치 않는다. 점점 내 앞으로 다가오려는 우현이를 막은 후.. 물끄러미 승휘와 재준이를 쳐다봤다. 우현이 못지 않게 당황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의 표정엔 상실감이 가득했다. "민지율..." 가만히 있던 승휘가 나지막히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못들은 척 발을 급히 놀렸다. 어떻게든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자 가승휘가 거칠게 내 팔을 붙들며 한숨과 함께 말했다. "윤석하 장관일 우리 아니야." "......" "어차피 우리도 다른 놈들 아니니까 해명하기 싫었는데. 니가 또 우리 피하려고 하니까 말해주는거야. 그거 우리 아니야." 내가 윤석하 장관일을 마음에 품고 이러는 줄 아는건지.. 승휘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물었다. "선민대 이사장은?" "......" "경호원한테 죄 뒤집어 씌운거 아니지? 그냥 그 경호원이 죽인거 맞지?" '아니라고 해줘.' 간절하게 아니길 바랐다. 승휘가 고개를 저어준다면 나는 그대로 믿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쉬운 하얀거짓말조차 하지 못하는 승휘가 내 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우리야." Writer. 청몽채화 51. 세 명의 눈길이 모두 나에게 꽂혔다. 순간 다리가 휘청거렸으나 이를 악물고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숨이 턱 막혔지만 애써 내 자신을 진정시키며 심호흡을 해 본다. 바보, 민지율. 이게 뭐야. 믿고 안 믿고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친구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거, 난 그냥 그걸 알게되는 게 싫었던 거잖아. 아예 몰랐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맙다고 웃어줄 생각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다. “그, 그래. 다들 피곤하겠네. 집에 가서 쉬어.” 억지로 웃으려니 입가에 경련이 느껴졌다. 어둠에 휩싸여 내 자세한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다. “지율아.” 재준이는 한숨을 내쉬며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순간,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비가 와서 고여있던 물에 내 발이 담기며 순식간에 신발이 더러워졌다. 양말도 축축하게 변한 걸 보니 신발을 통해 진흙탕물이 모두 다 스며든 모양이다. 공기 중에 가득한 습기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를 오한이 느껴졌다. “........ 왜 그래, 겁 먹지 마.” 어둠 속에서도 상처받은 재준이의 눈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상처를 받은 건 그 애들일텐데, 내 눈에 눈물이 고여오기 시작했다. “미안해, 미안한데......” 미안한데도 나도 모르게 내 발이 자꾸 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듯 가깝던 우리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바보들.... 가지고 있는 총이나 좀 잘 숨기지....”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놈들의 바지 주머니에 툭 튀어나온 권총의 손잡이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사람을 죽일 때의 옷을 입고, 사람을 죽이자마자 나에게 온 이들이 원망스러웠다. 내 말에 세 명은 자기들이 지닌 총을 발견하고 당황한 것 같았다. “지율아, 이건.....” “..... 나도 죽일 수 있어?” “.......... 민지율!!!!” 그 상태 그대로 내 앞에 나타난 놈들의 심정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힘들다 해도 내가 그 모습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걸까.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되는 이들의 행동을? 애초에 내가 그들이 저지른 짓을 모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요즘 살인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이들이 몰랐을 리 없으니까. “너희들한테서 피 냄새가 풍겨.” 꽤 뒷걸음질을 많이 친 것 같은데도 피 냄새가 강렬하게 풍겨왔다. 이미 주변 공간이 피 냄새로 가득 차서 굳어버린 것 같았다. “.... 다들 총 나한테 줘.” 재준이는 한참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돌아서서 승휘와 우현이를 향해 중얼거렸다. 승휘는 한숨을 쉬며 재준이를 향해 총을 건넸다. 검은 색의 총이 소름끼치도록 차가워보였다. 우현이는 재준이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멍한 얼굴로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놈이 나를 껴안았을 때 내가 거부하며 밀쳐버렸다는 것에 적잖이 충격받은 것 같았다. “미친새끼, 언제까지 정신 못 차리고 있을 거야??” 재준이는 우현이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하지만 우현이는 힘없이 재준이에게 밀려갈 뿐이었다. 우현이에게 소리치는 재준이의 모습을 보니 절실히 느껴진다. 저 세 명 중에서는 재준이가 모든 일을 책임지는 리더라는 것. 재준이는 언제나 내 옆을 지켜주는 친구였는데 어쩌다가 저런 일에 휘말려든 걸까. 재준이는 억지로 우현이의 옷에서 은색의 권총을 꺼내들었다. “총 들고 먼저 기관에 보고하러 갈게.” 재준이는 총이 더 이상 내게 보이지 않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지율이가 니 놈들하고 연관되는 거 진짜 죽도록 싫은데.” “..............” “이번 일은 우리끼리 풀어야 될 수밖에 없으니까 오늘만 지율이 너희들한테 맡긴다.” 재준이는 먼저 돌아갈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재준이가 가지 못하게 잡았겠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사라졌으면 했다. 가능하다면 셋 다 보이지 않는 것이 좋았다. “기관에 임무수행 성공한 거 보고하러 가기도 전에 너한테 왔어.” “..............” “우리도 쉴 곳이 필요했어.” 재준이의 쓸쓸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울렸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난 그걸 감당할 정도의 여력이 없었다. “.......... 미안해, 재준아.” 모든 상황을 파악한 상태에서, 수많은 말을 뒤로 하고 재준이에게 그 한마디만 내뱉었다. 그들이 나 때문에 KG에서 협박을 받았을 것도 짐작하고, 익숙해지지 않는 살인 때문에 점점 미쳐간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걸 지켜보는 나는 이미 극한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내게 와서 위안을 얻어간다면, 나는 누구에게 기대야 하는 걸까. 내가 에스퍼가 되어 그들의 일에 협력하지 않는 이상, 나는 절대 그들의 쉼터가 될 수는 없었다. 재준이는 내 말뜻을 이해한 듯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놈이다. “내일 웃는 얼굴로 보자.” 재준이는 억지로 밝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게 등을 보이고 뒤돌아선 그의 얼굴이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눈에 훤하게 밟혔다. 재준이는 총 세 개를 지니고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당장이라도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 용기도, 힘도 없었다. 재준이가 가버린 공간은 침묵으로 가득찼다. 그 누구도 먼저 말을 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다. 그 때, 승휘의 허리춤에 달려있는 호출기가 빨간 빛을 깜빡였다. 아까 주아도 가지고 있었던 호출기다. 다들 임무수행을 할 때는 저걸 달고 다니는 모양이다. 승휘는 호출기의 버튼을 누르며 대답했다. “임무수행 보고, 이재준이 하러 갔어.” 사무적인 승휘의 대답에, 더욱 사무적인 목소리로 하진언니가 답한다. - 보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임무수행 후 무조건 본부로 복귀하는 거 잊었어? 아까 전에 나를 나락까지 깔아뭉갰던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소름이 끼쳤다. - 우현이 위치추적 칩 박은 거 몰라? 지금 민지율이랑 같이 있니? “누나....” - 당장 돌아와. 해줄 이야기가 있어. 중요한 이야기야. 민지율에 대한 이야기지. 승휘가 내 눈치를 살폈다. 나에 대한 이야기가 무엇일까. 또 나를 미끼로 해서 아이들에게 어떤 일을 시키려는 거지? 하진언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볍게 몸이 떨리며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 우현이가 안 온다고 버티면 일단 너라도 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진언니 쪽이 일방적으로 호출을 끊었다. 승휘는 난감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자세한 건 다음에 이야기하고, 복귀하자, 정우현.” “너 먼저 가.” “정우현.” “지율이한테 할 말이 있어. 무조건 해야겠어. 너 먼저 가.” “너 혼자 뭘 어쩌겠다는 거야!!! 니가 지율이 이해시킬 수 있다는 거야?” “제발 이딴 일에까지 질투하지 말고 그냥 좀 가라고!!!!” 승휘의 목소리보다 우현이의 목소리가 더 큰 건 처음이었다. 승휘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는 미치겠다는 듯이 자신의 앞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호출하면 순간이동으로 바로 복귀해.” 승휘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단호하게 뒤돌아섰다. 이제 남은 건 우현이와 나 뿐이었다. 다행히,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나마 편한 것도 같았다. 대신 마음은 더 아릿하게 아파왔다. 무기력한 우현이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를 안아줄 수도 없었다. 그에게 풍기는 피 냄새와 아까 머릿속을 스쳐간 영상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아까.... 머릿속에서 스쳐간 영상을 봤어.....” “......... 너 예지력 없잖아.” 힘겹게 꺼낸 내 말에 우현이가 피식 웃으며 답한다. 말 그대로 씁쓸한 실소였다. “그래도 정확하게 보였어. 니가... 그 경호원이랑 서로 총을 겨누고...” “.... 또? 또 뭘 봤어.....?” 우현이는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그 경호원 죽이는 것도 봤어?” 익히 예상은 했었지만, 내 예지력은 그것까지 보여주지 않았다. 아마 우현이가 직접 사람을 죽이게 되는 장면을 봤으면 지금쯤 난 기절해있을지도 모른다. “정우현.....” “가승휘 손 잡고 동반 순간이동을 했지. 미리 봐둔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왔어. 근데 용의자로 지목돼서 도망치던 경호원이랑 딱 마주쳤어. 그 사람, 내가 가승휘랑 같이 잠입하는 거 다 봤거든. 다짜고짜 소리치는 거야. 왜 너희들 죄를 무고한 나한테 덮어씌우냐고. 내가 너희들 잡아서 경찰서에 쳐넣고 말겠다고, 그러면서 총을 겨누는 거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우현이의 말을 듣고있는 수밖에. “재준이는 우리랑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줄 수가 없었어. 승휘는 이미 이사장도 죽였고, 그 사람 기억도 빼냈고, 목격자들 기억도 조종했어. 아마 손 하나 들어올릴 힘도 없었을 거야. 그래서 내가 다시 순간이동 하려고 했는데. 심장에 무리가 와, 병신처럼. 순간이동 바로 이어서 하면 부담이 미친듯이 걸리거든. 살기 위해서 비상용으로 챙겨둔 내 총을 꺼냈어.“ “............... 너......” “........... 쐈어. 그 사람 머리를 관통시켰어. 일부로 자살로 처리시켜야 했으니까.” 우현이가 무사하길 바랐으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전해듣자마자 머리가 띵해졌다. 내 예지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괜한 혼란마저 밀려왔다. 이래도 내가 에스퍼가 아니란 걸까. “내가 어떻게 해야했다고 생각해?” 우현이는 비웃듯이 말을 이었다. “정우현!!! 너는 지금.....” “내가 총을 빼들지 않았으면 가승휘가 죽고, 내가 죽어.” 우현이가 울 것처럼 말을 이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너는 그런 눈으로 나를 보면 안돼!!!!” 우현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약한 우현이의 모습은. “니가 굳이 그렇게 쳐다보지 않아도 나는 이미 미치겠다고!!!!!” 어떤 말도 섣불리 내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견딜 수 없는 건, 우현이가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는데도 그의 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내 무기력함이었다. “안 그래도 미치겠으니까 너까지 나 건들지 말라고!!!” “............” “내가 어떻게 해야돼???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었어!!!!” “..............” “그걸 원해, 민지율....? 내가 죽는 거.... 그걸 원해....?” 우현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언젠가, 자신의 손목을 긋던 우현이의 모습이 재빠르게 겹쳤다. “그럼 어떡해?? 피 냄새 나는 너희들 얼굴 보면서 그냥 웃고 있으라는 거야? 너희들이 죽인 사람 이야기를 뉴스고 신문이고 언론에서 마구 떠들어대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런 말들을 접하면서 그냥 눈감고 귀닫고 있으라는 거야?? 너희들을 나한테 그런 것까지 요구하면 안 돼!!! 나라고 편한 줄 알아? 너희들만 힘들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아냐구!! 나는 너희들 쉴 곳이 되어주지 못해... 내 앞가림도 못하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쉴 새 없이 몰아붙인 내 말을 들으며 우현이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해해주는 건 바라지도 않을게.” “...............” “그냥.... 나 한 번만 안아주면 안 돼....?” 그 말에 복잡하던 생각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나는 미친듯이 우현이에게 달려가 그를 내 품에 안았다. 이렇게 괴로워하는 우현이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 나에게 안겨있던 우현이의 몸이 뜨거웠다. 온 몸에 열이 나고 있는 것 같았다. “..........우현아....” 내가 그의 이름을 천천히 발음한 순간,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한순간에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었어....” “...........” “나, 정말 어쩔 수 없었어.” “.................” “오늘 임무수행하는 내내 처음부터 끝까지 니 생각만 했어.” 나는 우현이를 더 꼭 끌어안았다. 피 냄새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 곁에 있는 우현이가 무사하다는 사실, 그것에 감사하는 수밖에. “내 여자, 널 만나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 Writer. 청몽채화 52. ※ 작가시점 ※ 승휘는 KG 본부로 복귀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매니저들이 사용하는 연구실로 발을 옮겼다. 매니저들 사이에서도 높은 직급을 자랑하는 도하진의 연구실은 복도 맨 끝 방이었다. 그는 노크도 없이 주저 않고 문을 열었다. 여러 종이 나부랭이를 흥미 없는 눈길로 훑어보고 있던 하진의 눈이 승휘에게 박혔다. 승휘는 그녀를 향해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재준은?" "오늘 상황보고는 감독관한테 하라고 넘겼어." 그녀는 승휘를 향해 앞에 있는 의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앉으라는 표시인 것 같았다. "지율이에 대한 이야기가 뭐야?" 승휘는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하진은 천천히 담배를 빼물며 턱을 괴고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계획서를 만지작거렸다. "워너비 프로젝트 들어갈 때 분명히 약속했잖아, 이제 지율이는 건드리지 않기로." "누가 그래? 감독관이?" 하진은 천천히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녀의 한 쪽 입 꼬리가 씩 올라갔다. 빨간 입술이 미치도록 섹시했지만 승휘의 눈에 그딴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온통 민지율에 대한 안전으로 쏠려있었다. 하진은 심각하게 진지해져 있는 승휘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껏 자신이 장난으로 건드리면 넘어오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승휘만은 달랐다. 이재준이나 정우현만 해도, 하진의 실체를 알기 전에는 그녀 앞에서 얼굴을 붉히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 하진의 눈앞에 있는 이 소년은, 하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장난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지거나 넘어진 척 몸을 맞대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처음은 오기가 발동해서 그에게 들이댄 것이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끈기 있게 다른 곳만 바라보는 놈이 신기했고, 그래서 관심이 갔고, 그래서 화가 났다. 그러다 결국은 여섯 살이나 어린 남자아이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만 것이다. 간절히 아껴온 가승휘의 사랑의 대상이 민지율이라는 것을 깨닫는 건 쉬웠다. 누구나, 승휘의 눈빛만 보면 그 점을 느꼈으리라. "이번만은 예외를 둬야겠네." "민지율 건들지마." "KG가 말 바꾸는 건 흔한 일이지. 뭐, 니가 그걸 몰랐을 리는 없잖아." "도하진!!!!!!!!!!!" "누나라고 부르지 않을 거면 매니저님이라고 불러, 니 앞에서 너 좋아하는 징글맞은 년으로 보여도 명령내릴 때는 니 상관이야." "명령?" 승휘의 입 꼬리가 비웃듯이 올라갔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그는 언제나 민지율이 관련된 일에 비정상적으로 반응했다. 사실, 하진은 승휘를 킬러로 키우려는 KG의 워너비 프로젝트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곧 워너비 프로젝트의 매니저 일을 맡겠다고 자진해서 나설 수밖에 없었다. KG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승휘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가승휘는 손에 피를 묻히고 적당히 웃을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런 추한 모습으로 민지율을 탐할 만큼 양심이 없는 남자도 아니었다. "명령이면 나만 불러들이는 게 아니라 이재준과 정우현도 불러들였겠지." 정곡을 찔린 하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니가 나만 부른 이유는 둘 중에 하나야." "............똑똑하네. 그럼 두 가지 상황이 뭔지도 말해볼래?" "이번 니 명령이, 이재준과 정우현이 들으면 지랄할 일이라서." "............." "아니면... 이번 명령에 찌질한 니 복수심이 개입되어 있어서." "둘 다 정답이네." 하진은 팔짱을 긴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녀는 주눅든 적이 없었다. "저번에 지율이 신고했던 때부터, 너 하는 짓 마음에 안 들었어. 감독관이 약속했어. 앞으로 절대 지율이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이재준이나 정우현이나 나나!! 병신처럼 그 한 마디만 믿고 사람까지 죽였어!! 아무 잘못없지만 국가가 처리하라고 하는 위험인물들 어떻게든 죽이는 살인병기까지 되어줬다고!! 근데 이제와서 뭘 원해!! 왜 다시 그 애를 끌어들이려고 해!!!?" 악에 받혀 소리치는 승휘의 고함소리가 들리기나 하는 건지, 하진은 의자를 한 바퀴 빙글 돌리면서 하진은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죽여." 승휘의 행동이 한순간 멈췄다. "다시 한 번 말해봐." "죽이라고." ".......... 누구를.....?" "너희가 끔찍이도 아끼는 그 민지율, 죽여." 하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고 무섭고도 잔인한 말을 입에 담았다. 개인적 복수심으로 그녀 혼자 독단적으로 내린 결론은 아니었지만, 그 명령에 그녀의 입김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승휘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국가가.... 그 애의 목숨에 신경쓸 일은 없을 텐데. 그 애는 에스퍼도 아니야." "에스퍼는 아니지만 워너비 1조의 활동에 지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지." 하진은 단호한 눈으로 승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셋 다 바빠 죽겠는데도 바득바득 우겨서 학교에 다니는 것도, 솔직히 시간이 아까워. 킬러로서 가장 움직이기 좋은 시간이 새벽인 거 몰라? 피 냄새 배어있는 채로 너희들을 학교에 보낼 순 없어. 특히나 이재준은 동반 순간이동으로 본부에 복귀할 수 없어서 언제나 걸어오거나, 택시를 타고 오는데, 그것 때문에 학교에서는 언제나 엎어져서 졸기 바쁘지. 덕분에 훈련에도 지장이 많아. 언제까지나 반경 1km 날씨조종만 할 순 없어. 국지성 호우로 기상청에서도 말이 많단 말이야. 너도 우현이 신경전도 날이 갈수록 깊어지지. 그러다 동반 순간이동 실패하면 어쩔 거야? 팀워크가 생명인 일이야. 개인적인 일로 틀어질 생각하지마. 곧 텔레파시 훈련도 들어갈 텐데 사이가 더 나빠지면 곤란해." 승휘는 차가운 눈으로 하진을 바라보았지만, 하진은 그 눈빛에 적당히 져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고작 그 이유야?" "너희들 생명이 걸린 일이야. 고작이 아니지." "차라리 우릴 죽여." "하기 싫으면 셋 다 자살해. 돈 들여서 만든 살인병기 우리 손으로 죽일 순 없어."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하진은 승휘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만큼이나 일에 관해서 노련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KG를 증오했으나, 누구보다도 KG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가족 전체가 에스퍼였던 하진은, 부모님과 남동생과 함께 KG에 들어왔다. 하지만 죽었다. 부모님은 능력이 하찮다는 이유로. 남동생은 부모님의 죽음으로 인해 반항한다는 이유로. 부모님은 약물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고, 동생은 감독관의 구타로 인해 죽었다. 그 때부터였다. 하진이 기를 쓰고 능력과 계급에 집착하게 된 건. "국가는 민지율이 사라지기를 원해. 대신 너희 손으로 그녀를 없애면 너희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제공해주지. 그 애만 죽이면, 앞으로 너희들이 죽이지 못하는 것은 없어." "거절하겠어." 승휘는 하진의 말을 자르듯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니가 이런다고 해도,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 "대신 다른 년을 쳐다보진 않겠지." 하진이 미처 하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승휘는 손을 위로 쳐들어 하진의 뺨을 내려쳤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하진의 고개가 오른 쪽으로 돌아갔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센 강도였음에도 불구하도 두 사람 다 놀라진 않은 것 같았다. 하진은 찌릿한 입술 끝을 만져보았다. 입 꼬리가 살짝 찢어져있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승휘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하진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짓말이라고 말해줘......" "이번 말일까지야. 진행해. 이재준과 정우현한테도 따로 말해둘게." 하진은 일부러 차갑게 대답하며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지율, 처음부터 느낌이 좋지 않던 계집애. 도대체 무슨 복을 타고났길래 KG가 애지중지하는 세 남자를 휘어잡았단 말인가. 하진이 승휘를 좋아하지 않았어도, 지율을 살해하라는 명령은 내려왔을 것이다. "빌어먹을 그 워너비 콤플렉스." ".................." "내가 이번에야말로 망가뜨려 주겠어." 워너비 콤플렉스. 세 남자와 지율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 말뜻을 알고있었다. 워너비 1조, 최초로 워너비의 명칭을 딴 세 남자를 KG는 워너비라 불렀다. 그 워너비의 콤플렉스는 단 하나, 민지율이었다. 민지율을 들먹이면 무슨 일이든 시킬 수 있었고, 민지율을 건드리면 어떤 일이든 미친듯이 반항했다. 기관 안에만 갇혀 살아야 하는 아이들이 바깥에 집착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대신, 하진이 아니었다면 그들 손으로 지율을 죽이라는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긴, 오히려 그게 더 나빴을 수도 있었다. 일이 그렇게 진행되었다면 세 남자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지율을 잃어야 했으리라. "차라리.... 날 집어넣어줘......" 승휘의 강하던 모습은 사라져있었다. 그는 하진이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만 내리면 고분고분하게 따를 정도로 얌전하게 변해있었다. 난폭하게 굴어봤자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5년간의 KG생활에서 누구보다도 절실히 깨달았으리라. "니 뺨에 상처냈잖아. 지금도 반말 쓰고 있고. 이거 하극상 맞지? 나 끌고 가. 차라리 지하 고문실로 다시 끌고 가, 죽을 정도로 괴롭혀!!! 피가 튀고 살이 으스러져도 신음소리 하나 안 낼 테니까!!! 그러니까 지율이는 제발 건들지 마. 국가가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죽일테니까... 군말없이 따를 테니까... 학교 다니지 말라고 하면 자퇴라도 할 테니까.... 제발 지율이는 가만히 내버려둬." 기관 내에서 누구보다도 냉정하다고 일컬어지는 승휘의 낯선 모습에 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진의 과거를 모르는 주제에 지껄이는 말이겠지만 심기가 불편했다. 그녀의 동생은 지하고문실에서 얻어맞다가 처참히 죽어갔다. 하진이 아무리 독하다고 해도, 그녀의 손으로 승휘는 고문실로 집어넣을 순 없었다. "너희들이 고문받거나 자퇴하는데 그 애가 가만히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지? 어떻게든 제 발로 KG로 걸어들어오게 되어있어. 신중하게 생각하길 바래. 너희들 손으로 처리해야 의미있는 일이기 때문에 워너비 2조로 넘길 생각은 없어." 하진은 끝까지 강압적인 매니저의 태도로 할 말을 마쳤다. "우리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 승휘의 목소리가 또 다시 바뀌어 있었다. 하진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발걸음을 옮기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에게 제일 소중한 아이야. 그 애를 해치라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가족을 KG로 인해 잃었을 때, 하진도 눈물을 흘리면서 다짐했었다.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가만히 둘 수밖에 없었다. KG는 그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힘을 가진 기관이었다. "무슨 짓을 할 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두지 않을 거면 온 힘을 다해 덤벼. 어린애 장난처럼 건드렸다가 너희들이 위험해져도 그 때는 도와줄 수 없어. 내가 널 귀엽게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적당히 까불어." 하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승휘를 노려보았다. 사랑하는 이에게 그런 눈빛을 보낼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 그녀는 언제나 승휘와 재준이와 우현이에게 안쓰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들이 행복할 수 없게 감시하는 역할도 해야했다. 에스퍼의 인생에 행복은 없었다. 그들은 인간이기 전에 에스퍼였다. 사랑이든 정의든, 그딴 말장난에 놀아날 만한 여유는 없었다. 삶의 이유가 있으면 KG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불행은 운명이었다. "난 분명히 말했어. 민지율을 죽여." 하진의 손이 차가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후회하게 될 거야." 승휘의 말이 이어졌음에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었다. "끝까지 덤벼주겠어." 이를 갈며 중얼거리는 승휘의 말에도 하진은 웃었다. "그럼 그 때는." "............." "전쟁이지." Writer. 청몽채화 53. "민지율, 어딜 가, 이리와, 이리와. 리본 어디다 팔아먹었어?" 오늘 등굣길도 역시나,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나를 자기 앞까지 불러들이는 재준이. KG 활동으로 인해 바쁘면서도 정말 징하게 선도부 생활은 계속하고 있다. 덕분에 학주선생님의 총애를 듬뿍 받고있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점점 다크써클이 짙어져가는 재준이의 모습은 안타까웠다. 우울해하거나 힘이 없을까봐 걱정했는데,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밝은 모습으로 나와 마주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재준이와 얼굴을 맞대기는 불편하다. 놈들이 사람을 죽인 건 사실이고, 그 사실은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 우현이의 눈물을 보면서 나도 많은 것을 느꼈다. 하고싶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나를 위해 하는 놈들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기에... 놈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야만 했다. 살기 위해 그들이 하는 행동을 비난할 자격같은 게, 나에게는 없었다. 그랬기에 나도 재준이를 향해 애써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초능력이나 국가, 명령, 살해... 이런 단어들에 압도되어 지치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지금 우리가 함께 하고있다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일상이었다. 앞으로도 많은 일들이 일어나겠지만 우리는 아직 젊으니까, 힘든 일이 있더라도 모두 견뎌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리본 빨았는데 아직 안 말라서... 나 한 번만 봐주라." "싫어." "아, 왜!!!" "너 어제 내가 가는데도 안 잡았잖아." ......... 어제 그 심각한 와중에서도 내가 지를 잡아주길 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정말 이 생명체는 평범한 생각의 범주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어차피 너 간 뒤에 승휘도 바로 갔거든?" "오호라, 그럼 정우현이랑 둘이 있었다는 소린가?" 그제야 내가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라리 승휘랑 우현이랑 셋이서 난동을 부리면서 싸웠다는 대답이 더 현명했다. "정우현이랑 놀아난 벌이야. 운동장 세 바퀴 돌아." "안 놀아났어!!!" "그럼?" "서로 욕 좀 하고, 발차기 좀 하고, 주먹질도 좀 하고..." "흐음...." 재준이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도 놈은 내 말을 믿어주는 눈치였다. 재준이는 씨익 웃으며 내게 다시 물었다. "너 걔 좋아하는 거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걔가 들러붙으면 내가 짜증부터 난다니까!!!" 재준이의 기분을 어떻게든 풀어주어 운동장 세 바퀴를 도는 불상사를 없애리라 다짐하며 풍부한 손짓까지 사용하며 열변을 토하고 있던 찰나, 재준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데, 정우현... 어떻게 생각해?" 설마... 설마... 설마... 나는 천천히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바로 뒤에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 우현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그런거였어, 민지율?" "아.... 아니아니, 정우현, 내 말 좀 들어봐, 그게 아니고!!!" 제기랄, 몸 좀 편하려다가 우현이에게 의심만 잔뜩 사게 생겼다. 다 내가 자초한 일이라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난 진심이었는데 넌 내 마음 가지고 놀았다 이거지?" "아니,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라니? 민지율 너 나한테 거짓말 했냐?" "아니, 재준아, 그러니까...." 두 남자 사이에 끼여서 어떤 말도 함부로 꺼내지 못하고 버벅대고만 있을 찰나, 교문으로 유유히 들어오는 한 남자의 형상에 눈에 들어왔다.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그 사람, 가승휘. "승휘야, 나 좀 도와줘봐. 얘들이 자꾸...." 그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설마 어제 일 때문에 아직까지 나에게 화나 있는걸까? 세 명의 기분 다 풀어주게 생겼구나, 그냥 셋 다 점심시간에 매점으로 끌고 가면 되나? 오늘 내 지갑에 얼마가 들어있었지?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계산을 하고 있을 때, 승휘가 입을 열었다. "잠깐 다들 시간 좀 내 줘. 할 말이 있어." * "어제 명령을 전달받았어." 학교 교문과 연결되어있는 작은 골목 샛길에 모이자마자, 승휘가 입을 열었다. 전에도 이 곳에 있다가 재준이가 KG로 잡혀갔었다. 언제나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려들게 되기 때문에, 벌써 심정이 불안해지고 있었다. "이번 살해대상은...." 승휘가 하던 말을 계속 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 "그걸 지율이 앞에서 왜 말해." 다행히 나보다 먼저 재준이가 나서주었다. 우현이도 재준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어떤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재준이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내가 그들의 임무에 지나치게 신경썼기 때문일까. 승휘는 살해대상을 나에게 미리 말해주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알고싶지 않았다. 알고서도 막지 못하는 게 더 절망적인 일이었다. 이제 누군가의 죽음에 크게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저기, 나 갈게. 너희들끼리 먼저 이야기 하고 와." 애써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피하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민지율." 승휘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너야." 머릿속이 순식간에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새하얗게 정리된 머릿속에 아까 승휘가 중얼거린 음성만이 가득 찼다.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우현이가 승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급하게 물었다. "다음 번 살해대상은 민지율이야." "닥쳐,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해." 재준이가 재빨리 승휘의 말을 잘랐다. "내가 본부에 연락해볼게. 그럴 리가 없어." "소용없어, 어제 도하진한테 직접 들은 거야." "지율이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우리한테 약속했잖아!!!!!!!!" "KG는 언제나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지. 그 놈들은 우리가 지율이한테 신경쓰는 것조차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승휘를 제외하고, 모두의 눈이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어제 이들을 향해 물었었다. 나도 죽일 수 있냐고. 그 질문에 놈들을 화를 냈었다. 손이 가볍게 떨려왔다. 아무리 다시 봐도 내 눈에 이들은 킬러가 아니고 친구였다. "도망가자." 승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준이는 여전히 멍해 있었지만, 우현이는 재빨리 내 손목을 잡았다. "그래, 지금 빨리 해외로 나가자. 우리 둘이 먼저 갈 테니까..." 승휘는 내 손목을 잡은 우현이의 손을 세차게 쳐냈다. "너는 민지율이랑 움직이면 안 돼. 칩 박은 거 잊었어?" 우현이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잊고 살았지만, 우현이에게 위치추적 칩이 박혀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자유로운 능력을 가졌지만, 누구보다 억압받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현이가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두 패로 갈라지자. 내가 지율이랑 같이 움직일게. 정우현 너는 이재준이랑 움직여. 둘이 바로 주아를 찾아가. 주아는 사람 장기를 빼낼 수 있는 염력 트레이닝 중이지. 아직 성공했다는 말을 못 들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기댈 구석은 그 뿐이야. 주아한테 정우현 손목의 칩을 빼달라고 해. 그 다음에 우리와 합류하자." 승휘는 이미 계획을 다 짜 놓은 듯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정동진, 우리가 갔던 그 바닷가에서 만나자." 재준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아를 설득시키려면 재준이가 우현이와 함께 가는 수밖에 없었다. 주아가 사람의 장기를 빼내는 염력 트레이닝 중이라고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는데, 그게 이런 일에 쓰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냥... 같이 움직이면 안 돼?" 위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처럼 재준이의 옷깃을 잡으며 물었다. 승휘와 둘이 다녀야 하는 상황도, 서로 떨어져야 하는 상황도 너무 무서웠다. "지금 어리광 부릴 상황 아니야, 민지율." 재준이는 나를 달래듯이 내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바로 승휘를 향해 말한다. "바로 강원도로 출발해. 어쨌든 KG를 교란시켜야 하니까 우린 남쪽으로 갈게. 충청도 쯤에서 만나자고 하면 주아도 와 줄거야." 재준이와 승휘가 계획을 짜고 있을 동안, 우현이와 내 눈이 마주쳤다. 우현이는 내 손목을 붙잡고는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오늘만은,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재준이와 승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너 두고 아무데도 안 간다고 했었지?" "............우현아........." "기다려. 칩 뺀 뒤에, 어디든 같이 가자. 너 가고싶은 곳 다 가자." "...... 나.... 무서워......" 우현이 품에 안긴 그때서야 눈물이 터져나왔다. 나는 에스퍼가 아닌데도, 왜 계속 KG의 표적이 되는 걸까. 더 이상 놈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은데도, 언제나 모든 일의 발단은 나였다. 우현이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어떤 말을 해도 서로를 위로할 수 없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승휘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재준이에게 내밀었다. 목걸이였다. 재준이의 어머니가 유품으로 남기신 것으로 추정되는 그 목걸이. 승휘가 재준이의 집까지 가서 찾아왔지만 감독관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전해주지 못했었다. 그걸 아직까지 승휘가 가지고 있었다는 걸까. 은색의 얇은 목걸이에, 작은 반지가 달랑대고 있었다. "무사해라." 승휘는 목걸이를 건네며 중얼거렸고, 재준이는 목걸이를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준이는 목걸이를 쥔 손을 꼭 쥐고는 우현이를 잡았다. "빨리 가자, 시간이 없어." 재준이가 재촉하는데도, 우현이는 나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너도 빨리와, 민지율." 승휘가 반대편에서 내 손을 잡아당겼다. 우현이와 나는 자연스레 떨어지고 있었다. "우현아... 재준아....." 나는 울먹이며 우현이와 재준이의 이름을 불렀다. 우현이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재준이는 나를 돌아보았다. "금방 만날 수 있어, 걱정마, 민지율." 재준이의 한마디에 눈물 한 방울. "칩 빼고 갈게. 어디 가고싶은지 생각해놔." 애써 웃으며 중얼거리는 우현이의 한마디에 또 눈물 한 방울. 우현이는 재준이의 손을 잡았다. "가승휘, 민지율 상처입히면 너 죽는다. 우리 먼저 갈게." 순식간에,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제 우현이의 동반이동은 완벽한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나는 눈물을 참으며 승휘를 올려다보았다. "걱정마. 아무 생각없이 넌 그냥 나만 따라오면 돼." ".................. 승휘야...."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눈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줄게." Writer. 홍양 54. 승휘는 강릉행 기차표를 두장 사왔다. 다행히도 10분 후 출발하는 기차가 있었다. 놓쳤다면 1시간도 더 기다려야할 뻔 했다. 부랴부랴 탑승하자, 승휘는 날 안쪽으로 앉히고 자신이 바깥쪽으로 앉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지만 신경쓰이는 듯 자꾸 옆을 살피는 승휘의 팔을 세게 잡았다. 내 나름대로의 위로였다. 그러자 승휘는 내 손이 닿은 자신의 팔을보다, 얼굴으로 시선을 옮긴다. "불안해 하지말라고?" 마치 내 속을 읽기라도 하는 듯 작게 웃으며 말하는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후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말고 손." "응?" "손 잡아 달라고." 꽤 단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우물쭈물대는 사이, 승휘는 덥썩 내 손을 잡았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는데.. 녀석도 이런 수줍은 미소를 지을 수 있구나에 새삼 놀라고 말았다. 승휘와 손을 잡았다는 생소한 느낌에 얼어 있을 찰나, 기차는 지체없이 빠르게 출발했다. 진짜.. 우리만 가는구나. 물론 아무일 없이 뒤따라 올테지만... 하아. 재준이와 우현이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점점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새삼, KG라는 기관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슬펐다. 얼핏 재준이에게서 들은 적이있다. KG의 권위가 높은 이유는 에스퍼들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고 했다. KG(Korea Goverment - ESP) 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에 KG와 같은 기관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우현이가 해외로 도망을 친다해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엔, 우리의 힘을 모아도 상대하지 못할 수많은 에스퍼들이 있다. 우리의 힘과는 비교도 안되는 초능력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에스퍼들을 가두는 기관이 영구히 지속 될 수 있는 이유는 강력한 에스퍼들 덕분이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지금 내 옆에 승휘가 없었더라면.. 난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승휘는 자신이 옆에 있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체온이 그대로 느껴지도록 손을 잡았다. "승휘야..." 난 나지막한 목소리로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보니 '승휘야..' 하고 다정하게 부른 건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녀석도 그걸 느낀건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에 이걸 묻지 않으면 후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용기를 냈다. 녀석과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내가 잊어버린 기억속에 있는거야, 넌?" "......." 느끼고는 있었지만, 대답을 들을 자신은 없어서 묻지 못했던 말이었다. 따뜻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든 승휘가 나에겐 자신의 모든것을 다 준다. 혹시나 이 모든게 과거에 우리가 알던 사이여서는 아닐까. 나름대로 추측한 사실을 묻자, 승휘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너에게 좋은기억이었다면.. 지우지 않았겠지." "그럼 나쁜 기억이었어?" "아니." "그럼.... 뭐야.. 넌 뭐였는데..." 내 예상대로, 과거 어디쯤에서 나와 알던 사이였던 게 분명했다. 긴장된 기색을 숨기며 묻자 승휘는 잡았던 손을 떼낸다. 그리고, 자려는 모양인지 쓰고 있던 캡모자로 얼굴을 덮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었어." "........" "내가 말해주면.. 나한테로 올래?"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승휘는 내 머리를 시트에 기대게하며 말했다. "반응이 재밌어서 놀린거야. 우리 아무사이도 아니었어." "....." "피곤할 일 많으니까, 좀 자둬." - 복잡하고 긴장되는 상황에서도, 나는 한번도 깨지 않고 잠만 잤다. 승휘가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일어 났을 땐.. 이미 도착해있었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정동진에 도착했다. 바다엔 조금씩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에 몸을 떨자 승휘가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내 몸을 감싸준다.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승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녀석이 내 눈빛을 느낀건지 쓰윽 내려다본다. 괜히 뻘쭘한 상황에.. 승휘가 벗어준 자켓에서 진동이 느껴져 '전화와' 라고 하자 녀석은 거리낌없이, 거의 날 안듯이 해서 주머니에서 호출기를 꺼내들었다. "어, 이재준. 주아는 만났......." "길게 못하니까 한번에 알아들어." "......." "민지율 어떻게든 지켜. 알았어?" 재준이의 목소리에 급박함이 느껴졌다. 승휘도 그걸 느낀 모양인지 입을 꾸욱 다문채 재준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승휘.. 믿는다." "너희....." "민지율!! 내 말들려??" 그 때, 우현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승휘는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으로 호출기를 내귀에 바짝 대줬다. "너.. 가승휘랑 바람나면 죽는다!! 진짜 안돼!!" 우현이의 말에 승휘는 욕을 하며 호출기를 끄려했다. 하지만 그 전에.. 재준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쪽 호출기가 먼저 꺼졌다. "우리 잡혔어." 담담한 것처럼 보이던 승휘의 몸이 떨림과 동시에, 호출기가 모래사장 위에 떨어졌다. 잘못들린 것이길.. 겁에 질린 내게 환청이 들린것이길 바랐건만.. 딱딱하게 얼어붙은 승휘의 표정에서 모든것이 진실임을 느낄 수 있었다. 우현이와 재준이가.. 잡혔다. 순간 뭐에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승휘야.." 내가 이름을 부르자 멍한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한다. 항상 모든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승휘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눈물을 참으며, 그의 한쪽 팔을 잡았다. "돌아가자." "....." "우리.... 그만하자." 정답이 나와있는 문제였다. 재준이와 우현이까지 잡힌 상황에서 우리가 더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이렇게 둘이 도망칠 거 였다면.. 처음부터 난 이 위험한 동행을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넷이 아니라면.. 나 때문에 누가 희생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다. "나 하나면 되는거잖아." "민지율..." "이런 도망... 처음부터 불가능한 거 였어. 나 겁 하나도 안나니까 늦기전에 돌아가자." 불행이 시작됐을 때 떠올랐던 빨간해가.. 이번엔 바다에 잠겨가고 있었다. 애초부터 허락되지 않은 반항의 끝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현이와 재준이 생각에, 금방이라도 풀릴 듯한 다리를 겨우 바로 세웠다. 그리고 한걸음을 뗐을 때 승휘가 강한힘으로 내 팔을 잡았다. 승휘가 팔을 잡음과 동시에, 겨우 참고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모래위로 떨어졌다. 나는 목이 멘 상태에서 승휘를 향해 낮게 말했다. "이제 그만해도 돼." "민지율... 너 지금 가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고 하는 말이야?" "알아.." 힘없는 내 대답에 한숨과 함께 내 손을 꽈악 쥐는 승휘. 맞잡은 두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직접 겪어보진 않았지만 나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KG가 얼마나 무서운 기관인지.. 나를 제거하라는 말이, 녀석들을 잡아두기 위한 빈말이 아닌것은 알고 있다. 그들에게 내가 거슬리는 존재라면 가차없이 죽일 것이다. 녀석들을 더 완벽한 킬러로 키우려면 '민지율' 이란 존재는 해가 되니까. "그런데, 내가 널 보낼 것 같아?" "내가 안가면.. 재준이랑 우현이는? 너까지 걸리면?" "....." "아무것도 장담 할 수 없으면 이번만큼은 니가 결정내리지마! 죽어도 내가 죽어! 넌 상관마!!" 결국엔 소리를 질러버렸다. 안그래도 승휘는 승휘대로 머릿속이 복잡할텐데.. 난 또 어린애처럼 소리부터 지르고 말았다. 역시나 조금씩 어두워져가는 승휘의 얼굴. 후회감이 들기도 전에, 지금쯤 어떻게 되어있을 줄 모르는 두 녀석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죽어도 상관말라고?"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야?" 승휘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나는 애써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너희가 했던 모든 일들... 나를 위한거였다지만 정작 나는 그것 때문에 하루하루를 죄책감에 살았어!!" "죄책감 같은거 가질 필요......" "나 이런애야! 너희가 무슨짓을해도 고마운줄도 모르고 내 맘 불편한 것만 알아.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거고..." "비꼬지마. 고마우라고 한 짓 아니야." "왜 너희만 다쳐야돼? 왜 난 다치는 너희 지켜만 봐야되는건데!" "진정해." "죽든살든.. 이제 다 내가 짊어질거야." 내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자, 승휘가 더욱 손을 세게 잡았다. 나는 그런 승휘를 뿌리치려 팔에 힘을 줬다. 재준이와 우현이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마저 내 뜻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승휘가 원망스러웠다. 지금 내가, 제 발로 들어가는 것 빼고 다른 길이 어디있단 말인가. 승휘는 머릿속이 복잡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그런 승휘에게 재촉하듯 말했다. "너랑 말다툼할 시간없어. 한시가 급해. 내가 안가면 우현이랑 재준이......" "지금 당장 안죽여." 당황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흔들림없는 눈을 한 승휘가 추우니 어디든 실내로 들어가자며 작게 말하곤 나를 자신쪽으로 끌어당겼다. 다시 한번 억지를 부리려는 날 말린 건, 승휘의 젖은 목소리였다. "고집 그만부려! 이재준, 정우현 살려놔도 니가 죽으면 다 끝이야." "........" "말했지, 니가 아니라 우릴위해 살라고." "........" "니가 죽으면.. 나도 죽어." Writer. 홍양 55. 겨우 안정을 되찾은 후.. 승휘는 둘이서 쓰기엔 약간 넓은 룸을 잡았다. 단둘이라 뻘쭘했던 모양인지 KG에 아는 에스퍼들에게 연락을 해보겠다며 밖으로 나가는 승휘. 덕분에 나는 혼자서 테라스에 섰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자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으나, 녀석들을 생각하자 도로 무거워졌다. 승휘의 말로는 우리가 나타날 때까지 녀석들을 건드리지 않을거라고는 했지만.. 갖은 잔인한 수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유리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자 정신이 번쩍 든다. "어~ 자기야!!" 그때.. 건물아래 모래사장 쪽에서, 코를 뚫어주고 싶은 충동이 이는 강력한 콧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복잡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는.. 내가 위에서 쳐다보고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듯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아 멜로영화 한편을 찍는 중이었다. "자기야.. 나 노무 쭈어.." "오우.. 우리 자기 추워쪄여?"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쌍의 바퀴벌레 커플의 추태에 헛구역질이 나올것만 같았다. 어째서 혀가 반토막인거야!! "자기! 내가 따뜻하게 입고 나오랬잖아요! 속상하게 참!" 그 몹쓸 장면을 나는 꿋꿋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단 한번도 연애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어려서는 재준이가 내 옆에 남자를 얼씬도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고 좀 커서는, 내 옆에 항상 재준이가 옆에 있어서였는지 웬만한 남자는 눈에도 차지 않았다. 그러니.. 우현이와 승휘가 쌍으로 날 좋다고 하는 이 상황이 어색하고 불편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질투인지, 아니면 단순한 화인지 모를맘으로 그들의 애정행각을 지켜보던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쪽으로 가지.. 짜증나게..." 내 말이 끝나자마자 두 남녀는 약속이라도 한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바닷가쪽으로 향한다. 점점 멀어져가는 두남녀... 막상 가니 심심함이 밀려온다. 나는 이만 안으로 들어갈까 하다, 승휘가 돌아올 때 까지만 두 남녀를 지켜보기로 했다. 둘은 나란히 앉아 모래성 비슷한 걸 쌓고 있었다. 서로를 보고 깔깔깔 웃기를 수차례... 아무래도 둘은 날 약올리려 작정을 한 것 같았다. 뭐가 저리도 신나는 걸까? 새삼 참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아니 에스퍼들에겐 마음을 주고 받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데 어째서 저들은,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걸까? "꺄하하하~" 이번엔 까무러칠듯 웃으며 나잡아봐라를 하고있다. 분개한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속삭였다. "바다에나 빠져라." 내가 말을 끝냈을 때, 잘만 뛰던 남자가 휘청거리더니 한쪽발이 바다에 빠진채로 허우적댔다. 얕은물임에도 불구하고 허우적대는 남자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여자. 기가막힌 우연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에라, 같이 빠져라." 장난스럽게 던진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자가 바다에 뛰어들더니 같이 허우적댄다. 쌤통이다. 믿을 수 없을만큼 내 말에 따라 움직이는 커플한쌍. 그러나 허우적대는 시간이 길어지자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내 말이 씨가 된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에서였다. "물도 안깊구만 지금 둘이 뭐하는거야! 저럴땐 남자가 여잘 데리고 나와......" 내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금 전까지 허우적대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여자를 안아들고 바다 밖으로 빠져나온다. 기력이 빠진 듯한 둘은 모래사장에 벌러덩 눕는다. 우연치고는 여러번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말그대로 우연이겠지만... 나는 시험을 해볼겸 말했다. "왼쪽으로 가." 약 1분후.. 그들은 거짓말처럼 왼쪽으로 걸어갔다.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내 말이 들리기라도 하는건가 의심해봤지만 그러기엔 그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오른쪽....." 내 말을 듣기라도 하는건지 이번엔 오른쪽으로 향한다. 계속되는 우연의 일치.. 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입술 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헤어져." 저렇게 행복해보이는 연인에게는 가능해보이지 않는 말이었다. 머릿속 계산도 거치지 않고 나온 내 말에.. "야! 니가 여길 오자그래서 바다에 빠진거잖아!!" "너도 여기 좋다며!!" "내가 언제 좋다그랬어!! 난 하와이가 좋다 그랬잖아!! 이게 뭐야!!" 별것도 아닌 일에 갑자기 언성이 높아진 두 남녀. 얼마 안있어.. 그들은 등을 돌려버린다. 그리고 서로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나는 테라스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약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대로는 안되겠단 생각에 용기를 내 혼잣말을 했다. 불길한 느낌에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 식은땀이 났다. "다시 만나." 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둘은 다시 서로를 돌아본다. 영화와도 같은 두남녀의 재회장면에, 불길한 느낌은 현실이 되었다. "자기를 뒤돌아보는 시간이라도 좀 가지지 그래? 수백명을 위험으로 몰아넣고도 너만 위험에서 한 발 빠지면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나?" ......... "모든 불행이 너로부터 시작된다. 니 뜻대로 주변을 휘두르니 그 아픔이 보일 리가 있나. 내 말 명심해. 넌 신을 모실 자격따윈 없어. 너 자신을 돌아보란 말이다, 너 자신을." 불현듯 생각난 말. 언제나처럼 맞곤 했지만 나에겐 없었던 예지력.. 그럼 예지력이 아닌 다른 힘이 있다는 소리였는데 어째서 난 다른 능력에 대해선 생각도 해보질 못했던 걸까? 내뜻대로 주변을 휘두른다는건..... 설마... 내 마음대로 남을 움직인다는 걸 의미한걸까? "추운데 여기서 뭐해." 딱딱하게 얼어붙은 내 뒤로 승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겁에질린 표정으로 뒤돌아봤다. 표정을 읽은건지, 승휘는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를 쓸어 내리며 말한다. "너무 걱정하지마. 애들 괜찮대.." "........" "KG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도와준댔으니까 일단 옷입고 나가자." "승휘야......." "괜찮아. 믿을만한 사람들이니까." 승휘는 내말을 듣지도 않고, 자신의 점퍼를 내 어깨위에 놓으며 먼저 밖으로 나갔다. 나는 녀석의 뒷모습마저 사라지자 마자, 기다렸단 듯 침대위에 풀썩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불길한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오한마저 드는 것 같았다. 얘들아.. 난.. 대체 뭘까? 지금까지 난 대체 무슨짓을 하며 살았던걸까? -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밖으로 나갔을 때... 승휘는 내 팔을 이끌고 웬 승용차 앞에 섰다. "웬 차야?" 내 물음에 식당안에 있는 아저씨를 턱끝으로 가리키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빌렸어. 하루만... 차에 대한 기억이 다시 떠오르면 찾아오겠지." "........" "지금은 그런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일단 타." 승휘의 능력이 새삼 놀라워지는 순간이었다. 도난차량에 탄다는 느낌에 나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조수석 위에 올랐다. 반면에 승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시동을 걸었다. 나는 그런 그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너 운전은 할 줄알아? 면허증도 없잖아." "이것저것 따지다가, 두놈 죽는 꼴 볼래?" 승휘는 단호한 얼굴로 답한 뒤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생각보다 노련한 손놀림이었다. 난 녀석을 믿기로 하고, 지친 몸을 뉘였다. 그러자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재준이와 우현이에 대한 걱정을 이긴 건... 나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저기..." 내가 조심스럽게 녀석을 부르자 핸들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개를 한번 끄덕인다. 나는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녀석에게 물었다. "너... 기억을 조종할 때.. 사람들의 머릿속이 다 보이는 거야?" 난 내 능력이 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녀석은 어떨까 해서 물으면 승휘는 지금 이 상황에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라는 표정을 한채 건성으로 대답한다. "보이는 기억은 일부고 거의 빼내는 거지. 그래서 힘든거고.. 안전벨트 매." "........" 내가 아닌 다른 에스퍼들은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걸까? 적어도 자신의 능력을 잘못알고,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며 살진 않았겠지. 나는 얼른 안전벨트를 매며 다시 한번 물었다. "기억들이 어떻게 보이는건데? 글로.. 아니면 영상으로?" "민지율... 그런건 나중에 물어볼래?" 재준이와 우현이가 잡힌 마당에, 쓸데없는 걸 물어본다는 듯 승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지금 우현이와 재준이를 빼내는 게 급선무인데, 안그래도 승휘는 긴장상태일텐데... 관두자. 내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창문쪽으로 돌리자 승휘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대답해줬다. "파노라마.. 들은적 있지?" "파노라마?" "죽기 직전에 지금껏 살아왔던 인생이 눈앞에 한번에 펼쳐지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사람의 기억이 눈앞에 펼쳐져. 난 그 기억들을 편집하는거고." "......편집.." "응.. 편집. 앞뒤가 맞게 연결해야 그 사람도 덜 혼란스러울테니까, 한번 기억을 건드리기 위해서는 책임감이 필요해. 그게 그 사람에 대한 예의고.." 내 예상과는 다르게, 기억조종이라는 게 쉬운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저 지우길 바라는 기억만 쏘옥 골라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승휘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이상한게.. 머릿속에 나쁜 기억들만 가득 차있어. 좋은 기억은 너무 적고..." "......." "그래서 내가 기억을 지울땐.. 그 나쁜 기억들이 죄다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 "그 사람은 기억이 없겠지만.. 난 평생 그 아픈 기억들 다 끌어안고 살아야돼. 그게 나같은 메모리컨트롤 에스퍼들의 숙명이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메모리 컨트롤이라는 근사한 능력에, 그런 아픔이 있을 줄은.. 그래도 다행인건.. 승휘는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됐을테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책임감.. 자신의 능력에대한 책임감도 있었다, 녀석은. 하지만 난 어떤가. 만약.. 내 능력이 예지력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게 초능력의 일종이라면, 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며 산걸까. 내말대로 맞아들어가는 현실이 예지력인줄만 알고 살아왔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KG가 아니었다면 난 평생, 다른사람의 기억따위 건드리는 일 없었을거야." "......." "썩 유쾌한 능력이 아니거든. 특히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기억을 내 손으로 지워야할땐.. 죽을만큼 괴롭고." 위로의 말은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금은 내 마음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다. 승휘는 내가 자는 줄 아는 모양인지 조용히 운전만 했다. 차안에 적막감이 흘렀다. 그 순간.. 번뜩하고 내 머릿속에 떠오른 영상. 영상안에서.. 나란히 앉은 재준이와 우현이가 손목에 수갑을 찬채로 어두운 곳에 앉아있다. 거기까지에서 끊기자 나는 다시 한번 정신을 집중한 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번엔.. 재준이와 우현이 말고도, 정면에 앉아있는 감독관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언제봐도 두렵고 끔찍한 모습이었다. "민지율..." 내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는 걸 알아챈 승휘가 한 손으로 날 흔든다. 나는 그런 승휘의 손을 뿌리친 채 다시한번 집중했다. 감독관앞에는 까만 총이 놓여져 있었다. 흐릿해서 잘 보이진 않지만 녀석들을 협박하고 있는 장면이 분명했다. 불안한 느낌에 주먹을 꽉 쥐었다. "너 왜그래!! 눈떠!!" "......" "민지율 너 어디 아파?" 승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아낸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승휘야.." "악몽꿨어? 불안해 하지 말랬잖아! 괜찮다고!" "감독관이 자살했어." "......." "총으로 머릴 쐈어.." 내 말에 딱딱히 굳어지는 승휘의 표정.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린 말에 눈물 한방울이 툭.. 떨어졌다. 두려움에 몸이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째서 내가 그런말을 한건지... "민지율.. 너 지금 무슨 말을..." "죽었어, 감독관이." 분명히 내가 본 장면에서 감독관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재준이와 우현이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끊임없이 감독관이 죽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넣으며 조금더 디테일한 상황을 꾸며냈다. 승휘는 두려워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가만히 나를 안았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애쓰지 않아도 돼. 예지력이 없다 그래서.. 니가 소중하지 않은게 아니야." "....." "보이지 않는 미래를 억지로 만들어 낼 필요없어. 니가 아파하면.. 힘든 기억들 다 내가 지고 갈테니까 그런 생각 하지마." 승휘는 내 말이, 이 상황에 뭐든 도움이 되고 싶은 전직 예지력에스퍼의 잡담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다른 변명도 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승휘의 바지주머니에서 빨간불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승휘는 품안에 날 떼어놓고 놀란 눈으로 호출기를 쳐다보다 작게 욕을 한다. 나는 눈물을 닦아내며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 "누구야?" "KG 본부... 이재준, 정우현을 데리고 딜을 할 모양이야." 승휘는 내가 제지하기도 전에, 입술을 깨물며 호출기를 받아들었다. 소리를 크게 설정한 덕분에 내 쪽까지 들려왔다. "가승휘!! 내말들려??" 감독관이나 KG관계자의 목소리가 들릴 줄 알았건만 잔뜩 흥분한 재준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우리둘은 놀란채로 호출기에 귀를 갖다댔다. 재준이의 거친 숨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듣고 있으니까 말해. 그쪽에서 원하는 게 뭐래." "씨발, 감독관이 죽었어...." 재준이의 말을 듣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눈앞이 흐려지고 손이 덜덜 떨린다. "우리가 그런거 아니야.. 자살이야. 지금 정우현은 패닉상태고 니가 이쪽으로 와. 일단 정우현데리고 밖으로 도망칠게. 감독관놈한테 열쇠있으니까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같다. 창고쪽 담장있지?" "......." "가승휘! 듣고 있어?" 승휘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으로 날 뚫어져라 쳐다봤다. 녀석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처음보는 눈빛이었다. Writer. 홍양 56. "알았어, 금방갈게. 잘 따돌려.." 한참동안 나만 바라보던 승휘가 시선을 거두고 다시 핸들을 잡았다.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는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50 대 50 이었다. 내말대로 감독관이 죽어버릴 거라는 확률. 덧붙여, 마지막 시험이기도 했다. 내가 미래를 예지했던게 아니라 내가 생각한대로 된거라는 것에 대한... 결국은 예지가 아니라 내가 남을 조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 모든것을 다 깨달아버린 내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고 있자 승휘는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재준한테 다시 보라 그래야겠다." "......" "이래도 정말 니가 예지력이 없는건지.." 아직도 내 능력을 예지력으로 믿고 있는 승휘가 엑셀을 세게 밟았다. 차가 총알마냥 빠르게 움직였다. - 승휘는 차를 KG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두고 자신의 점퍼를 내 머리위로 씌운다. 그리고 초등학생에게 주의를 주듯 단호하게 말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있어. 이재준, 정우현 데리고 올테니까." "같이 가." 불안한 마음에 녀석의 소매를 잡자 승휘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여기 있다가, 내가 10분안에 안오면..." "......." "뒤도 돌아보지말고 도망가." 승휘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떼어놓으며 성큼성큼 걸어간다. 나는 급히 안전벨트를 풀며 차 밖으로 나왔다. 승휘가 문 닫는 소리를 듣고 뒤돌아섰다. 녀석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나는 녀석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은 했지만 용기를 내 옆으로 다가갔다. "나도 같이가." "민지율..." "살아도 같이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감독관이 죽었다고 해서, 셋이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KG엔 감독관 말고도 녀석들을 감시하는 눈들이 많다. 언제든 다시 잡힐 수 있다. 그걸 알기에 승휘는 나를 떼어놓고 혼자 가려는 것이다. "넌 여기 있어.. 까불지말고." 승휘의 단호한 말에도 나는 눈도 꿈쩍하지 않고 녀석보다 앞서걸었다. 그런 내 어깨를 거칠게 휘어잡는 승휘.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얘기했다. "혼자가 편해. 한시가 급하니까 고집 피우지마." "......" "그 자식들 데리고 올게. 제발 넌 여기 있어." 승휘의 간절한 어투에, 결국 난 한걸음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녀석은.. 내 어깨를 잡던 손에 힘을 풀며 달려갔다. - 1초가 1분마냥 더디게 흘러갔다. 승휘는 약속한 10분을 훌쩍 넘겨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불안한 느낌에 승휘가 벗어주고 간 검정자켓을 손에 꼬옥 쥐며 하느님께 빌었다. '하느님. 만약 제게 남을 내맘대로 조종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면.. 이재준, 정우현, 가승휘.. 세 녀석이 털끝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얼마간 기도를 했을까. 모은 두손에 축축히 땀이 배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녀석들은 한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10분내로 오지 않으면 혼자라도 도망치라던 승휘의 말은... 이 상황을 염려한게 틀림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는 거칠게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 순간..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다시 차안으로 들어가 승휘의 점퍼를 덮으며 몸을 웅크렸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더니 벌컥 조수석 문을 열었다. 제길... 문을 잠근다는 걸 깜빡했어. "....." 숨을 죽인 순간.. "민지율..." "......" "너 괜찮아?" 내 눈앞에 보인건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는 재준이였다. 나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이런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라는 듯,시선을 거두고 뒷좌석 문을 열고 자리에 앉는 재준이. "아, 씨발.. 아프잖아. 너 혼자 막 움직이지 말라고!" 뒤이어 반가운 우현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 수모를 당하고서도 여전히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안심을 하고 있을 때.. 승휘가 어떤 여자애의 손목을 잡고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난 그 여자애가 주아라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우현이가 칩을 제거하기 위해 주아를 만난댔다. 설마..우릴 돕다가 주아마저 위험한 상황에 처한걸까? "아무 열쇠나 주워오긴 했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승휘는 족히 100개는 되보이는 열쇠꾸러미를 뒷자석에 던지고 운전석에 탔다.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물끄러미 뒤를 쳐다보니 재준이와 우현이의 손목에 하나씩 수갑이 채워져있다. 덕분에 둘은 한 몸이 된 듯 했다. 짜증 가득한 얼굴로 열쇠를 맞춰보고 있는 우현이와 주아를 뒷자석에 태우고 상태를 확인하고 있는 재준이. "임주아, 너 괜찮아? 개자식들이... 무슨 여자를 그렇게 우악스럽게 끌고가냐." 재준인 분노한 얼굴로 주아의 부은 손목을 손으로 감싸쥔다. 그러는 사이 승휘는 차에 시동을 걸고 격하게 유턴을 했다. 덕분에 짤랑짤랑..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쇠꾸러미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 너땜에 다시 처음부터 맞춰야 되잖아! 차 천천히 몰라고오!" "너 아직 칩 못 뺐다며! 곧있으면 추적당할텐데 들키고 싶냐?" "열쇠 이거 왜 이렇게 많아!" 우현이는 지금 우리 도망치고 있는 상황이란 걸 잊은 듯 했다. 결국.. 나는 녀석들이 돌아왔다는 감동의 눈물을 흘릴 타이밍을 놓친 채, 멀뚱히 앞만 봤다. 아직 주아가 우현이의 칩을 제거하지 못한 듯 했다. "미안하다. 괜히 나 때문에 너까지..." 끊임없이 욕을 하며 열쇠를 맞추던 우현이가 주아를 향해 말하자 주아는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금방이라도 울듯한 얼굴로 재준이를 쳐다봤다. "걱정하지마. 무슨수를 써서라도 너 다치게 안할게." "......" 평소 재준이가 여자들에게 했던 입발린 소리가 아닌,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다. 주아도 그 마음을 느낀건지..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 했다. 하지만 여전히 심각한 얼굴을 한 세 남자, 그 중 승휘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감독관.. 죽은거 확실해?" "응." "자살 맞아?" "......." 우현이가 아까일이 또렷히 생각나는 듯 말을 멈추자, 재준이가 대신 대답했다. "처음 지하고문실로 들어왔을 땐.. 평소랑 다름 없어 보였어. 존나 성질내면서 너희 둘 어디있는지 말하지 않으면 쏜다고 협박하고.. 그런 독한놈인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 우리가 말릴새도 없었어." "......." "어디하나 병신되길 바란적은 있어도, 죽길 바라진 않았는데... 계속 심문하다가.. 먼저 정우현한테 총으로 협박하더라.. 그땐 나도 좀 무서웠는데 이 자식은 눈도 꿈쩍안해. 독한놈이야, 이자식.." 재준인 아직도 생생한 듯,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총을 정우현 머리에까지 갖다댔는데... 이제 끝이다 싶었는데.. 그 자식이 불같이 화를 내다가, 갑자기 말투가 부드러워지는거야. 아 씨발.. 그때 얼마나 소름이 끼쳤는데... 지가 아수하백작이야, 뭐야." 아수하가 아니라, 아수라야.. 지적할 타이밍은 아니란 생각에 입을 꾸욱 다문채 재준이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 머리에 총을 겨누는거야. 나는 저게 웬 쇼인가 했지. 정우현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고...." "빵..." 그 때..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우현이가 총소리를 표현하는 듯..'빵' 하고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우현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총 맞아도 안 죽을것 같던 불독놈이 바로 바닥으로 쓰러지더라. 승휘 니가 그걸 봤어야 되는데..." "........" "죽을만큼 싫었던 감독관놈이 자살하는거 보는 순간.. 난 지랄맞게 눈물이 났고.." "정우현..." "그래도 살겠다고 감독관놈 피묻은 옷에서 열쇠꺼내고.. 호출기 조작해서 관계자 놈들 의심못하게 해놓고.. 주아까지 꺼내서 왔잖냐." 감독관을 죽게 만든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못했다. 감독관의 죽음은 녀석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분명한건.. 그리 유쾌해보이진 않는다는 것이었다. 담담하게 듣고만 있던 승휘는 사이드미러를 만지작대며 재준이를 부른다. "이재준." "어..." "민지율.. 정말 예지력 없어?" 승휘의 물음에 다들 아무말 없이 나를 쳐다봤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냐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없어. 갑자기 그런건 왜 또...." "감독관이 죽을걸 예언했어." "......" "그게 예지력이 아니라면 대체 뭔데." 승휘의 말에 말문이 막힌 재준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는 나지 않아서 재준이의 모습은 볼수 없었지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 쯤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혹시나 들킬새라 승휘의 자켓을 목 끝까지 덮어쓰며 말했다. "그냥.. 찍은게 우연히 맞아 들어간거야. 아무것도 아니......" "타인조정." "........" "그게뭐지?" 재준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쉴새없이 들리던 열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멈췄다. 우현이가 얼어붙음과 동시에 자동차 안에 소음이 사라지자 무거운 적막감이 흘렀다. 핸들을 잡은 승휘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어느새 속력도 많이 줄었다. 타인조정.. 타인조정.. 계속 중얼거리던 재준이도 뭔가 깨달은 눈친지 말을 멈췄다. "언니....." 그 적막감을 깬건 주아의 목소리였다. "타인조정 에스퍼였어요?" "......." "그게 말이돼? 이재준.. 헛소리하면 죽는다." 간만에 듣는 우현이의 진지한 목소리. 나는 이 순간이,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을만큼 창피하고 괴로웠다. 승휘는 인상을 찌푸리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고 재준이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타인조정... 왜 그딴게 보이냐? 평생 안보이다가.. 오늘 왜 이렇게 또렷히 보이냐..미치겠네.." "......." "내 눈에 보인다는 건, 민지율 니가 능력을 자각했다는거잖아." 재준이가 다그치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녀석 또한 혼란스러움에 그런거겠지만 서운한 마음이 밀려왔다. 지금 그걸로 인해 가장 괴로운 건 바로 나였다. 내가 말한 모든게 현실이 되어버릴까, 말 한마디도 제대로 꺼낼 수가 없는데.. 녀석들 마저 몰아부치면 난 어쩌라는 걸까? "지율이 니가 설명해봐. 나 무식해서.. 타인조정 그런 뜻 몰라." "......." "그게 뭔데?" 타인조정.. 말그대로 이건만.. 재준이도 그 뜻을 알고 있는 듯 했지만 잔인하게도 내 입으로 듣길 원하는 눈치였다. "주아가 위치추적 칩 제거해주면 어디로든지 데려다 줄게, 어디 가고 싶어... 민지율?" 그때, 이야기의 맥을 끊으며 우현이가 나를 향해 물었다. 재준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우현... 지금 그딴 얘기 할때 아니........." "멀면 멀수록 좋은데.. 세명은 다른곳으로 옮겨놓고 우리 단둘이 어디 먼곳으로 갈래?" 재준이의 말을 끊으며 장난스럽게 묻는 우현이. 녀석은 늘.. 이런식으로 날 위로하곤 한다. "지금까지 예지가 아니라, 니 상상으로 미래를 만든거였어? 너 언제부터 알았던 건데?" 하지만 재준이는 그냥 넘길 생각이 없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걸까... 지금까지 내가 봤던 모든 미래는 내가 꾸며낸 것이었을까? 내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그것이었다. 이제껏 예언했던 모든 불길한 일들은 내 상상이 빚어낸 것이라는건.. 그건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자 승휘가 말했다. "많진 않지만 타인조정 에스퍼들을 본적이 있어. 타인조정에는 기본적으로 예지력이 필요해. 예지력에스퍼 만큼은 아니지만.. 이재준 니 눈에 안보였던건 예지력이 완벽한 상태가 아닌, 부수적인 능력이어서 안 보였을테고..." "........" "민지율이 꾸며낸거 아니야. 다만 눈에 보인 미래를 민지율 임의로 조정할 수 있을 뿐이지." 승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까지만해도 당황한 듯 보였던 녀석이.. 평소처럼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난.. 녀석의 말을 듣자마자 안심이 됐다. 불길한 미래가 내 상상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건 불행중 다행이었다. 승휘는 창문을 반쯤 내리며 습관처럼 담배를 입에 물더니..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응?' 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녀석은 내게 준 자켓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며 물었다. "감독관 자살은.. 단순히 미래를 본거야, 아님..." "........" "니가 만든거야?" Writer. 청몽채화 57. 조수석 시트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눈을 꼭 감아버렸지만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것만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이미 말라버린 입술을 움직였다. "자살시켰어." 작은 목소리였으나, 놈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다. 내 대답에 갑자기 차가 끼익 멈춰섰다. 승휘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역시 지금 상황에 대해서 자기도 많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걸까. 아무렇지도 않았던 게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었던 거겠지. "지율아...." 재준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나는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친구들끼리 팔짱을 낀 채 거리를 걷고 있는 여고생 무리가 보인다. 아무 근심걱정 없는 듯이 이야기를 나누며 까르르 웃어대고 있다. 저 아이들의 고민을 뭘까. 성적과 연애, 또는 가족... 그 정도일까. 적어도, 우리처럼 초능력자를 개처럼 취급하는 KG에서 도망치는 게 목적은 아니겠지. "내가 죽인 거야." 이상하리만치 나는 담담함을 꾸며내고 있었다. 오히려 당황하는 건 놈들 쪽이었다. "미래가 보였어. 감독관이 앞에 총을 두고 너희들을 협박하고 있었어. 단지 그것뿐이었어, 그 사람이 죽는다는 영상은 보이지도 않았어. 그래도 난 승휘한테 꾸며서 말했어. 감독관이 자살 했다고. 그리고 그 말대로 실현됐어. 그게 다야. 그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야. 내가 죽였어." 쉽게 깰 수 없을듯한 침묵이 우리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제껏 다 내 상상이 만들어낸 일이었어. 별 거 아닌 사고로 끝날 수 있는 문제들도, 오히려 내 쪽에서 지레 짐작하는 바람에 일이 더 커지기만 했던 거야. 내가 입 밖으로 말을 내뱉으면, 그게 무슨 일이든지 다 이루어져. 나도 미치겠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혼란스러워서 죽겠어." 기를 쓰고 대범한 척 하고 있었지만 점점 감정이 울컥이며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실로 무서운 능력이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만큼. 차라리 벙어리가 되면 편할 수 있을까. 그렇게되면 모든 일이 순리대로 흘러가는 걸까. 예지력으로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좌절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겪어보니 내 뜻대로 운명이 흘러가는 건 더 끔찍했다. "그거 알아....?"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처럼 평범해지고 싶다고 몇 천 번을 말해봤자, 그런 바람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 능력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사람을 조정하는 능력이니까 그리고 이미 운명은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상황의 한계치를 넘어버렸으니까. "너희들은 원하지 않았지만 사람을 죽여야 할 수밖에 없었지." 그런 너희들을 보면서 나는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었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난 내 의지로 사람을 죽였어." 뒷자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준이의 버릇이다. 놈은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부딪히면 자신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리곤 했다. "난 이제 완벽한 살인자야." 왜 조금 더 일찍 알아채지 못한걸까.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될 수 있었는데. 왜 약한 척 하면서 뒤로 물러서서 너희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만 한 걸까. "나도 내가 무서우니까, 굳이 다들 괜찮은 척 하지 않아도 돼." 우현이도 당황한 모양이다. 뒤에서 계속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승휘가 건네준 자켓 속에 내 몸을 깊게 파묻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5분 48초." 텅 빈 적막감 속에서 승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뜬금없는 말이었다. "슬슬 우리 탈출한 거 알아낼 시간이야. 속력 높인다. 도하진이 진두지휘 할 거야. 일 처리는 빠른 여자라 안심할 수가 없어, 어떻게든 정우현 손목에 있는 칩부터 빼 봐." 단호하게 중얼거린 승휘는 무서울 정도로 속력을 높이며 차를 출발시켰다. 마치 그 전까지 내가 고민하며 이야기한 내용은 싸그리 무시해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어이없는 건, 그 와중에 내 눈 앞에 종이 쪼가리를 내밀며 헤벌쭉 웃는 우현이의 반응이었다. "야야, 읽어봐, 읽어봐." 눈으로 재빨리 우현이가 종이쪽지에 적은 내용을 보았다. [정우현과 민지율은 서로 너무 사랑해서 결혼한다.] ............설마.... 방금 전까지 부시럭대던 이유가 이것이었단 말인가. 나는 무서워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태연하게 종이에다가 이딴 말을 쓰고 있었다니. 재준이는 우현이의 행동을 다 보고 있던 모양인지, 그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이 새끼야, 지금 장난칠 때냐?" "아!! 왜 때려, 장난 아니란 말이야, 그리고 나 이제 확실하게 하겠는데 KG에서 나온 이상 나 이제 니들보다 낮은 에스퍼 아니거든? 상관이라고 니들 모실 필요 없단 이야기야. 그러니까 함부로 때리지 마. 이제 나도 안 참는다, 절대로." 딱히 우현이가 승휘와 재준이를 상관으로 대접해준 적은 없는 듯 했지만 나는 그냥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 그럼 우현오빠!! 나도 이제 오빠 말 들을 필요 없는 거예요?" 이런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듯, 주아가 재빨리 우현이에게 물었다. "오빠가 나한테 시켰잖아요. 무조건 윗사람 말에 복종해야 된다면서 맨날 식당에서 일부러 진혁이 오빠랑 나랑 붙여놓고. 난 재준이 오빠랑 밥 먹고 싶었는데, 재준오빠 옆에 가면 혼낼 거라고 협박하구. 재준이 오빠한테 이르면 그 땐 더 혼낼 거라고 막 뭐라 그러고. 재준오빠가 맨날 물어봤단 말이예요, 진혁이 오빠랑 사귀는 거 아니냐면서. 내가 얼마나 곤란했는 줄 알아요?" ........ 이번만큼은 나도 우현이의 장난을 옹호해줄 마음이 없었다. 놈은 정말 유치하고 치졸한 방법으로 재준이와 주아의 아름다운 사랑을 방해하고 있었다. 놈에게는 한낱 장난이었을 저 일로 인해서... 주아는 얼마나 난감했을 것이며, 재준이는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을까. "야, 임주아!! 너 그걸 말하면 어떡해!! 내가 니 윗사람인 거 잊었냐!!" "이제 그런 거 상관 없다면서요!!!" "야, 정우현, 이 새끼 너 이리와 봐. 마침 잘됐다. 수갑으로 묶여있어서 도망갈 틈도 없네. 뭐? 그래놓고는 주아가 진혁이를 좋아해서 너한테 상담을 했다고?? 야, 이 미친놈아, 재밌었냐? 왜 애한테 협박을 해, 왜!!!!" "이재준, 내 말 좀 들어봐!!! 난 그냥 너희들의 사랑을 더 견고하게 해주기 위해서!! 악!!! 야, 잠깐 좀 있어봐!! 야, 원래 시련이 있어야 사랑이 더 강해지는 거야!!!" 뒷좌석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할 정도로 정신 사나웠다. "민지율." 시끄러운 잡소리로 어지럽혀진 그 난장판 속에서, 승휘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니가 타인조정 에스퍼든, 예지력 에스퍼든, 에스퍼가 아니든... 넌 그냥 민지율이야." "..............." "우린 끝까지 널 지킬 거야. 그러니까 불안해할 필요도 없고 겁먹을 필요도 없어. 고작 니 초능력 하나로 널 무서워할 거면, 지킨답시고 이제껏 지랄하지도 않았어." 거짓말처럼,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오늘 하루동안의 마음고생이 모두 그 눈물 한 방울에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민지율, 너 앞으로 마스크 쓰고 다닐 각오해. 정우현 이 새끼가 이제 너한테 어떤 말을 시킬지 몰라." 한 손으로 힘들게 우현이 조지고 있던 재준이가 큰 소리로 나에게 외쳤다. "민지율!! 우리 애기는 몇 명 낳을까!!? 나는 넷이면 딱 좋다!!!" 맞는 중에도 불굴의 의지로 내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우현이. 왜... 이 놈들은 내 앞에서 언제나 대책없이 밝기만 한 건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살인자라, 지옥에 떨어질 게 걱정된다면 마음 놓고 있어." 운전 중이던 승휘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다 같이 지옥에 떨어져줄 테니까." "............" "자의든, 타의든.... 우리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어. 너랑 똑같은 살인자야." "............." "......어디가서 내세울 자랑은 아니겠지만." 승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그의 눈이 그렇게 위로가 된 건 처음이었다. * 수상하리만큼 KG는 우리들을 추적하지 않고 있었다. 한바탕 전쟁이 될 거라던 승휘의 예상이 빗나가고 있었다. 수많은 열쇠들 중에서 맞는 열쇠를 찾아 재준이와 우현이 손에 연결된 수갑도 풀었다. 끝없이 달려온 모두의 심정을 조금은 진정시킬 겸 우현이 손목의 위치추적 칩도 뺄 겸, 우리는 한적한 공터에 차를 세웠다. 주아와 우현이를 앞에 두고 재준이, 나, 승휘가 그들을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 그럼 시작할게요." "..... 근데 주아야, 이거 확실한 거야? 이거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 건데?" 매우 불쌍한 표정으로 눈썹을 찍 찌그러뜨리고 묻는 우현이. "잘못하면 신경계 건드려요. 그럼 오빠 팔 마비되는 거죠, 뭐." 그리고 너무나 태연하게 대답하는 주아.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아서 더 무서웠다. 하지만 우현이 손목의 위치추적 칩을 빼는 게 급선무였다. 이런 일로 계속 망설이게 되면 KG 사람들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게 된다. 언제나 쫒기는 몸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태연한 대답과는 다르게 주아는 많이 불안해보였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사람의 장기를 빼낼 수 있다는 주아의 트레이닝은 완벽한 단계가 아닌 것 같았다. 위험부담이 큰 능력이긴 했다. 잘못되면 사람 하나를 망칠 수 있는 무서운 능력이었다. "걱정말고 배운대로 해 봐. 이 새끼 병신되든 말든 상관하지 말고." 재준이가 주아를 격려해주기 위해 한 마디 내뱉었다. 진심인 것 같았다. 하지만 우현이는 재준이의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피식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오른 팔을 주아에게 내밀고는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어차피 내 손으로 절단해버릴 생각이었거든." "............ 우현오빠...." "니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봐." 주아는 꿀꺽 침을 삼켰다. 불안한 모습을 보이던 그녀가 눈을 천천히 감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 같았다. 우현이는 그동안 본 적이 없는 침착한 표정으로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주아의 손이 우현이의 팔목 위롤 조심스레 매만졌다. 한참 뒤, 눈을 뜬 주아의 손바닥 안에는, 작은 정사각형 모양의 칩이 놓여져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능력에 재준이와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있었고, 승휘와 우현이는 주아의 손에 놓인 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아가 숨을 몰아내쉬며 천천히 칩을 우현이에게 내밀었다. 우현이는 왼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어 손 안에 넣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투두둑,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난 칩이 우현이의 손에서 떨어져내렸다. ".........이렇게 약한 칩 하나 때문에..... 내가... 그동안 KG의 개로 살았네." 만감이 교차하는 듯, 그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고마워, 주아야. 이 은혜 절대 안 잊을게." 우현이의 감사인사에, 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제대로 해냈다는 만족감에 들떠있는 것 같았다. "근데 나 너무 목말라서 그런데, 나 저 구멍가게에 있는 음료수 좀 사다줘." 그러나, 생명의 은인인 주아에게 곧바로 배은망덕한 말을 내뱉는 우현이. "야, 니가 직접 가, 지금 음료수를 사줘도 모자랄 새끼가 왜 이렇게 애한테 일을 시켜." 재준이가 막아보지만.... "아, 사다줘~ 나 사이다 마시고 싶어, 사다줘, 사다줘~" 우현이는 애교로 맞받아쳤다. "아, 그럼 나랑 주아랑 둘이 사올게, 니들은 여기있어." "주아만 보내." "정우현!!!!" "임주아, 빨리 다녀와."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우현이는 애교를 거두고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돌변해 주아를 향해 명령했다. 주아는 무서움을 느낀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 너머의 구멍 가게로 뛰어갔다. "애 괴롭히는 게 취미냐? 아깐 장난인 줄 알았는데 너 주아한테 무슨 감정..." 재준이가 우현이를 향해 본격적으로 화를 내려는 찰나, 앉아있던 우현이가 여유가 넘치는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아한텐 아는 척 하지 마라." "뭐?" "사실 민지율도 모르게 해야되는 건데 아무래도 오래 숨길 자신이 없어서." 무언가를 깨달은 듯 승휘가 인상을 썼다. 우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억양으로 말을 이었다. "칩은 빼냈는데." "............." "오른손 손목 아래부터가 전혀 안 움직여." Writer. 청몽채화 58. 나는 멍하니 우현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자 손처럼 길고 고왔던 우현이의 손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니,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거짓말 하지 마, 이런 일에서까지 장난치면 안 되는 거잖아, 너!!!" 우현이의 오른팔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하지만, 우현이의 말 그대로... 그의 손목은 힘이 들어가지 않은 채 꺾여있었다. 우현이는 왼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내 손에 잡힌 자신의 오른 팔을 빼냈다. "너한테 보여주긴 쪽팔리잖아, 그만해." "....... 진...짜야, 너?" 내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씨익 웃기만 하는 우현이. 승휘와 재준이의 표정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굳어있었다. "미친놈아, 이거 그냥 웃고있을 일이 아니잖아!!!" 재준이는 우현이의 어깨를 휘어잡으며 말했다. "소리 낮춰, 니가 그렇게 사랑하는 주아한테 들린다. 주아가 이거 알면 충격 먹어, 임마. 칩까지 빼줬는데 죄책감 얹어주고 싶진 않아." 재준이는 성질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세차게 걷어찼다. 멀리 날아간 돌멩이가 도로 한복판을 굴러가고있었다. "정우현, 미안하지만 치료는...." 승휘가 망설이듯 말을 이었다. "알아. 치료는 미루고 도망치는게 급선무, 맞지?" 우현이는 중간에 승휘의 말을 자르며 매력적으로 웃어보였다. 어떻게 저 놈은 이런 결정적인 일을 맞이하고서도 웃을 수 있는 걸까. 평소에는 조그마한 일에도 신경질내고 짜증내고 하고싶은 말 다 했던 주제에... 이런 일에서 그렇게 어른인 척 하지 말란 말이야. 니가 이런 식으로 행동해버리면... 내가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잖아. 우현이의 말에 승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두 사람은 정반대의 성격이지만 가끔 서로의 생각을 꿰뚫어 볼 때가 있다. "나을 거야. 분명히 나아, 안 나을 수가 없어. 이거 마비된 거 아니야. 확실히 나을 거야." 우현이 앞으로 달려든 나는 우현이의 팔을 잡아채고 주문처럼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나, 타인조정이니까 무조건 내 말대로 될 거야." 세 남자는 조용히 내 행동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미칠 것만 같았던 내 능력을 내 입으로 들먹이고 있었다. 우현이의 손이 타인조정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라도 안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민지율, 쉿." 우현이는 천천히 나를 감싸안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뒤를 돌아보자, 주아가 음료수를 사들고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빨리 다녀오려고 애썼는지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우현이 오빠, 여기요, 사이다." 우현이는 씨익 웃으며 왼손으로 사이다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놈은 음료수 병을 따지 못하고 있었다. 오른 손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오른 손 마비는 많은 일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주아는 다른 사람들에게 음료수를 나눠주고 있었기에, 그 일에 대해서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우현이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를 돌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승휘오빠, 음료수 뭐 드실래요?" 주아가 승휘 앞에서 비닐봉투를 쫙 펼치며 물었다. 자신이 사 온 음료수 중에서 아무거나 고르라는 뜻이었다. "아아, 난 한모금이면 돼. 정우현 꺼 훔쳐 마실게." 승휘는 여느 때처럼 침착한 모습으로 우현이 손에 들린 사이다 캔을 빼앗아들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캔뚜껑을 따고,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채 다시 사이다를 우현이에게 건네준다. 우현이나 주아 모두를 생각한 현명한 방법이었다. "......... 개새끼, 너 내 꺼 왜 뺏어먹어." 우현이는 어색하게 중얼거리면서도 피식 웃어보였다. "언니, 언니도 하나 고르세요." 주아가 해맑게 웃으며 나에게도 음료수는 권했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마시면 그게 모두 눈물이 되어 나와버릴 것 같았다. 다들 자기가 사 온 음료수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주아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까만 비닐봉투를 재준이에게 맡기고는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난 이제 여기서 안녕할게요. 무사히 도망치면 그 땐 나 걱정안하게 연락이라도 줘요. 나... 재준이오빠랑, 승휘오빠랑, 우현오빠랑, 지율이언니... 다 좋아해요. 어릴 때 KG로 끌려와서 친구도 없었는데 언제나 나 끼워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라도 도움이 돼서 다행이예요." 주아는 작별인사와도 같은 말을 건넸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임주아,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재준이도 뜬금없음을 느꼈는지 인상을 쓰고 그녀에게 물었다. "나까지 있으면 움직이기가 힘들 거예요. 나는 KG로 돌아갈게요." "너 돌았어? 지금 돌아가면 널 죽일 거야!!" "하진언니한테 계속 호출기로 연락이 와요. 내가 계속 있으면 오빠들도 위험해질 거예요." "위험할 거 감수하고 데려온 거야!!!" 재준이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럴 때 보면 저 놈도 남자였다. 평소에 여자를 심심풀이 대상으로 생각하던 놈이 저렇게 성장한 걸 보자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 들어왔다. 장성한 동생을 장가보내는 누나의 마음이랄까. "우리가 단지 정우현 손목에 달린 위치추적 칩만 빼라고 너 데려온 거 같아?" ".............." "네 명이든, 다섯 명이든 위험한 건 똑같아." 주아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우리가 자기를 버릴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차피 죽을 거 각오하고 있다면, 그냥 우리랑 같이 가." "따라....가도... 괜찮은 거예요, 나?" 주아가 우리를 둘러보며 물었다. 두 말 할 것 없는 질문이었다. 주아는 우리에게 있어 버릴 수 없는 귀여운 동생이었다. 덧붙여, 재준이가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기도 했다. 재준이는 자신의 호출기를 꺼내들었고, 다른 이들에게도 손을 내밀어 호출기를 달라는 행동을 취했다. 주아와 우현이와 승휘까지 호출기를 그에게 내밀자, 재준이는 네 개의 호출기를 땅바닥에 거칠게 내던지고는 발로 짓밟았다. "봤지? 더 이상 얽매이지 말자. 이제 우리 해방이야." 네 개의 호출기와, 우현이의 손목에 박혀있던 위치추적 칩이 처참한 모습으로 박살이 나 있었다. 아마 나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감회가 더 새로울 것이다. "이제 빨리 움직이자. 위치추적 칩의 신호가 여기서 끊겼을 테니까 KG가 여기로 올 거야. 어디로든 빨리 가자." 승휘가 급하게 중얼거렸다. "한 번에 세 명씩 동반 순간이동 할 순 없지만 따로따로 능력 사용하면 하루에 두 명 정도는 부산까지 옮길 수 있을 거야. 해외로는 안 나가봐서 모르겠지만." 우현이가 승휘의 말을 바로 받았다. "그래도 그건 일단 여기서 벗어난 뒤의 이야기야. 여기서 시간 끌다가는 잡혀." 승휘는 언제나처럼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며 차에 올라탔다. 우현이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더니 내 눈을 보고 중얼거렸다. "가승휘 옆인 조수석에 앉지말고 내 옆에 앉아." "............" "내 손 잡아줘." 주아의 시야에서 우현이의 손을 치워버리기 위해 주아를 조수석에 앉혔다. 재준이와 승휘에게 상당히 불만이 있는 것 같았으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우현이의 오른 손을 꼭 잡고 있었지만 우현이는 그 감각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딱히 목적지 있는 거 아니면..." ".........." "내가 원하는 곳에 잠깐만 들를 수 있을까?" 우현이는 운전을 하고 있는 승휘를 향해 질문했다. "어디서든 여기서 벗어나기만 하면 괜찮아, 어딜 가고 싶은 건데?" 나도 우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런 말을 꺼내는 자체가 창피하다는 듯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집." * "미안해할 필요 없어, 너도 집에 가고 싶으면 들렀다 가도 돼." "그런 거 아니예요, 오빠. 나는 우리 가족 한 번 보면 거기 계속 있고 싶을 거 같아요. 언니랑 오빠들 따라갈 결심이 안 날 거예요, 그랬다가는 바로 잡힐 거구요." 우현이의 집 앞. 우현이는 대문 가까이에서 서성대고 있었고, 승휘는 집 앞 골목 코너에 차를 주차한 뒤 운전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재준이와 주아의 대화를 들으며 창 밖으로 언뜻언뜻 비치는 우현이의 행동을 보고 있었다. 우현이는 멀리서라도 가족을 지켜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꽤 부잣집으로 보이는 그의 집은 담장부터가 너무 높았다. 그 때, 누군가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슬픈 멜로디의 벨 소리를 듣자마자 승휘가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울렸다. 상대편의 말을 듣던 승휘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잠시만요." 승휘는 차 안에 있던 우리의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통화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뭐야, 저 새끼. 무슨 전화길래 저래?" 재준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제껏 승휘에게 중요한 전화가 오는 걸 보지 못했기에 나도 궁금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나도 승휘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사실, 자리를 비워달라는 재준이의 은밀한 눈빛을 읽은 게 자리를 비워준 가장 큰 이유였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승휘를 찾았지만 놈은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재빠른 놈이다. 승휘를 찾기 위해 한 걸음 발을 내딛었을 때, 흰 교복을 입고있는 한 여학생과 마주쳤다. 아... 우현이와 닮았다. 그 생각을 한 순간, 우리가 지금 우현이 집 앞에 와 있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둘러 우현이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여학생이 다가왔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듯 집 대문 앞을 기웃거리고만 있었다. 여학생은 아무 상관없는 듯 나를 스쳐지나가더니 대문 앞에 서 있는 우현이를 보고 멈춰섰다. "........ 오.... 빠?" 그 순간 진정이 되지 않는 듯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던 우현이의 동작이 멈췄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몸을 돌려세웠다. 아무래도 저 여학생, 우현이의 여동생인 모양이다. 우현이의 눈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지수야........." "뭐야, 오빠 잘 있었어? 살아있었어? 그동안 어디서 뭐한 거야? 오빠!!!" 우현이의 여동생은 그가 어디서 뭘하다 왔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우현이는 동생을 보며 애써 웃음짓는 것 같았다. "......... 수지는?" ".......오늘... 음악레슨 있다고.... 오빠, 어떻게 된 거야? 빨리 집에 들어가자, 응?" "이제 너희들도 벌써 고등학생이네. 더 이뻐졌다." 차라리 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우현이의 표정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수지랑 내가 밤마다 얼마나 오빠 찾아다녔는 줄 알아? 아르바이트 하다 갑자기 사라져서. 돈 벌겠다고 가출한 건가 싶어서 걱정 얼마나 많이 했는데. 아빠 사업 이제 괜찮아졌어. 오빠 없어지고 얼마 안 돼서 제대로 자리 잡았어. 엄마도 맨날 오빠 생각하면서 운단 말이야. 오빠 설마 아빠랑 싸운 거야? 아빠가 맨날 오빠 찾지 말라고 하는데, 그래도 괜찮아. 아빠도 맨날 오빠 사진 보면서..." 우현이의 동생을 울면서도 끊임없이 말을 내뱉었다. 우현이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 그래도 버림받은 건 아니었네." "........ 오빠?" 우현이는 끝까지 울지 않았지만,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오빠 봤다는 말, 다른 가족들한테는 절대 하면 안 돼." "왜? 오빠 돌아온 거 아니야? 빨리 들어가자, 다들 좋아할 거야." 우현이의 동생이 우현이의 팔을 잡아챘지만, 우현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 이제 다신 못 와." "............. 오빠...." "마지막으로 보러 온 거야." 우현이는 씨익 웃으며 왼손으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오빠!!!!!!!!!!!!" 그리움에 사무쳤던 듯한 우현이 동생의 고함소리가 골목길을 물들였다. 그제야 우현이의 눈에서 참아왔던 눈물이 떨어졌지만, 그는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Writer. 청몽채화 59. ※ 승휘시점 정우현은 자기 집 앞을 계속 기웃거리고만 있었다. 자동차 앞 유리로 머뭇대는 놈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뒤로 돌려 지율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애틋하고도 간절한 눈이다. 그렇게나 정우현이 걱정되는 걸까.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그 어느 시절, 지율이가 저런 눈으로 나를 쳐다봐준 적도 있었다, 지율이를 위해 떠났기에, 지율이를 위해 돌아왔을 때 그 사랑이 당연한 듯이 다시 내게 향할 거라고 막연하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그녀의 눈은 내가 아닌 정우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지율이를 놔 주는 일 뿐일까. 지율이를 버리면 지금껏 그녀를 위해 버텨왔던 내 인생은 어떻게 되어버리는 걸까. 나와 사랑을 하고 있는 와중에 정우현이 나타났다면, 지율이의 마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가... 온전히 나의 것이었던 때가 있었다. 감상에 한참 젖어있을 찰나, 휴대폰의 벨소리가 울렸다. 우울한 내 심정을 대변하여 한없이 가라앉는 멜로디로 설정해두었던 기억이 난다. 본래 시끄러운 음악을 싫어하는 내 취향 때문이기도 했다.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다.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걸려온 전화였다. KG라면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기 위해 반항하는 에스퍼들에게 KG의 힘을 전면적으로 내세워 스스로 굴복해버리게 만들곤 했다. "여보세요." 작은 소리로 조잘대던 이재준과 임주아의 목소리마저 끊겼기 때문이 차 안이 조용했다. 까딱하면 휴대폰 너머로 상대방의 소리가 새어나올 것 같아 조심스럽게 통화음을 줄였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 나야. 하진누나다. 피곤에 지친 듯한 목소리였다. 권력과 계급사회에 물들어있는 하진누나가 KG임을 드러내지 않고 전화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만요." 어쨌든 다른 아이들 눈에 띄지 않고 통화를 마치는 게 먼저였다. 차 문을 거칠게 박차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먼 곳으로 달려나가 작은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뭐야? 왜 발신자 표시 제한이야?" 골목길 벽에 몸을 기댄 채 목소리를 죽이고서야 질문을 던졌다.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KG의 공포를 체험하게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예상하고는 있었다. KG가 지금 우리의 상황을 모르고 있을 리는 없었다. 굳이 다른 놈들에게 걱정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 말은 못했지만, 이런 전화는 한 번쯤 받아야 할 절차이기도 했다.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전화가 올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하진누나도 KG의 일원이었다. - 굳이 전쟁, 하겠다는 거야?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거라면... 기꺼이." 누나가 나를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오히려 웃는 누나 쪽이 더 서글퍼보였다. - 지금이라면 없던 일로 해줄 수 있어, 돌아와. 나 지금 KG 매니저 수칙 어기고 전화하는 거야. 쓸데없는 일 만들고 싶지 않아. 적어도 너하고만큼은. 너희들처럼 높은 계급 에스퍼들이 탈출하면 일이 심각해져. 킬러들을 파견할 수도 있다는 소리야. 워너비 3조, 4조... 지금 마구 만들어지고 있어. "우리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어." 몇 사람이나 죽였지만, 아직도 이런 말을 입에 올릴 때면 입술이 가늘게 떨려온다. 나 자신에게 너무도 간절하고 소중했던 지율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 정말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스스로를 향해서 욕해본다. 가승휘, 넌 정말 미친놈이야. 수화기 너머로 하진누나의 한숨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 너희들은 A급 에스퍼들이야. 하급 에스퍼들이 도망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단 말이야. 뛰어난 에스퍼들이 무단이탈하면 남는 건 죽음 뿐이야. 내 말 좀 들어. 나도 더 이상은 막아줄 수가 없어. 지금은 내가 너희들을 풀어서 요양시키고 있는 걸로 둘러댔어. 윗 상관들이 너희들을 찾게 되면 그 땐 두 말 할 것 없이 끝장이야. 평소처럼 정신교육 한 달로 끝나거나 고문실에서 며칠 맞는 걸로 끝나지 않는단 소리야. 하진누나가, 이런 식으로 나에게 사정조로 말하는 건 처음 들었다. - 감독관도, 너희들이 죽인 거니? 그녀는 내내 그 질문을 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 표면적으로는 자살이지만, 삶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사람이고.. 니가 기억을 조작했다면.. "맞아. 내가 죽였어." 하진누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질문에 대한 답을 내뱉었다. 기억을 조작할 때에는 무조건 상대방의 눈을 봐야했다. 감독관은 내가 KG에 진입하기도 전에 죽었으니 기억을 조작할 새는 없었다. 아니, 조작한다고 해도 나에게는 그의 죽음까지 유도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지율이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만큼 바보같은 짓은 없었다. 모든 업보는 내가 짊어지고 가야했다. 다른 이들의 운명을 짊어지고 그 아픔을 감수하는 게 메모리 컨트롤 에스퍼의 숙명이었다. - 역시 능력 자체는 소름이 끼치네. 불독 감독관은 내 형을 죽였고, 지율이의 아버지를 죽였고, 재준이의 어머니를 죽였다. 정우현의 아버지를 꼬드겨 그 놈을 KG로 끌고와 가족과 단절시켰고, 하진누나의 부모님을 약물로 죽였으며 그녀의 남동생조차 때려죽였다. 우린 그를 죽일만큼 증오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의 시체를 보지도 못했으니 그의 죽음을 실감나게 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재준이야, 예전 기억을 잃었을 테니 별 생각은 없다치고... 하진누나나, 우현이는 그의 죽음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 불독의 죽음은 총기오발로 처리했어. 제발 돌아와. 지금이라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게 넘어갈 수 있어. 하진누나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건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나를 쉽게 내칠수만은 없었다. 내가 지율이를 생각하는 것처럼, 누나는 나를 생각할 테니까. 매니저가 에스퍼에게 이만큼의 호의를 보이는 것조차 사실은 규칙에 어긋난 짓이었다. 하진누나로서는 죽음을 결심하고 하는 행동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먼 길을 와버린 것이다. - 보고가 들어왔어. 우현이 위치추적 칩이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고. 주아가 한 짓이야? 하진누나가 보기에는, 우리가 한 짓이 애들 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 주아는 살인병기로 키워진 에스퍼야. 아무 일 없이 넘어갔을 리가 없어. ".............." - 우현이 손 마비된 거 맞지? 너희들 정말 제정신이야? 정우현의 손이 마비된 것도, 이미 예고된 일이었던 걸까. 왜 KG는 본인의 능력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조차 애초에 배제시켜버리는 걸까. "끊어. 전쟁을 해도 좋고, 죽이려고 킬러를 보내도 좋아." - 너희들한테 이길 승산이 있다고 보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릴 해!! 군대가 파견될 거야. 순간이동 조금, 기억 조작 조금, 날씨조종에 카운트, 염력!! 고작 그 정도로 너희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지금껏 너희가 날뛸 수 있었던 건, 너희 뒤에 KG가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야, 그걸 모르는 건 아니잖아!! 하진누나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아무리 지율이의 타인조정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타인조정이 어느 정도의 범위를 자랑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율이에게 타인조정 능력을 쓰라고 요구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지금도 이미 감독관을 죽인 일로 엄청나게 마음 고생하고 있을 게 뻔했다. "한 번만 우리 이해해주면 안 돼? 제발... 우리 그냥 좀 보내주면 안 돼?" 하진누나가 지율이를 죽이라고 한 적이 있어도, 지율이를 신고한 적이 있어도... 그녀는 존경할 만한 여자고, 언제나 내가 감사해야 할 여자다. 그것만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와 우현이, 재준이에게 베푼 하진누나의 호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대담하고 통 큰 계획으로 언제나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면서도, 절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았고, 털 끝 하나 다치게 하지도 않았다. - 너 자신을 어디까지 희생시킬 수 있는 지 말해봐. 하진누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누나를 봐온 이후로 처음이다. - 씨발, 내가 병신이지. 내가 왜 너한테 이런 말을 하고있는 건지 모르겠어. 비상사태로 돌아가는 KG내에서도, 누나는 힘겹게 나와의 통화를 시도했다. - KG와 딜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더 이상 우리와 할 수 있는 거래가 남아있었단 말인가. - KG가 가진 방법은 세 가지야. "..............." - 너희들을 다 죽이던가, 가승휘를 잃던가, 가승휘를 제외한 모두를 잃던가. "그게 무슨 말이야?" - 지금 그대로 너희들이 다 돌아오지 않는다면, 한국 정부는 너희들을 죽일 거야. 하지만 지금 니가 돌아오면, 니가 평생을 KG에 복종하겠다고 다짐하면, KG는 너를 제외한 모두를 다시 잡아들이지 않을 거야. 그들을 평생 포기할 수 있어. 나는 그렇게 윗사람들을 설득할 힘이 있어. 대신 너는 니 삶을 KG에 맡겨야 해. 하진누나는 KG의 총괄매니저였다. 누구보다 영향력있는 인물인 건 틀림없었다. - 그게 싫으면, 넌 지금 민지율 손을 잡고 어디로든 도망쳐. ".............." - 이재준, 정우현, 임주아가 잡히면, KG는 너를 쫒지않고 그냥 놔줄 거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리는 것 같았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재준이를 제외하고, 나와 딜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 정우현은 특별관리대상이었어. 아직도 시험볼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천방지축이지. 그건 사실 이재준도 마찬가지야. 놈이 왜 괴물로 불렸는줄 알아? 뛰어난 능력도 한 몫했지만, 밖으로 나가서 제 멋대로 하고싶은 욕망이 들끓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기 때문이야. 놈들은 너처럼 기계나 개로 살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야. 주아는 말은 잘 듣지만 너무 연약해서 아무데나 마구잡이로 써먹을 수가 없지. ".............." - 그래서 국가는 너를 선택했어. 마치 물 속에서 하진누나의 말을 듣고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몽롱했다. 왜 세상은, 언제나 견딜 수 없는 시련을 나에게 주는 걸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은 없었다. KG가 내게 제시한 선택지는, 오히려 나를 옮아매기 위한 덫과 다름없었다. - 니가 민지율과 떠나겠다면, 어쩔 수 없어. 그냥 니 마음대로 해, 나도 널 포기할게. ".............." - 대신 다른 놈들의 생명을 보장해달라고 말하진 마.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KG 거래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더럽지. 좆같아." 잇새로 나지막히 내뱉는 내 공격적인 말투에도 하진누나는 그저 피식 웃어보였다. - 나는 불독감독관과는 달라. 말을 바꾸진 않을 거야. "............." - 모든 건 니 선택이야. 선택이라고 말한 채 또 다시 빌어먹은 운명은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나도 한 번쯤은, 행복해보고 싶었다. 내가 바란 건 아주 작은 것이었다. 남들이 느끼는 평범한 행복. - KG 감시대가 이미 너희 뒤를 따라붙었어. "............." -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래. 기한은 내일까지야.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왜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거냐고. - 너나, 너를 제외한 모두가 내일까지 KG로 도착하지 않으면, 그 때 너희들은 다 죽어. 니가 그렇게 아끼는 민지율도 예외는 아니겠지. 돌아올거면 감시대 차를 타고 오면 돼. 그게 아니면 지율이 데리고 도망치고. ......... 다른 감독관들이 나를 찾아. 그럼 이만 끊을게. 긴급한 상황이 벌어진 듯, 하진누나는 먼저 연락을 뚝 끊었다. 나는 담벼락에 기댄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미친듯 생각해본다. 인간으로서 느껴야 할 기본적인 감정도, 도덕도, 의지도, 미래도 모두 버렸다. 민지율을 사랑한 죄밖에 없는데, 세상은 이제 그녀마저 놓아주라 말한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한 줌밖에 보이지 않는 하늘을 바라본다. 내가 맡는 역할은 언제나 정해져있었다. "왕자는 정우현, 백마탄 기사는 이재준...." 그럼 나는 지율이 너를 언제나 뒤에서 훔쳐보던 노예쯤 되는 걸까. 혼자서 견디는 건 이미 익숙해졌다. 행복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난 똑같은 상황을 맛본 적이 있었다. 지율아, 대답해봐.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모른 척 널 가져야 돼? 아니면 모두를 위해서 다시 나를 희생시켜야 돼? 나는 이미 한계까지 왔어. 더 이상 그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니가 나한테 얼마나 간절한 존재인지, 도대체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아직 사랑한단 말도 해주지 못했는데, 왜 다들 내게서 널 빼앗으려 하는 거지? "가승휘, 개새끼." 나약한 스스로를 향해 나지막히 욕을 내뱉어본다. 구석진 담벼락 옆에서 답도 없는 질문을 되뇌어 생각해본다. 빌어먹게도, 염치없는 눈물만 끊임없이 흘렀다. Writer. 홍양 60. 천천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우현이. 만감이 교차하는 듯 했다. 지수라는 여동생의 찢어질듯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녀석은 온몸을 떨었다. 그러다 골목을 돌아 나를 발견한다. 초점이 없는 녀석의 눈이 나와 마주친 순간. "하아..." 녀석은 가슴에 응어리진 무언가를 풀어내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다시 여동생이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녀석이 돌아오는 줄 아는듯.. 눈물로 범벅된 얼굴이 기대로 가득참과 동시에, 여동생은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 견제의 눈빛을 보낸다. "오빠, 누구......" "내가 무지무지 좋아하는 여자." "......." 우현이의 대답에, 지수라는 아이는 맑은눈을 들어 나를 쳐다본다. 아무리 남매라지만 녀석과 똑같은 느낌이들어 더욱 가슴이 욱씬거렸다. 지수는 빨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반면에, 우현이는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른 채 말을 이어나갔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모래성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내 마지막 여자니까, 얼굴 잘봐둬." "오빠.... 그러지말고 집에 들어가자, 응?" 우현이는 수지의 손을 힘겹게 떼어내며 대신에 내쪽으로 손을 가져왔다. 힘없는 오른손이 닿자, 나는 녀석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래야 녀석이 덜 비참해질 것만 같았다. 이미 마비가 된 손은 냉기마저 돌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난 후에, 내 얘기 웃으면서 할 수 있을 때..." "......." "그 때 가족들한테 말해줘. 오빠 마지막 여자 얼굴이 어땠었는지.." "오빠..." "지금 고생하고 와서 덜 예쁜데, 원래 진짜 예쁘거든. 정말 착하고 좋은 여자라고... 그렇게 전해줘." 지수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을 때, 정말 눈 깜빡할 새에 지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빠!!!!!!!!!" 꽤 멀리서 지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울음소리라기보단 발악에 가까웠다. 그렇다.. 지수가 사라진게 아니라 우현이와 내가 순간이동을 한 것이다. 우현이는 쓰러지듯 주저앉아, 담벼락에 몸을 기댄채 고개를 떨군다. 그리고 혹시나 동생이 있는 저곳까지 자신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라도 할까 왼손으로 입을 막은 채 서러운 울음을 토해낸다. 언제나 당당하고 거침이 없던 우현이는, 무너지는 것도 한 순간이었다. 감정의 들고남이 심한 녀석이니까 당연했다. 녀석은.. 행복할때는 한없이 행복하다가도, 괴로운 순간이 오면 밑바닥에서 부터 끓어오르는 괴로움을 맛봤다. 하- 얼마쯤지나야 이 악몽이 끝이날까... 내일 아침이 밝으면, 재준이가 안 일어나고 뭐하냐며 날 흔들어 깨워줬으면 좋겠다. 밥먹고 학교가자고,숙제해놓은 거 빠뜨리지 말고 책가방 싸라고, 승휘랑 우현이랑 내기농구를 하기로 했으니 자신을 응원하라고. 재준아 내일이 되면 나 깨워줘. "......" 우현이쪽으로 가려던 손이 허공에 멈췄다. 타인조정. 그 엄청난 힘을 가지고도 난.. 이 아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불길한 미래를 바꾸는 것도 예지력이 허락할 때만 가능한 얘기였다.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KG 관계자들을 감독관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없앨 수 있었지만.. 더이상 사람들을 죽이는데 힘을 쓸 용기도 없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깨달은거지만 타인조정은 사람의 감정까지는 가지고 놀 수 없다. '정우현.. 슬퍼하지마. 마음 아파하지마..' 따위가 통할 수가 없단 얘기였다.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능력을 지닌 승휘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승휘는 도려낸 나쁜 기억들을 죄다 자신의 머리에 넣은채 살아가야하는 것처럼 나 역시 남을 위해 바꾼 미래들까지, 죄다 내 몫의 죄책감으로 느끼며 살아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힘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도 함께 느낄거고.. 그건 모든 에스퍼들의 숙명이었다. 신이..... 인간에게 전지전능한 힘을 주지 않은 까닭이었다. 완벽해보이는 에스퍼라할지라도 실은 한계가 훨씬 많았다. 초능력자들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승휘의 말을 떠올랐다. 우린, 정말.. 절대로 행복해 질 수 없는걸까? 서럽게 울려퍼지는 지수의 울음소리가 듣기 괴로운 듯 왼손을 올려 한쪽 귀를 막는 우현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오른손 덕분에.. 두쪽 귀를 다 막지 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나는 녀석의 앞에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두손으로 녀석의 귀를 막아주었다. 그러자 우현이는 고개를 들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결좋은 머리칼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빨갛게 반사됐다. 녀석은 그 와중에도 내게 눈물을 보이는 게 창피한지 소매로 쓰윽 눈가를 닦아낸다. "정우현!!!" 그 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주아와 재준이가 우리 앞으로 뛰어온다. 차안에 있느라 그들이 본 장면은 나와 우현이가 지수와 무슨 얘길 나누다 갑자기 사라진 것이 끝일 것이다. 꽤 오래 찾아 헤맨건지 그들의 이마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재준이는 빤히 우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니 동생 지금 바닥에 주저 앉아서 울고불고 난리났어. 동네 사람들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고 너희 부모님까지 나오는 건 시간문제야." "......." "이러고 있지 말고 가족들한테 인사라도 하지 그러냐.." 재준이의 말에 우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주차된 차쪽을 향해 걸어간다. 그곳에선 지수의 모습이 보였지만, 지수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승휘답게 기가막힌 위치선정이었다. 우현이는 물끄러미 지수를 쳐다보다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날 보고 자신의 옆에 타라는 듯 차시트를 툭툭 때렸다. "후- 저 자식 어쩌려고..." "오빠, 부모님 얼굴이라도 보고 가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재준이가 내 옆에 타고, 주아는 조수석에 탔다. 여느때보다 훨씬 무거운 공기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때... 차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승휘가 아까보다 어두운 얼굴로 차에 올랐다. "야, 잠깐. 지금 출발하게?" 시동을 거려는 승휘의 한팔을 잡는 재준이. 승휘는 재준이의 손을 떼며, 싸늘한 눈빛으로 시동을 걸며 말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 핸드폰까지 추적하고 있었어. 이제서야 꺼서 여기까지 잡혔을거야." "그래도 조금만 더 있어보자." 우현이를 배려하는 듯한 재준이의 말에, 우현이는 반대편 창가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냥 가자." 우현이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승휘는 망설임없이 엑셀을 밟았다. 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우현이 대신.. 재준이가 무슨 미련이 남는 건지 자꾸 뒤돌아 봤다. 상황파악이 냉철한 승휘가 핸들을 꺾자, 이제 정말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현이의 과거가.. 우현이의 가족이.. 피곤한 듯 감은 우현이의 두눈에서 굵은 눈물 한줄기가 흘렀다. - "다들 일어나." "........" "후우-" 빠앙------- 클락션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나자 승휘가 사이드미러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루종일 고된 일을 겪은 우리가 모두 기절한 듯 잠든 사이에, 승휘는 꽤 멀리까지 차를 몰고 왔나보다. 주아, 재준이, 우현이 순으로 천천히 눈을 떴다. 그 괴로운 일을 겪었음에도 우리가 잠을 잘 수 있었다는 건..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KG가 말하는 기계들이 아니라.. 그나저나 승휘는 운전을 하느라 한숨도 못 잤을 터였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녀석을 보자 승휘는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재준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따라나섰다. 그러나 우현이는 많이 피곤한 듯 다시 눈을 감는다. 밖을 보니 녹슨 그네, 미끄럼틀이 눈에 띄었다. 분위기 상.. 시골에 있는 폐교 같았다. "가지마. 옆에 있어." 내가 따라나가려는 걸 용케 알아차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우현이. 주아는 이 상황이 불편한 듯 안전벨트를 풀고 차밖으로 나갔다. 주아까지 나가자, 슬슬 우현이의 오른손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 눈빛을 느낀건지 우현이가 눈을 반쯤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번쩍 왼손을 들어 내 마이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낸다. "뭐하려고..." "민지율, 기억나?" "......뭐?" "칩 빼내겠다고 지랄하고, 니가 나 치료해준 날." 우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손수건으로 꽁꽁 싸맸다. 그래, 니 팔목 치료해준 날.. 생각해보니 그런 일도 있었구나. 되지도 않는 예지해서 내가 널 구해준 줄 알았는데.. 니 불길한 미래를 바꾼거라며 내심 기뻤었는데.. "나 설렜다?" "......" "니가 내 팔목 잡는데 설레더라고. 이 멍청이는 자기 잡아가려는 남자애 팔목을 치료해주고... 참 이상한 애다 싶었는데 다음날부터 니가 예뻐보이더라." "쓸데없는 소리.....아!" 그러고보니, 녀석의 손이 죽은 사람 손마냥 하얬다. 나는 기겁을 하며 손수건을 풀어냈다. "안되겠어, 당장 병원 가자!" "지금 나 아픈척하면 안되는 상황이잖아." "아픈척이 아니라 아프잖아!" "안 아파. 느껴지지도 않는데 뭘." 우현이는 장난스럽게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한번 손수건으로 손을 꽁꽁 싸맨다. 핏기를 잃은 자신의 손을 보이지 않기 위함인 것 같았다. "이재준!!" 창문을 열며 큰소리로 재준이를 불렀다. 그러자 녀석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쪽으로 걸어온다. 나는 그의 귀에대고 속삭였다. "우현이 병원 가봐야돼. 주아랑 어디 다른 곳으로 가있어." 재준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주아와 어딘가로 향함과 동시에 승휘가 운전석에 탔다. 급히 차를 몰았다. 녀석도 우현이의 팔이 걱정됐던 모양이었다. 병원을 찾으려 두리번 거려봤지만.. 흔하던 동네병원조차 보이질 않았다. 내 예상보다 훨씬 시골인 모양인지, 병원이 많지 않았다. 초조해하는 승휘, 나와는 달리.. 담담한 얼굴로 창문틈에 새어나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는 우현이. 이윽고 어디엔가 차를 멈춘 승휘가 급한 걸음으로 앞서걷자 나는 우현이를 붙잡고 그의 뒤를 따랐다. 제발.. 늦지 않았길.... 우현이의 오른손이 멀쩡하길... 그 짧은 순간에 몇번을 빌었는지 모르겠다. "후우- 일단 저기라도 들어가자." 허름한 동네병원이라 영 찝찝했지만 한시가 급하다는 생각에 안으로 들어서자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할아버지가 돋보기 안경을 쓴채로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할아버지를 지나치려는 승휘.. 뒤따라 오던 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 어디있어요?" "......."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 "내가 의살세." 할아버지는 코를 찡긋하며 내 뒤에 서있는 우현이를 쳐다보다, 손수건으로 가린 손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승휘는 이 할아버지가 의사일줄은 상상도 못한 듯 당황한 얼굴로 서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우현이 앞에선 할아버지.. 아니 의사선생님이 손수건을 풀어내고 우현이의 오른손을 빤히 쳐다본다. 곧이어 긴 한숨소리가 들렸다. "젋은이가 어쩌다 이랬누. 외상도 없어보이는데 어쩌다가.... 후-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군.." "......." "늦었네, 늦었어.." 의사선생님의 한마디에 나와 승휘의 시선이 우현이쪽으로 고정됐다. 우현이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피식 웃는다. "죽은 신경을 살리기엔 늦은 거 같지만, 일단 들어와보게." "됐어요." "그냥 동네 늙은이 같아도 30년간 의사일을 했는데, 환자를 그냥 보낼수야 있나. 따라 들어오게." 됐다는 우현이의 손을 붙잡으며 진료실로 추정되는 곳으로 들어간다. 내가 따라 들어가려는 걸 승휘가 제지하는 바람에 멈춰섰다. 우현이도 내가 자신의 치료과정을 지켜보는 걸 원치 않는 눈치였다. 유독 차가워보이는 문이 닫히자마자 승휘는 그간의 피로가 쏟아지는 듯 의자에 앉았다. 서 있을 힘조차 없는 나 역시 그의 옆에 앉았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만약 우현이의 팔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난 어떤 표정을 지어야하나 고민중이었다. 마음이 시키는대로 펑펑 우는게 나을까, 아님 괜찮은 척 해야할까. 그 어떤 것도 정답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민지율..." 심각한 생각에 빠져있는 그 때, 승휘가 내 이름을 부른다. 축 가라앉은 목소리에 덩달아 내 기분까지 가라앉았다. 내가 '응' 이라고 대꾸도 하지 않았음에도, 승휘는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우리 둘이 도망갈까?" "......." "지금 니 기억들 다 지워버리고, 나 너 데리고 도망가 버릴까..." Writer. 홍양 61. 승휘가 무슨말을 하고 있는걸까, 그냥 해본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간절한 목소리에 나는 멍한 눈으로 승휘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악!!!!" 그 때, 진료실 밖으로 우현이의 찢어질듯한 고함이 들려와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려는 걸.. 승휘가 막아섰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정우현 생각만하면..." "......" "나 진짜 욕심부릴지도 몰라." 우현이의 오른손이 어떻게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승휘는 내게 뭘 바라고 있는걸까? 그애 걱정만으로도 머리가 터질것만 같은데 승휘는 '나를 봐줘.'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힘을주어 승휘를 밀쳐내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진료대 위에 올려진 우현이의 오른쪽팔에 굵고 길다란 주사바늘을 꽂고 있는 의사. 내가 거슬린다는 눈빛으로 힐끔 나를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우현이는 내가 들어왔다는 걸 눈치챘는지 왼손을 휘휘저으며 어색하게 웃어보인다. "기지배가 엉덩이까고 주사놓고 있으면 어쩌려고 막 들어오냐? 승휘야, 민지율 데리고 나가." "정우현...." "나가라고. 너보니까 더 아픈거 같잖아." 바보처럼, 자신의 팔을 관통하는 주사바늘이 두렵고 아플텐데도 아까까지만해도 악을 질렀던 주제에 담담한 척을 하고 있었다. 우현이가 더이상 아픔을 못참겠는 듯 이를 꽉 물며 고개를 숙이자 주사를 놓던 의사선생님이 승휘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희망은 없지만 노력은 해보겠다는 표시였다. 승휘는 씁쓸한 표정으로 내 팔을 끌고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힘없이 의자에 걸터앉아 두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재준이의 카운트, 주아의 염력, 승휘의 메모리컨트롤, 나의 타인조정 능력까지 그 어떤 힘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믿을건 오직 신 뿐이었다. 그 생각으로 기도를 마쳤을 때, 승휘는 어느새 차가운 음료수 두개를 뽑아와 내게 건넸다. 냉기가 그대로 전해져와 마음까지 차갑게 만들었다. 이제서야 머리가 냉정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KG를 벗어나겠다고 나선거... 그 자체가 무모한 일이었을까. 우린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고 있는걸까, 이 발악의 끝은 뭘까, 얼마나 더 엄청난 시련이 우리 앞에 서 있을까. 수만개의 물음표가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니 머릿속엔 온통 정우현 뿐이지..?" 머릿속이 복잡한데, 승휘가 뜬금없는 말을한다. 아까부터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승휘가 아니더라도 나.. 충분히 미칠것만 같은데... 나는 억지로 창문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승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채로 지그시 눈을 감는다. 녀석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 이제껏 어떻게 견뎌왔는데." "........." "마지막 욕심도 부리면 안되는거겠지..." 젖어있는 승휘의 음색에, 나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너, 참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지금 이 순간까지 너랑 정우현이랑 재야겠어?" "....." "내가 누굴좋아하건 지금은 두번째 일이야. 게다가 난..." 사랑을 해본적은 없지만... 사람들이 사랑은 아름다운 거랬다. 같이 있으면 좋고, 설레는 게 사랑이랬다. 정말 그 사람들 말대로라면 난, 승휘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 앤.. 언제나 내 마음을 마음대로 휘젓고 아프게만 한다. 내 심장이 본능적으로 승휘를 거부하고 있었다. "널 좋아하지 않아. 정우현에 대한 기억을 지운다고 해서, 내가 널 좋아하는 맘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 툭. 튀어나온 말에 나조차도 놀라버렸다. '널 좋아하지 않아.' 그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버렸다. 승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가득 찼다. 그러나 이윽고 평소의 차가운 표정을 찾은 승휘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뭐라든 상관없어." "......." "정우현 팔 멀쩡하다 그러면.. 나는 너.. 더이상은 안놓쳐. 무슨수를 써서라도." "....." "그게, 널 위해 이제껏 버틴 나에대한.. 최소한의 배려야." 도대체 뭘, 날위해 버텼다는 걸까. 승휘는 왜 한마디도 설명해주지 않고 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만 하는걸까. 나는 병원 천장을 향해 한숨을 내뱉었다. 뭐에 쫓기는 듯한 승휘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그가 내 기억을 지우고 단둘이서만 도망칠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아는 승휘는 그런애가 아니니까. 그냥 이 상황이 너무 괴로워서 뱉는 어리광이라고 여길 뿐. 그 이상은 아닐거다, 절대로. 그렇게 몇시간이 흘렀을까, 진료실안에서 발소리가 나나 싶더니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왔다. 돋보기 안경을 벗으며 피곤한듯 고개를 하늘로 들어올렸다가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는 의사선생님. 뭔가 불길한 느낌에 나와 승휘가 동시에 일어나 그의 앞에 섰다. "어떻게 됐습니까..?" 오랜만에 들어보는 승휘의 떨리는 음성.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킨채로 의사선생님의 말을 기다렸다. 의사는 주름진 이마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외상도 없는데, 꽤 강한 힘으로 신경을 건드려놨더군.. 대체 무슨 짓을 한거요?" "팔은.." "평생 쓰지 못할........" "돌팔이." 의사선생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승휘는 인상을 찌푸리며 진료실안으로 뛰어들어가려 한다. 그런 녀석을 잡은건 내가 아닌, 의사 선생님이었다. 그러자 승휘의 인상이 더욱더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거 놔요, 더 큰 병원 가볼....." "다그치지말고.. 섣불리 위로도 하지말고, 마음이 정리되서 혼자 나올때까지 기다려주시구려." 타이르듯 말하는 의사선생님의 손을, 승휘는 세차게 떼낸다. 그러자 의사는 다짜고짜 자신의 바지를 반쯤 걷었다. "........" 그 순간 나는 할말을 잃고야 말았다. 승휘또한 깜짝놀란 표정으로 물끄러미 그의 다리를 쳐다봤다. 긴 막대처럼 생긴 의족이었다. 잠시후, 걷어올렸던 바지를 내린 의사선생님은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내꼴이 이러니.. 저 마음을 잘알지. 가만 두시오." "....." "고치지 못했으니, 진료비는 받지 않겠소." 그러고보니 그의 걸음걸이가 조금 어색했다. 승휘가 문고리로 가져갔던 손을 내려놓았다.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헤집는 듯 했다. 그 때, 뒤돌아서 걸어가던 의사선생님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럴 땐 사랑하는 사람의 역할이 중요한 법이지. 항상 옆에 있어주시오." "........"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승휘를 쳐다봤다. 예상과는 달리 녀석은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었다. 그 뒤로 한참을 우현이는 진료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한군데 오래 지체하고 있으면 위험했기에, 승휘는 주아와 재준이를 이리로 데리고 오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덕분에 병원복도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나는.. 우현이를 만나면 해줄 수백가지 위로의 말들을 곱씹었다. 그렇게 삼십분. 의사선생님은 혼자 마음속을 정리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라고 했지만 결국엔 문고리를 돌리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늦게까지 나오지 않자 우현이가 나쁜맘을 먹지나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흰색 커튼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진료실 가장 외진 구석에 초록색 커튼으로 가려진 침대.. 우현이는 약간 작아보이는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 잠을 자고 있다. 나는 의자를 끌어다 침대 옆에 앉았다. 이불을 덮어주며 녀석의 고운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깊은 잠에 빠진건지 미동조차 않는다. 마음을 굳게 먹고 바늘자국이 나있는 녀석의 팔에 손을 가져다대자 "만지지마." 우현이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깜짝놀라 손을 떼어내며 녀석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깼어? 많이 피곤했나보네? 졸리면 더 자." 우현이는 무표정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승휘는?" "재준이랑 주아 데리러 간다고....." 우현이는 내 대답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침대맡에 걸려 있는 점퍼를 집어들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감각이 없는지 두걸음 걸어가서야 뒤돌아본다. 마음이 욱씬거렸다. 그는 내 손에 잡힌 자신의 오른팔목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봤지? 니가 잡아도 몰라, 이제." "........" "병신같지, 나?" "그런 말 하지마.." "그럼 무슨말해줄까, 전처럼 농담따먹기나 할까?" "....." 나는 등을 보인채 걸어가는 우현이를 뒤에서 껴안았다. 그러자 놀란 듯 걸음을 멈춘다. 아까 녀석을 보면 해주겠다고 다짐한 말들 중... 뭐든 하나를 꺼내야 했다. 섣불리 위로해서는 안되는 상황인걸 알면서도 나는 우현이를 향해 말을 내뱉었다. "내가 니 오른손 해주면 되잖아." "......." "밥도 먹여주고, 글씨도 써주고.. 또...... 아무튼 내가 다 해줄게." 우현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채 말했다. "사랑해." "....." "정우현." 내 손끝에 닿은 녀석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내가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그런 우현이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누구에게든,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흔한 여자가 되어선 안된다는 재준이의 가르침 덕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내게 안겨 서있던 우현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한번 말해봐." "왜..." "얼른." 우현이의 재촉에 별수없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사랑한다고." "민지율, 너..." "......." "그말... 후회하지마." 우현이는 갑자기 뒤돌아섰다. 녀석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놀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우현이는 피식, 매력적인 웃음을 날리더니 점점 얼굴을 내 쪽으로 가져온다. 나는 멀뚱히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우현인 평소와 다를것 없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눈 안감아?" "....응?" "키스할건데." 언젠가 들어본적이 있는 것 같은 말에, 이번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부드러운 우현이의 입술이 닿았다. 천천히 입술을 움직이며 장난스럽게 내 입술을 깨문다. 한쪽팔로 내 허리를 감은채 숨이 막힐만큼 세게 안았다. 내가 입술을 떼내려 하자, 녀석은 날 놔주지 않겠다는 듯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내 볼을 한손으로 잡고 길고긴 키스를 이어갔다. 예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KG안에서 키스연습을 하기라도 한건지 정우현은 과거가 의심스러울만큼.. 화려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내가 정우현의 가슴을 손으로 밀쳐냈다. 그러자 우현이는 쪽 하고 내 볼에 뽀뽀를 한 뒤, 앞서 걸으며 말했다. "내가 이 꼴을 하고도 너 갖는다 그럼, 가승휘 지랄할건데..." "......." "어쩌냐, 천성이 뻔뻔한걸." "......." "죽어도 못 놓겠는걸." Writer. 홍양 62. 언제 온건지 병원 밖에는 차가 대기중이었다. 나와 우현이가 나란히 차 위에 올라탔다. 재준이와 주아는 반가운 듯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든다. "병원은 왜 온거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주아의 천진난만한 물음에 "민지율이 머리가 좀 아프다 그래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로 넘기는 우현이. 나는 살짝 머리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아픈 연기를 했다. 그러자 재준이가 비웃듯 코웃음을 친다. 그 순간, 승휘가 급하게 출발을 하는통에 몸이 앞으로 쏠린다. 우현이가 왼쪽팔로 그런 날 안듯이 하자 승휘가 갑자기 클락션을 울렸다. "악, 시끄러워!" 재준이가 귀를 막으며 승휘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주아도 놀란건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승휘를 쳐다봤다. 승휘는 이상하리만큼, 나와 우현이의 작은 움직임에도 반응하고 있었다. KG에게 쫓기는 입장이라 예민해진건 이해가 갔지만 아까부터 과하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지금은 질투같은 걸 할 때가 아니지 않는가. 내가 승휘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찰나였다. 우현이가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사색이 된채로 말했다. "뒤에 KG차야." 우현이의 말에 우리는 깜짝놀라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한적한 국도를 달릴무렵, 언젠가 본적이 있는 것 같은 까만색 외제차가 우리가 타고 있는 차 뒤에 바짝 붙어 오고 있었다. KG차라면, 당장이라도 우리를 잡을 수 있는 거리일텐데도 그들은 느릿느릿 우리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재준이도 든 모양인지 우현이를 향해 묻는다. "맞아? KG라면 왜 우릴 안잡아? 확실해?" "맞다니까!! 가승휘 넌 알잖아!!" 미치겠다는 듯 길길이 날뛰는 우현이를 보며, 고개를 젓는 승휘. "KG차 아니야." 백미러를 통해 차를 확인한 승휘가 아니라고 하자 우현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행동을 멈췄다. 재준인 그럴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여유롭게 차시트에 몸을 기댄다. 우현인 승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저 차가 KG의 차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바보같긴... 상식적으로 KG차라면 벌써 우릴 잡았어야 맞지. "그런데 우리 어디가는거냐?" 목적지도 없이 달리기만 하는 상황이 못미더운 듯한 재준이의 말에 승휘는 갓길에 차를 세운다. 그러자 뒤에서 따라오던 차가 잠시 멈칫하더니, 우리를 스쳐지나간다. 역시 KG의 차는 아니였나보다. 하지만 우현이는 계속 의심스러운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차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상했다. 천하의 KG를 너무 쉽게 따돌리고 있다라는 생각에 빠져들 무렵, "민지율, 어디가고 싶어?" "......" 갑작스럽게 들려온 승휘의 물음에 다들 내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중요한 걸 모두 나한테 떠넘기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데나." 자신감없는 내 대답에 모두들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 아무데나라는 대답이 나오냐는 듯 말이다. 그 때, 우현이가 차 앞에 꽂혀있는 지도를 꺼내 내 무릎위에다 놓는다. "자, 가고 싶은 곳 찍어봐." 자신의 능력이 순간이동이니, 어디든 데려다 주겠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지도를 펼쳐준다. 세상에.. 하필이면 우리나라 전도가 아니라 세계지도다. 녀석이 아뿔싸하는 표정으로 뒷장에 있는 우리나라 전도를 편다. 5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갔다 하려면 외국은 무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아. 그런데 지금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지? 난감한 상황에 재준이를 쳐다봐도, 그는 내게 도움을 줄 생각이 없는 듯 눈을 감고 있다. 결국 나는 혼자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고르니 남쪽... 제법 자세히 나온 지도라, 이름도 모르는 섬들이 수두룩 했다. "화양도." 그 때, 재준이가 중얼거린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재준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재준이는 감았던 눈을 뜨며 말했다. "민지율 너 기억안나? 2년전인가 TV에서 봤었잖아." "......." 기억이 날듯 말듯한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재준이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거기 주민들이 30명도 안된댔지, 아마... 배도 2주에 한번만 다니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외딴섬. 우리 거기 한번 가보기로 했었잖아." "지금, 거기를 가자는거야?" KG를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 내가 되묻자 재준이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주아도 동조하듯이 '그럼 거기로 가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우현이는 생각만 해도 지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덥썩 내 손을 붙든다. 당장이라도 날 데리고 떠날 기세였다. 그런 우리를 말린건 당연히 승휘였다. "순간이동으로 움직일 생각하지마." "아까부터 왜 그래, 너. 지금 순간이동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어쩌겠다는건데." 오늘따라 녀석이 이상하단 걸 느낀 재준이가 묻자, 승휘는 놓았던 핸들을 다시 잡으며 말했다. "그곳까지 같이 움직일거야. 따로따로는 안돼." "말도 안돼! 한시라도 바삐 움직여야 한다고! 몰라서 그러는거야?" 우현이의 악에도 흔들림없이, 승휘가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너 그 섬 가본 적없잖아. 이름하나만 가지고 순간이동이 가능할거라고 생각해?" "......" "게다가 니가 옮겨야 될 사람은 너까지 총 다섯이야. 오늘내로 절대 불가능해. 여기 중 몇명은 뒤처져야 된다고." 꽤 설득력이 있는 말에 재준이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승휘의 말은 논리적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우현이는 아이같이 떼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무조건 다 데려다 줄 수 있어! 민지율 나 믿지?" "제발, 마지막 부탁이야." "......" 승휘의 말에 모두들 놀란듯 녀석을 쳐다봤다. 안어울리게 제발이라니, 부탁이라니, 마지막이라니...? 자신을 보고있는 시선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듯 승휘는 서둘러 말을 바꾼다. "다신 너희들한테 부탁같은 거 할일 없다는 뜻이야. 우리가 마지막이라는 게 아니라.." "졌다. 가승휘 속을 어찌 알겠냐, 죽을 때까지 모를걸." 우현이는 포기했다는 듯 내 손을 놓았다. 그렇게 우리는 도난차량을 타고, 고물 네비게이션을 두드려가며 화양도로 향했다. - 해가 질 무렵 도착한 우리를 맞은 건, 아주 작은 항구였다. 네비게이션도 못찾는 곳인 바람에 물어물어 오느라 상당히 시간이 지체되어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2주에 한번씩.. 섬을 들어가는 배가 있는데 오늘이 그날이었다. 정원이 10명도 안되는 작은배의 선장은 그곳에 들어가기엔 너무도 어린 우리를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봤지만 승휘가 많은돈을 지불하자 군소리 없이 우리를 배에 태워줬다. 조금은 낯선 바다냄새..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름냄새... 녀석들이 아니었다면 난 그 섬으로 갈 용기조차 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가장 마지막으로 배에 올라탔다. 석양이 지고있는 바다가 우리를 삼킬 것만 같았다. 매서운 바닷바람이 볼을 스친다. 무서워선지 추워선지 덜덜 떨면서... 고개를 들었을때, 내 앞에는 승휘가, 나를 제외한 세명을 앞에두고 진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저것들이 나만 빼놓고... 바람소리에 묻혀 무슨 얘긴지 알 수는 없었다. 굳이 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난 바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아- 우리는 과연 행복한 길을 가는 걸까, 섬으로 떠난다고 해서 KG에서 우리를 찾아내지 못할까? 결정지어진 답은 없다. 그저 함께인 우리를 믿는 수 밖에. 몇시간이 흘렀을까. 먹은 것도 없는데 배멀미 때문에 수십번을 게워냈다. 그렇게 우린.... 죽을고생 끝에 화양도에 도착했다. - 짐승이라도 나올 것 같은,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것 같은 자그마한 섬. 단 두시간만 준다면 섬 이곳저곳을 다 돌아보고도 남을 것 같았다. 이곳에 사람이 산다니.. 조금 놀랍기도 했다. 우현이와 재준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먼저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뒤이어 나, 주아가 내리고 승휘가 가장 늦게 내렸다. 난 의리있게 그를 기다려주었으나 우현이와 재준이, 주아마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승휘는 기다리고 있는 내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천천히 나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가로등 하나도 없어서 매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승휘가 펜처럼 생긴 후레쉬를 켜주어서 돌뿌리에 걸려 넘어질 일은 없었다. 그건 참 다행이었다. "이 녀석들 우리 떼놓고 어딜 간거지, 의리없이?" 둘이 있다는 생각에 뻘쭘해 큰소리로 말하자 승휘는 피식.. 웃었다. 아, 녀석 참.. 내 속 좀 그만 읽었음 좋겠는데... 하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이곳까지 왔음에도 아직 안심할 수 없는걸까? "민지율..." 그 때, 승휘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나는 반 발자국 정도 앞서걷다 뒤를 돌아봤다. 승휘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채로 서서 내게 말했다. "난 생각할 게 좀 있으니까 먼저 가." "응? 나혼자?" 녀석들이 어디있는지도 모르는데 이 어두운 밤중에 나혼자 가라고?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승휘를 쳐다봤다. 하지만 녀석은 진심인듯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내 등을 떠민다. 녀석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왜였을까? 사춘기소년마냥, 오늘따라 예민한 녀석이기에 나는 비위를 맞춰줘야겠단 생각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 때... 먼 곳에 민가가 보인다. 정말 이곳에 사람이 살긴 하나보다. 오호.. 구멍가게까지 있고.. 내가 가게 밖에 걸린 오징어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때 였다. "민지율!!!!" 어딘가에서 들리는 정우현이의 목소리에 답을 해주기도 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우현이가 내 앞에 섰다. 하아, 살았다... 무서워 죽는 줄 알았는데... "주아랑 같이 따라오고 있는 줄 알았는데 너 뭐야! 혼자 어딜 갔던거야!" 우현이는 내가 뒤에 없자 놀란 모양인지, 내 어깨를 한 손으로 잡은 채 마구잡이로 흔들며 말했다. 나는 우현이를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승휘랑 같이 오고 있었지. 걱정도 팔자다." "어, 남자 이름 같은데... 그 놈이 누군데!" "뭐야..." "아 됐고, 추우니까 일단 따라와." 아까부터 승휘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정우현.. 아예 쌩을 깔 모양이었다. 에라이 유치한 녀석...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녀석이 이끄는대로 따라갔다. 바닷가에 혼자 남겨진 승휘가 걱정이었지만, 지금은 마음정리가 필요할 것 같으니 가만둬야지. 한 10분쯤 걸어가자 나무로 대충 만든 듯한 건물이 보이고 그 앞엔 재준이와 주아가 날 째려보며 서있었다. 당연히 승휘랑 같이 올 걸 알았을텐데 왜 저렇게들 민감하게 난리일까. "민지율! 너 혼자 막 움직일래?" "왜들그래... 승휘......." "여기가 손님방이래, 짐승들 사는데지 여기가 어떻게 손님방이야. 완전 사기야!" 우현이는 내 말을 끊고, 투덜대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녀석을 따라 들어갔다. 그나저나 어느새 방까지 잡은 모양이었다. 방이라기보단 우현이 말대로 짐승들이 사는 우리 같았지만.. 전등불조차 들어오지 않는, 간신히 나무를 때워 난방 정도만 할 수 있는 듯한 작은방. 아무리 외딴 섬이라지만.. 이렇게들 사는걸까? 아까 얼핏 민가를 봤을 때 이 정돈 아니었는데.. 여긴 정말 짐승들의 우리가 아닐까? 우리는 그곳에 앉아 추위에 떨다, 이대론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재준이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우현이랑 내가 나무 좀 구해올게. 너희 여기 있어." "야, 이재준." 우현이가 오른팔을 들어보이며, 자신은 그런일을 할 수 없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다. 주아는 무슨 뜻인지 모르는 듯.. 녀석이 그저 일을 하기 싫어서 그러는 줄 알고 나서서 말했다. "칫.. 남자가 치사해. 우현이 오빠 대신 제가 갈게요." 재준이는 주아를 고생시키기 싫은건지, 아니면 내가 더 좋은건지....물론 전자일 확률이 높겠지. 나한테 같이 가자고 눈치를 줬지만 나는 녀석의 눈을 피했다. 그러자 주아가 먼저 재준이에게 팔짱을 끼며 밖으로 나갔다. 녀석들이 쌍으로 사라지자 어두운 방안에 우현이와 내가 남겨지고 말았다. 우현이의 두눈이 음흉하게 빛났다. 틈을 주면 안된다니까.... 나는 그런 녀석의 눈빛을 애써 무시한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승휘, 이쪽으로 오는 거 모를텐데 가봐야 되는거 아니야?" "야.. 승휘 그 놈이 누구길래 자꾸, 딴놈 얘기하면 나 화낸다." "왜 그래. 유치하게... 안되겠다, 데리러 가야겠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현이는 그 앞을 막아선다. 그리고 짜증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귀신이라도 홀린거야?" "정우현. 너 진짜 유치한거 알지? 여기까지 와서 승휘랑 꼭 싸워야겠어?" "진짜 미치겠네. 대체 승휘 그놈이 누군데!" 우현이는 화를 억누르려는 듯, 자신의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진심으로 승휘를 모른다는 눈빛에 나는 녀석을 옆으로 밀쳐내고 밖으로 나갔다. 지금 힘을 모아도 모자랄판에 이런 유치한 장난이나 치고 있는 녀석이 한심했다. "민지율! 나 진짜 화나려고 그러거든?" "나도 화나려고 그런다!" 어느새 내 앞을 또다시 막아선 우현이.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다그치면 다그칠수록 삐뚤어지는 녀석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최대한 타이르듯이 말했다. "승휘 마음도 좀 이해해줄 수 없어? 걔가 너한테 나쁘게 대하려고 한게......" "그놈이 누군데, 내가 이해를 해!" 우현이의 언성이 높아졌을 때, 뚜벅뚜벅하는 발걸음소리가 들리더니 재준이와 주아가 검정색 비닐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둘이 싸우는거에요? 왜 그래요!" 주아가 우리 둘 사이를 막아선다. 굉장히 웃긴 그림이었다. 가장 어린 주아가 싸움을 말리고 있는 꼴이라니. "저 자식이 자꾸 승휘 모르는 척 하잖아! 유치하게!" "아씨, 진짜 모른다니까!" "지금 그렇게 싸울때야? KG 피하려면 힘을 모아도 부족할판에!" "씨발, KG는 또 뭐야! 야, 이재준 민지율 좀 이상해!!" 그 때, 검은 봉지를 들고 서있던 재준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빵과 우유를 내쪽으로 건네준다. 나는 얼떨결에 빵과 우유를 받아들었다. 아까 본 구멍가게에서 사온 모양이었다. 이런 외딴섬에 이런 게 있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재준인.. 우현이, 주아까지 빵과 우유를 모두 전해 준 뒤 빈 비닐 봉지를 바닥에 버린다. 어라, 승휘껀 없나? "나무하러 가기전에 뭐든 먹어야될 거 같아서... 먹고 하자, 먹고. 배고파.." "승휘껀? 승휘도 배고플텐데, 아까부터 아무것도 안 먹어서." 내 말에 우현이가 더이상은 못참겠다는 듯 빵과 우유를 바닥에 내던졌다. 주아마저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너, 승휘인가 뭔가 그놈 이름 한번만 더 말해봐. 나 진짜 화낸다." 이미 화를 내고 있는 주제에, 그걸 협박이라고 하는걸까. 내가 굴하지 않고 승휘가 있을 바닷가쪽으로 발을 돌릴 찰나에.. "승휘가 누군데?" 재준이마저 승휘를 모른다는 듯이 행동한다. 기가막힌다, 짜기라도 한걸까..... 나는 재준이 녀석을 쏘아봤다. 정말 이 유치한 자식들... 녀석들을 무시하려던 그때, 주아의 가녀린 음성이 들려왔다. 주아의 말까지 듣는 순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야 말았다. "언니, 승휘가 누군데요?" "......" "안그래도 오싹하니까, 이상한 소리 좀 하지마요..." "......." “아, 서울에서 바쁘게 생활하다 이런데로 이사 오니까 좋네요. 좀 으스스한거 빼면.” 이사가 아니야, 우린 KG를 피해 도망온거라고. 어째서 너희 표정은 그렇게 평화로운건데..? Writer. 청몽채화 63. 아무래도 지금,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승휘가 다른 아이들의 기억을 지운 게 분명하다. 도대체 어느 틈에 이렇게 만든 거야? 그렇다면, 나는 왜 그냥 남겨둔 거지? 빨리 승휘를 찾아 대화를 나눠봐야 했다. 승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저기.... 나... 잠깐 밖에 좀......" 풀려버린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일어났다. "야, 너 어디가!! 너 승휜가 뭔가 그 놈한테 가는 거야?" 역시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른 우현이가 내 손목을 재빠르게 잡아채며 묻는다. 기억을 지워도 이 모양인데 그 전에는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화, 화장실 가는 거야!!!" 다행히 화장실은 방 밖에 따로 있었다. 우현이는 의심스런 눈을 거두지 않았지만 천천히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빨리와. 5분 안에 안 오면 나 너 찾으러 갈 거야." 우현이가 내 손목을 놓아주자마자 나는 재빨리 밖으로 달려나갔다. 내가 없는 새 승휘가 사라지고 없을 것 같아서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있었다. 처음부터 가승휘란 존재가 없었던 것처럼,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지우다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잊혀진다는 것처럼 슬픈 일은 없을 텐데. 계속 주저앉을 것처럼 고꾸라지는 다리를 정신력으로 지탱해가며 바닷가에 다다랐다. 파도를 바라보며 어둠 속에 서 있는 승휘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언제 사라질까 두려워, 나는 뒤에서 그의 몸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놈이 바다에 빠져 없어질 것 같았다. "가승휘!!!!!!!!!!!!" 내가 달려오는 무게에 부딪힌 승휘가 몇 걸음 앞으로 떠밀려갔다. 하지만 내 손엔 놈이 확실히 만져지고 있었기에,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승휘는 아무 말 없었다. 대신 조금 놀란 듯 나를 돌아볼 뿐이었다. 내가 꽉 감은 눈을 떠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자, 승휘는 떨리는 손으로 가만히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내 손을 감싸는가 싶더니, 놈은 거센 힘으로 자신의 허리에 감긴 내 손을 풀어 버렸다. "데려가고 싶어지니까... 이러지 마." 나는 다시 승휘의 옷자락을 꼭 휘어잡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어디 가?" "어, 가. 되게 멀리."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머나먼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딜 가? 지금 다들 붙어있어야지, 혼자 나다니면 위험해." "..............." "승휘야, 왜이래. 나 좀 봐 봐. 애들이 지금 널 기억못해. 니가 한 짓 맞지? 니가 애들 기억 지운 거지? 왜? 왜 그랬어? 이유가 뭐야, 말 좀 해 봐!!!" 억지로 승휘를 돌려세워놓고 그를 향해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나 승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있었다. "가승휘!!! 너 정말 왜 그래!!!"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크게 소리질러버렸다. 놈은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깊고 그윽한 그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는 것 같았다. "너 지금 왜 이러는 거야!!! 애들 기억 빨리 되살려놔!!! 왜 그래!!!" 평소와 다른 승휘의 반응에 미친듯이 소리치며 그의 옷깃을 흔들었다. 이미 내 눈에서는 수많은 눈물방울들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지, 나도 모를 노릇이었다. "울지마, 임마." 그는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섬의 이 곳, 저 곳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본다. "좀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아름답고 아늑한 곳이니까, 그렇게 불편하진 않을 것 같다. 이재준이나 정우현, 임주아... 다들 생활력 하나는 끝내줄 거야." "너 왜 그런 말 해, 도대체 어디 가는 건데!!!?" 그는 아무 대답없이 계속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만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놈의 눈가는 촉촉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정우현 그 새끼가 잘 해줘야 될 텐데. 그래도 시간나는 대로 자주 올게. 정우현이 너한테 잘 못하면, 그 때는 니가 날 봐주겠지." "무슨 소리하는 거야, 빨리 가. 애들한테 우리 이야기해주면 돼. 기억 살릴 순 없어도..." "나 익숙해, 잊혀지는 거."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아프게 느껴져서, 나는 행동을 멈춰버릴 수밖에 없었다.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던 사람도, 나를 잊은 적이 있었거든." 그제야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내린다. 승휘가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 미칠 것만 같았다. 저 멀리서, 배가 한 척 들어오고 있었다. 작지만 호화스럽게 꾸며진 배였다. 2주에 한 번씩 들어오는 배는 이미 가버린 후인데, 저건 대체 뭘까. 검게 칠해진 배의 한 귀퉁이에, 은색으로 작게 박힌 이름이 보였다. "............K.....G.....?" KG 소속의 배가 분명했다. 순간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승휘의 손을 거세게 낚아채고 달렸다. 하지만 승휘는 꿈쩍도 않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승휘야, 저거 KG배야!!! 우리 도망쳐야돼!!! 애들이랑 빨리!!!!!" "민지율.... 내가 준 명찰 어딨어?" "지금 뜬금없이 그런 말 할 때가 아니....." 답답한 놈을 향해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는 오히려 여유가 넘쳐보였다. 5분만 더 지체하다가는 KG배가 바닷가에 정착하여 섬으로 내려올 것 같았으나, 승휘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저 배가 KG소속인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놈이 왜 이러는건지 궁금했으나 아무 이유없이 이상한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교복 주머니 속에 있던 승휘의 명찰을 천천히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승휘는 씨익 웃더니 자신의 지갑을 꺼냈다. 처음 보는 그의 지갑이다. 삐까번쩍한 그의 지갑 안에서 오래된 듯 구겨지고 낡은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승휘는 그 사진을 내 눈 앞에 내밀었다. ......사진 안에 있는 건.... 중학교 교복을 입고있는 재준이, 나.... 그리고... 승휘였다. ".............가승휘........" 승휘는 웃으며 자신의 핸드폰을 꺼낸 후, 사진을 핸드폰의 얇은 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핸드폰줄에 자신의 명찰을 매달았다. "자, 민지율." "........... 승휘야...." "이제.... 이 세상에 가승휘는 없는 거야." "..........이러지마....." "적어도 너희들 세상에서.... 나는 빠지는 거야." "...........가승휘....." "우리 추억, 바다에 묻자." 혼란스러운 마음에 그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잊어버릴 수도 없고, 잃어버릴 수도 없게... 평생 바다에 묻자." 그는 나를 향해 활짝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바다 저 멀리로 던져버린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핸드폰이 물 속에 처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어두워서 밤하늘과 밤바다의 경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 것도 구분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 나를 지배했다. KG소속의 배가 점점 우리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승휘의 의도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 그는 KG와 일종의 거래를 한 모양이었다. ".............가승휘!!!" "......... 나 한 번만 안아주면 안돼? 아까는 뒤에서 잘도 안더만." "너 정말 미쳤어? 왜 그래!!? 같이 있으면 되잖아!! 우리끼리 숨어서 잘 살면 되잖아!!" "늦으면 배에 타고있는 감독관들이 다 본단 말이야. 앙탈부리지 말고 빨리." 주체할 수 없을만큼 흐르는 눈물 때문에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승휘는 그런 나를 천천히 감싸안았다. 조심스럽고도 고요한 손길이었다. 두근대는 그의 심장소리가 들릴만큼 우리는 매우 가까이 서 있었다. "나 좀 봐, 지율아." "싫어, 너 내 기억 지울 거잖아." "............민지율...." "나까지 너 잊으면 어떡해, 그럼 누가 너 기억해줘? 너 다 잊혀지면 어떡해? 가지마. 너 혼자 거기가서 뭘 어떻게 할 건데? 가지마, 승휘야. 나 너 잊기싫어, 나 너 안 잊을 거야." "........ 말 왜 이렇게 안 들어." 피식, 웃는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승휘는 내 손을 가볍게 잡았다. 놈이 너무나도 쉽게 내 손을 얼굴에서 떼어냈다. 하지만 나는 재빨리 눈을 감아버렸다. 감아버린 눈에서도 눈물이 마구 흐르고 있었다. 눈을 뜨지 않으면, 그는 내 기억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제발 이러지마, 승휘야. 내 기억 절대 지우지마. 나 너 잊어버리기 싫어. 제발, 승휘야. 왜 니가 이래야돼? 우리 그냥 평생 숨어서 살면 되잖아, 외국으로 가버리면 되잖아. 니가 내 기억 지우면 이젠 돌이킬 수 없잖아. 그 땐 우리 어떡해. 나 눈 안 떠, 절대 안 뜰 거야. 이러지마, 승휘야. 우리 도망가자. 제발 도망가자." "민지율, 너 나랑 게임하냐? 빨리 눈 떠, 고집은 세 가지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세차게 젓고있었다. 재준이도, 우현이도, 주아도 모두 다 승휘를 잊었다. 승휘는 자신의 핸드폰까지 바다를 향해 던져버린 후였으니, 앞으로는 연락도 닿을 수 없을 것이다. 나까지 승휘를 잃으면 놈이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나 진짜 이런 짓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승휘는 허탈하면서도 장난끼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는 그 순간, 내 입술에 무언가가 와닿았다. 깜짝 놀란 내가 한 걸음 물러서며 눈을 떴을 때, 승휘는 나에게 키스하고 있었다.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널 어떻게 잊어, 내가 잊으면 널.... 이제 누가 기억해주지?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리는데도 승휘는 웃었다. "이제, 다시 나 기억안해줘도 돼." "...............승...휘야...." "........ 안녕, 내 소중한 사람."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눈이 감기고 있었다. 기를 쓰고 놓지 않으려 했던 승휘의 옷자락이 내 손을 빠져나갔다. "..........씨발..... 끝까지.... 왜 포기를 못하게 해..." 승휘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잊어서는 안된다고 미친듯이 생각했다. "........... 사랑해, 민지율." * "뒤질라고 왜 여기서 자!! 밤바다가 얼마나 추운지 모르냐!!!" 누군가 나를 향해 크게 소리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 우현이가 인상을 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현아....." "귀신 들렸어? 왜 밤바다에 오고그래?" ".....글쎄, 나 여기 왜 왔지?" 머리를 긁적이며 우현이를 올려다보았다. 놈은 미워죽겠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자신의 옷을 벗어 내게 덮어주었다. "이재준이랑 주아가 기다려. 빨리 가자. 너 내가 안 왔으면 어쩔 뻔 했냐?" 우현이의 손을 잡으면서도 뭔가 잊고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자 우현이가 질투에 가득찬 표정으로 빈정거렸다. "승휘라는 놈 생각하냐?" "뭐? 그게 누군데?" "나도 몰라!! 니가 아까 계속 중얼대던 놈이잖아!!!" "무슨 소리야, 나 그런 사람 몰라." 내가 우현이를 향해 정색을 하며 대답하는 순간, 우현이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설마... 이 섬에 전설같은 거 있는 거 아니야?" ".......... 응?" "처녀를 홀리는 승휘라는 총각귀신 전설, 야, 원래 섬일수록 괴담이 많아. 아, 무섭게 왜 그래, 너 아까 계속 승휘라는 사람 이야기 했다니까. 그래서 나도 화낼 뻔 했잖아. 계속 승휘 타령하다가 바닷가에서 자는 채로 발견됐다? 승휜지 뭔지 그 총각귀신 할 일 더럽게 없네, 그거 물귀신 아니야???" "말도 안돼, 나 승휘라는 사람 이야기한 적 없거든? 세상이 귀신이 어딨냐?" "야, 빨리 와 봐. 민박집 주인한테 승휘귀신 전설 물어보자!!!!" "야, 잠깐만!!! 좀 천천히 달려!!!" 우현이는 내 팔을 잡고 모래사장 위를 신나게 달려갔다. 놈에게 끌려가는 와중에 드넓은 밤바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조그만 배 한 척이 유유히 파도를 가르며 바다 저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Writer. 청몽채화 64(完). ※ 승휘시점 - 2년 후- "오랜만의 휴가잖아. 이해해줄 수 없어?" - 혹시라도 너 잘못될까봐 그러지. 적당히 즐겨. 호출기 계속 켜두고. "아아, 오케이." 걱정스러운 하진누나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호출기를 끄는 동시에 배가 항구에 도착했다. 기막힌 타이밍에 나도 모르게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섬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재준, 오늘 기분 많이 좋은가보다. 2년 전, 이 바다에 던졌던 내 휴대폰과 중학교시절의 사진, 명찰이 생각난다. 바닷물에 녹아버릴 물건들이 아니니, 그건 이 바다속 어딘가에 고이 잠들어있겠지. 지율이와의 추억은 죽지 않고 살아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 기억속에서만큼은. 머리를 긁적이며 부드러운 모래사장에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모래에 내 발자국이 새겨지자마자 남다른 감회가 밀려들어왔다. 인적이 드물던 섬은 꽤 유명해져서 이제는 관광객도 제법 모여들고 있었다. 주말마다 배가 오고가는 정도였다. 벌써 2년이 지났다. 어떤 날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어떤 날은 억만년처럼 길었다. 혼자서 워너비의 모든 계획을 실행했다. 2년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내 두 손으로 거두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피를 묻혔다. 처음엔 내가 죽인 사람들의 숫자를 셀 수도 있었던 것 같은데, 반복되는 일상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고, 이제 살인에 대한 공포는 아득하리만치 먼 기억 저 편으로 흘러가버렸다. "그거 알아? 이 섬 괴담." 내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저마다 이야기를 나눈다. "이 섬에 남자 물귀신이 산대. 귀신 이름은 승휘라고 하는데, 여자를 그렇게 홀리나봐. 말끔한 얼굴을 해가지고 밤마다 여기서 만나자고 해서 여자를 불러내는데, 여자들은 항상 그 꿈을 꾼 뒤에 해변가에서 잠을 잔대. 근데 일어나고 나면 그 승휘 귀신에 대해서 기억을 못하는 거야." "꺄악!!!! 어떡해, 그래서 진짜 죽은 여자들이 있대???" ...... 저딴 헛소문을 만들어낸 건 누구일까. 왠지 정우현이 저 소문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년 전, 지율이를 두고 이 섬을 떠났던 그 날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기억을 잃고 쓰러졌던 지율이를 정우현이 찾으러 왔을 거고, 내가 지운 기억 속의 일을 저희들끼리 끼워맞추다가 괴담으로까지 발전시켰을 것이다. 머리를 긁적이며 본격적으로 걸음을 옮긴다. 심장이 주책맞게 두근거린다. 이재준, 정우현, 임주아 그리고... 민지율, 2년만이다. 내 손으로 그들 머릿속에 있는 내 기억을 지웠다. 잘 지내고 있는 건지, 불쑥불쑥 찾아오는 그리움에 언제나 마음 한 구석이 뻐근했다. 그동안 혼자 킬러 임무를 마친 뒤, 기숙사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그대로 쓰러지곤 했다. 할 일은 많았으나 일을 해결해야 하는 건 나 하나였다. 모든 일이 힘에 벅차서, 견딜 수 없는 통증에 그대로 쓰러져버린 적도 여러번이었다. 하진누나는 자기와 함께 오피스텔에서 살기를 권했지만 나는 모든 것을 마다하고 KG의 1인실 기숙사를 얻어 철저한 개인생활을 계속해나갔다. 그들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떠오르면 나는 금방이라도 돌아가고 싶어질 것이 분명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언제나 그들을 생각했다. 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지킨 그들의 행복이다. 그건 어떻게든 지켜져야 했다. 모래사장 밖으로 벗어나자마자 작은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구멍가게가 보였다. 생수라도 한 병 사기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온 몸이 굳는 것만 같았다. 작은 가게의 카운터에 조용히 앉아있는 사람은, 임주아였다. "어서오세요~" 2년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 순간 존댓말을 써야하나, 반말을 써야하나 잠시 고민했다. "안녕하세요." 다른 놈들이 여기 있는건 아닌지 살피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아는 카운터 앞에 책 한 권과 참고서를 펴들고 앉아있었다. 아직 열여덟살이기에, 공부를 계속 해오고 있는 것 같았다. "어려보이는데... 주인집 따님이신가 봐요." 다 알면서도,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조심스레 물었다. "아, 아니예요. 구멍가게 아줌마가 다리를 다치셔서, 그 동안만 아르바이트 하고 있어요." 해맑게 웃으며 주아가 대답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생수 한 통과 담배 한갑을 계산했다. 다행히 그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좁아터진 섬이다. 빨리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놈들을 찾아봐야 했다. 급하게 구멍 가게 안을 나오다가, 가게 안으로 급히 들어가려는 한 남자와 부딪히고 말았다. 꽤 세게 부딪히는 바람에, 손에 들고있던 생수병과 담배가 흩어진 채 떨어졌다. "아, 제기랄!!! 죄송합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우현이다.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보다 조금 더 짧아진 머리랄까. "오!! 우리 마을에 젊은 사람들 별로 안오는데!! 관광객이예요?" 아직도 호기심 충만한 성격은 여전한가보다, 나는 대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에게 지율이를 빼앗겼다는 생각을 하면 마냥 웃어줄 수는 없었지만 일단은 반가웠다. 지율이에게 아직도 잘 하고있는걸까. 헤어졌거나 울리고 있으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가차없이 한 방 날려줘야겠다. "관광객이면 해변가에서 놀지 동네까지는 잘 안 들어오는데." "물 사러 왔어요." "해변가에도 매점 있어요. 아, 하긴 거긴 좀 사람이 득실대긴 하죠? 오늘 주말이라서.." 정우현은 쉴 새 없이 말을 내뱉으며 내가 떨어뜨린 생수를 왼손으로 집어들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내가 떨어뜨린 담뱃갑을 오른손으로 집어들려 하다가 포기한다. 2년이 지나도 그 망할 오른손의 마비는 여전한 모양이었다. KG로 데려갔다면, 그들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놈의 손목을 치료했을 것이다. 대신 정우현은 팔꿈치부터 손 끝까지 이어지는 긴 나무 판을 팔 안쪽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 나무판이 손목이 꺾이는 것을 방지하는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때, 뒤에서 축구공을 든 한 꼬마와, 이재준이 나타났다. 외딴 섬에 사는 주제에... 주아나, 우현이나, 재준이나 믿을 수 없을만큼 더 멋스러워졌다. "이 새끼 너 딱 걸렸어, 아이스크림 사오랬더니 그 길로 내빼냐? 돈 내놔." 이재준과 내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금방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정우현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형!!! 형네 팀이 축구에서 졌잖아요!!! 빨리 아이스크림 사내요!!!" 고등학교때 자주하던 내기 농구에 이어, 여기서는 내기 축구인 건가. 그것도 초등학교 다니는 꼬마들과? 정우현은 도망가는 데도 불구하고 순간이동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분명 나는 그들 머릿속에서 자신들이 초능력이 있다는 기억조차 지웠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바라기만 해도 이루어지는 능력을 놈들이 아직도 모르고 있을 리는 없었다. 정우현은 자신의 능력을 평생 숨기면서 살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이재준은 나와 부딪힌 뒤로 계속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있는 정우현을 보고는 대충 무슨 상황인지 파악한 것 같았다. 그는 정우현 손에 들려있는 생수통과 땅에 떨어져있는 담뱃갑을 주워 내게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애가 발은 병신이 아닌데, 손이랑 뇌가 좀 병신이라." 기막히게 이재준다운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재준이 건네주는 내 물건들을 받아들었다. "일어나, 병신아." 퉁명스럽게 중얼대면서도 이재준은 정우현을 부축하며 일으켜세웠다. "마침 가게 앞이니까 딱 됐다. 아이스크림 여섯개 빨리 사서 내놔." "아, 꺼져!! 아이스크림 먹을 시간도 없거든!! 야, 민지율이 학교에서 우리 기다려!!!" "그래, 지율이 아이스크림이랑 주아 아이스크림까지 여덟 개 사가자." "아, 씨발, 이재준!!!!" "꼬마들도 많으니까 그냥 진 팀 것도 사. 주아야, 여기 아이스크림 열 네 개!!!!" "나 돈 없어, 개새끼야!!!!" "오케이, 그럼 니 꺼 빼고 열 세 개." 투닥거리는 정우현과 이재준. 그리고 그들의 싸움을 재밌게 지켜보며 아이스크림을 챙기는 주아.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내가 걱정했던 것 이상으로 그들은 잘 지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방금 전의 대화로 유추해보건대, 지율이는 지금 학교에 있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학교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100미터 가량 걸었을까. 작은 학교가 눈에 보였다. 우리가 이 섬에 올 때만 해도, 학교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는데, 언제 생겨난 걸까. 새로 만들어진 것 같은 학교는 아담하고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운동장 한 켠에 마련된 작은 나무 테이블에서 신문을 읽고있는 지율이의 모습이 보였다. 2년간 죽고싶을만큼 그리워서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여자의 얼굴.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잡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샘솟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후문으로 들어가 운동장 한 켠에 작게 마련된 수돗가에 몸을 숨겼다. 작은 지율이의 옆모습이 보인다. 이 정도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조차도 그동안 얼마나 바랐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 앞으로 다가가 너를 만지고, 말을 나누는 것도 나에게는 죄악이겠지. 보면 볼수록 넘쳐나는 욕심을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멍하니 지율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저 멀리서 한 무리가 다가왔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정우현, 이재준, 임주아였다. 다들 쭈쭈바를 하나씩 물고 어슬렁 거리며 교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민지율, 니 서방이 한 턱 냈다!! 너도 먹어!!" 이재준이 멀리서 지율이를 향해 아이스크림 하나를 던진다. 신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지율이가 드디어 고개를 들어보이며 웃는다. 서방이라, 이제 그게 당연해진 호칭이 되어버린 건가. 그래도 다행이야, 잘 지내고 있는 거구나. 정우현 새끼, 싫증 잘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한테는 진심인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다. "자기야, 나 아이스크림 사느라 돈 완전 많이 썼엉~" 정우현이 되도않는 애교를 부리며 지율이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도망가다가 잡혔나보네? 그러게 도망가지를 말지, 어차피 잡힐 거 왜 도망가?" 2년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 왜 항상 나는 너를 두고 떠나야만 하는 걸까. 그리워서 미칠 것 같아도 말 한 마디 못하고. "내가 순간이동 거기서 했으면 안 잡혔지. 근데 꼬마들 있는데 순간이동 어떻게 해." "그래도 다행이예요, 우현오빠. 오늘 주말 아니었으면 유치원 꼬마들도 다 있었을 텐데. 유치원 꼬마들 아이스크림까지 샀으면 돈 더 많이 들었을 걸요." "유치원 꼬마들은 원래 내가 많이 사주거든? 우리 마누라 제자들인데." 지율이는, 학교에 딸려있는 조그마한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민지율, 돈 안 벌어도 된다니까. 우현이나, 나나, 주아나 통장에 돈 가득한 거 못봤냐? 왜 혼자 돈 벌겠다고 청승을 떨고 그래?" 재준이의 핀잔에도 지율이는 그저 웃어보이기만 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뭐 보이는 거 없어요? 언니 예지력 되게 잘 맞는데." 주아가 지율이의 반대편에 앉으며 중얼거린다. 역시나, 지율이의 능력이 타인조정이라는 건 알지 못하는 듯 하다. 예전처럼, 지율이의 능력을 예지력이라고 다들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자기, 예지력으로 빨리 알아봐봐. 우리 진짜 결혼 언제 해?" 정우현은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우리 아직 어리잖아. 어차피 할 건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 "지금은 주아랑 너랑 방쓰잖아!! 나 이재준 새끼랑 방 같이 쓰는 거 싫단 말야!!" 어차피 결혼을 할 거라니, 지율이는 알고있을까. 방금 자신의 말 한 마디로 인해 정우현과의 결혼이 확실해졌음을. 타인조정은 그렇기 때문에 무서운 거였다. 자신의 한마디로 인해 모든 게 이루어진다는 것. "맞다, 지율언니. 아까 가게에 되게 잘생긴 오빠 왔다갔어요. 그런 남자 처음 봤어요." 그 순간, 내 이야기를 지율이에게 꺼내는 주아. "우리 동네에 젊은 남자가 있단 말이야? 마을 할머니 손잔가?" "아냐, 내가 물어봤어, 관광객이래. 주아 말 듣지마, 그 새끼 나보다 훨 못해." "야, 임주아. 다시 말해봐. 아까 그 새끼가 잘생겼어, 내가 잘생겼어?" 이재준이 주아를 향해 질문을 건네는 즉시, 무시무시한 먹구름이 하늘에 가득 찼다. "이재준, 비내리지마, 신문 젖어." 지율이가 명령조로 말했지만, 이재준은 여전히 승질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늘 신문에 무슨 내용있어?" 우현이의 물음에, "새벽에 또 살인사건이 났대. 사회의 거물급들이 차례대로 죽어. 아무래도 타살이겠지?" "으, 이런 살인자들은 똑같은 방법으로 죽여놔야 돼." 뜨끔했다. 오늘 신문 1면에 난 거물급 사회 유명인사는 내가 죽인 사람이었다. 도하진은 더 이상의 워너비를 만들지 말아달라는 내 청을 받아들였다. KG가 공인하고 있는 킬러는 가승휘, 나 단 한 사람 뿐이었다. 다른 사람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보다, 모든 걸 내가 감당하는게 현명하리라 생각했다. 바쁘고, 지치고, 힘들어도.... 나는 이렇게 살아나가고 있었다. "아니야, 우현아. 똑같이 죽이는 건 복수가 아니지." "그럼?" "살아야지. 살아가는 평생을, 고통 속에서 몸부림 치면서." 지율이의 무시무시한 한 마디에,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타인조정인 주제에 저렇게 잔인한 말을 내뱉다니, 오히려 죽어버리라는 게 낫잖아. 민지율, 니 한 마디로 인해 나는 눈 감는 날까지 고통에 몸부림 치겠지. 지금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니가 그리워서 죽겠어. 정말 미치겠어. 비가 한 두 방울씩 투두둑 내려왔다. "이재준!!! 비 내리지 말랬지!!!" "임주아가 대답 안하잖아!! 내가 더 잘생겼다니까!!!"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그들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모두 웃으면서 지내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호출기가 작은 진동을 내며 반짝거렸다. "왜?" - 미안하지만 바로 복귀해줘야겠어. 워너비 임무 또 수행이야. ".........알았어, 갈게." -..... 지율이 봤어? 괜찮아? "..... 아니, 못 봤어." 하진누나와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은 채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래, 민지율. 이제 나도 내 기억에서 널 잊어야겠지. 니 기억에서 나를 덜어낸 건 바로 내 자신이니까, 이 정도 아픔은 견뎌내야겠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녕, 민지율. ........... 살인자 워너비의 마지막 콤플렉스, 안녕. 니 말대로 평생을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너를 사랑할게. Writer. 청몽채화 에필로그 에필로그 part, 1 ※ 재준시점 꽤 평온하던 기온이 하루 새에 뚝 떨어졌다. 매년 수능 날이면 이런 한파가 꼭 찾아온다. 3일전 미리 섬을 떠나온 게 다행이었다. 오늘이었다면 파도가 심해서 섬을 빠져나오지도 못할 뻔 했다. 초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날씨를 바꾸려고 하지는 않았다. 순리대로 사는 게 제일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 지 오래였다. 어느 새 두 뺨과 코 끝이 붉게 물들어버린 주아의 목도리를 한 번 더 꽉 여며준다. 언제봐도 귀여운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생각한다. 그래, 역시 수능 날에는 추운 게 제격일 지도 모르지. 처음 봤을 때, 주아는 중학교 3학년이었던 열 여섯 살 꼬맹이였는데, 어느 새 이렇게 시간이 지난 걸까. 이런 성격이 아닌데도, 괜히 감상에 젖게 된다. 외진 섬에 살면서도 열심히 공부하던 주아다. 솔직히 주아의 성적이 좋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어쨌건 그 동안의 노력만은 가상했다. 그래도 수능이란 걸 칠 생각도 없었던 나, 지율이, 우현이보다는 훨씬 나았다. 주아는 도전정신이 투철한 용기있는 꼬맹이였다. "어때, 잘 할 수 있겠어?" 주아가 수능시험을 치를 학교 앞은 소란스럽고도 유난스러웠다. 각 학교에서 응원 차 파견된 후배들이 교문 앞에 진을 치고 서서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거나 커피를 나눠주고 있었다. 마치 축제라도 치르는 듯한 그 분위기에서 우리만 제외되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세상에서 고립된 이방인처럼 문득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후회는 없다. 나와 주아, 지율이와 우현이. 네 명만 있으면 행복은 우리 곁에 있었다. 뭔가 빠진 것 같은 예감이 가끔 나를 사로잡을 때도 있었지만 기분 탓이라 여겼다.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는 내게 그런 외로움은 필연일 수도 있었다. 주아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들어가기 전에 전화 한 통만. 지율언니랑 우현오빠가 응원해준댔어." "걔들 목소리 들어봤자 방해 된다니까. 정신 사나워지고." 짜증섞인 내 말투에도 주아는 환하게 웃어보인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내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주아에게 다시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언니, 나 수능치러 왔어요. 통화하고 나서 바로 들어갈 거예요." - 주, 주, 주, 주아야, 다, 당황하지 마, 말고, 넌 자, 잘 될 거니까. 바보처럼 지가 더 긴장하는 민지율과, - 브이, 아이, 씨, 티, 오, 알, 와이!!!! 우. 윳. 빛. 깔. 임. 주. 아!!!!! 되도않는 응원문구를 남발하는 정우현. 평소 늦게 일어나는 놈들이 꼭 이런 날에만 일찍 일어나서 정신 사납게 군다. 언제나 죽이 척척 맞는 바보 커플. 정말 멋대가리 없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도 주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분홍색 벙어리 장갑에 갇힌 손으로 힘겹게 핸드폰 폴더를 닫고, 다시 내게 핸드폰을 내미는 주아. "그럼 오빠, 나 이제 들어갈게." "못 봤다고 울진 말고, 너 대학 붙어도 걱정인 거 알지? 너 혼자 기숙사 어떻게 보내냐. 여자친구 혼자 객지에 보내줄 만큼 나 멋진 놈 아니다." 주아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녀를 언제까지나 내 곁에 두고싶은 마음. 언제나 반반이다. 우리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거라 확신하지만, 위험하게 주아 혼자만 대학주변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늑대같은 사내놈들이 도사리고 있는 음침한 지역에 주아가 자취하게 된다면, 난 정신병에 걸려 짧은 생을 끝마치게 될 지도 모른다. 화양도의 첫 번째 전설인 승휘라는 물귀신에 이어, 재준이라는 두 번째 전설, 정신나간 총각귀신도 생기겠지. 하긴 모두 쓸데없는 걱정이긴 하다. 미안한 말이지만, 주아는 어디까지나... 공부를... 열심히만 했으니까. 정말 열심히... 그냥 열심히... 잘하는 건 아니고 그냥 열심히. "걱정마, 나 고등학교 졸업하면 지율언니가 일하는 유치원에서 일하기로 했어." "...... 그럼 대학은?" "나 대학갈 성적 안되는 거 오빠도 알잖아. 대학 안 갈 건데?" "그럼 너... 수능치러 왜 온 거야?" "음... 그래도 내 실력은 어느 정돈지 알아보고 싶었고... 그리고...." "............." "오빠랑 단 둘이 이렇게 여행오고 싶었으니까." 밝게 웃으며 내 뺨에 키스하더니 교문 안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주아. 어이없었지만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치고와, 끝날 시간 맞춰 데리러 올게."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크게 소리치며, 멀어져가는 주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아가 학교건물의 중앙현관 사이로 들어간 걸 확인하고, 피씨방에서 시간이나 때울까 생각하며 크게 기지개를 피던 바로 그 순간. "재준이형!!!!!!!!!" 반가움이 묻어나는 목소리. 서둘러 고개를 돌렸을 때, 모르는 남자아이 두 명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 명은 나를 보며 밝게 웃고 있었지만, 다른 한 명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들은 이방인처럼 보였다. 마치, 방금 전의 주아와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누구...."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을 때, 내 이름을 부른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우와, 형을 어떻게 이런 데서 봐요?" "실례지만, 누구세요?" "왜 그래요, 형. 저 진혁이잖아요. 아무리 3년동안 못 봤다고 해도 너무한다." 정말 모르는 남잔데, 너무나도 살갑게 나에게 말을 건다. "형 도대체 어디서 뭐하고 지낸 거예요? 그동안 안 보여서 정말 걱정했었어요. 저기, 설마... 주아.... 어디 있는지도 알고 계세요? 같이 사라진 것 같아서..." 내 눈 앞에 이 남자가, 사람을 착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스스럼없이 불러대고 있었고, 주아와도 절친해보였다. 나는 대답없이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다행히 아무 경계심 없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승휘형은 멀리서라도 가끔 봤어요. KG 기숙사 건물 최상층에 계시다는데, 형도 그래요? 이제 완전 신과 같은 존재예요. 워너비 1조라고 하면 애들이 다 겁부터 먹는다니까요. 형들이 수고해주셔서 다행히 다른 워너비 프로젝트는 중단됐어요. 사실 저도 워너비 4조로 만들어지던 기획단계였거든요. 감사하다는 말,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만날 수가 없어서." KG? 워너비?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감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승휘라니? 그건 화양도의 물귀신 이름인데.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지만, 이 남자의 말이 거짓말처럼 어느 순간 뚝 끊겨버린 내 기억을 찾아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은 희망일 뿐일지라도, 나는 그 희망을 붙들어야 했다. "아, 저 꼬마 처음 보시죠? KG 2년차 된 놈이예요. 올해 열 일곱 살이구요. 친한 고3 동생 응원차 같이 왔어요. 그 고3 동생도 KG 소속인데, 대학은 가고 싶대서." 수다스럽다 싶을 만큼 입을 놀리면서, 그 남자는 뒤에 서 있던 차가운 눈빛의 소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어리지만 꽤 매서운 눈길이었다. 소년의 눈빛이 나를 파고들었다. "승휘형 2세라고 불리는 놈이예요. 하진누나가 꽤 아끼죠. 능력은 특 A+급. 계급은 3급."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건지 짜증이 치밀어오르려는 찰나. "됐어요, 진혁이형. 이 남자, 상대할 가치도 없어." 열 일곱 살 된 차가운 눈빛의 소년이, 냉정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꽤나 당돌한 모습이었다. 그의 대답에 시종일관 시끄럽게 떠들던 진혁이라는 남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야, 김 건. 이 형이 어떤 분인줄 알아?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승휘형이랑 같은 팀..." "지금은 아니잖아요. 이 남자는 아무 것도 몰라요." 이대로 놓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나를 지나쳐가려는 꼬맹이의 손목을 거칠게 붙들었다. "미안한데, 꼬맹아." "........... 나 꼬맹이 아니거든." "형한테 다가오는 건 니 자유일지도 모르지만, 떠나는 건 아니야." "너 게이냐?" 실로, 이렇게 나에게 잘 개기는 놈은 처음이었다.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웃었다. "말해봐. 내가 누군지, 너희는 알고있지? 너희들이 알고있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불어봐.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서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내 말에 진혁이라는 남자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하지만 꼬맹이는 평정심을 놓지않고 여전히 차가운 눈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형, 설마, 승휘형이!!!!" "그 승휘가 누군지, 그것부터 들어보자." 내가 그렇게 말을 내뱉은 순간, 진혁이라는 남자가 내 팔을 덥썩 잡았다. 남자끼리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그 손을 뿌리치려는 순간, 그는 흡사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기억... 다 잃었네요, 재준이형." 내 손을 만지고서, 나에 대한 것을 알아냈다. 설마 진혁이라는 이 남자도 초능력자인 걸까. 내 손만 잡고서는 나에 대한 정보를 읽어냈다. 사이코메트리 능력자가 분명했다. "그러니까 말해봐. 니가 알고있었던 나에 대해서." 그제서야 상황파악이 된 듯이, 진혁이라는 남자는 매서운 눈빛의 꼬맹이를 내 앞으로 밀어붙였다. "건아, 이 형 좀 도와드려. KG 특 3급 자리에 있던 분이야. 너도 들은 적 있지? 딱 한 명 있었던 날씨조종 에스퍼. 어쩌다 이렇게 되셨는지 모르겠지만 기억 잃을 분이 아닌데. 뭐가 잘못된건지 모르겠다." "싫어." "김 건!!!" "지금 이러는 것도 기밀누설에 해당돼요. 딱 봐도 승휘형이 기억 지운거잖아요. 기억을 지운 이유가 있을텐데 괜히 우리가 나설 필요 없단 소리예요. 가요, 진혁이형. 이런 사람 상대해서 좋을 거 없어요." 건방진 꼬맹이가 다시 나를 지나쳐가려 할 때, 나는 다시 강한 힘으로 그를 붙들었다. 이래뵈도 몇 년동안이나 화양도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했다. 열 일곱 살의 꼬맹이가 내 힘을 이겨내기는 역부족인 것 같았다. "난 승휘라는 놈을 전혀 모르겠지만, 꼬맹아." "............" "니가 날 먼저 알았더라면 지금 나를 도왔을 거야. 나 그 정도 가치는 있는 놈이거든." 꼬맹이가 나를 노려봤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기에 눌릴 법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놈을 보며 씨익 웃어줬다. 내게 숨겨진 과거를 알아야겠다는 일념만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제일 싫어, 건방진 사람." "그건 내가 할 말이다." 꼬맹이는 주변 눈치를 보는 듯 하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광인 줄 알아요." "..........." "난 KG에 들어온지 2년밖에 안됐지만." 꼬맹이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승휘형이 없애버린 기억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에스퍼죠."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기억재생 에스퍼." 구역질이 밀려왔다. 미칠 것만 같았다. "김 건이예요." 턱 막혔던 숨이 그제야 터져나왔다. 가쁜 숨이 멈추지 않았다. 마치 주마등이 스쳐지나가듯 막아두었던 기억들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들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는 진혁이와, 건방진 꼬맹이 건이를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가승휘. 이 미친 새끼.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내 몸을 진혁이가 급히 부축했다. ".........이진혁." "........ 재준이형, 괜찮아요? 이제 다 기억나요?" "........... 가승휘... 어딨어." "............." "그 미친놈... 지금 어딨어." Writer. 청몽채화 에필로그 part, 2 ※ 재준시점 [가끔 형과 스칠 때마다 느꼈어요. 승휘형과 재준형은 인연이 강하게 이어져 있어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발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미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내 발을 더 빨리 움직였다. [그 땐 단순히 두 사람이 친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아니, 지금도 같이 계실 줄 알았어요. 떨어져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진혁이의 말이 쉴 새 없이 머릿속을 울린다. [승휘형은 KG유일의 킬러예요.] 개새끼. 미친새끼. 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새끼. [다른 워너비 프로젝트를 없애고, 혼자 모든 걸 뒤집어쓰기로 결정했대요.] 도대체 가승휘 넌 왜 혼자 병신춤 추기로 결심한 거야? 어릴 때부터 항상 옆에 있던 우리였는데, 왜 항상 희생하는 건 너야? 씨발, 내 기억을 두 번이나 지웠어. 만나면 가만히 둘 줄 알아? 용서 못해. 절대 용서 못해, 가승휘. ...........넌 내 손에 죽어. 병신처럼 너를 잊은 나도, 병신처럼 내 기억을 지운 너도... 다 죽일 놈이니까... 그냥 죽자. 너도, 나도 그냥 죽자. [승휘 형은 KG 기숙사 최상층에 있어요. 새벽에 임무를 수행하니까 지금은 자고 있겠죠.] 진혁이의 말을 듣자마자 승휘놈을 찾아 KG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건이라는 기억재생 에스퍼의 마지막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도하진이 왜 그 애를 아낀다는 건지, 느낄 수 있었다. 놈의 눈빛은, KG안에서 생활하던 가승휘의 눈빛과 꼭 닮아있었다. 기억을 관리하는 에스퍼들의 한은, 그의 눈빛에서부터 읽혀진다. 쉴 새 없이 달린 지, 2시간 정도 지났을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입 안이 메말라 목구멍이 쓰라렸다. 그와 동시에 여전히 압도적인 모습으로 서 있는 KG의 건물이 내 눈 안에 들어왔다.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괜시리 눈물이 차올랐다. 목이 찢어져라 소리치고 싶었다. 내 인생을, 내 행복을, 내 친구를... 제발 돌려내라고. 초능력 방지용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담벼락 앞에서, 나는 그저 힘없이 스르륵 주저앉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가승휘의 생명과 맞바꾼 안전이었다. 에스퍼인 나는, 놈의 희생으로 인해 세상과 맞닿은 채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놈과 처음 헤어질 당시의 힘없는 열 네 살 꼬맹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받는 것만 익숙한 지독한 이기주의자. 승휘는 어떤 마음으로 지율이를 포기해야만 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죽을 것처럼 괴로웠다. 참아왔던 구역질이 올라왔다. 아무렇지 않게 우현이와 지율이의 사랑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도대체 어땠을런지. 그 순간, 담벼락에 기댄 채 퍼질러 앉아있는 내 앞으로,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다가왔다. 곁눈질로 슬쩍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승휘였다. 한 눈에 봐도 피곤에 지친 듯한 모습으로,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아직 나를 보지는 못한 것 같았다. 진혁이 말대로 KG내의 에스퍼 기숙사에서 자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놈을 만나게 될 때까지 몇 날 며칠을 꼼짝도 안하리라 다짐했는데, 갑작스레 놈과 마주치게 되자 만감이 교차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놈의 넥타이가 약간 틀어져있었다. 평소 빈틈없는 놈이지만, 넥타이를 매는 건 언제나 서툴렀던 기억이 난다. 오히려 평소에는 덜렁대지만 패션에 신경쓰는 우현이는 넥타이의 미묘한 각조차 맞추는 편이었다. 선도부 활동을 하게 되면, 지율이는 언제나 목에 매야하는 리본을 빼먹곤 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빈틈없어보이지만 허술한 거, 둘이 꼭 닮았구나. 너무 사소한 일에 너희들을 끼워맞추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승휘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숙였던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 나른하게 움직였던 그의 몸짓이 순간 거짓말처럼 굳었다. 그를 보자마자 울컥거리는 감정이 북받치며 올라왔다. 힘겨워보이는 일상 속에서도, 놈의 멋들어진 모습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차마 그와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버렸다. 열 아홉 살이 될 때 헤어졌던 우리는, 스물 두 살이 되어서야 마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렇게 좆같은 모습으로. 옅은 한숨소리가 바람을 통해 들려왔다. 승휘는 천천히 내 곁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놈의 다리는 미세하게 후들거리고 있었다. "어이 형씨, 미안한데." 말라붙어버린 입을 힘겹게 움직였다. 발걸음을 돌리고 천천히 나를 돌아보는 승휘. 나, 여전히 기억을 잃은 채였다면... 이런 너를 보면서도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었던 걸까. 너는 그렇게 상처받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넌 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택했어? 다 같이 죽는 방법도 있었잖아. 함께 살 수 없다면 다들 그 방법을 택하리란 거, 너도 알았잖아. "내가 시골사는데, 서울에서 길을 잘못들어서 이리 와버렸거든요." 그의 표정에 안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심한 모양이었다. "저 쪽 길로 나가면 돼요. 일반인 출입금지 지역이니까, 다신 오지 않게 조심해요." 놈은 넓은 공터 한가운데서 긴 손가락으로 출구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놈이 다시 천천히 몸을 돌려 걸어가는 그 순간, 나는 자꾸 힘이 풀리려는 다리를 땅바닥에 고정시킨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킬러가 비맞고 다니면." 뒤에서 뱉어내는 내 말에,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는 놈. 나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평소에 쓰지 않았던 나의 날씨조종 능력이다. "그거 완전 영화겠다." "................." "가승휘.... 그렇지?" 떨리는 목소리. "........... 나 모른 척 하니까 편하냐." "............. 이재준....." "다들 속이고 이렇게 사니까... 좋았냐." "너 어떻게......" "개새끼야!!!! 니가 뭔데 날 이렇게 병신으로 만들어!! 왜 너를 기억못하게 만들어!!! 메모리컨트롤 에스퍼면 다야? 너한테 내 기억을 맘대로 조종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이런다고 니가 멋있어보일 줄 알아? 정말 넌.... 넌 왜......" 내 곁으로 다가온 놈의 멱살을 힘껏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 불쌍한 놈의 앞에서... 난 힘없이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었다. "왜.... 다 니가 감당해...." 놈은 잠자코 입술을 깨물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한테만큼은.... 다 말해줘도 되잖아... 나한테만큼은." 승휘가 피식 웃었다. "그럼 너... 행복할 수 없잖아." "잘난 척 하지마. 너 같은 새끼 없어도 나 충분히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 이제 비는 빗발치듯 내리고 있었다. 놈과 나 모두 비에 젖어가고 있었다. 소름돋을만큼 추운 날씨였지만,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알고있는 건, 가승휘와 내가 지금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였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내게 세상의 전부와도 같던 친구였다. 놈은 나에게 아버지였고, 친구였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지율이가 지켜야내야만 하는 존재였다면 그는 내가 소중하게 의지하고 믿어왔던 존재다. "기억... 어떻게 찾았어?" "너 내 눈 쳐다보지 말고 눈 깔아. 왜 두 번이나 내 기억을 지워. 세 번은 용서 안한다. 어릴 때 내 꼬봉이었던 새끼가, 어디서 형님 기억을 함부로..." 어머니의 유품으로 생각하고 내가 항상 걸고 다니면 목걸이 또한 승휘가 준 것이었다. 그만큼, 나는 무의식속에서도 놈을 찾고있었던 모양이다. "건이 만났냐?" 승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 속에 묻어있는 애정은 그대로 느껴졌다. "혼 좀 내야겠네. 내가 지운 기억 건드리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했는데 말을 안 들어." "너랑 똑같은 새끼던데." "그래서 걱정이야." "뭐가? 존나 기계처럼 시키는대로 막 살까봐?" "아니, 소중한 걸 잃을까봐." 놈의 쓸쓸한 눈빛때문에 소름끼치도록 마음이 쓰라렸다. 내가 놈을 잊고 행복하게 생활하던 동안에도, 놈은 혼자서 여러 번 눈물을 삼켜야 했을 것이다. "위험해, 이재준. 돌아가. 기억 지워줄게." "꺼져, 병신아. 이제 너 안 잊어." "나한테 신경쓰는만큼, 행복할 수 없을 거야. 너 지켜야될 거 많잖아." "그거 다... 니가 나한테 떠넘겨서 그런 거잖아, 개새끼야." 안쓰러운 마음에 욕지거리만 미친듯이 튀어나왔다. "주아는 내가 굳이 말 안해도 잘 챙겨주겠지. 정우현 잘 챙겨라. 아직 손 병신이잖아." "그 새끼가 손만 병신이냐, 뇌도 병신이지." 진지한 내 대답에도 웃어보이는 놈. "그리고....." 차마 지율이에 대해서는 말을 꺼낼 수 없는 듯,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 그리고....." "지율이 기억.... 되살리면 안되냐....?" 단호하게 건넨 내 말에 승휘가 인상을 찌푸렸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결의같은 것이 표정 속에 깃들어있었다. "그런 걸로 농담하지마." "농담 아니야. 지율이가 너 모르는 채로 산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잖아. 지율이한테도 할 짓 아니고!!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애 앞에서 니가 어떻게!!!" "나 자극하지마, 이재준." "............." "민지율.... 이제 정우현 여자야." 알고있다. 승휘가 이렇게 되새겨주지 않아도 그 쯤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 애 기억을 지우면서, 지율이는 나밖에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바보같은 자만심이었지. 사람은 누구나 변할 수 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어. 내가 사랑했던 지율이도 예전의 지율이야. 난 과거 속에 머물러 있지만, 지율이는 변했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너도 그렇잖아, 이재준." ".............." "지금 너에게 나보다 소중한 건... 정우현이잖아." 세월이란 건 야속하고도 잔인했다. 기억은 돌아왔지만, 현재의 나와 더 가까운 사람은 승휘보다 우현이일 수밖에 없었다. 기억과 관계된 추억은, 오로지 과거 속에서만 살아 움직였다. "안 그래도 그리워 미칠 것 같으니까... 나도 행복하고 싶어 죽겠으니까...." "..............." "그런 말은 쉽게 하지마." 사람들은 누구나 망각 속에서 사랑을 쉽게 떠나 보내는데, 왜 가승휘는 언제나 과거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걸까. 그 때, 가승휘의 허리춤에 달려있던 호출기가 빨간빛을 내며 움직였다. 도하진의 호출이 분명했다. 예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찔한 공포감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몰래 나온 거라, 도하진이 눈치 챈 모양이다." "어디 다녀왔는데?" "내가 죽인 사람 장례식." 씁쓸한 말투로 중얼거리는 가승휘. 우리를 빌미로 끝까지 KG에 잡혀 살아야만 하는 그가 눈물겹게 안타까웠다. 지금도 여전히, 내가 놈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나 봐, 이재준. 기억 지워줄게." "꺼져, 너 안 잊을 거라고 했잖아." "지금 기억해준 거, 평생 되새기면서 살아갈게. 이제 그만 안녕하자." "너 진짜 내 입에서 욕 나오게 할래.....?" 그 때, 가승휘는 말없이 나를 껴안았다. 어렸을 때, 놈과 나는 기분이 좋으면 서로를 껴안곤 했다. 그게 남자다움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지율이... 아직 예쁘냐?" "...........예뻐, 징그럽게 예뻐. 눈부시게 아름답다, 아주 그냥." "보고싶네." 농담처럼 내뱉은 내 말에도, 깊은 그리움을 드러내는 놈의 목소리.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기억이 나면 전해줘." "가승휘.... 너...." "미안해, 이재준." 놈의 손이 내 머리를 감싸쥐었다. 내가 방심했다. 여태껏 KG에 있던 놈이, 자기 능력을 계발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제 놈은 눈이 마주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머리를 만지는 것으로도 상대방의 기억을 앗아버릴 수 있는 것 같았다. 기억이 희미해졌다. 눈이 감겨왔다. 여전히 내가 내리는 비가 줄기차게 퍼붓고 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가승휘의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흘러내린 것도 같다. "사랑한다고." ".............."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빌어먹을 워너비 콤플렉스. 그리고, 이제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질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미친 새끼, 가승휘. Writer. 홍양 에필로그 part, 3 ※ 우현 시점 ※ 숨막히도록 시린 바닷바람이 불고 있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화양도로 가는 배위에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뿔뿔이 흩어져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슬쩍 민지율을 쳐다보니 그앤 흩날리는 교복치마를 잡은 채 물끄러미 바다만 보고있다. 모든게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빠져있을게 뻔했다. 그게 다가 아니란걸 왜 모르는걸까, 바보같이. 나나 이재준, 가승휘... 셋다 너를 지키는 게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다가가 장난이라도 쳐서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그게 위로가 되진 않을거라는 생각에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을 찰나, “가승휘가 할말있댄다.” 재준이가 귀찮은 듯 내 팔을 이끌고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곳엔 추운건지 코가 빨개진 주아와, 언제나처럼 무표정인 승휘가 나란히 서있었다. “왜 또 임마, 니가 부르면 존나 가슴이 콩닥대는거 알지?” “너 나 사랑하냐?” 녀석답지 않은 농담을 하며 피식, 힘없는 웃음을 날린다. 나는 토하는 시늉을 하며 흘끗 녀석을 노려봤다. 이렇게 불러모은걸 보니 나나 이재준처럼 시덥잖은 말을 할 놈은 아니다. KG에서 완벽히 벗어날 작전이라도 짠건가... “그럼 지율이 언니도 불러올....” 지율이쪽으로 향하는 주아의 손목을 약하게 휘어잡는 가승휘. 그런 가승휘의 모습이 오늘따라 시려보여서, 녀석의 말처럼 사랑하는 것도 아니건만 벌써 심장이 반응하기 시작한다. 이재준도 뭔가를 느낀건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KG에서 연락받았지..“ “어.” “뭐래, 그 자식들이!!” 내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승휘는 지율이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차분히 말을 잇는다. “꽤 괜찮은 제안을 했어.” “거기서 괜찮은 제안을 해? 씨발, 단체로 약이라도 마신거래?” “답안은 세 개였어. 제일 괜찮은 거 골랐으니까 군말말고 따라와.” 승휘의 말에 우리는 숨을 죽인채 그의 눈을 바라봤다. 그렇게 몇분이 지났을까.... 어지러운 듯 녀석의 눈이 살짝 풀리더니 휘청거린다. "왜 이래, 갑자기." “하, 알지... 능력 너무 한꺼번에 쓰면 힘풀리는거..” 얼떨떨한 상황에 나는 급하게 가승휘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자 녀석은 강한 힘으로 나를 이끌고 배 뒤편으로 가더니 숨을 몰아 쉬었다. 불길한 느낌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뭐야, 한꺼번에 능력쓸 일이 뭐가......” “나에대한 기억이 많은건 이재준일줄 알았는데 한번 지워서 그런가 아니네...” “이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거야!” “5년 헛보낸건 아닌가, 너랑 나 징그럽게 얽혀있네. 너 건드리기가 제일 힘들다. 좀 쉬었다 하자.” 나는 녀석의 멱살을 잡았다 놓으며 이재준과 주아를 쳐다봤다. 그들은 멍하니 앉아있었다. 워너비 프로젝트를 실행할 때 여러번 본 적이있는 눈빛이었다. 기억을 잃은 뒤 몇분간은 머릿속이 하얘져서, 저렇게 멍한 표정이던가.. 많은 걸 잃으면 정신을 잃기도 한다. 설마 가승휘 이 새끼 지금... “너 무슨 말도 안되는 일을 꾸미고 있는거야!” “정우현.” “그렇게 내 이름 부르지마! 가슴 콩닥댄다 그랬지! 이번엔 또 무슨 이상한 일.....” “지율이 많이 좋아하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물끄러미 가승휘의 얼굴만 쳐다봤다. 생각할 틈도 없이 ‘응’이라고 튀어나올 내 대답이 새삼스레 녀석에게 미안해서였다. 승휘가 말했던 소중한 사람이라는 게 민지율이라는 건 느끼고 있었다. 알면서도 시작된 내 마음이 혼란스러웠지만.. 더 이상은 포기 할 수 없을만큼 난 민지율을 많이 좋아하고 있다. 콩만한 기지배가 어찌나 내 마음을 휘젓고 다니는지... 나도 미칠지경이었다. “대답해, 많이 좋아하냐고.” “엉, 존나게.. 민지율이 너 좋다 그러면 순간이동으로 납치라도 할란다, 어쩔래.” 이런말을 하기가 괜히 쑥스러워 귀를 후비적대며 이야기 하자 가승휘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씁쓸해 보여서 풀렸던 긴장이 다시 전신을 휩싸고 있었다. 나는 움직여지지 않은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녀석의 팔목을 붙잡으며 나조차 놀랄만큼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혼자 멋있는척 하지마.” “.........” “마지막 부탁이다, 가승휘.” 녀석이 재준이와 주아의 기억을 지웠다는 건.. 녀석을 오래봐온 나였기에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애써 담담한 척 녀석의 못되먹은 생각을 고치기 위해 말을 이었다. 여기서 내 성질대로 했다간 한순간에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었다. “나한테 쓸데없는 짓 했다간 같이 바다에 빠질줄 알아. 나 한다면 하는 놈이야.” 내 말에 승휘는 마비된 내 오른손을 만지작댔다. 마비된 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는 듯이.. 평소라면 감히 내 손을 잡았다며 뿌리쳤겠지만 나는 오히려 녀석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미친놈아, 형님 좋아하면 말을 하지.. 손잡는 걸론 성에 안차지? 안아줄까?” “........지랄..” 이제 내가 제어할 한도를 벗어난것도 알고, 죽어도 안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빌어먹을 삼각관계에서 내가 빠질게. 마음 가는건 어쩔 수 없는 거 알지... 대신 니 앞에서 티 안낼게.” “........” “당장은 안돼. 내가 민지율 좀 많이 좋아해서....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포기할게.” 쉽게 마음을 고쳐먹을 놈이 아니란건 알지만, 어떻게든 붙잡아야 했다. 놈은 그런 내 말이 우스운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KG안에서 애들 바보 만들 때 써먹던 거 있잖아. 내 능력이 통하지 않는 방법..” “..........” “로보캅. 그거 한번 써먹어봐.” “....미친놈... 하지마...바다에 뛰어든다 그랬어.. 나랑같이 고래밥되기 싫으면 닥쳐.” “난 죽을힘을 다해 지울테니까.. 넌 죽을힘을 다해서 나 잊지 않도록 애써봐. 시작한다..” “하지말랬어.... 하지...”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부터, 이미 기억이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제길, 눈을 감아야 된다는 걸 잊고 있었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에도 난 최면에 걸린듯 승휘의 눈과 마주하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온몸을 나른하게 만들고 있다. 원망스럽도록 완벽한 가승휘의 능력.. KG 최고의 메모리컨트롤 에스퍼답게 녀석은 순식간에 내 기억을 다 지워내고 있었다. "고집피우지마, 새끼야.... 힘풀고 있어... 안그래도 힘들어 죽겠다고." "하..지..마...." 왜 진작에 알지 못했을까, 기억을 지울 때 가승휘 저놈의 표정이 저렇게 일그러진다는걸.. 소중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걷어낼때... 녀석은 수천번, 수만번 무너져야 한다는걸.. 안돼, 니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친구인지 한번도 말 못했단 말이야.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이 아파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지만, 말해주고 싶다. 너란놈을 죽도록 미워도 했고, 항상 동경해왔음을.. 꼭 말해주고 싶은데.. “병실안에서 민지율이랑 키스했냐, 개자식아.” “.........” 어느새 과거를 다 지우고, 방금 전 있었던 병실안에서 지율이와의 키스장면이 보이는 듯 눈을 찌푸린다. 내 손목에 칩을 박은 그 날부터 순간이동이라는 망할 능력을 얼마나 원망했었는지 모른다. 저 놈은 어땠을까. 모든 고통을 자신이 감내해야하는 능력을 가진 가승휘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봐줬다. 이건 놔둔다.” 얕은 잠에 빠진 듯 머릿속을 휘젓던 모든게 흐릿해져간다. 그리고 새로운 기억들이 머릿속을 파고들고 있다. 완벽히 조작된 기억안에서 난 평범한 남자고등학생이 되어있었다. 녀석은 더 이상은 힘에 부치는 듯 거친숨을 몰아쉬며 배 안에 있는 작은 객실에 몸을 숨기고 속삭였다. “니 기억속에 지율이가 더 예쁘다.” “........하아...아...“ “내 기억속엔 맨날 울고 있는데, 너랑 있을 때 천사처럼 웃네.” “..........” “알겠다, 민지율이 너를 선택한 이유.” 다리에 힘이 풀리고 속이 메스껍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눈을 떴을 때, 누구 것인지 모를 은색라이터만이 배 위에 떨어져 있었다. * 딸깍 딸깍.. “씨발, 그만둬! 시끄러워! 잠 좀 자자!!” 열고 닫을때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라이터를 계속 만지작대자, 잠을 이루지 못하던 이재준이 베개를 던진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나였기에망정이지, 딴놈이라면 턱이 돌아갔을 엄청난 스피드였다. “내일부터 살 집도 알아보고 해야되는거 알지? 잠 좀자.. 이 미친놈아.” “아, 방은 두 개 이상이어야지. 너랑 주아랑 한방, 나랑 민지율이랑 한방.” “너랑 민지율이랑 왜 한방을 써! 달밤에 먼지나게 맞고 싶어 안달났지??” “나 좋자고 그러는거냐! 너도 좋잖아, 내숭은!” “아오, 말을 말자.” 나는 봤다. 이재준의 붉어지는 두 볼을.. 저 도둑놈 심보..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주아를 넘겨줄 줄 알아? 그나저나 걱정돼 죽겠네.. 왜 모래사장에 쓰러져있고 난리야. 보약이나 한첩 해먹여야 되나... “이재준, 나 진짜 손만 잡고 잘꺼라니까?” “닥치고 자라.” 이재준은 꿋꿋이 문 앞에 자리를 잡고 누워 화장실을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지가 지율이 보호자야 뭐야.. 그렇게 몇시간이 흘렀을까, 괜시리 마음이 시려지는 라이터를 만지작대며 지율이를 머릿속에 그렸을 때 나는 내 몸이 붕 떠오르는 걸 느꼈다. 그리고 믿기지 않게도 내 눈앞에 보이는건 징글맞은 이재준의 등짝이 아니라,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아기처럼 몸을 말고 자고 있는 민지율이었다. 말도 안되는 상황에 눈을 비비며 다시 떠보았다. 그리고 지율이의 볼을 살짝 만져보았다. 인상을 찌푸리는 게 진짜 민지율이었다. “하....” 귀신이 곡할 노릇일세.. 이게 어떻게 된거지... 뭐 어때... 나는 복잡한 상황을 뭐 어때 하나로 정리하고, 지율이의 옆에 자고 있는 주아의 눈치를 살피며 지율이의 작은 손을 잡았다. “승...휘..야...” 지율이는 간절한 목소리로 또 그놈의 이름을 불렀다. 승휘라는 총각귀신 놈.. 지율이한테서 떨어지라고! 나한테 잡히기만 해라. 아작을 내주마! 분했지만 천사같은 지율이의 얼굴을 보자 스르르 풀린다. 나는 녀석의 볼에 뽀뽀를 했다. 괜히 쑥쓰러워 헛기침을 해본다. “가..지...마....” 뭘 가지마. 지율이를 흔들어 깨울까하다 괜히 방에서 쫓겨나겠다 싶어 관뒀다. 대신에 지율이의 옆에 누워 녀석을 품에 안았다. 그제서야 안정이 되는 듯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민지율... 그거 아냐... “사랑해.” 지구상 최고 멋쟁이 정우현이 너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거. 나는 더욱 꽈악 지율이를 끌어안았다. 이재준 미안하다, 손만 잡고 잔다 그랬는데 그 약속 못지킬 것 같다. 다음날 일어나면 넌 이 세상에 없는 욕까지 만들어 나를 괴롭힐테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눈을 감고 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무의식 중에도 나는 라이터를 손에 쥐고 놓지 않았다. 그날 밤 내 꿈속엔, 생판 처음보는 웬놈이 나왔는데.. 그놈이 감히 지율이를 잘지켜라 뭐 어째라 하기에 딱 한마디 해줬다. '오냐, 이 여잔 내가 잘 지킬테니 걱정마라.' 돌아서는 그 남자의 눈빛이 어찌나 슬퍼보이던지, 자고 일어나서까지 가슴이 먹먹했다. Writer. 홍양 에필 part, 4 지율은 종종 말없이 집을나와, 모래사장에 앉아 한참동안 밤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너 자꾸 밤에 혼자 돌아다니다가 딴놈이 채가기라도 하면, 나 어떻게 살라고 그러냐." 자신의 등뒤에서 들리는 볼멘소리에 지율은 활짝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우현은 그렇게 웃고 있는 지율의 모습이 더 불만이라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지율의 하얗게 드러난 다리를 덮었다. "무릎이상 오는 반바지는 안된다 그랬지." "......." "그런데 30센치는 더 올라온거 같다?" 가디건을 걷더니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길이를 재보는 우현, 그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지율은 못참겠다는 듯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여름마다 해수욕장와서 비키니 입은 여자들 몸매 감상하는 주제에, 되게 보수적인척 한다 너?" "야, 그건...." "뭐." 주아와 지율은 여름이 돌아올때마다 골머리를 앓곤 했다. 이 섬은.. 다른 계절은 외부인이 뜸했지만, 여름만 되면 해수욕장을 찾아 사람들이 바글바글 대곤 했다. 재준과 우현은 요즘 대세인 짐승남이 될것이라며 선탠을 핑계로 자주 해수욕장을 찾곤 했는데 사실은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의 몸매를 평가하러 가는 것임을 늦게서야 눈치챘다. 그들의 잘나신 외모덕분에 자주 헌팅이 들어왔음은 말이 필요없는 사실이고. 얼마전 재준이와의 내기에서 진 우현이가, 쭉쭉빵빵한 미녀의 번호를 따다가 지율이의 눈에 띈 이후 그것은 두고두고 우현의 약점이 되어버렸다. "걔들 벗는거야, 좋지... 그런데 넌..." "뭐. 난 여자도 아니야? 내가 감춰두고 있어서 그렇지.. 나도 몸매 돼, 왜 그러셔!" "아무튼 넌 안돼." 발끈한 지율이 걸치고 있던 셔츠를 벗어 나시만 입으려고 하자 우현의 두볼이 빨개지는가 싶더니 서둘러 지율의 만류한다. "놔봐! 나는 몇점짜리 몸맨가 평가 좀 받아보게." "벗기만 해." "벗기만 하면 뭐!" "가뜩이나 참기힘들어 죽겠구만, 자꾸 사람 인내심 테스트 해라.. 너." 그제서야 우현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한 지율이 어정쩡한 손놀림으로 옷을 단정히 한다. 민망한지 헛기침을 두어번 하며 일어나려는 걸 우현이 손목을 붙들었다. 지율은 멍하니 그를 내려다봤다. "민지율." "응?" "우리 사귈까." 우현이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로가 사귀잔 말을 하지 않았어도 아주 자연스럽게 마음을 주고 받았던 터라, 정식으로 '사귀자' 라고 말한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별것도 아닌 말에 지율의 가슴은 터질듯 했다. "너 왜 갑자기 그런말을......" "결혼하자 그랬더니 싫다 그랬잖아. 그럼 사겨주기라도 해야지." "내가 언제 싫댔어, 시간을 갖자고 그랬지." 둘의 나이는 이제 겨우 23살이었다. 왠지 급하다고 여긴 지율이 차차 생각해보자며 대답을 미룬게 우현은 내내 마음에 걸렸다. 팔이 성치 않기에, 한참을 혼자 고민하다 한 프로포즈였건만 지율은 무심해도 너무 무심했다. KG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었지만,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우현의 한쪽팔은 훈장처럼 남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나.. 욕심이라는 거 아는데.." "........." "내 여자친구 되주라." "응. 알겠으니까, 이거놔줘." 지율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우현에게 잡힌 팔을 비틀어 빼냈다. 의외로 그녀는 닭살돋는 걸 못 견뎌했다. 어쩔땐 이재준과 사귀는게 아닐까 싶을정도로, 재준의 앞에선 애교를 떨어대다가도 우현의 앞에서면 누나처럼 가르치고 설명하기 좋아하는 이상한 여자였다. 먼저 스킨십을 한다던가, 애정표현을 한다던가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누가 보면 그가 혼자 짝사랑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 였다. 차마 '이재준이랑 노는거 보면 샘나 죽겠다'라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우현은 지율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때가 많았다. "무슨 기지배가 그러냐, 반응이!" "뭐... 눈물이라도 흘려야돼?" "아오, 말을 말자." 우현이 미치겠다는듯 자신의 머리를 헝크러뜨리며 돌아서려 하자, 지율이 급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그리고 달려가 그의 앞에 섰다. 결좋은 생머리가 바닷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 순간까지도 '이뻐죽겠네.'라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손해보는 장사였다. 연인끼리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던데, 우현은 자신이 약자라는 생각에 약이 오른다. "우현아."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더니, 그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앞쪽으로 끌어당겨 네번째 손가락에 무언가를 끼워준다. 감각이 없는 덕분에 그는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그것이 반지임을 깨달았다. 심플한 디자인의 은색반지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렸으면 내가 먼저 프로포즈 했을텐데, 그걸 못참냐.. 바보야." "......뭐냐....이게." 그는 알면서도 되물었다. 짖궂게도 지율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결혼하자는 거잖아, 바보야." "........" "이거 니 통장에 있는 돈으로 산거 아니야. 내가 직접 번 돈으로 샀어. 비싼건 아냐. 아참... 다이아는 못 박았다, 시간이 없어서." "...쳇.." 몇달간 지율은 지독하리만큼 돈을 모았다. 재준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전직 KG에스퍼로써 일한 재준이, 주아, 우현의 통장엔 돈이 가득하건만 마을에 있는 일이란 일은 다 도와가며 돈을 모으던 이유가 이 반지 였단 사실에 우현의 가슴이 뭉클한다. 그는 애써 웃음을 삼키며 지율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봐온지 벌써 4년이 훌쩍 지났건만, 보면볼수록 질리기는 커녕 마음만 커져간다. "반지 이거 얼마냐.." "가격은 왜물어, 비싼거 아니......" "얼마냐고." 그가 피식 웃으며 묻자 지율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300만원이다, 어쩔래." "오케이. 기분이다." "뭘....." 지율이 무슨 말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우현은 그녀의 허리를 단번에 휘어감고는 한손으로 그녀의 눈을 지그시 감기며 말했다. "300분간 키스해주지, 뭐." 지율이 놀라 눈을 다시뜸과 동시에 우현의 입술이 그녀를 덮쳐왔다. 끊으라고 신신당부한 담배를 또 몰래 피운 모양인지, 알싸한 담배향이 풍겨오더니 곧.. 달콤한 향기가 전해져왔다. 지율이 가장 좋아하는 그만의 향기였다. 벤치 위에 누워 그의 팔을 벨 때도, 뜬금없는 타이밍에 그의 품에 안기게 될때도 그를 거부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하나, 이 달콤한 향 때문이었다. 지율은 서서히 눈을 감고, 조심스레 그의 목을 두팔로 감았다. 키가 한참이나 작은 덕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미치겠다는 듯 우현은 지율을 번쩍 안아들더니 좀더 깊은 키스를 한다. 우현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키스에 몰입한지가 너무 오랜만인지라 지율은 당황해버렸다. 하지만 얼마안가 조심스레 입술을 떼낸다. 그리고 이마에 쪽소리나게 뽀뽀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더이상가면 사고 치겠다는 우현의 냉철한 판단 덕분이었다.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음에도 애써 담담한 척 웃으며 말한다. "아, 애 데리고 키스 못하겠다." "뭐야, 300분간이라더니!" 자신도 모르게 나온 투정에 지율은 쑥쓰러워 뒤돌아선다. "하하, 미치겠네. 정말 300분간 할 생각이었던거야? 난 입술이 생명이라서 퉁퉁 부으면 안되거든? 아쉬웠어? 그럼 더 해주지 뭐. 돈드는 것도 아닌데." "얄미워 죽겠어! 저리로 가!" "아 맞다, 프로포즈는 보류야. 일주일간 생각하고 답해줄게." "뭐?" "너도 한번 당해봐." 우현은 장난스럽게 그녀의 이마를 툭치며 앞서걸어간다. 그녀는 일부러 발을 쾅쾅 구르며 우현의 뒷통수를 노려봤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발에 채인 돌부리에 우두커니 멈춰섰다. 까만 돌인줄 알았건만.. 단종된지 오래인 까만색 구형 휴대폰이 모래사장을 뒹굴고 있었다. "왜 이게 여깄지..?" 지율은 무릎을 굽히더니, 조심스레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이곳저곳이 부식되고, 파도에 휩쓸리며 돌에 부딪혀 액정도 깨져있었다. 갑자기 지끈 머리가 아파오는 걸 겨우 참아내며 다시한번 휴대폰을 바라보았을때 믿기지 않게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알수없는 아릿한 느낌에 그녀는 핸드폰을 손에 꽉 쥐었다. 앞서걷던 우현은 뒤늦게서야 지율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지 않음을 깨달은건지 서둘러 뒤돌아서 그녀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무릎을 굽히고 앉아있는 지율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어라....민지율.. 너 울어?" "아, 아니." "손에 든거 뭐야. 쓰레기를 왜 주워. 유치원 선생이라고 티내냐, 지금?" "쓰레기 아니야." 그녀의 단호한 말에 우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옆에 앉더니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프로포즈 안받아줬다고 우는거야, 지금?" "울긴 누가 울어." "알았어, 받아주면 될거 아니야. 그렇게 울고불고 하는데 받아주지, 뭐." "우는거 아니라고!!" 지율은 여전히 눈물이 그렁한채로 우현에게 소리를 지르며 앞서걸어간다. 우현은 그런 지율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깐죽대며 뒤따라 갔다. "결혼하면 애는 몇이나 나을까, 원래는 농구팀이었는데 이제는 축구팀이야, 알지? 최소한 11명." "........뭐?" "너랑 나 결혼한다 그러면 이재준 또 거품물거야, 예쁜 주아랑 사귀는 도둑놈 주제에." "재준이가 왜 도둑놈이야. 주아가 이쁘긴 하지만 우리 재준이가 짱이거든." "어, 너 지금 이재준 편드는거냐? 너랑 이재준 무슨사이야!" "내 분신이라고 그랬잖아!" "허, 그럼 난 뭔데!" "너는... 너는....." 지율이 망설이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서방, 남편, 내남자' 수많은 말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택한 답은 결국 "븅신!" ".......뭐?" "너는 내 븅신이다!" "하, 죽을래?" 그렇게, 한 연인의 뒷모습이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져간다. "아 웃었다. 울다 웃으면 몸에 이상한 변화가 생기는데, 너 첫날밤에 내 환상 다 깨놓는거 아니지?" ".......제발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마, 내가 너땜에 못살아!" "이거 어떡하냐, 난 너땜에 사는데."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들은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들이 정착한 어느 작은 섬에서 에스퍼가 아닌 한 인간으로써 열심히 다투고, 사랑하면서... 어느날 우연히 그들을 본다면 이렇게 말해주시길. '이제는 행복하라고.' Writer. 청몽채화 ★ 스페셜에디션 1. ※ 건이 시점 "아직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승휘한테 못 미치니까 계속 트레이닝 하는 게 좋을 거야. 능력이 A+급이라고 해서 안심하지마. 특이한 능력이라 후하게 점수 쳐준거야. 능력에 비해 니 계급이 낮은 것도 그런 이유..." 한참 나를 세워두고 설교를 늘어놓던 하진누나의 말이 끊겼다. KG총괄 매니저 개인 사무실의 책상 옆에 있는 팩스기에서 종이 한 장이 뽑혀나왔다. 하진누나는 진지한 분위기를 깨버린 팩스 한 장 때문에 꽤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다.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빼들어 살펴보았다. "가봐도 돼요?" 계속되는 잔소리에 이미 반쯤 짜증이 차올라있던 상태였다. 자리를 피할 수 있다면 빨리 피하고 싶었다. KG내의 모두는 나를 승휘형을 대신할 에이스라 생각하고 있었다. 메모리컨트롤 에스퍼 가승휘에 대적할 만한 기억재생 에스퍼 김건. 그런 기대 자체는 아무 상관없었다.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었다. 지금의 내가 승휘형의 대단한 실력에 못 미친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성장해야 한다]는 당연한 헛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이럴 시간에 한 시간이라도 더 일찍 트레이닝을 받는 게 나았다. KG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여느 다른 에스퍼들과는 달리 난 이 곳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통제할 수 없어서 폭주하는 내 능력을 정돈해준 것도 여기였고,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게 도와준 곳도 여기였다. 술이나 처마시는 아버지와 도박에 미쳐있는 어머니에게 맞고자란 나에게 이 곳은 천국과 다름없었다. 그 어떤 감독관도 아버지만큼 무지막지하진 않았고, 그 어떤 매니저도 어머니만큼 잔인하진 않았다. 진혁이형은 웃으면서 말했다. 불독이라는 감독관을 본 적이 있으면 그런 말을 못할 거라고. 하지만 그는 죽었다. 이미 죽은 사람 이야기를 들어봤자 나에게 새로울 것은 없었다. 단지, 그 일이 내 흥미를 끈 이유가 있다면... 그 감독관을 승휘형이 죽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KG내에서 전설이 되어버린 승휘형이다. 죽일만한 이유가 있기에 죽였을 터였다. 승휘형은 되는대로 살아온 내가 존경하기로 마음 먹은 유일한 한 사람이다. "대답 안해요? 가봐도 되냐고 묻잖아요."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하진누나를 향해 물었다. 평소같으면 어린 게 까분다며 당장에 주먹 한 방이 날아와야 했다. 하지만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하진누나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신경이 쓰이긴 했다. 어쨌든 하진누나는 KG내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정을 전혀 모르고 자란 나에게, 그녀는 가족같은 믿음을 주었다. 진짜 가족을 가지고 있는 다른 에스퍼들은, 이런 내 생각을 비웃을까.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냉정하고 잔인한 KG의 사람들이 내게는 가족이었다. KG에서 간간히 보이는 내 반항적인 면은, 사춘기 소년의 투정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그래도 명령을 거역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승휘형의 능력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한 뒤로, 한 두번 승휘형의 영역을 침범한 적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장난일 뿐이었다. 예전, 재준이라는 남자의 기억을 되살렸던 것처럼. 물론, 그 일 이후에 승휘형한테 직접 불려가서 죽기 전까지 욕먹었지만. "하........" 한동안 종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하진누나가 한숨을 내뱉으며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겨울바람을 맞고있는 느티나무의 나뭇가지는 공허할만큼 을씨년스러웠다. 그와 반대로 하늘의 날씨는 놀랄만큼 청명해서 그게 더 기분 나빴다. "잘한걸까, 내가." 하진누나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어본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쳤던 여자가, 그렇게나 쓸쓸한 목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았다. "왜, 뭔데요." "넌 알 거 없어. 가 봐." 하진누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종이를 무자비하게 찢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평소에는 없었던 궁금증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왔다. 바로 그 때, 하진누나가 지니고 있던 매니저용 호출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뭐야, 무슨 일이야? 뭐? 여자기숙사에서 싸움이 나? 애들 미친 거 아냐? 언제 들어온 애들인데 그렇게 개념이 없어? 붙잡아서 교육실에 가둬 놔." 사소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KG의 세계. 철저한 등급과 계급으로 평가받는 사회. 평범한 세상으로 이 곳을 착각했다가는 바로 고문실로 끌려가기 십상이었다. 물론 윗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있는 나는, 아직 사고를 친 적이 없었다. "트레이닝은 오후 2시로 미루자." 하진누나는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더니 순식간에 자신의 사무실에서 나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나는 망설임없이 쓰레기통으로 다가가 누나가 버린 종이를 집어들었다. 매니저의 사무실은 CCTV가 돌아가지 않았다. 매니저들보다 계급이 낮은 감독관들이 그들을 감시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네 등분된 종이를 맞춰 천천히 내용을 읽어본다. 그 종이는, 사무적인 내용이 담긴 보고서였다. 민지율이라는 여자가 결혼을 한다고 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는데,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인다. KG내의 여자 에스퍼 이름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평소 마주칠 기회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고등학교도 자퇴했는데 같은 학교 여학생 이름도 아닐테고. "신랑 정우현... 신부 민지율..." 두 사람의 결혼은 오늘이었다. 서울 외곽의 작은 성당. 딱 봐도 조촐한 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하진누나가 왜 이 결혼식에 대한 보고를 받고 깊은 한숨을 내쉰 걸까. 머리를 굴리다보니, 정우현이란 이름도 낯설지 않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하진누나의 책상 앞으로 가서 날짜가 지난 파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왜 내가 이 일에 이렇게 신경써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내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워너비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파일을 집어들었다. KG에 조금 더 빨리 들어왔다면, 내가 하게 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승휘형이 다 덮어쓰는 바람에 워너비 프로젝트는 완전히 무산되었지만, 실제로 내가 이 일을 하게 되었으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게 되었을까. 그 순간 내 눈에 보인 것은, 워너비 1조의 목록. 이재준, 가승휘, 정우현. .........그 때 본 이재준이라는 사람, 확실히 승휘형보다 대단한 사람이긴 했던 모양이다. 날씨조종이라, 씨발. 오늘 기분 끝장나게 좋은 가보다. 좆같이 맑은 하늘이 기분 나쁘다. 서류 한 장을 보니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파악되었다. 승휘형이 자기 목숨보다 사랑한다던 여자의 이름이 민지율이었다. 그 여자가 결혼을 한다니, 하진누나의 기분이 복잡할 만도 했다. 그것도 그 여자의 결혼 상대가... 승휘형과 같은 팀이었던 정우현이라는 남자라니. 파일에 붙어있는 정우현의 사진을 쳐다본다. 귀여운 얼굴에 장난끼 있는 미소. 승휘형과는 확연하게 다른 매력이다. 이런 남자, 왠지 거부감이 느껴진다. 태어날 때부터 밝았을 것만 같은 사람. 재수없어. 결혼식은 3시. 지금 시간은 오전 11시 30분. 아직 늦지 않았다. 오늘 내 스케줄을 돌이켜본다. 2시부터 트레이닝. 4시에는 일을 해야 한다. 사회 고위급 인사들의 무의식적인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 대부분이다. 핸드폰을 천천히 꺼내들고 진혁이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무슨 일이야?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한 진혁이형. 형도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서, 형도 죽을만큼 마음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KG에 대놓고 항의하진 못했지만 그 형도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만은 분명하다. 다들 말은 안하지만, 아마도 KG가 그녀를 죽였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는 듯 했다. 에스퍼들의 명령 불복종이나 도주는 발견되는 죄의 경중에 따라 즉결처분이다. 그 여자, 워너비 2조라고 했었지. 파일을 한 장 넘기니 워너비 2조의 정보가 보인다. 예쁘장하고도 어려보이는 한 여자. 염력 에스퍼 임주아, 진혁이형이 사랑했던 여자였나. 어쩔 수 없이 죽어가기에 아까운 여자임에는 분명했다. "형, 고문실 끌려가봤어요?" - 갑자기 무슨 말이야? 너 사고쳤어? "아니, 사고친 건 아닌데...." - 왜 그래? 너 어디야? "사고 한 번 치려구요." - 미친놈아, 지금 무슨 말 하는거야? 고문실 끌려가면 반 죽어서 나와, 몰라서 그래?? "잘됐네, 우리 부모님한테 맞는게 아픈가, 여기서 맞는게 아픈가. 비교 좀 해보지 뭐. 그동안 좀 찌뿌둥했거든요, 하도 맞다가 한 번도 안 맞으니까." - 김 건!!!!! "뒷 일 좀 부탁할게요." 핸드폰을 끄고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창문 너머로 주변 환경을 둘러보았다. 하진누나의 방은 2층이다. 뛰어내린다고 죽을 만한 높이는 아니었다. 1에스퍼들의 기숙사 너머에는 높은 철창이 쳐져있지만, 매니저들의 사무실은 바로 밖과 이어져있었다. 괜히 나가서 두리번거리다가 CCTV에 적발되거나, 높은 철창을 넘으려고 지랄하는 것보다 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게 더 현명하다는 소리다. KG에 끌려온 이후, 한 번도 일탈을 즐겨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와서 이런 행동을 하려니 조금 낯간지럽고 쑥스럽긴 했다. 하지만 승휘형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했다.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열 다섯 살, KG에 끌려와 바로 하진누나의 사무실로 인계되었다. 그 때, 하진누나와 함께 있었던 승휘형을 처음 만났다. 폭력을 사용하는 부모 밑에서 되는대로 막 살아왔어도 처음 맞이한 환경에 겁먹고 위축되어있던 내게, 승휘형은 너무나도 커보였다. 흔치않은 기억재생 에스퍼라고 나를 소개한 감독관이 나간 후, 나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관찰하던 하진누나와 달리, 승휘형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 꼬마." 두려움에 떨면서도,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풀어주면, 너 도망갈래?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갈 힘 있냐?"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사무실 안에 있던 하진누나와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승휘, 너 점점 월권하고 있다는 생각 안들어? 위험한 말 함부로 하지마." "내가 여기 끌려온 게 열 네 살이었던가." 하진누나의 추궁에도 아랑곳않고 담배를 피워물던 그의 태도. "도망가고 싶으면 지금 말해. 내가 도와줄게." "가승휘!!!!!!!!!" "눈치보지말고, 니 생각만 말해봐." 지금 돌이켜보면 승휘형은,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걸어갈 나를 어떻게든 도와주고픈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나.... 그냥 여기있을 건데요." 세상에 지친 내가 그렇게 대답했을 때, 승휘형은 내 눈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 때, 내 머릿속에 꽉 찬 더러운 기억들을 다 읽었던 것 같다. "이 새끼, 잘 해줘." 담배연기와 함께, 승휘형은 하진누나에게 한 마디 내뱉었다. "뭐? 가승휘, 니가 그런 말도 하는 인간이었어?" "내 소관으로 해줘. 이 애 내가 키울 거야." "진심이야?" "내 눈엔 보여. 나를 능가할 거야." 어이없어하는 하진누나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던 승휘형. 사무실을 나가는 승휘형의 뒷주머니에, 아찔하게 빛나는 권총이 꽂혀있었다. 그 때부터, 모두가 나를 가승휘 2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떠오른 옛기억에 피식 웃으며 창문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하진누나의 사무실 바로 아래, 1층에는 삐까번쩍한 오토바이가 세워져있었다. 승휘형의 오토바이다. 승휘형의 오토바이는 언제나 하진누나가 보는 곳에 세워져있어야 했다. 하진누나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승휘형을 감시하곤 했다. 언제든지 외출할 수 있는 자유를 주면서도 24시간 감시되는 이런 생활 속에서, 아주 조그만 일탈만이 주어지더라도, 승휘형은 그저 그런대로 만족하고 있는걸까. 눈부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면서, 몸을 한 번 풀고 오토바이에 올라탄다. 허락따위 맡을 필요도 없었다. 승휘형 몰래 오토바이 열쇠를 카피해뒀으니까. 승휘형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에스퍼에게 가끔 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사람이다. 이재준, 그 남자처럼 민지율이라는 여자도 승휘형을 까맣게 잊고있겠지. 승휘형한테 맞아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여자의 기억을 재생시켜놓고 싶었다. 나의 영웅이 죽을만큼 사랑하고있는 민지율, 오늘은 그 여자의 결혼식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그 여자를 납치할 것이다. Writer. 청몽채화 ★ 스페셜에디션 2. ※ 건이 시점 혹시라도 할리 데이비슨의 소음이 감독관이나 하진누나 귀에 들릴까 두려워 오토바이를 미친듯이 빨리 몰았다. 덕분에 2시. 여유있게 서울 외곽에 위치한 작은 성당에 도착했다. 어쨌거나 빨리 도착했으니 위험한 질주를 즐긴 보람은 있었다. 드넓은 들판 위에 덩그러니 홀로 놓여있는 성당을 발견하자마자 오토바이를 세웠다. 한산한 시골 성당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변은 매우 조용했다. 괜히 오토바이 소리를 내다가 들키면 곤란스러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내가 하려는 일은 오늘 결혼식을 치르는 신부의 납치였고, 그건 범죄였다. 요란스럽게 오토바이 소리를 내는 것은 동네방네 내가 납치범이라고 소문내는 것과 다름 없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오토바이에서 내려 천천히 성당쪽으로 발을 내딛는 그 순간, 오른 편의 거대한 나무 뒤에서 이야기 중인 두 남자를 발견했다.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고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두 남자는 수풀이 우거진 산길의 구석 쪽에 서 있었기에 휑한 들판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나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은 정장을 입은 재준이란 남자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래도 예전에 한 번 본 적은 있어서 익숙하긴 했다. 반면 턱시도를 입고있는 남자는 나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오늘 결혼식을 치르는 정우현이란 사람이겠지. 반반한 낯짝 한 번 실물로 보고 싶었는데, 이래서야 얼굴을 못 봐서 조금은 아쉽잖아. 재준이란 남자는, 우현이란 남자에게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이제 결혼하니까 너 바람 피면 죽인다. 도박해도 죽고, 폭력 써도 죽고, 욕해도 죽고." "아, 씨발, 니가 지율이 아빠냐? 말 존나 많네." "나 도는 꼴 보고 싶으면 지율이 눈에 피눈물 나게 해보든가." "이재준, 니가 이런 짓 안해도 나 충분히 잘하거든요? 너나 주아한테 잘하세요." "나만큼 하는 새끼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웃기시네, 니 컴퓨터에 있는 야동이나 지워." 영양가없는 대화. 그러고보니 이재준, 기억재생 시킬 때 보니까 확실히 민지율을 아끼는 마음이 강했었다. 사랑은 아니었지만 보호자라는 책임감과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 투성이였다. "암튼 잔소리 그만해. 나 지율이 보러 갈거야." "결혼식 전에 부인얼굴을 왜 봐, 부정 타, 임마." "지율이 너무 예뻐서 나 기절하면 니가 책임질 거냐? 책임질 거냐고!! 지금 미리 봐놔야 면역이 생겨서 결혼식 할 때도 멀쩡하지!!!" "개소리 하지마. 나 너한테 당부할 거 존나 많이 남았거든?" 더 이상 그들의 대화를 듣고있을 필요는 없었다. 헛소리에 낭비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뒤로 돌아 성당 안으로 곧바로 들어갔다. 넓은 성당의 앞 쪽 한가운데에 서 있는 여자가 있었다. 눈부신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있는 여자.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를 향해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성당 안을 울리는 목소리에 다시 급히 몸을 숨겨야만 했다. "역시 티아라보다 화관이 더 나은 것 같아요. 생화가 제일 예쁘잖아요." 민지율이 입은 웨딩드레스의 옷자락을 정리해주고 있었던 듯, 앉아있던 여자가 천천히 일어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 저 얼굴, 방금 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진혁이형이 짝사랑했던 여자, 임주아. 씨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곳에서 멀쩡히 살아 숨쉬고 있었구나. 저 여자도 납치해서 진혁이 형 앞에 데려가볼까. 이재준, 응큼한 새끼 같으니. 임주아는 잘 지내고 있다고 진혁이 형한테 한 마디라도 해주지, 치사하게 그걸 숨기냐. "주아야, 어떡하지? 나 떨려...." 처음 듣는 민지율의 음성. 자그마한 몸집에 어울리는 아기같은 미성이다. 승휘형한테는 하진누나같은 당당한 타입이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다. "의자 가져올까요? 성당 의자엔 앉지말아요, 드레스 구겨지니까." "속이 이상해." "떨려서 그런 거예요? 아니면 입덧 때문에?" "사실 나 무서워, 주아야. 나 임신한 거... 우현이가 알면 좋아할까?" "당연한 걸 왜 물어요, 언니. 우현오빠 좋아서 기절할 지도 몰라요. 재준오빠가 문제죠. 속도위반했다고 막 몰아세울 거야. 은근히 언니 문제에 대해선 보수적이잖아요."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나를 덮쳐왔다. 임신. 분명히 임신이라고 했다. 내가 지금 이 여자를 납치한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어쨌든 의자 가져올게요. 언니 무리한 것 같으니까." 임주아라는 여자가 활짝 웃으면서 뛰쳐나갔고, 나는 줄맞춰 세워진 기다란 5인용 의자 사이로 몸을 숨겼다. 혼자 남은 민지율은, 이미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승휘형의 사랑은... 성당의 십자가를 멍하니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회는 지금이다. 발소리를 죽이지도 않은 채, 재빨리 그녀가 있는 성당의 단상 위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우현아, 너 벌써 왔...." 옅은 미소를 머금고 뒤를 돌아본 그녀의 안색은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창백하게 굳었다. "정우현이 아니라서 유감이네." "당신.... 누구...." 공포에 떠는 목소리.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당신 승휘형을 만나도 그런 표정을 지을 거야?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겁에 질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승휘형이, 당신에게는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사람이야?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지만, 당신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에게... 그렇게 잔인해질 수 있어? "따라와." 무작정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성당 밖으로 끌고나갔다. "뭐예요, 왜 이러는 거예요? 놔 줘요, 지금 난!!!!" 씨발, 민지율이 더 이상 큰 소리를 내면 일이 복잡해진다.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겁에 질린 그녀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재생되는 그녀의 추억이 내 머릿속으로도 밀려 들어왔다. ....... 당신도 좋아했잖아. 당신도 모든 걸 내던질 만큼 승휘형을 사랑했잖아. 지금 되살아나는 이 기억을 보면... 당신이... 승휘형을 포기할 리가 없잖아. 두 사람이 미친듯이 사랑했잖아, 죽도록 원하고 아꼈잖아. 그걸 왜 잊어, 당신이 뭔데 그 기억을 잊어, 당신은 그걸 잊을 권리조차 없어. 순간, 풀려가던 그 여자의 눈이 다시 초점을 찾았다. "............. 너는........." "승휘형 만나." ".......... 넌......." "기억재생 에스퍼야." 더 이상 그녀의 눈은 공포에 질려있지 않았다. 하지만 순식간에 밀려든 과거의 기억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릴만큼 놀란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이 안쓰러울만큼 떨리고 있었다. 온통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살아왔던 승휘형의 절망까지 그대로 느껴보라는 의미에서 민지율이 모르고 있었던, 나만 알고있는 현재 승휘형의 일상까지 기억 속에 주입했다. "..........승휘......." 그녀는 신음소리처럼 승휘라는 이름을 발음했다. 작지만 애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순간, 내가 헛된 짓을 한 건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 나 따라가면, 승휘형 만날 수 있어. 갈래?" 단호하게 그녀에게 질문했다. 천천히 나를 올려다본 민지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 갈래?" "데려다 줘." 그녀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성당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 다리가 풀리는 듯 몇 번 휘청거렸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이재준과 정우현이 서 있던 길가를 슬쩍 바라보았다. 여전히 서로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켜자마자, 바로 진동이 울렸다. 승휘형이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여보세요." - 오토바이 니가 가져갔지? 일 가야돼, 빨리 가져와. "고장냈어요." 후, 깊게 몰아내쉬는 승휘형의 한숨소리. "도와줘요. 빨리 안오면 경찰이 수거해갈 것 같으니까. 나 면허없으니까 바로 뺏길걸요." - 도대체 넌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한 거냐. "KG 호출기에 내 위치 찍히죠?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빨리 와요. 나도 서울쪽으로 갈게요. 오토바이 끌고서라도 갈테니까 중간에서 만나요." 승휘형이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민지율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표정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갑작스레 되살아난 기억이 혼란스러울 만도 했다. 과거에 있었던 모든 기억을 되살렸다. 너무 많은 기억을 주입해서 기절할 법도 한데 그래도 이렇게 멀쩡한 걸 보면, 예전에 승휘형한테 많이 당한 모양이다. 이제 기억을 조종당하는 건 익숙해진 걸까. "오토바이 타도 괜찮아?" "............." "임신했다면서." 그제서야 자신이 임신한 몸이란 걸 깨달은 듯, 잠시 흠칫하는 민지율. 하지만 망설이지도 않고 이내 대답한다. "괜찮아, 승휘한테 데려다줘." "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오토바이에 올라타는 그녀.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 허리에 꽉 감았다. 어쨌든 지금부터는 안전이 최우선이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굉음을 내며 오토바이가 움직였다. 등에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민지율이 울고있는 것 같았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까. 내가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해서 후회는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대상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말없이 오토바이의 속력만 높였다. 민지율은 소리없이 울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더 처절해서 짜증이 차올랐다. 정신없이 도로를 달린지, 얼마나 지났을까. 뒤에서 경적소리가 울렸다. 갓길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검은색의 KG 차량이 내 뒤를 바짝 쫒아오고 있었다. 이윽고, 마찬가지로 KG차량도 갓길에 멈춰섰다. 운전석에 타고 있던 한 남자가 길쭉한 기럭지를 자랑하며 차에서 내렸다. 인상을 쓴 채로, 긴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김건, 내가 너 쫒아오느라 유턴까지 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앞뒤 생각없이 나 혼자 저지른 이 일에 대해서, 승휘형은 어떤 평가를 내릴까. 민지율을 바라보았다. 아직 오토바이에 탄 채로, 입을 틀어막고 울고만 있었다. "그리고 도대체 저 여잔....." 그제야, 승휘형의 눈이 민지율을 향했다. 처음엔 몰랐겠지만 지금은 한 눈에 알아보았겠지. 운명보다 사랑한 여자니까. 승휘형은 마치 얼음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있었다. 민지율은, 천천히 오토바이에서 일어났다.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 납치사건. 내가 진짜 미친 짓을 했다는 걸 지금에야 깨달았다. "..........승휘야....." 그녀가, 쥐어짜내듯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Writer. 청몽채화 ★ 스페셜에디션 3. ※ 건이 시점 승휘형은 피식 웃는 듯 했다. 아마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형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민지율을 스쳐지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그 사실을 의아해하기도 전에 내 뺨을 내려쳤다. 소름끼칠만큼 날카로운 소리가 4차선 도로에 울려퍼졌다. 힘없이 왼쪽으로 돌아간 고개를 다시 돌리기도 전에, 승휘형은 다시 한 번 내 뺨을 때렸다. 아까보다 더 센 강도였다. 입술이 찢어진 것 같았다. 귀에서 윙윙대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너... 돌았어?" "죄송해요." "재준이 때도 말했었어, 쓸데없이 내가 건드린 기억 되살리지 말라고!!!" 승휘형이 진짜 화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잘했다고 칭찬 해주지 않을 거라고는 진작에 예상했지만, 이런 반응일 줄이야. 승휘형이 다시 높게 손을 치켜들었다. 그 때, 민지율이 내 앞을 막아섰다. "........ 하지마......." "..............." "..........하지마, 승휘야.... 그러지마... 때리지마...." 그녀는 지켜보기도 힘들만큼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쥐죽은 듯 눈물만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그제서야 내 입가를 만져볼 수 있었다. 젠장, 따끔하다 싶더니 빨간 피가 흐른다. 인정사정 없는 거야 이미 알고있었지만 너무 하잖아. "........그러니까... 나는.... 나는, 승휘야... 그러니까...." "..............." "..........왜 그랬어?" 벅차는 심장을 진정시키기가 힘든 듯 흐느끼며 묻는 민지율과, 땅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승휘형. "왜 그랬냐고 묻잖아!!!!!!!!!!" 그 때, 민지율이 소리쳤다. 그제야 참아오던 감정이 폭발해버린 것 같았다. 방금전까지 안쓰러울만큼 울고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너에 대한 기억 지우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마지막에 그렇게 매달렸는데!! 혼자 떠나지 말고 같이 어디론가 가버리자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니, 애초에 왜 재준이랑 나만 남겨뒀어? 같이 끌려갔어도 되는거였잖아!!! KG에 끌려갔어도 셋이 함께라면 괜찮은 거였잖아!!!! 왜!!! 니가 뭔데!!! 니가 뭔데 내 기억을 건드려!!! 왜 너랑 함께한 내 추억까지 가져가, 니가 뭔데!!! 니가 그것까지 관리할 권리는 없잖아. 널 사랑한 건 난데, 왜 내가 너를 잊어. 널 사랑한 건 난데.... 왜 그 기억을 니가 지워.... 니가 뭔데...." 한참을 소리치던 민지율은, 그 말을 끝내자마자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온 몸을 지배하던 긴장이 이제야 풀린 탓이리라. ".............. 미안해, 승휘야............." 그리고는, 승휘형에게 안긴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승휘형도 천천히 민지율을 감싸안았다.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마도 승휘형의 저런 표정은 민지율만이 끌어낼 수 있는 거겠지.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씨발, 피해주고 싶어도 피할 데가 있어야지. "미안해, 너를 기억 못했어, 전혀 몰랐어. 미안해, 승휘야, 나는..." "알아, 내가 지운 거야. 니가 잘못한 거 없으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 "다시 사랑해야 했는데... 나 아무 것도 몰라서, 그래서....." "괜찮아, 다 내가 저지른 일이야. 모두 각오하고 한 일이니까 그런 생각 하지마." 담배연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승휘야, 미안해... 나...." 민지율은 천천히 자신의 옷차림을 바라보았다. 이미, 승휘형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알아, 오늘 결혼해?" "............ 그렇게 됐어." "그래, 그러니까 저 새끼가 널 나한테 데려왔겠지." 내가 승휘형 앞에 더 빨리 나타났다면,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 민지율과 승휘형이 재회한 순간, 그들이 사랑했던 시절의 기억을 되살렸더라면 이 두 사람은 아무 무리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까. "예쁘다, 민지율. 변함없이, 예전처럼." "승휘야, 나는...." "알아, 지금 니가 사랑하는 사람은 정우현이라는 거." 이미 지나온 세월은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걸까. 이럴 때면 밀려드는 공허감, 내 능력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걸까. 하늘이 에스퍼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뭘까, 무엇을 위해서 내가 태어난 거지? 민지율의 기억을 되살렸어도, 변하는 건 없는 걸까. "............이미 그 새끼랑 함께한 시간이 더 많으니까." "........... 안 웃어줘도 돼. 나 평생 불행하라고 저주해도 되니까, 승휘야..." "내가 널 왜 저주해. 정우현한테 전하기나 해. 너 울리면 바로 내가 데려올 거라고." ".............." "농담이야, 나 너 데려올 능력 없어." 이미 형에게서 배어나는 피냄새. 피곤에 절어버린 얼굴과, 그의 분신이 되어버린 권총. KG 유일의 킬러가 되어버린 형은, 더 이상 무언가를 가질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그는 바라고 원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사람이었다. "더럽고, 불행하고, 아프고, 힘든 거.... 내가 다 가져갈게." "................" "행복하기만 해." 승휘형은 애써 웃으며 민지율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웨딩드레스 차림을 보고서도 저렇게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민지율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승휘형의 손을 잡아 천천히 떼어냈다. 이제 승휘형의 손길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건가, 생각하며 인상을 써버린 순간. 민지율은 울먹이면서 중얼거렸다. "더 이상... 내 기억 건드리지마." 아, 승휘형이 자신의 기억을 또 건드릴까봐 겁난건가. 내가 최근 승휘형의 근황까지 민지율의 기억에 주입시켰으니, 승휘형이 머리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메모리 컨트롤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승휘야, 이제 더 이상 나 건드리지마." ".........민지율...." "내가 널 기억하면 안되는 이유가 어딨어? 왜 너 혼자 힘들고 아픈 거 다 짊어지려고 해? 같이 나눠줄게, 그러니까... 혼자 힘들어하지마." ".............타인조정 에스퍼는......" 민지율, 그녀는 무시무시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말을 번복할 수 없어." ".......... 승휘야...." "........ 나, 평생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살아갈 각오 되어있어." 잔인한 여자, 언제 그런 말까지 한 거야. 당신은 승휘형을 나락으로 떨어뜨렸어. 사랑할 자격도 없지만... 더 이상 승휘형 잊지는 마. 지옥끝까지라도 쫒아가서 당신의 기억 살려놓을 거야. 승휘형한테 맞아죽는 한이 있어도 당신의 기억 내가 재생시킬 거야. ".........미안해, 승휘야.... 나....." 민지율이 망설이듯 한마디를 꺼냈다. "........임신을 했어." 승휘형의 표정이 굳었다. 나도 알고있다. 이제 민지율은 영원히 정우현의 여자다. "축하해." "아무 것도 몰라서.... 그래서...." "나 이제 너 탐낼 정신도 없어. 그럴 자격조차 잃었거든." ".............." "미안하다는 말, 이제 더 듣기싫은데." "..............." "행복해라." 승휘형이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자, 민지율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되돌리기에, 시간은 너무 늦어있었다. "염치없지만 승휘야.... 내 기억은 지우지말아줘." "............" "결혼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널 기억할 기회라도 줘." ".............." "나라도... 니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줘." 민지율의 부탁에 승휘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승휘형의 눈에서도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지만, 민지율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승휘형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마주해서도 서로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다니, 뭐야, 이게. "이제 가, 정우현이 너 찾으러 오면 큰일난다." 정우현이란 남자가 순간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까 훔쳐 본 워너비 프로젝트의 파일에서 진작에 알아낸 정보였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2시 50분. 곧 3시가 되면 민지율과 정우현의 결혼식이 시작될 터였다. "김 건. 책임지고 지율이 좀 데려다줘. 부탁할게." "같이 안 가요?" 내가 물었지만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결혼식을 보고픈 남자가 몇이나 될까. "오토바이 빌려줄테니까, 오늘은 니가 써." "씨발, 무슨 사랑이 이렇게 좆같냐." 안쓰러운 마음에 괜히 욕을 내뱉어본다. "이제 가."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자, 승휘형은 민지율을 내 쪽으로 떠밀었다. 그녀는 승휘형의 손을 꼭 붙잡고는 마지 못해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사랑했어, 승휘야." 과거형. 끝까지 잔인한 여자. 승휘형은 웃었다. 정말 바보스러울만큼 미련한 남자였다. "알아주는 걸로 됐어." "..........." "행복해, 지율아." 좆같아. 기억을 살려서 얻어지는 게 아무 것도 없어, 나는 지금까지 뭘 한 거야? "나도... 사랑했어." 거짓말이야. 아직도 사랑하잖아. 사랑해서 미칠 거 같잖아. 다시 무너질 거잖아. 앞으로도 사랑할 거잖아.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민지율은 내 허리를 꽉 껴안으면서도 여전히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승휘형의 모습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 10분 후, 성당 앞에 도착했다. 민지율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멍하니 오토바이에 앉아있었다. "3시야. 당신 결혼식 할 시간." 내가 간신히 중얼거리자, 그녀는 그제서야 웨딩드레스를 정리하며 일어난다. "고마워... 내 기억 되살려줘서." "승휘형은....." 멀리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을 사랑해." 민지율이 웃었다. 모든 걸 이미 알고있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넓은 들판 한가운데로 나가기 시작했다. 약한 듯 보이던 그녀였지만 이제 더 이상 울고있지 않았다. "민지율, 어디 갔었어, 지금 막 순간이동으로 너 있는 데로 가려고 했잖아." 정우현이라는 남자의 목소리. 하늘은 여전히 맑다. 빌어쳐먹을 하늘은, 좆같이도 맑았다. Writer. 홍양 ★ 스페셜에디션 4. ※ 건이 시점 "이거, 내 신부 맞아? 왜 이렇게 꼬질꼬질해." "우현아..." "장난 치지 말고 내 신부 데려와." "미안해..."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말투. 그래, 이름이 정우현이랬지. 아까 얼굴을 못봐서 아쉬웠는데 이제서야 보게 됐네. 사진에서 보던것보다 훨씬 잘생긴 남자였다. 똑 떨어지는 이목구비가 기분 나쁠 정도였다. 맞춘듯 몸에 딱 들어맞은 턱시도에, 땀 덕분인지 약간은 흐트러졌지만 단정한 까만색 머리... 민지율을 보며 일렁이는 갈색 눈동자, 게다가 아까 사진에서 눈여겨 봤었던 매끄러운 콧대.. 승휘형만큼이나 잘난 얼굴 때문에 기분이 묘해진다. 민지율 저 여잔 대체 뭐길래, 저렇게 잘난 두 남자를 사로잡았을까. "우현아.. 미안해..." "뭐가 미안해, 너 어디 갔다 오는데?" "........미안해..." 다그칠거라는 시나리오와는 달리, 정우현은 그 여자를 끌어 안는 것으로 내 예상을 보기좋게 깨뜨렸다. 그의 품에 안긴 민지율은 서러운 듯 온몸을 부르르 떨며 눈물을 터뜨렸다. 승휘 형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던 여자가, 어째서 정우현 저 남자 앞에선 안식처라도 찾은 아이처럼 목놓아 울 수 있는 걸까. 그리고 그런 당신을 말없이 끌어안아주는 정우현이란 남잔 대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거야? 씁쓸한 패배감이 입안을 맴돌았다. 이런 결말을 예상한게 아니었다. 적어도 하나쯤은 어긋날거라 생각했다. 쉽진 않겠지만.. 이제 승휘형도 행복할 수 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우현아....미안해.. 미안해..." "뭐가 미안하냐고, 글쎄.." 미안해말고는 더이상 할말이 없는 듯 미안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는 민지율. 그 남잔 그런 민지율을 향해 씨익 웃어보인다. 기분이 좋아보이는 웃음은 아니었지만 저 남자에겐 상대방의 긴장을 한순간에 풀어버리는 힘이 있었다. "지율이 언니!!!" 정우현이란 남자를 살피고 있는 내 등뒤로 갑자기 웬 여자목소리가 들려온다. 뒤돌아 봤지만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 바로 두사람을 향해 뛰어간다. 분홍색 미니드레스에 웨이브 진 긴머리를 한 여자.. 아까봤던 임주아였다. 그 여잔 바로 지율의 손을 덥썩 잡더니 숨도 쉬지 않고 따졌다. "언니 대체 어디 갔던 거에요?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요?" "주아야, 미안해... 많이 놀랬지?" 임주아, 개인적으로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여리여리한게 천상여자였다. 진혁이 형.. 밑도끝도 없이 눈 높은건 알았지만 저 정도일줄이야. 나는 피식 웃으며 빨간 빛을 내고 있는 호출기를 꺼버렸다. 지금쯤 KG는 발칵 뒤집혔을 게 뻔하다. 하지만 나는 적당히 멈출 생각이 없었다. 내가 망친 그들의 결혼을 끝까지 지켜볼 생각이다. 기억을 찾은 저 여자가 어디까지 행복해질 수 있는지, 꼭 두고 볼 것이다. "오빠, 지율이 언니 찾았어. 식장으로 돌아와. 응.." 임주아는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닫고, 민지율을 사납게 노려봤다. "신부가 사라지는게 어디있어요!" 말은 톡톡 쏘듯 하면서도 민지율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성스럽게 매만져 준다. 흙이 묻은 드레스 밑자락을 속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파우더를 꺼내 눈물 자국이 난 민지율의 얼굴에 두드려 바른다. "속상해 정말.... 언니 땜에 속상해 죽겠어요. 좋은날 울긴 왜 울어요." 정우현은 이제 그만 됐다는 듯이 식장 안쪽으로 임주아의 등을 떠밀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이상하게 느껴왔던건데, 저 남자.. 오른쪽의 팔 움직임이 매우 부자연스럽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주시했고 들어가는 와중에 눈이 마주쳤다. 딱히 피할 생각도 없었다. 나를 발견한 민지율은 약간 당황한 기색이 보였지만 정우현은 웬놈이냔 표정으로 나를 살피다 식장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매우 자연스럽게 세 사람을 따라 들어갔다. 은은한 조명이 켜진 예배당안에 분홍색 꽃이 이리저리 널려있었다. 꽃이라면 질색이기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의자 맨 끝자리에 걸터앉았다. 결혼이라기엔 하객도 없고 지나치게 쓸쓸해보였다. 하지만 저 사람들은 어쩐지 이런 외로움이 익숙해보였다. 하긴 KG에서 도망친 에스퍼들이 많은 사람들과 연을 맺었을리는 없을터.. "재준오빠 오면 시작할.... 근데 누구세요?" 그 때 마침, 맨 끝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한 임주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나는 귀를 후비적대며 못들은 척 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그러자 그 여잔 눈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오늘 여기서 예배 안 보거든요. 보다시피 결혼식 할거라서 나가주시면 좋겠는데.." 나긋나긋한 말투로 부탁하는 임주아의 말을 무시한 채 민지율을 쳐다봤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살짝 떨렸다. 하긴.. 내가 자신의 결혼식까지 지켜볼 줄은 몰랐겠지. 정말 감정을 더럽게 못 숨긴다. 오늘 처음 보는 내 눈에도 감정이 다 보일 정도니까. 저 여자 습성대로, 정우현과 승휘형 사이에서도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면.. 형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정우현.. 저 남자에게로 향해있는 마음을 보고도 그냥 둬야 했을 때.... 씨발. "한 사람이라도 더 봐주면 좋지..." "그래도..." "좋은 날이니까, 그렇게 하자." 민지율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뒤로, 그들은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언니 정말 어디갔던건데요? 이 몸을 하고...." 은근슬쩍 지율의 배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정우현이 다급히 물었다. "너 어디 아파?" "아니, 아냐." 급히 손사레를 치는 민지율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임주아는 숨기지 말고 말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임신소식을 말하라는 거겠지.. 하지만 마음의 준비가 덜 된 모양인지 어색한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해버린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신기하게도 정우현은 어딜갔다 사라진건지에 대해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저 남자의 여유로운 태도가 더 사람을 열받게 했다. 둘 사이에 있는 끈끈한 믿음같은 게 느껴진다. "민지율 이 기지배 어디갔어!!" 그 때, 닫혀진 성당문을 격하게 열어젖히며 누군가가 성큼성큼 식장안으로 들어온다. 자신 때문에 쓰러진 화분은 보이지도 않는 듯 큰 보폭으로 걸어오더니 입고 있던 와이셔츠 단추 두개를 풀어내며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요 근방을 다 돌다 온건지 이마엔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재준, 그 때도 느꼈지만 주체할 수 없는 다혈질에 성격이 보통은 넘는 놈이다. "이게 죽을라고!! 너 어디 갔었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이재준의 앞을 급하게 막아서는 임주아. "안그래도 우현이오빠한테 많이 혼났으니까 그만해, 오빠." 거짓말.. 정우현은 민지율을 단 한번도 다그치지 않았다. 신랑보다 더 길길이 날뛰는 이재준의 꼴이 우스워 피식 웃자, 그는 고개를 틀어 나를 노려본다. "저건 뭐냐." "저거? 내가 물건이냐?" "아오, 저 새끼 뭐야!" 단순하기 그지 없었다. 방금전까지 민지율을 향해 화를 낼땐 언제고 금세 나를 향해 이글이글한 눈빛을 발사한다. "오빠, 좋은 날 큰소리 내기야? 이제 신부님 부르러 가야겠다." 임주아가 급한 걸음으로 식장밖으로 나간 뒤 얼마 안있어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신부님이 성경책 비슷한 걸 들고 걸어 들어왔다. 나까지 경건해질 필요는 없었건만, 절로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재준은 억지로 화를 누르며 가장 앞쪽 의자에 앉았다. 보통 저 자린 신부 부모님이 앉는 자린데.. 알면서도 저길 앉은거면 정말 뻔뻔한 거다. 하긴, 저 남잔 자기가 민지율의 부모쯤 되는 걸로 착각중이니까. "오빠, 양복마이 어쨌어? 왜 와이셔츠만 입고 있어.." "불편해." "그래도 결혼식인데 좀 입지. 비싼 돈 주고 산건데.." "비싼거 맞아? 되게 싼티나고 불편해." "비싼거거든요!" 끊임없이 투닥대던 두 남녀의 목소리가 잠잠해지나 싶더니 정우현과 민지율이 나란히 신부님의 앞에 섰다. 신랑, 신부 입장같은 건 생략하는 것 같았다. 내 바로 뒤에 놓인 성모 마리아상.. 믿지는 않지만 나는 무언갈 바라듯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오늘 거룩한 혼인예식을 축하하고자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신부님의 낮은 음성이 예배당 안에 울려퍼졌다. 하객이래봤자 나를 포함한 셋 밖에 없었지만 분위기는 더없이 엄숙했다. 힘없이 돌아서던 승휘형의 뒷모습을 보면 마냥 축복해줄 순 없었다. 당장이라도 깽판을 놓고 싶었다. 내가 지금 정우현, 이재준, 임주아의 머릿속에 기억을 재생하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궁금하기도 했다. "이제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일생을 함께 하기로 사랑의 서약을 맺는 신랑 신부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늘 함께 하도록 기도드립시다." 신부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손을 모은채 기도를 시작한다. 나는 멍하니 성모마리아상만 올려다볼 뿐이었다. 주례사는 계속 이어졌다. "두 분이 오늘 이 성당에 함께 온 것은 모두의 앞에서 하는 약속이고, 혼인하려는 뜻을 주님께 엄숙히 확인받기 위해서입니다." 형, 이제 난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렇게 뒤에서 보는 것 밖엔.. 마지막 선택은 기억을 모두 찾은 민지율의 몫이야. "두 분은 결혼생활을 하면서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겠습니까?" "네!" 신부님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우현이 힘차게 대답하자, 민지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내내 참고 있었던 눈물이 이제서야 터져버린 모양이다. 자신의 눈물에 가장 당황하고 있는 건 바로 민지율 자신이었다. 눈을 꼬옥 감은채로, 눈물을 아무리 참아내려 해도 참을 수 없는 듯 손으로 입을 막는다. 자신을 위해 모든걸 다 버렸던 가승휘란 남자.. 그 남자의 희생으로 인한 결혼... 내가 생각해도 모든게 벅찰만 했다. 모두가 당황한듯 숨을 죽인채 그녀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율아.." 눈물이 그치지 않자, 정우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되지 않을거란걸 알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소원을 빌었다. "...네..."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단호하게 들리는 그녀의 대답에 나는 성모 마리아상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 "역시 신이란 믿을게 못되요. 그쵸, 아줌마." 내 중얼거림과는 상관없이 이어지는 예물 교환.. 정우현은 정말 멋대가리 없이 주머니에서 쓰윽 반지케이스를 꺼내더니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민지율의 네번째 손가락에 끼워준다. 역시나 내가 예상했던대로 오른팔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케이스를 입에 물고 왼손으로만 끼워주는 폼이 불편해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듯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형이 봤어야 하는데.. 당신 때문에 저 여자가 저렇게 울고 있잖아. 평생을 모르는 채로 살 수도 있었는데, 저렇게 서럽게 울어. 참 행복하지 않아..?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그렇게 서럽게 울면 팔려 온줄 알잖아." 정우현은 무심하게 툭 한마디를 뱉으며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민지율의 눈물을 닦아준다. 어떻게든 망쳐놓고 싶었던 두 사람은, 생각보다 견고했다. 그럼에도 나는,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끈질기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식을 마치고 신부님이 식장을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 나는 자세도 바꾸지 않고 물끄러미 네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제 그들에게 나는 없는 사람 처럼.. 자연스럽게 섞여들어갔다. "아, 진짜.. 결혼했네... 씨발." 서운하다는 말투로 식장에 널린 꽃들을 하나하나 줍는 이재준. 신랑 신부까지 동참해서 결혼식 뒷정리를 하고 있는 이상한 장면을 나는 지켜볼 뿐이었다. "정우현, 너 앞으로 나한테 형님이라고 불러. 알겠어?" "형님 같은 소리 하네." "씨발, 그럼 결혼 물러!" 승휘형과 친구라면 나이도 꽤 있을텐데, 저런 말다툼이 재밌는 걸까. 둘 가운데에 승휘형을 아무리 그려넣어봐도 어울리질 않았다. 전설의 워너비 1조라니, 보통 능력을 가진 에스퍼들은 아닐텐데.. 허접스러웠다. "우현이 오빠." 임주아는 어느새 화관을 뗀 민지율의 등을 쿡쿡 찌르며, 우현의 앞으로 데리고 나간다. 쭈뼛쭈뼛.. 억지로 끌려나온 티가 역력한 그녀의 표정. "언제까지 숨길거에요, 이제 말해요.. 언니." 임주아가 다시 한번 닥달을 하자 정우현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오늘 이거 몰카야? 왜 이렇게 사람을 불안하게 해." 데코레이션으로 썼던 꽃을 정리하다 말고 민지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이재준도 뭔가 심각한 분위기를 잃은건지 정우현의 옆에 섰다. "결혼 없던걸로 하자, 뭐 이딴거면....." "아냐, 민지율.. 지금도 늦지 않았어. 이딴 개망나니랑 한평생 살순 없잖아? 이제 정신차린거지?" 정우현의 말을 끊으며 이재준이 희망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자 그녀는 결심했다는 듯 입술을 꽉 깨문 뒤 개미만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 아기를.. 가졌어." 그녀의 말에, 정우현과 이재준은 뭐에라도 얻어 맞은 양 멍하니 민지율만 쳐다봤다. 마치 쌍둥이 같은 그들의 똑같은 반응에 피식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둘 중 먼저 정적을 깬건 이재준이었다. "누가... 니가?" 민지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재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하하하.. 하고 웃는다. "말이 돼? 애 아빠가 누군데?" 옆에 있는 정우현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황당한 질문을 날렸다. 그러자 임주아가 대신 손가락으로 정우현을 가리켰다. 하지만 믿기지 않는 건 정우현도 마찬가진지 '나?' 하고 되물으며 얼굴에 핏기가 가신다. 그의 반응에 민지율은 실망한 듯 뒤돌아서버린다. "거봐, 내가 싫어할거랬잖아." "싫긴 누가....악!!!!" 정우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재준의 주먹이 그의 배에 꽂혔다. 단발마 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구는 오늘의 주인공, 신랑 정우현. "그럴리가 없어!! 내가 얼마나 철통같이 문 앞을 지켰는데!!" "윽.. 이..재..준.. 너......" "거짓말이지? 이건 꿈이야!!" 이 상황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납게 정우현을 노려본다. 그리고 이번엔 정우현의 등을 팔꿈치로 내려찍는다. 장난이라고 하기엔 엄청난 파워에 괜히 내가 아픈것같은 착각까지 일었다. 그 난리통 속에 돌아서려는 민지율의 한팔을 잡은채 인상을 찌푸리는 정우현. 이윽고 그의 입매가 반달로 휘었다. "민지유울!!!! 브으라보!!!" 이재준이 말릴 새도 없이 그녀를 끌어안은 정우현이 방방 뛰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는 그 감정.. 사랑도 해본적 없는 내가 알리는 없지만 정말 더럽게 기쁜건가보다. "맞다, 맞다. 조심.." 오버스러운 제스쳐로 민지율을 품에서 떼어놓으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한다. "똥배 나온거 가지고 아기라 그런거 아니야? 대체 어느 틈에!" "오빠, 안 기뻐? 귀여운 아기가 언니 뱃속에 있다니까? 우현이 오빠 닮았으면 되게 잘생겼을걸." 아직까지도 이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이재준. 활짝 웃으며 지율의 배를 살짝 쓰다듬는 임주아.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며 성당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정우현. 그리고..... "감사하면서 살자."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말이야. 대답해, 정우현이랑 너랑 무슨짓을 한거냐고오!!" "우리 행복 지켜준 사람한테, 평생 빚진거 갚는 마음으로 살자." "너 자꾸 말 돌릴래?" 나는 기지개를 켜며 오래 머물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꺼두었던 호출기를 켰다. 이제 KG로 복귀해야 될 시간이다. 내 미친짓도 이쯤 접어둬야겠다. 더이상 갔다간 저들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은 이상한 감정이 들것만 같았다. "누나, 미안요." - 호출기까지 끄고.. 왜 안하던 짓을... 너.. 당장 복귀해! 정말 죽고싶어 환장했어? "승휘형, 화 많이 났죠?" - 승휘 미치게 한거 니 짓이야?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거야! "네네, 금방 갈게요!" 일방적으로 호출기를 꺼버리고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승휘형을 위해 조금만 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이기심이 들기 시작했다. 신경질적으로 헬맷을 눌러썼다. 후회되진 않는다. 승휘형에게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후회 하지 않을 것이다. 민지율.. 형이 죽도록 사랑했던 그 여자가 적어도 형을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니까. 가끔 그리워도 해주고, 승휘 형 생각에 웃기도, 울기도 할테니까. 그걸로 만족해야 하는게 우리네 삶이니까. 메모리 컨트롤 에스퍼의 숙명. 그 좆같은 현실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새겨넣으며 나는 다짐했다. 절대로 형같은 사랑은 하지 않겠다고. * 일주일 정도가 흐른 뒤, 본부내에선 얼굴을 비추지 않던 승휘형과 마주쳤다. 언제나처럼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생각보다 평화로워보이는 모습이었다. "죽여도 돼요, 형." 나는 그냥 지나치려는 그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그제서야 그는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봤고, 깊고 검은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당장이라도 뺨을 칠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한번 내 영역에 들어오면, 그 때 죽일거야." "그럼 죽기 전까지 패기라도 해요. 이렇게 지내는 거 불편해서 못 해먹겠으니까." 내 말에 그는 피식 웃는다. 그리고 내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더니 스쳐지나간다. 뒷주머니에 권총이 있는 걸보니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길 인가보다. "건방졌지만.. 나쁘진 않았어." "......" "못본 사이에 민지율.. 어른이 다 됐더라. 못 견딜 줄 알았는데 이겨내는 모습이 기특해. 예뻐." "......" "진작에 니가 끼어들었다면.. 옆에 있는건 나였을까? 이런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죄겠지." 민지율 얘기를 하는 형의 얼굴엔 그리움이 잔뜩 묻어났다. 나는 다급히 대꾸했다. "형.. 그럼 이재준이나 정우현도 기억 재생 해줄까요? 형이 원하면......" "아니, 이제 그만해." 승휘형은 자신의 뒷주머니에 있는 권총을 빼들며 내게 겨누었다.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겨 쏠 것 같았지만 긴장되진 않았다. 권총을 잡은 두손 뒤의 형의 얼굴이... 이상하게도 행복해보여서였다. "그건 민지율이랑 나랑 무덤까지 갖고가기로 했어. 우리 둘만의 추억." 둘만의 추억. "고맙다, 김 건." 앞주머니에 권총을 넣는다. 그리고 분홍색 봉투를 꺼내 흔들더니 뒤돌아선다. 나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만 보다 급히 따라나서며 물었다. "그거 뭐에요? 설마 민지율이 준 편지에요?" "비켜, 인마. 형 바빠." "저도 좀 봐요!!" "이 건방진 새끼가, 절로 안 비켜?" 처음 보는 승휘형의 미소에 내가 헛짓을 한건 아니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렇게라도 사랑할 수 있다는건 잔인하지만 행복한걸지도.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민지율과 편지를 주고 받는것, 게다가 휴일이 주어질때마다 화양도라는 섬으로 휴가를 가는 것도 KG에서 특별히 허가했다고 한다. 형의 기분이 좋은날엔 어김없이 편지가 주머니에 꽂혀있었고 중요한 날마다 화양도로 놀러를 가 민지율의 얼굴을 보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승휘형은 제 손으로 모든걸 끊어냈다. 그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가장 행복할 수 있을 때 모든걸 정리하는 게 옳을거라는 판단임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내 소원과는 다르게 나 역시 승휘형 같은 사랑을 하게 된 어느날.. 그는 내게 말했다. "죽을만큼 힘든 시간이 지나가면.. 아픔이 무뎌져서 아주 작은 것에도 행복할 수 있어." "형..." ".....그냥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때가 와. 내 존재를 기억해주는 것만으로 벅찬 때가." 세상에서 가장 바보같은 워너비, 모든 사람이 그를 동경하지만 나는 그가 가엾다. 워너비와 치명적인 콤플렉스.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 진정으로 그가 행복했냐고 물어본다면, 난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에게 정해진 운명안에서 최대한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청몽채화 & 홍양 - 워너비 콤플렉스 스페셜한 그녀들의 이야기, S팸( http://cafe.daum.net/S.FAM ) 블루드림 (http://cafe.daum.net/chaehwa )